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상上은 평소 음악을 즐겨 듣지 않고 손에 주옥珠玉을 잡지 않았다. 일찍이 사냥을 나갔다가 거가車駕가 밤에 돌아왔는데, 상동문上東門의 후候인 질운郅惲(질운)이 관문을 막고 열어주지 않았다.注+상동문上東門은 낙양성 동면雒陽城 東面의 북쪽 정문이다. 낙양성雒陽城은 12개의 문이 있는데, 각 문에 후候 한 명이 있었는바 질秩이 육백석六百石이다. 성문교위城門校尉에 소속되어서 성문을 여닫고 사람들을 출입시키는 일을 관장하였다.
상上이 종자從者로 하여금 문틈 사이로 얼굴을 보이게 하였는데注+현見(나타내다)은 현편賢遍의 절切이다., 질운이 말하기를 “불빛이 멀어 〈분별하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명령을 받지 않자, 상上은 마침내 돌아서 동중문東中門으로 들어왔다.注+동중문東中門은 동면東面의 중문中門이다.
다음 날 질운이 상서上書하여 간하기를 “폐하께서 멀리 산림山林에서 밤낮으로 사냥하시니,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를 어찌하시렵니까.” 하였다.
이 글을 올리자, 질운에게 100필匹의 삼베를 하사하고 동중문東中門의 후候를 좌천하여 참봉위參封尉로 삼았다.注+참봉參封은 현縣의 이름이니 낭야군琅邪郡에 속하고, 위尉는 도적盜賊을 잡는 일을 주관하였다.
綱
【강綱】 노방盧芳이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目
【목目】 노방盧芳이 운중雲中을 공격하여 오래도록 함락하지 못하니, 그의 장수 수욱隨昱(수욱)이 구원九原에 남아 지키면서 노방을 위협하여 와서 항복하려 하였다.
노방이 이것을 알고는 10여 명의 기병과 함께 도망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니, 그 무리들이 모두 수욱에게 귀의하였다. 수욱이 마침내 대궐에 나와 항복하자, 조령詔令을 내려 수욱을 오원태수五原太守에 제수하고 전호후鐫胡侯(전호후)에 봉하였다.注+전鐫은 쪼아 다듬음을 이른다. 그러므로 이것을 칭호로 삼은 것이다.
綱
【강綱】 조령詔令을 내려 여러 왕王을 모두 공후公侯로 강등하였다.
目
朱祐(≪雲臺三十二將圖≫)
【목目】 주호朱祜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신하가 봉지封地를 받을 적에 왕王의 작위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조령詔令을 내려서 장사왕 유흥長沙王 劉興, 진정왕 유득眞定王 劉得, 하간왕 유소河間王 劉邵, 중산왕 유무中山王 劉茂를 모두 작위를 강등하여 후侯로 삼았고注+유무劉茂는 사수왕 유흡泗水王 劉歙의 종부제從父弟이고 유흡은 경시更始(유현劉玄)의 숙부叔父이다. 다만 장사왕長沙王, 진정왕眞定王, 하간왕河間王, 중산왕中山王을 봉한 것은 황제와 똑같이 경제景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유흥劉興은 임상후臨湘侯, 유득劉得은 진정후眞定侯, 유소劉邵는 악성후樂成侯, 유무劉茂는 단부후單父侯(선보후)가 되었다.,
조왕 유량趙王 劉良은 조공趙公, 태원왕 유장太原王 劉章은 제공齊公, 노왕 유흥魯王 劉興은 노공魯公으로 삼았다. 이때에 종실宗室과 후사가 끊긴 나라에서 후侯에 봉해진 자가 모두 137명이었다.
【강綱】 여름 4월에 오한吳漢의 군대가 돌아오자, 장병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고, 공신들에게는 모두 봉읍封邑을 더하고 봉지封地를 바꾸었다.
目
【목目】 오한吳漢이 촉蜀에서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와 여름 4월에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이에 장병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으며, 공신功臣 중에 읍邑을 더하고 봉지封地를 바꿔준 자가 모두 365명이고 외척 중에 은택후恩澤侯로 봉해진 자가 45명이었다.
등우鄧禹를 봉하여 고밀후高密侯로 삼아서 4개의 현縣을 식읍으로 하고注+“사현四縣(4개 현縣)”은 창안昌安, 이안夷安, 순우淳于, 고밀高密이다., 이통李通을 고시후固始侯로 삼고注+고시후固始侯의 나라는 여남군汝南郡에 속하였으니 옛 침현寢縣인데, 황제가 이름을 바꾸었다.가복賈復을 교동후膠東侯로 삼아서 6개의 현縣을 식읍으로 하고注+“육현六縣(6개 현縣)”은 욱질郁秩, 장무壯武, 하밀下密, 즉묵卽墨, 정호挺胡, 관양觀陽이다., 나머지는 각각 차등을 두었다.
