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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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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永明八年이요 魏太和十四年이라
春正月 하다
◯秋七月 齊以蕭緬爲雍州刺史하다
緬留心獄訟하여 得劫 皆赦遣하여 許以自新하고 再犯乃加誅하니 民畏而愛之注+緬, 鷥之弟也. 劫, 謂劫盜也.러라
子響有勇力하여 好武事注+子響, 齊主子.하여 自選帯仗左右六十人하니 皆有膽幹이라 數以牛酒犒之이러니
私作錦袍絳襖하여 欲以餉蠻하여 交易器仗注+帶仗左右, 使之帶器仗而衛左右, 因名. 襖, 烏浩切. 夾衣也.이어늘 長史劉寅司馬席恭穆等密以啓聞注+席, 姓也.한대 子響怒執寅等殺之하다
齊主欲遣戴僧靜討之러니 僧靜曰 巴東王年少어늘 長史執之太急하니 忿不思難故耳 天子兒過誤殺人이어늘 有何大罪리오 忽遣軍西上이면 人情惶懼리니 僧靜不敢奉勅하노이다
齊主不答而心善之하고 乃遣衛尉胡諧之將軍尹略中書舍人茹法亮하여 帥數百人詣江陵하여 檢捕群小할새 勅之曰 子響若束手自歸어든 可全其命이라
軍副張欣泰曰注+欣泰, 興世之子也. 今段之行 勝旣無名이요 負成奇恥注+今段, 猶言今來一段事也. 彼凶狡相聚하여 爲其用者 或利賞逼威 無由自潰하니 若頓軍夏口하고 宣示禍福이면 可不戰而擒也리라 諧之不從하다
至江津하여 築城燕尾洲注+洲在江津戍西, 江水至此, 北合靈溪水.하니 子響白服登城하여 遣使相聞曰 天下豈有兒反이리오 今便單舸還闕하여 受殺人之罪호리니 何築城見捉耶
尹略獨答曰 誰將汝反父人共語注+將, 引也. 子響灑泣하고 具酒饌하여 餉臺軍한대 略棄之江流하다 子響呼茹法亮한대 法亮執其使하니
子響怒하여 遣兵西渡하여 與臺軍戰하고 而自與百餘人操萬鈞弩하고 從江隄上射之하니 臺軍大敗하여 略死하고 諧之逃去하다
齊主又遣丹楊尹蕭順之하여 將兵繼至하니 子響即日乗舴艋至建康注+舴, 陟格切. 艋, 莫幸切. 舴艋, 小船也.한대 太子長懋素忌子響이라 密諭順之하여 使早爲之所하고 勿令得還하니
子響見順之하고 欲自申明이어늘 順之不許하고 縊殺之러라
久之 齊主遊華林園이라가 見一猿透擲悲鳴하고 問左右注+透, 穿林也. 擲, 投下也.한대 曰 猿子前日墜崖死로라
齊主思子響하여 因嗚咽流涕하고 頗責法亮하니 順之慙懼而卒하다
方鎭皆啓子響爲逆호되 兗州刺史垣榮祖曰 此非所宜言이라 正應云 劉寅等 孤負恩奬하고 逼迫巴東하여 使至於此라하니 齊主以爲知言이러라
臺軍 焚燒江陵하여 府舍皆盡하니 齊主以樂藹爲荆州治中하다 藹繕廨舍數百區하여 頃之咸畢하고 而役不及民하니 荆部稱之러라
九月 하다
魏主勺飲不入口者五日이요 哀毁過禮注+勺, 音酌. 周禮考工記 “梓人爲飮器, 勺一升.”하니 中部曹華陰楊椿諫曰注+據北史楊椿傳, 時爲中部法曹. 聖人之禮 毁不滅性注+孝經曰 “三日而食, 敎民無以死傷生, 毁不滅性, 此聖人之政也.”하니 縱陛下欲自賢於萬代 其若宗廟何 帝感其言하여 爲之一進粥이러라
於是王公表호되 請時定兆域하여 旣葬하고 公除注+兆, 塋域也. 域, 界局也. 公除, 卽漢文帝三十七日釋服之遺制, 曰 “公除者, 以天下爲公, 外雖除服以臨政而親親之思, 結於內, 猶終三年之慕, 公則除服, 私則未之除也.”라한대 詔曰 奉侍梓宮 猶希髣髴이니 山陵遷厝 所未忍聞注+髣髴, 相似也. 事死如事生, 猶冀髣髴見之也. 厝, 與措同.이니라
十月 王公固請한대 乃葬永固陵注+陵, 在方山.하다
太尉丕等進曰 臣等老朽 歴奉累聖하여 國家舊事 頗所知聞이니 願抑至情하여 奉行舊典하소서
魏主曰 祖宗情專武略하여 未修文教어니와 朕今仰稟聖訓하여 庶習古道하니 論時比事 又與先世不同이니라
乃問尙書游明根高閭等曰注+明根․閭, 時以儒鳴, 故魏主別與之言. 聖人制卒哭之禮하고 授服之變 皆奪情以漸注+禮, 親始死, 哭無時, 謂朝夕哭之外, 哀至則哭也. 旣葬而虞, 旣虞而卒哭, 自此朝夕之間, 哀至不哭, 猶朝夕哭. 三年之喪, 服斬衰, 朞而小祥, 旣祥而練, 再朞而大祥, 旣祥而禫, 又三月而除服.하니 今旬日之間 言及即吉 得無傷於理乎
對曰 踰月而葬하고 葬而即吉 此金冊遺旨也注+蓋以文明太后遺旨書之金冊也.니이다
魏主曰 朕惟中代所以不遂三年之喪 蓋由君上違世하고 繼主初立하여 君德未流하고 臣義不洽이라
