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丞相諸葛亮이 漢中으로 출병하고자 할 적에 李嚴이 후방의 일을 맡게 되었다. 이엄은 주둔지를 江州로 옮기고 護軍陳到를 남겨두어 永安에 머물게 하되 이엄에게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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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吳나라가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屯田하게 하였다.
目
【目】 陸遜이 주둔해 있는 곳마다 곡식이 부족하다 하여 表文을 올려서 장수들이 農地를 더욱 넓힐 것을 청하자,
吳王孫權이 답하기를 “매우 좋다. 우리 父子도 친히 籍田을 경작하여 수레에 딸려 있는 여덟 마리의 소로 짝을 지어 4개의 쟁기를 끌도록 할 것이니, 비록 古人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또한 여러 사람들과 수고로움을 같이 하고자 한다.”注+“親受田”은 친히 籍田을 경작하는 것이다. 여덟 마리의 소가 짝을 지어 밭을 가는 것이다. 하였다.
綱
【綱】 魏나라가 執法鮑勛(포훈)을 죽이고, 將軍曹洪의 관직을 면직하였다.
目
【目】 魏主曹丕가 太子로 있을 적에 郭夫人의 아우가 죄가 있어 魏郡의 都尉鮑勛이 治罪하였는데, 조비가 그를 풀어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조비가 즉위한 뒤에 포훈이 자주 直諫을 하니, 조비가 더욱 분노하였다.
으로 있었다. 陳留太守孫邕이 포훈의 집을 방문하였는데,注+過(방문하다)는 古禾의 切이다. 이때 營壘가 아직 완성되지 못하여 길에 표시하는 낮은 담장만을 세워두었다.
손옹이 길을 갈 적에 바른 길을 따르지 않자,注+標는 표함이다. 埒은 음이 劣이니, 낮은 담장이다. 또 길을 경계 짓는 것을 埒이라고 한다.軍營의 令史가 推考하자고 하였는데 포훈은 풀어주고 탄핵하지 않았다. 조비가 이 말을 듣고 詔令을 내리기를 “포훈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니, 체포하여 廷尉에게 회부하라.” 하였다.
정위에서 법조문을 끌어다가 의논하여 五歲刑으로 판결하였는데注+“法議”는 법을 인용하여 의논하는 것이다. 正은 판결함이다. 五歲刑은 머리를 깎고 재갈을 물려 城旦舂(아침에 城을 쌓고 온종일 방아를 찧는 형벌)으로 삼는 것이다.三官들이 논박하여 법률대로 벌금을 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니,注+三官은 廷尉正, 廷尉監, 廷尉平이다. 일설에 三官은 三公이라 한다. 駁은 논박하여 의논함을 이른다.
조비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포훈이 살 명분이 없는데 너희들이 그를 풀어주고자 하니, 삼관 이하를 체포하여
에게 맡겨서 10마리의 죽은 쥐가 한 구멍에 있는 것처럼 一網打盡해야 한다.”注+分(명분)은 扶問의 切이다. 刺姦은 官名이니, 간악한 자를 검거한다는 뜻이다. “十鼠同穴”은 鮑勛과 三官 이하의 여러 사람들을 모두 죽이되 한곳에서 죽게 하여 10마리의 죽은 쥐를 한 구덩이에 묻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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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鍾繇, 華歆, 陳群, 辛毗, 高柔 등이 함께 鮑勛의 아버지 鮑信이 太祖에게 功이 있다고 아뢰어 포훈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청하였는데,注+漢獻帝初平 3년(192)에 鮑信이 濟北相으로 있으면서 曹操를 맞이하여 兗州牧을 겸하게 하였는데, 黃巾賊이 경내로 들어오자 조조가 포신과 함께 전쟁터를 순행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났다. 이에 포신이 결사적으로 싸워서 조조를 구원하여, 조조는 겨우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포신은 마침내 죽었다. 황제(曹丕)는 허락하지 않았다.
【目】 曹叡가 정사를 보던 초기에 陳群이 첫 번째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하들이 附和雷同하여 옮고 그름을 서로 은폐하는 것은 진실로 나라의 큰 근심입니다.
그러나 만약 신하들이 화목하지 않으면 원수와 黨이 생겨서 훼방과 칭찬이 실정을 잃게 되니, 두 가지를 깊이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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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가을 8월에 吳王孫權이 魏나라 江夏를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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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王孫權이 魏나라에 國喪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江夏를 공격하였는데, 江夏太守文聘이 굳게 수비하였다.注+文聘이 이때 石陽에 주둔하고 있었다.
魏나라 조정에서는 군대를 징발하여 구원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魏主曹叡가 말하기를 “손권은 水戰에 익숙한데 지금 감히 육지에서 공격하니, 이는 우리가 대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기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공격과 수비는 형세가 갑절의 차이가 난다. 그는 끝내 감히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손권이 과연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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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吳나라가 襄陽을 공격하니, 魏나라의 撫軍司馬懿가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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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겨울에 吳王孫權이 陸遜과 諸葛瑾으로 하여금 법조문을 가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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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나라 陸遜이 便宜를 아뢰어 吳王孫權에게 德을 베풀고 형벌을 늦추며 부세를 너그럽게 하고 調發(징발)을 그치게 할 것을 권하자,
이에 손권이 有司로 하여금 법률을 다 쓰게 하여 郞中褚逢으로 하여금 이것을 가지고 陸遜과 諸葛瑾에게 찾아가 마음에 온당치 않게 여기는 것을 가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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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魏나라가 處士管寧을 불렀는데, 오지 않았다.