이미 죽은 자는 그 자손에게 봉읍을 늘려 주거나 지손支孫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目
【목目】 황제가 전쟁터에 있은 지 오래되어서 무력으로 싸우는 일을 싫어하였으며, 또 천하가 피폐하고 고갈되어
등우鄧禹와 가복賈復은 황제가 전쟁을 그치고 문덕文德을 닦아서 공신功臣들이 경사京師에서 병력을 보유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갑옷과 병기를 버리게 하고 유학儒學을 돈독히 하는 데 힘썼다.
황제는 공신들의 작위와 영토를 완전히 보전하고자 하여, 관리의 직책을 맡겼다가 잘못으로 인해 〈작위와 식읍을 잃는 일이 없게 하려고〉注+〈“불령이리직위과不令以吏職爲過”는〉 직책의 일에 잘못이 있어서 작위와 식읍을 잃을까 염려한 것이다. 마침내 좌장군左將軍과 우장군右將軍의 관직을 파하였다.注+≪속한지續漢志≫에 “전장군과 후장군, 좌장군과 우장군은 모두 정벌을 주관하였는데, 일이 끝나면 모두 파하였다.” 하였다.
이에 경감耿弇 등 또한 대장군大將軍의 인수印綬를 올리고 모두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집으로 물러나니, 특진特進의 지위를 가하고 조청朝請을 받들게 하였다.
또 봉국封國의 식읍食邑에 의뢰하여 물자를 사용하고, 가산을 불리거나 영리를 도모하지 않았다.注+〈“자용국읍 불수산리資用國邑 不修産利”는〉 모든 용도를 다 봉국封國의 식읍에 의뢰하여 쓰고, 생산하고 작업하거나 이익을 경영함을 일삼지 않는 것이다.가복賈復은 인품이 강직하고 굳세고 방정하며 큰 절개를 중시하였다.
사제私第로 돌아가서는 문을 닫고 위엄과 장중한 기개를 길렀다. 주호朱祜 등은 가복이 재상宰相이 되기에 마땅하다고 천거하였으나, 황제는 이때 막 관리의 일을 삼공三公들에게 책임 지우고자 하여 공신功臣은 모두 등용하지 않았다.注+
이때에 열후列侯 중에서는 오직 고밀후高密侯(등우鄧禹), 고시후固始侯(이통李通), 교동후膠東侯(가복賈復) 세 명만이 공경公卿과 함께 국가의 대사에 참여하여 의논해서 은혜와 대우가 매우 후하였다.
황제가 비록 공신들을 제어하기는 하였으나 매번 법을 굽혀 용납해서 작은 잘못을 용서하고注+회回는 굽힘이니, “회용回容”은 법法을 굽혀 용납함을 이른다., 먼 지방에서 진귀한 음식을 바치면 반드시 먼저 제후들에게 두루 하사하여 태관太官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공신들이 모두 복록을 보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견책을 받은 자가 없었다.
目
【목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등우鄧禹, 가복賈復, 구순冦恂, 주호朱祜, 채준祭遵, 탁무卓茂의 무리는 모두 공보公輔(재상宰相)가 될 만한 기국이니, 마땅히 재상宰相이 되어서 국가의 큰 의논을 헤아려 처리해야 하는데,
일체 공신功臣으로 대우하여 다시는 관직에 임용하여 부리지 않았으니, 비록 나라를 경륜할 만한 큰 계책이 있으나 어찌 감히 스스로 말할 수 있겠는가.”
綱
【강綱】 두융竇融을 대사공大司空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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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두융竇融은 자신이 오래된 신하가 아닌데 하루아침 조정에 들어와서 공신功臣의 위에 있다 해서, 매번 조회朝會에 나아가 뵐 때마다 용모와 말소리가 너무 겸손하고 공손하니, 황제가 더욱 그를 친근히 하고 후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두융은 조심하느라 오랫동안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자주 작위를 사양하며 상소上疏하기를 “신臣 두융은 자식들을 가르칠 적에 아침저녁으로 경예經藝(경서經書)를 가지고 교도敎導하고, 그들로 하여금 천문天文과 참기讖記를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손하고 엄숙하며 성실하게 일을 처리하여 순순히 도道를 지키게 하고자 하였을 뿐, 재능才能이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몇 개의 성城을 이은 광활한 토지를 물려주어서 옛날 제후왕諸侯王의 나라를 누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는 윤허하지 않고 조령詔令을 내려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綱
【강綱】 5월에 흉노匈奴가 하동河東을 침략하였다.