故身襲袞冕하여 行即位之禮어니와 朕誠不德이나 在位過紀하니 足令億兆知有君矣注+宋明帝泰始七年, 魏孝文受禪, 至是十九年. 此言在位過紀, 蓋以宋主昱元徽四年顯祖方殂, 踰年改元太和, 至是十四年, 故云在位過紀. 十二年爲一紀. 於此之日而不遂哀慕之心하여 使情禮俱失이면 豈不深可恨邪
閭曰 杜預論古天子無行三年之喪者라하여 以爲漢文之制 闇與古合이라하니 是以臣等敢有請耳注+漢文帝遺詔短喪以日易月. 闇, 古暗字.니이다
魏主曰 金册之旨 群公之請 所以然者 慮廢政事故爾 朕今不敢闇默不言하여 以荒庶政이니 唯欲衰麻廢吉禮하고 朔望盡哀誠하노니 如預之論 蓋亦誣矣注+闇, 音陰. 謂諒闇也.니라
祕書丞李彪曰 漢明德馬后保養章帝러니 及后之崩 葬不淹旬 尋已從吉注+漢章帝建初四年六月癸丑, 明德皇后崩, 七月壬戌, 葬. 史不書公除之日. 此言葬不淹旬, 尋已從吉, 以漢文三十六日釋服之制推之也.호되 然漢章不受譏하고 明德不損名하니 願陛下察之하소서
魏主曰 朕所以眷戀衰絰하여 不從所議者 實情不能忍이니 豈徒茍免嗤嫌而已哉
群臣又言호되 春秋蒸嘗 事難廢闕注+禮曰 “喪三年不祭.” 言帝若行三年之喪, 則宗廟之祭將至廢闕也.한대
魏主曰 先朝恒以有司行事러니 朕蒙慈訓하여 始親致敬하니 今昊天降罰하여 人神喪恃注+詩曰 “無母何恃.” 想宗廟之靈 亦輟歆祀 脫行薦饗이면 恐乖冥旨하다
且平時公卿毎稱四海晏安하고 禮樂日新하여 可以參美唐虞注+晏, 亦安也.러니 今乃欲苦奪朕志하여 使不踰於魏晉 何邪
李彪曰 今雖治安이나 然江南未賓하고 漠北不臣하니 臣等猶懐不虞之慮耳로이다
魏主曰 魯公帯絰從戎하고 晉侯墨衰敗敵하니 固聖賢所許注+據史記 “武王崩, 成王幼, 管․蔡反, 淮夷․徐戎亦竝興. 魯公伯禽征之, 時有武王之喪, 故帶絰從戎也. 春秋時, 晉文公卒, 未葬, 襄公墨衰絰以敗秦師于殽.” 如有不虞 雖越紼無嫌이니 而況衰麻乎 豈可以晏安之辰 豫念軍旅之事하여 以廢喪紀哉注+鄭玄曰 “越, 猶躐也. 紼, 輴車索.” 孔穎達曰 “未葬之前, 屬紼於輴, 以備火災. 今旣祭天地社稷, 須越躐此紼而往祭, 故云越紼.”
古人亦有稱王者除衰而諒闇終喪者하니 若不許朕衰服이면 則當除衰拱默하고 委政冡宰 二事之中 唯公卿所擇이니라
明根曰 淵默不言이면 則大政將曠이니 仰順聖心하여 請從衰服하노이다
太尉丕曰 魏家故事 尤諱之後三月 必迎神於西하고 禳惡於北하여 具行吉禮注+尤諱, 猶云大諱也. 尤, 甚也. 死者, 人之所甚諱也.니이다
魏主曰 若能以道事神이면 不迎自至 茍失仁義 雖迎不來 此乃平日所不當行이어든 況居喪乎 朕在不言之地하여 不應如此喋喋注+不言之地, 謂居喪諒陰, 三年不言也.이로다
但公卿執奪朕情하여 遂成往復하니 追用悲絶하니라 遂乃號慟而入하니 群臣亦哭而出하다
太后忌魏主英敏하고 恐不利於己하여 盛寒閉之하고 絶食三日하여 欲廢之하고 而立咸陽王禧注+通鑑 “盛寒閉於空室, 絶其食三日.”러니 東陽王丕僕射穆泰尙書李沖固諫하여 乃止注+泰, 崇之玄孫也.하니 魏主初無憾意하고 唯深德丕等이러라
又有宦者譛魏主於太后한대 太后杖之數十하니 魏主默然受之하다 及太后殂 亦不復追問이러라
冬十月 齊以伏登之爲交州刺史하다
交州刺史房法乗專好讀書하고 常屬疾不治事注+屬疾, 猶言託疾也.하니 由是長史伏登之得擅權하여 改易將吏한대 法乗聞之大怒하여 繫登之於獄이러니
登之厚賂法乗妹夫崔景叔得出하여 因將部曲襲執法乗하고 囚之하고 啓法乗心疾이라 不任視事한대 詔以登之爲刺史하다
齊議鑄錢不果行하다
太祖以南方錢少라하여 更欲鑄錢하다 奉朝請孔覬上言
食貨相通 理勢自然이라 李悝云호되 糴甚貴傷民하고 甚賤傷農注+民, 謂士․工․商.이라하니 三吳歳被水潦而糴不貴하니 是錢少 非榖賤이니 此不可不察也니이다
鑄錢之弊 在輕重屢變하니 重錢患難用이요 而難用爲累輕이라 輕錢弊盜鑄 而盜鑄爲禍深하니
民所以盜鑄하면 嚴法不能禁者 由上惜銅愛工하여 謂錢爲無用之器라하여 務欲數多而易成하고 不詳慮其爲患也니이다
夫民之趣利 如水走下하니 今開其利端하고 從以重刑이면 是導其爲非而陷之於死也
漢鑄輕錢 巧僞者多러니 及鑄五銖 民計其費不能相償하여 私鑄益少하니 此不惜銅不愛工之效也니이다
宋文帝鑄四銖하니 至景和 錢益輕하여 雖有周郭이나 而鎔冶不精注+周郭, 錢之形制也.이라 於是盜鑄紛紜而起하여 不可復禁하니 此惜銅愛工之驗也
凡鑄錢 與其不衷으론 寧重無輕注+衷, 與中通. 不衷者, 不得輕重之中也.이니 自漢至宋五百餘年 制度世有興廢 而不變五銖者 明其輕重可法하여 得貨之宜故也
自鑄四銖 又不禁民翦鑿하고 爲禍旣博하여 鍾弊于今하니 豈不悲哉注+鍾, 聚也.
自晉氏不鑄錢하고 後經冦戎水火하여 所失歳多하니 士農工商 皆喪其業이라 愚以爲宜如舊制하여 大興鎔鑄호되 錢重五銖 一依漢法하고
嚴斷翦鑿하여 輕小破缺無周郭者 悉不得行하노이다 官錢小者 銷以爲大하여 利貧良之民하고 塞姦巧之路