目
【目】 管寧이 遼東에 있은 지 37년에 魏主曹丕가 부르자 마침내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갔고, 太中大夫로 삼았는데 받지 않았다.
이때에 華歆이 太尉가 되자 자신의 지위를 관녕에게 사양하니 〈황제(曹叡)가〉 허락하지 않았고 관녕을 불러 光祿大夫를 삼고 靑州에 명하여 安車와 따르는 관리들을 주어 禮를 갖춰 데려오게 하였는데, 관녕이 또다시 오지 않았다.注+管寧은 北海朱虛 사람이니, 靑州의 관내이다. 從(따르다)은 才用의 切이다.
綱
【綱】 吳나라 呂岱가 交趾太守士徽를 유인하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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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나라 交趾太守士燮이 卒하니, 吳王孫權이 사섭의 아들 士徽로 九眞太守를 맡게 하고 校尉陳時로 사섭을 대신하게 하자, 사휘가 스스로 교지태수가 되고 군대를 일으켜 항거하였다.
交州刺史呂岱가 3천 명의 군대를 감독해서 바다를 건너 사휘을 토벌하고, 사섭의 아우의 아들(조카) 士輔를 師友의 禮로 우대하는 從事로 삼아서 사휘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였다.注+“師友從事”는 從事로 임명하여 師友의 禮로 대우한 것이다.
사휘가 그의 형제 여섯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여대가 모두 참수하였다. 또 從事官을 보내 남쪽 지방에 위엄스러운 명령을 펴니, 변방 밖의 扶南과 林邑의 여러 왕이 각각 使者를 吳나라에 들여보내 공물을 바쳤다.注+扶南國은 바다의 큰 굽이 가운데에 있으니, 북쪽으로 日南과의 거리가 7천 리이다. 林邑國은 본래 漢나라의 象林縣의 땅으로, 땅이 바로 交趾와 맞닿아 있는데 바닷길로 3천 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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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孫盛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먼 나라를 회유하고 가까운 나라를 길들이는 것은 信義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呂岱가 항복한 사람들을 죽여 功을 세우고자 하였으니, 君子가 이 때문에 呂氏가 길게 이어가지 못할 줄 알았다.”
역주2刺姦(척간) :
간악한 관리를 감독하는 직책을 말한다. 魏나라에서는 刺奸掾, 刺奸令史, 刺奸主簿 등이 있었다.
역주3帝 :
≪資治通鑑綱目≫의 綱에서는 正統을 蜀漢에 주어 ‘帝’는 오직 昭烈帝 劉備와 後主 劉禪을 가리키고, 曹丕는 魏主로 표기하였는바, ≪자치통감강목≫의 綱에서는 正統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이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目에서는 이를 다 따르지 못한 부분이 자주 보이는바, 아래의 卞太后 ‘責帝’와 ‘勅帝’도 모두 그러하다. 독자들이 참작하기 바란다.
역주4曹洪이……보인다 :
曹操가 滎陽에서 董卓의 장수 徐榮과 싸우다가 패하고 流矢를 맞고 타던 말도 부상을 당했는데, 이때 曹洪이 자신의 말을 내주어 밤중에 도망해온 일을 가리킨 것으로,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2권 하에 보인다.
역주5魏主丕卒 :
“魏主에게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漢나라(蜀漢)를 높인 것이니, 漢나라(蜀漢)가 망한 뒤에야 비로소 ‘吳主殂’라고 썼다. 賀善의 贊에 말하였다. ‘魏나라 文帝는 曹操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한 달이 넘어 「그 아우들을 보내어 모두 封國으로 나아가게 하였다.」라고 씀에 兄弟간의 은혜가 박해졌고, 계절이 지나 「군사와 父老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다.」라고 씀에 부자간의 天倫이 없어졌으며, 이해 겨울에 「황제를 칭하고 황제를 폐위하였다.」라고 씀에 군신간의 綱常이 끊어졌고, 이듬해 「夫人 甄氏를 죽였다.」라고 씀에 부부간의 義理가 무너졌으며, 또 「宮室을 경영하였다.」 「凌雲臺를 쌓았다.」 「진귀한 물건을 요구하였다.」 「鮑勛을 죽였다.」라고 써서 7년 사이에 失德한 일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당시에 「크게 蟲害가 있어 飢饉이 들었다.」라고 쓰고, 「홍수가 졌다.」라고 쓴 것이 유독 魏나라에만 보이니, 비록 그가 능히 孔羨을 宗聖侯로 봉하고 太學을 세웠으나, 아름다운 옥이 하자를 감출 수 없는 것과 같다.’[主書卒 何 尊漢也 至漢亡而後 始書吳主殂 賀善贊曰 魏文嗣立 踰月而書遣其弟等皆就國 而兄弟之恩薄 踰時而書大饗軍士父老 而父子之天滅 是冬而書稱帝廢帝 而君臣之綱絶 明年而書殺夫人甄氏 而夫婦之義虧 而又書營宮室 築凌雲 求珍物 殺鮑勛 七年之中 失德相望 是以當時書大蝗饑 書大水 獨魏見之 雖能封宗聖立太學 瑜不掩瑕矣]”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