역주
역주1詔太官……異味 :
“이것을 쓴 것은 음식을 박하게 함을 찬미한 것이니, 이 뒤에 和帝가 太官에게 詔令을 내려 먼 나라의 진귀한 음식을 받지 말라는 글이 있고, 安帝가 薦新하는 물건 23종을 생략하라는 글이 있으니, 이는 황제(光武帝)가 계도한 것이다. 〈唐 玄宗 天寶 9년(750)에〉 檢校進食使者를 두었다고 쓴 것과는 다른 것이다.[書 美菲食也 後此和帝有詔太官勿受遠國珍羞之書 安帝有省薦新物二十三種之書 帝啓之也 與書置檢校進食使者 異矣]” ≪書法≫ “예로부터 人君은 일이 많을 때에 근로하고 고생하며, 일이 없을 때에 편안하게 지내었다. 이때에 隴과 蜀이 이미 평정되어서 四海가 편안하여 통일되었으니, 황제는 다년간 변방에서 온갖 수고로움을 겪은 몸으로,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편안히 지내면서 玉食의 봉양을 다소나마 누려도 될 터인데, 太官에게 거듭 명하여 郡國의 특별한 음식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니, 황제가 조심하고 두려워하고 삼가서 자만한 뜻이 조금도 없는 것이 어떠한가. 이것을 책에 썼으니, 人君 중에 잠시라도 조금 편안해지면 즉시 사치한 욕심을 부리는 자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自古人君 莫不勤苦於多事之時 而宴安於無事之日 于時隴蜀旣平 四海寧一 以積年間關跋履之勞 至是亦可自安 少享玉食之奉 而乃申詔太官 勿受郡國異味 則帝之兢兢畏謹 略無自滿之意 爲如何哉 書之于冊 可以爲人君暫得少安 卽肆奢慾者之戒矣]” ≪發明≫
역주2乘輿의 法駕 :
황제의 수레를 乘輿라 하며, 말에 멍에하여 황제가 출동하는 것을 法駕라 한다.
역주3詔諸王 皆降爲公侯 :
“王者는 천하를 소유한 자의 칭호이니, 신하가 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백성들에게는 두 왕이 없으니, 어찌 여러 왕을 함께 봉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戰國時代부터 諸侯들이 왕의 칭호를 참칭하여 서로 왕이라고 부른 이후에 秦나라 사람이 다시 皇帝라 하여 스스로 높였다. 漢나라 이래로 마침내 왕의 작위를 가지고 신하들을 봉하였으니, 매우 잘못되었다고 할 만하다. 光武帝가 詔令을 내려 여러 왕들을 모두 公侯로 강등하였으니, 옛 법에 매우 부합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제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다. 책에 크게 썼으니, 이 또한 충분히 후세에 신하들을 봉작하는 법이 될 만하다.[王者有天下之號 非人臣所得稱也 天無二日 民無二王 焉有諸王竝封之理 自戰國諸侯僭號交稱 而後秦人更以皇帝自尊 由漢以來 遂以王爵而封臣子 可謂失之甚矣 光武詔諸王皆降爲公侯 深合古典 惜乎 不能終守此制爾 大書于冊 亦足爲後世封爵臣子者之法也]” ≪發明≫
역주4紹嘉公……삼았다 :
孔安은 殷나라의 후손이고 姬常은 周나라의 후손으로, 이들은 두 왕조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宋公과 衛公으로 봉한 것이다. 成帝 綏和 원년(B.C.8)에 殷나라의 紹嘉公을 봉하고 周나라의 承休侯의 작위를 올려 承休公이라 하였으며, 平帝 元始 4년(A.D.4)에 소가공을 宋公으로, 승휴공을 節公으로 개칭하였는데, 이때 또다시 절공을 衛公으로 바꾼 것이다.
역주6옛날……않으셨으니 :
이 내용은 ≪論語≫ 〈衛靈公〉의 “衛 靈公이 공자에게 陣法을 묻자, 공자께서 ‘祭器에 대한 일은 일찍이 들었습니다만 軍事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시고, 다음날 마침내 떠나셨다.[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라고 보인다.
역주7각각……하였으며 :
袁宏의 ≪後漢紀≫에 “각각 한 가지 經書에 통달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