錢貨旣均 百姓樂業하여 市道無爭하고 衣食滋殖矣리라 太祖然之하여 使州郡大市銅炭하다 會晏駕하여 事寢이라
是歳 益州行事劉悛言호되 嚴道銅山舊鑄錢處 可以經略注+悛, 勔之子也. 班志嚴道屬蜀郡. 括地志 “雅州榮經縣北三里有銅山. 卽鄧通得賜銅山鑄錢者也.” 唐榮經, 卽漢嚴道也.이라한대 齊主從之러니 頃之 以功費多而止하다
齊免前坐却籍戍邊者하다
齊自校籍謫戍 百姓怨望이러니 至是 乃詔自宋昇明以前으로 皆聽復注注+聽復注籍也.하고 其謫役者 各許還本하고 此後有犯이어든 嚴加翦治하라
高車遣使如魏하다


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 소이蕭頤 영명永明 8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14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 사람이 격성隔城의 전투에서 잡았던 포로를 북위北魏에 돌려주었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소면蕭緬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았다.
[] 소면蕭緬옥송獄訟에 유념하여 강도를 잡아들였을 때注+① 蕭緬은 蕭鷥의 동생이다. 劫은 강도를 말한다. 모두 사면하고 석방하면서 죄를 뉘우쳐 새로워질 것을 허락하고, 다시 범죄를 저지르면 마침내 사형에 처하니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그를 좋아하였다.
[] 나라 형주자사荆州刺史 파동왕巴東王 소자향蕭子響이 죄를 지어서 죽임을 당하였다.
[] 소자향蕭子響注+① 蕭子響은 齊主(蕭賾)의 아들이다. 용력勇力이 있어서 군사에 관한 일을 좋아하여 직접 대장좌우帯仗左右 60명을 선발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담력과 재간才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소고기와 술을 주어 그들을 위로하였다.
소자향이 은밀하게 금포錦袍강오絳襖를 만들어 만족蠻族에게 보내어 무기를 교역하려고 하였는데注+② 帶仗左右은 그들에게 무기를 가지고 左右에서 지키게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이름이 되었다. 襖는 烏浩의 切이니, 겹옷이다., 그의 장사長史 유인劉寅사마司馬 석공목席恭穆注+③ 席은 姓이다. 등이 은밀하게 제주齊主(소색蕭賾)에게 장계를 올려 보고하자, 소자향이 노하여 유인 등을 잡아 죽였다.
[]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대승정戴僧靜을 파견하여 소자향蕭子響을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대승정이 말하기를 “파동왕巴東王은 나이가 어린데 장사長史 유인劉寅 등이 너무 다급하게 그를 잡아 분노가 치밀어 환난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자天子의 아들이 과오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큰 죄입니까. 〈폐하께서〉 갑자기 군대를 파견하여 서쪽으로 올라가게 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이니, 저는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주齊主가 대답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대승정의 말을 좋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위위衛尉 호해지胡諧之, 장군將軍 윤략尹略, 중서사인中書舍人 여법량茹法亮을 파견하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강릉江陵으로 나아가게 하여 〈소자향의〉 여러 수하들을 조사하여 체포하게 할 적에 명령하기를 “소자향이 만약 손을 묶고 스스로 귀순하면 그의 목숨을 보전해주라.”라고 하였다.
군부軍副 장흔태張欣泰注+① 張欣泰는 張興世의 아들이다. 호해지에게 말하기를 “이번 행동은注+② “今段”은 今來一段事(지금 한 가지 일)라는 말과 같다. 승리를 해도 명분이 없고 패배하면 치욕스러울 것입니다. 저 흉악하고 교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소자향을 위해 일을 한 것은 혹은 상을 받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위세에 핍박을 받아서 그런 것이니, 스스로 궤멸될 까닭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군대를 하구夏口에 주둔시키고 그들에게 화복禍福의 이치를 말하여 보이면 싸우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호해지는 따르지 않았다.
[] 〈호해지胡諧之〉가 강진江津에 이르러서 연미주燕尾洲注+① 燕尾洲는 江津戍 서쪽에 있고, 江水가 여기에 이르러서 북쪽으로 흘러 靈溪水와 합류한다. 성을 쌓았다. 소자향蕭子響이 흰옷을 입고 강릉성江陵城에 올라가 사자를 파견하여 호해지胡諧之에게 알리기를 “천하에 어찌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란하는 일이 있겠는가. 지금 곧 내가 한 척의 배를 타고 궁궐로 돌아가서 사람을 죽인 죄를 받을 것이니, 어찌 성을 쌓아서 나를 잡으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윤략尹略이 단독으로 대답하기를 “누가 그대와 같이注+② 將은 이끈다는 뜻이다. 아버지를 배반한 사람과 함께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자향이 눈물을 흘리면서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군臺軍(관군官軍)에게 보냈는데 윤략은 그것을 강물에 버렸다. 소자향이 여법량茹法亮을 부르자 여법량이 그의 사자를 잡았다.
소자향이 진노하여 병사를 파견하여 강 서쪽으로 건너가서 대군臺軍과 싸우고 자신이 백여 명과 함께 만균萬鈞의 쇠뇌를 가지고 강의 제방 위에서 대군臺軍에게 발사하였다. 대군臺軍이 크게 패하여 윤략尹略이 죽고 호해지胡諧之는 도망갔다.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또 단양윤丹楊尹 소순지蕭順之를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고는 이어서 도착하였다. 소자향蕭子響이 그날 즉시 작은 배를注+③ 舴은 陟格의 切이다. 艋은 莫幸의 切이다. “舴艋”은 작은 배이다. 타고 건강建康에 도착하니, 태자太子 소장무蕭長懋가 평소에 소자향을 꺼렸기 때문에 은밀하게 소순지에게 타일러서 조속히 처치하게 하고 〈소자향蕭子響이 건강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다.
소자향이 소순지를 만나보고 〈황제에게〉 직접 해명하기를 원하였는데, 소순지가 허락하지 않고 그를 목매어 죽였다.
[] 오랜 뒤에 제주齊主(소색蕭賾)가 화림원華林園에서 노닐다가 원숭이 한 마리가 숲을 통과하다가 떨어져注+① 透는 숲속을 통과한다는 뜻이다. 擲은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슬피 우는 것을 보고는 좌우左右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원숭이 새끼가 전날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주齊主소자향蕭子響을 생각하여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고, 여법량茹法亮을 몹시 문책하니 소순지蕭順之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 하였다.
[] 예전에 방진方鎭들에서 모두 소자향蕭子響이 반역을 하였다고 보고하였는데, 연주자사兗州刺史 원영조垣榮祖가 말하기를 “이는 마땅히 말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응당 말하기를 ‘유인劉寅 등이 황제의 은혜와 포상을 저버리고, 파동왕巴東王(소자향)을 핍박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주齊主(소색蕭賾)는 도리를 아는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대군臺軍강릉부江陵府에 불을 질러 관사官舍가 불타자, 제주齊主악애樂藹(악애)를 형주치중荆州治中로 삼았다. 악애가 관사 수 백 곳을 수리하여 짧은 기간에 모두 마치고 부역으로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니, 형주荆州의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 9월에 북위北魏 태후太后 풍씨馮氏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는 한 되의 물도 마시지 않은 지 5일이 되었고, 슬픔으로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지나치게 를 행하였다.注+① 勺(구기)은 음이 酌이다. ≪周禮≫ 〈考工記〉에 “梓人이 飮器를 만들었는데, 勺은 한 되가 들어간다.” 하였다. 중부조中部曹注+② ≪北史≫ 〈楊椿傳〉에 의거하면 이때에 中部法曹가 되었다. 화음華陰 사람 양춘楊椿이 간언하기를 “성인聖人는 슬픔으로 몸을 상하여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注+③ ≪孝經≫에 “3일이 지나면 죽을 먹고, 백성에게 부모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생명까지 상하게 해서는 안 되며 몸이 수척해지더라도 자기의 생명만은 해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하니, 이것이 성인의 정사이다.” 하였다. 비록 폐하陛下께서 스스로 만대萬代에 어진 군주가 되려 하시지만, 종묘宗廟에 어찌 하려고 그러십니까.”라고 하니 황제가 그의 말에 감동하여 그로 인해 한 번 을 올리게 하여 마셨다.
이에 왕공王公들이 를 올려 말하기를 “알맞은 때에 조역兆域(장지葬地)을 정하여 장사를 지내고 나서 상복을 벗기를 청합니다.”注+④ 兆는 묘소이다. 域은 境域이다. 公除는 바로 漢 文帝가 37일에 상복을 벗은 遺制인데, 말하기를 “公除는 천하를 公으로 삼고 겉으로는 비록 상복을 벗고 정사를 보지만 부모를 친애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맺혀 있으므로 오히려 3년 동안 사모함을 마치는 것이니, 공적으로는 상복을 벗어도 사적으로는 아직 상복을 벗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조서를 내리기를 “재궁梓宮(풍태후馮太后의 관)을 받들어 모실 적에 오히려 어렴풋이 뵙기를 바라는데, 산릉山陵에 재궁을 옮기는 말은 차마 듣지 못하겠다.”注+⑤ “髣髴”은 서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죽은 사람을 섬기기를 산사람을 섬기듯이 하니, 오히려 그를 어렴풋이 뵙기를 바라는 것이다. 厝(두다)는 措와 같다.라고 하였다.
10월에 왕공王公들이 굳게 청하자, 마침내 영고릉永固陵注+⑥ 永固陵은 方山에 있다. 장사 지냈다.
[] 태위太尉 탁발비拓跋丕 등이 진언하기를 “ 등은 늙은 나이에 여러 임금을 두루 받들어 국가의 옛일을 제법 알고 들었습니다. 태후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을 억제하시고 옛 법을 받들어 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말하기를 “조종祖宗께서는 무력으로 정벌하는 일에 전념하여 문교文教를 닦지 못하였지만, 은 지금 성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고도古道를 익혔는데, 시사時事를 논의하고 비교함에 또 선세先世와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상서尙書 유명근游明根고려高閭 등에게 묻기를注+① 游明根․高閭는 당시의 儒學者로 명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魏主가 별도로 그들과 함께 말한 것이다. “성인이 졸곡卒哭를 제정하고 복제服制의 변화를 준 것은 모두 애통한 감정을 점차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注+② 禮에 아버지가 처음 돌아가시면 곡하는 것은 때가 없으니, 朝夕으로 哭을 하는 것 외에 슬픔이 지극하면 곡하는 것을 말한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虞祭를 지내고 虞祭를 지내고 나서 哭을 마친다. 이로부터 朝夕 간에 슬픔이 지극해도 哭하지 않지만, 여전히 朝夕으로는 哭을 한다. 三年喪에 斬衰服을 입는데, 1년이 지나면 小祥을 지내고 소상을 지낸 뒤에는 練服을 입으며, 2년이 지나면 大祥을 지내고 대상이 지난 뒤에는 禫服을 입고, 또 3개월이 지나면 복을 벗는다. 지금 열흘 사이에 바로 길복吉服을 입자고 말 하는 것이 천리를 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유명근 등이 대답하기를 “달을 넘겨 장사를 지내고, 장사를 지내고 나면 바로 길복을 입는 것이 금책金冊유지遺旨입니다.”注+③ 文明太后의 遺旨를 金冊에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니,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의 생각으로는 중고中古 시대時代에 삼년상을 행하지 않은 것은 군상君上이 세상을 떠나고 이어 계승한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임금의 이 아직 전파되지 않았고, 신하의 도리가 흡족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몸에 곤의袞衣를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쓰고서 즉위即位를 행하였다. 이 진실로 덕이 부족하지만 즉위한 지 12년이 지났으니注+④ 宋 明帝 泰始 7년(471)에 北魏의 孝文帝가 선위를 받아 지금 19년에 이르렀다. 이는 즉위해서 12년이 지난 것을 말한다. 宋主 劉昱의 元徽 4년(476)에 顯祖(拓跋弘)가 막 殂하니, 그해를 넘겨서 太和로 연호를 바꾸고, 지금 14년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在位過紀”라고 하였다. 12년이 1紀이다., 백성들에게 이 있음을 알게 하는 데는 충분하다. 이런 날에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행하지 못하여 마음과 예절을 모두 그르치게 된다면 어찌 몹시 한스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가 말하기를 “두예杜預가 논평하기를 ‘예로부터 천자天子가 삼년상을 행했던 경우는 없었고, 문제文帝가 제정한 제도가 은연중에 옛날 제도와 합치된다.’注+⑤ 漢 文帝가 遺詔을 내려 喪禮 기간을 단축하여 하루를 한 달 상례 기간으로 바꾸었다. 闇(모르게)은 暗의 古字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등이 감히 청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금책金冊유지遺旨로 여러 공들이 청하는 것을 그렇다고 한 것은 정사政事를 그만둘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 지금 감히 상중喪中에 침묵하여注+⑥ 闇은 음이 陰이니 諒闇을 말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 여러 정사를 그르칠 수는 없다. 오직 최마복衰麻服을 입어 길례吉禮를 폐지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슬픔과 정성을 다하고자 하니, 두예의 논평과 같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 비서승祕書丞 이표李彪가 말하기를 “후한後漢 명덕황후明德皇后 마씨馬氏(명제明帝의 황후)는 장제章帝를 보호하여 양육하였는데, 명덕황후가 하자 장사 지낸 지 만 열흘도 안 되어 곧 길복을 입었습니다.注+① 漢 章帝 建初 4년(77) 6월 癸丑日에 明德皇后가 崩했는데, 7월 壬戌日에 장사를 지냈다. 歷史에 公除(以日易月의 短喪) 상복을 벗는 날은 기록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장사를 지낸지 만 열흘도 안 되어(癸丑에서 壬戌까지는 만 9일임) 곧 길복을 입었으니, 漢 文帝가 36일 만에 복을 벗게 한 제도를 따라서 한 것이다. 그러나 장제章帝는 비난을 받지 않았고 명덕황후는 이름이 훼손되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살펴주소서.”라고 하였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말하기를 “이 태후를 그리워하여 최질衰絰을 〈벗으라는〉 의논을 따르지 못하는 까닭은 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니, 어찌 다만 구차하게 비웃음과 혐의를 면하려고 할 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또다시 말하기를 “봄과 가을의 증제烝祭상제嘗祭는 폐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注+② ≪禮記≫ 〈王制〉에 “상중에는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하였다. 황제가 만약 삼년상을 거행하면 宗廟의 제사를 거르게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자,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항상 유사有司가 일을 행하였는데, 이 태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서 처음으로 직접 공경을 바쳤다. 지금 호천昊天을 내려서 사람과 귀신이 믿을 곳을 잃었기 때문에注+③ ≪詩經≫ 〈小雅 蓼莪〉에 “어머니 아니면 누구를 믿을까.” 하였다. 종묘宗廟의 신령들도 제사를 받는 것을 중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제사를 올리면 신령들의 뜻을 어길까 두렵다.
또 평상시에 공경公卿들은 늘 사해四海가 편안하고注+④ 晏(편안하다)은 또한 安이라는 뜻이다. 예악禮樂이 날마다 새로워져서 의 아름다움과 나란히 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지금 마침내 짐의 뜻을 애써 빼앗아 나라․나라의 시대 수준을 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이표가 말하기를 “지금 비록 편안하게 다스려지지만 강남江南은 아직 복종하는 이 되지 않았고, 막북漠北은 신하가 되지 않았으니, 등은 여전히 예상치 못한 우환을 염려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노공魯公(백금伯禽)은 대질帯絰의 차림으로 종군從軍하였고, 진후晉侯 양공襄公은 검은색의 상복으로 전쟁에 나가 적을 패배시켰으니, 진실로 성현聖賢이 허여한 것이다.注+⑤ ≪史記≫에 의거하면 “武王이 崩하고 난 뒤에 成王은 어렸고, 管叔․蔡叔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淮夷․徐戎도 나란히 일어났다. 魯公 伯禽이 그들을 정벌하였는데 이때에 무왕의 喪이 있었으므로 帶絰 차림으로 從軍하였다.” 하였다. 春秋 때에, 晉 文公이 卒하고 아직 장사를 지내기 전인데, 襄公이 검은색 상복으로 전쟁에 나가 秦나라 병사를 殽에서 패퇴시켰다. 만약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면 비록 상여 줄을 넘는다[월불越紼]注+⑥ 鄭玄이 말하기를 “越은 넘는다는 뜻과 같다. 紼은 상여 줄이다.” 하였다. 孔穎達이 말하기를 “장사 지내기 전에 상여에 줄을 달아놓아서 화재에 대비하였다. 지금 〈상중에〉 天地․社稷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이 줄을 넘어 제사에 나아갔으므로 이르기를 ‘越紼’이라 하였다.” 하였다. 해도 꺼릴 것이 없으니, 하물며 최마복衰麻服이겠는가. 어찌 편안한 때에 미리 군려軍旅의 일을 생각하여 상사喪事를 폐기하겠는가.
옛날에 또한 이라고 일컬은 사람 중에는 최마복衰麻服을 벗고서도 상중喪中 기간의 상례를 마치는 자가 있었는데, 만약 〈경들이〉 짐의 최마복衰麻服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최마복衰麻服을 벗고서 팔짱을 끼고 침묵을 한 채 정사를 재상에게 맡기겠소. 두 가지 일 중에 오직 공경들이 선택하시오.”라고 하였다.
유명근游明根이 말하기를 “침묵하고 말하지 않으면 대정大政이 텅 비게 될 것이니, 우러러 성심을 따라서 최마복衰麻服을 입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위太尉 탁발비拓跋丕가 말하기를 “나라의 고사故事우휘尤諱(제왕이 사망함)한注+⑦ 尤諱는 大諱(제왕의 사망)라는 말과 같다. 尤는 더욱이라는 뜻이다. 죽음은 사람들이 더욱 피하는 것이다. 후에 3개월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서쪽에서 을 영접하고, 북쪽에서 을 물리치면서 길례吉禮를 갖추어 행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만약 정도正道로써 을 섬길 수 있으면 영접하지 않아도 스스로 올 것이고, 만약 인의仁義를 잃는다면 영접하더라도 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평일平日에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 아닌데, 하물며 거상居喪에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처지에注+⑧ “不言之地”는 상을 당하여 諒陰에 있을 때에 3년 동안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있어서 응당 이와 같이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공경公卿들이 짐의 마음을 빼앗아서 마침내 논쟁이 오가니, 생각할수록 이 때문에 비통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곧 통곡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신하들도 곡을 하면서 나왔다.
[] 예전에 풍태후馮太后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의 영민英敏함을 꺼리고 자기에게 이롭지 않을까 염려하여 한창 추울 때 그를 빈방에 가두고 3일간 먹을 것을 주지 않아注+① ≪資治通鑑≫에 “한창 추울 때에 빈방에 두어 문을 잠그고 3일간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하였다. 그를 폐위하고 함양왕咸陽王 탁발희拓跋禧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동양왕東陽王 탁발비拓跋丕, 복야僕射 목태穆泰注+② 穆泰는 穆崇의 玄孫이다., 상서尙書 이충李沖이 굳게 간언하여 마침내 멈추었다. 위주魏主는 애초에 서운한 마음이 없었고 오직 탁발비拓跋丕 등을 매우 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다시 환관宦官태후太后에게 위주魏主를 참소하자 태후太后위주魏主에게 수십 대의 을 때리니, 위주魏主는 묵묵히 매를 맞았다. 태후太后하니, 역시 다시 추문追問하지 않았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복등지伏登之교주자사交州刺史로 삼았다.
[] 교주자사交州刺史 방법승房法乗은 오로지 책 읽기를 좋아하고 항상 병을 핑계 대고注+① “屬疾”은 병을 핑계 댄다는 말과 같다. 일을 다스리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장사長史 복등지伏登之가 권력을 독점하여 장수와 관리를 바꾸니, 방법승이 듣고는 크게 진노하여 복등지를 포박하여서 감옥에 가두었다.
복등지가 방법승의 매부妹夫 최경숙崔景叔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고 감옥에서 나와서는 자기 부곡部曲을 거느리고서 방법승을 습격하여 가두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를 “방법승이 심질心疾이 있어서 정사를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조서를 내려서 복등지를 교주자사交州刺史로 삼았다.
[] 나라가 동전을 주조할 것을 의논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 예전에 태조太祖(소도성蕭道成)가 남방南方에는 동전이 적다고 여겨 다시 동전을 주조하려고 하였다. 봉조청奉朝請 공기孔覬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곡식과 화페貨幣가 서로 유통되는 것은 이치와 추세로 볼 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회李悝가 이르기를 ‘곡식을 사들이는데 값이 너무 비싸면 백성에게注+① 民은 선비․공인․상인을 말한다. 해를 끼치게 되고 너무 싸게 되면 농민에게 해를 끼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삼오三吳 지역은 해마다 수해를 입어도 곡식을 사들이는데 비싸지 않습니다. 이는 동전이 적어서이지 곡식이 저렴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이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전을 주조하는 데에서 폐단이 생기는 것은 무게에 자주 변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동전은 사용하기 어려운 것이 근심이고 사용하기 어려운 동전은 여러 번 가볍게 만듭니다. 가벼운 동전의 폐단은 개인이 동전을 만드는 데 있으니, 개인이 동전을 만들면 큰 재앙이 발생합니다.
백성들이 사적으로 동전을 만드는 것을 엄격한 법으로 금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부에서 동전을 주조할 때에 이 낭비되는 것을 아까워하고 공력이 드는 것을 아껴서 동전은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하여 수량을 많게 하여 쉽게 완성하는데 힘쓰고, 근심이 된다는 것을 상세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이익을 향하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익의 출입문을 열어놓고 그에 따라 무겁게 형벌을 내리면 이는 그에게 잘못을 저지르도록 인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가벼운 동전을 주조하자 〈백성 중에〉 교묘하게 속이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하게 되자 백성들이 〈사적으로 동전을 주조하는〉 비용이 주조한 동전으로 보상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사사로이 주조하는 것이 더욱 줄어들었으니, 이는 을 아끼지 않고 공력을 아끼지 않은 효과입니다.
문제文帝사수전四銖錢을 주조하니, 경화景和(465) 연간에 이르러 동전이 더욱 가벼워져서 비록 주곽周郭注+② 周郭은 돈의 형태와 모양을 뜻한다. 있었지만 제련製鍊하는 것이 정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개인이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번잡하게 일어나서 다시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을 아끼고 공력을 들이는 것을 아까워했기 때문입니다.
동전을 주조할 때에는 무게에 걸맞지 않기보다는注+③ 衷(알맞다)은 中과 통한다. “不衷”은 무게가 알맞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무겁게 하고 가볍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나라에서 나라까지 5백여 년의 제도는 대대로 흥폐興廢가 있었으나 오수전五銖錢을 바꾸지 않은 것은 무게를 법으로 삼을 만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재화의 마땅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수전四銖錢을 주조함으로부터 또다시 백성들에게 〈옛 동전을〉 깎아내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고, 재앙이 이미 커져서 그 폐단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注+④ 鍾은 모은다는 뜻이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 나라로부터 동전을 주조하지 않고, 후에 환란․전쟁․수재․화재를 거쳐서 잃어버린 것이 해마다 많았으니, (선비)․(농부)․(공인)․(상인)이 모두 그 본업을 잃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땅히 옛 제도와 같이 하여 제련 사업을 크게 일으키되 동전의 무게 오수五銖를 한결같이 나라 법에 의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옛 동전을〉 깎아내는 것을 엄히 단속하여 가볍고 작아지고 파손되어 주곽周郭이 없는 것을 모두 유통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관전官錢 중에 작은 것을 녹여서 크게 만들어 빈궁하고 선량한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간교한 길을 막아야 합니다.
동전이 고르게 되면 백성들이 본업을 즐겨 시장 거리에 다툼이 없고 음식과 의복이 더욱 풍부해질 것입니다.” 태조太祖(소도성蕭道成)가 옳다고 여겨서 주군州郡황동黃銅과 숯을 많이 사들이게 하였는데, 마침 태조가 세상을 떠나서 일이 중지되었다.
이해에 익주행사益州行事 이 말하기를 “엄도嚴道 동산銅山에 옛날 돈을 주조하던 곳을 경영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注+① 劉悛은 劉勔의 아들이다. 班固의 ≪漢書≫ 〈地理志〉에 嚴道는 蜀郡에 속해 있다. ≪括地志≫에 “雅州 榮經縣 북쪽 3리에 銅山이 있는데, 바로 鄧通에게 銅山을 내려주어서 돈을 주조하게 한 곳이다.” 하였다. 唐나라 榮經은 곧 漢나라 嚴道이다., 제주齊主(소색蕭賾)가 그의 말을 따랐는데, 얼마 뒤에 공력과 비용이 많이 들어서 중지하였다.
[] 나라는 이전에 허위로 호적戶籍을 작성한 죄에 걸려 변경邊境을 수비하던 사람들을 사면해주었다.
[] 나라가 호적을 검열하여 〈허위로 호적에서 빠진 자를〉 변방 수비에 충당하면서부터 백성들이 원망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조서를 내리기를 “나라 승명昇明(477~479) 이전부터 모두 다시 호적에 기록하도록 허락하고注+① 〈“皆聽復注”는〉 호적에 기록하여 회복시키는 것을 허락해준 것이다., 허위로 호적에서 빠져 변방에 가서 노역한 자에게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이후에 범죄를 저지르면 엄하게 더 징벌하여 다스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고차高車가 사신을 북위北魏에 보냈다.


역주
역주1 齊人歸魏隔城之俘 : “魏主(拓跋宏)가 齊나라에 사신을 보낼 것을 논의하자, 신하가 그 아름다움을 잘 받들어 이루고 齊나라도 사신을 보내 보답하였다. 지금 齊나라가 또 포로를 北魏에 돌려보내서 거의 우호를 이어가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백성의 다행이 되었으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모두 기록하여 인정해준 것이다.[魏主議通齊使 其臣能將順其美 齊亦遣使報之 今齊又歸其俘于魏 庶幾繼好息兵 以爲生民之幸 故綱目皆書而予之也]” ≪發明≫
역주2 齊荆州刺史巴東王子響有罪 伏誅 : 이미 臺軍(官軍)을 패배시켰는데 ‘反’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蕭子響의 반란은 尹略이 압박하였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실정을 추구하므로, 다만 ‘有罪(죄가 있다)’라고만 기록한 것이다.[旣敗臺軍矣 不書反 何 子響之反 尹略迫之也 綱目原情 故止書有罪]” ≪書法≫
역주3 魏太后馮氏殂 : “太后는 예전에 ‘弑其主(그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는 일상의 말로 기록하였으니, 어째서인가. 北魏 조정에 大臣이 없음을 나무란 것이다. 太后의 죄가 큰데 임금은 어려서 모른다고 해도 大臣도 모르는가. 생전에 올바르지 않으면 죽었을 때 끊는 것이 옳은데, 게다가 魏主(拓跋宏)는 효도를 극진하게 하였다. 魏主의 지극한 천성은 남보다 뛰어났으나 古禮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큰 원수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이는 조정에 大臣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謁陵(陵에 알현했다.)’이라고 기록하고, ‘祥禫(祥祭와 禫祭를 지냈다.)’이라고 기록하고, ‘遷祔(신주를 옮기고 祔祭를 지냈다.)’라고 기록하여 번잡하게 말을 하여 줄이지 않았으니, ≪資治通鑑綱目≫의 의도가 은미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폄하하는 말이 없는 것인가. 古禮를 회복하는 것이 옳았으니 어찌 폄하하겠는가. 다만 예를 사용할 대상이 아닌 자에게 사용하였으니, ≪자치통감강목≫에서 매우 애석해한 것이다.[太后前書弑其主矣 此其以恒辭書何 譏魏朝之無大臣也 太后之罪大矣 主幼不知 大臣其不知乎 生不能正 死而絶之可也 而魏主且致孝焉 蓋魏主之至性 有過人者 知古禮之當復 而不知大讐之不可忘 則朝無大臣故也 故書謁陵 書祥禫 書遷祔 辭繁而不殺 綱目之意微矣 然則何以無貶辭 復古禮 是也 何貶焉 獨用非所用 綱目所以深惜之]” ≪書法≫
역주4 劉悛(유순) : ≪資治通鑑≫ 권137 〈齊紀〉 永名 9년(491)에는 “悛, 士倫飜, 又丑綠飜.”이라고 하여, ‘순’과 ‘전’ 두 音을 제시하였는데, 첫 번째 音을 따라 ‘순’으로 하였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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