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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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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이라
秦王符登太初元이요 燕建興元이요 後秦建初元이요 西燕主慕容永中興元年이라 ◑ 魏太祖道武帝拓跋珪登國元年이라 ◑ 涼王呂光大安元年이라
◯ 舊大國四 西秦小國一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七僭國이라
春正月 拓跋珪 復立爲代王하다
珪從曾祖紇羅 與諸部大人으로 共請賀訥하여 推珪爲主하여 大會於牛川하여 卽代王位注+① 自武周塞, 西出至牛川, 牛川以北, 皆大漠也.하고
以長孫嵩, 叔孫普洛으로 爲南北部大人하여 分治其衆注+② 嵩爲南部大人, 普洛爲北部大人. 魏書曰 “魏初, 自北荒南遷, 置四部大人, 坐王庭, 決詞訟, 以言語約束, 刻契記事, 無囹圄考訊之法, 諸犯罪者, 皆臨時決遣.”하고 以張袞爲左長史하고 許謙爲右司馬하고 王建等爲外朝大人하고 奚牧爲治民長하여 皆掌宿衛하고 及參謀議注+③ 建, 什翼犍之壻也. 外朝大人, 無常員, 主受詔命, 外使, 出禁中, 國有大喪大禮, 皆與參知, 隨所典焉.하고 長孫道生等 出納教命注+④ 道生, 嵩之從子也.하다
燕王垂 稱皇帝하다
始置公卿百官하고 繕治宗廟社稷하다
丁零翟遼 據黎陽하다
翟眞之死也 遼奔黎陽하니 太守滕恬之 甚愛信之注+① 遼, 眞之從兄也.러니
恬之喜畋獵하고 不愛士卒하니 遼潛施姦惠以收衆心하여 遂執恬之하고 而據其郡하다
二月 西燕 弑其主沖하고 立段隨爲燕王하다
樂在長安하고 且畏燕主垂之彊하여 課農築室하여 爲久安計하니 鮮卑咸怨注+① 鮮卑思東歸, 而沖安於長安, 故怨.이라
將軍韓延 因衆心殺之하고 立沖將段隨하여 爲燕王하다
張大豫 起兵攻姑臧하다
張天錫之南奔也 秦長水校尉王穆 匿其世子大豫하여 與俱奔河西러니 至是 魏安人焦松 聚兵하고 迎大豫爲主하여 攻拔昌松하고 進逼姑臧注+① 魏安縣, 在武威昌松縣界, 蓋曹魏所置也, 而晉志不見. 後魏置魏安郡. 昌松, 卽漢倉松縣地. 本屬武威郡, 蓋河西張氏分置郡也. 呂光後以郭靡言, 改昌松, 爲東張掖郡.하다
穆曰 呂光 糧豐城固하고 甲兵精銳하니 不如席卷嶺西하여 厲兵積粟然後東向이니 不及期年 光可取也니이다
大豫不從하고 自稱涼州牧하고 使穆으로 說諭嶺西諸郡하니 皆起兵應之 保據楊塢注+② 自西郡至張掖․酒泉․建康․晉昌, 其地皆嶺西也. 楊塢, 在姑臧城西.하다
代徙都盛樂하다
代王珪 徙居定襄之盛樂하여 務農息民하니 國人 悅之러라
三月 泰山太守張願하니 謝玄 退屯淮陰하다
謝玄 欲使朱序屯梁國하고 而自屯彭城하여 以北固河上하고 西援洛陽하니 朝議以征役旣久라하여 欲令玄置戍而還이러니
至是 張願以郡叛하여 降翟遼하니 北方騷動이라
謝罪乞解職한대 詔慰諭하고 令還淮陰하다
燕主垂 追尊母蘭氏하여 爲文昭皇后하다
燕主垂 欲遷文明段后於别室하고 而以蘭后配享太祖注+① 段氏, 皝之元妃, 之母. 蘭氏, 皝之側室也. 皝廟號太祖, 謚文明皇帝.하니 議者皆以爲當然이어늘
博士劉詳, 董謐 以爲堯母爲帝嚳妃로되 位第三이라 不以子貴陵注+② 帝嚳有四妃. 元妃有邰氏女, 曰姜嫄, 生后稷. 次妃有娀氏女, 曰簡狄, 生卨. 次妃陳豐氏女, 曰慶都, 生放勛. 次妃娵訾氏女, 曰常義, 生摯.하니 文昭后 宜立别廟니이다
垂怒逼之한대 詳, 謐曰 上所欲爲 無問於臣하소서 按經奉禮하니 不敢有貳니이다 垂乃不復問而卒行之하다
又以可足渾后 傾覆社稷이라하여 追廢之하고 尊烈祖昭儀段氏하여 爲景德皇后하여 配享注+③ 可足渾后, (雋)[儁]之元妃也, 與垂有故怨, 事見穆帝升平二年, 及帝奕太和四年. (雋)[儁]廟號烈祖, 謚景昭皇帝. 段氏, (雋)[儁]之側室也.하다
崔鴻曰
齊桓公 命諸侯 無以妾爲妻하니 夫之於妻에도 猶不可以妾代之어든 況子而易其母乎
春秋所稱母以子貴者 君母旣没 得以妾母爲小君也 至於享祀하여는 則不得爲配矣
君父之所爲 臣子必習而效之 寶之殺母 由垂爲之漸也注+① 寶之殺母, 事見下二十一年. 可足渾氏 雖有罪於前朝 然小君之禮成矣어늘 垂以私憾廢之하고 又立兄妾之無子者하니 皆非禮也注+② 私憾, 謂譖殺垂妃段氏, 又譖垂而逐之奔秦也.니라
燕慕容恒, 慕容永 殺段隨하고 立宜都王子顗하여 帥鮮卑男女四十餘萬口하고 去長安而東注+① 顗, 蓋燕宜都王桓之子.이러니 恒弟韜殺顗恒하고 又立沖之子瑤하다
又殺之하고 乃立泓之子忠爲帝하니 忠以永爲丞相한대 持法寬平하니 鮮卑安之러라
至聞喜하여 聞燕主垂 已稱帝하고 不敢進하여 築燕熙城而居之注+② 聞喜縣, 屬河東郡, 春秋時, 晉武公所居之曲沃也. 秦改爲左邑, 漢武帝於此, 聞南越破, 改曰聞喜. 後魏分屬絳郡.하니 廆弟之孫也
夏四月 代改稱魏하다
◑ 後秦王萇 取長安하고 稱皇帝하다
鮮卑旣東 長安 空虛 取之하고 始稱皇帝하고 置百官하다
六月 以楊亮爲雍州刺史하여 鎭衛山陵하고 荆州刺史桓石民 取弘農하고 初置湖, 陝二戍注+① 帝置雍州於襄陽, 今遣亮, 帶雍州, 鎭洛. 湖․陝二縣, 皆屬弘農.하다
◑ 關隴諸郡 復起兵爲秦하다
秦主丕 以王永爲左丞相하여 傳檄四方하여 共討姚萇, 慕容垂하니 於是 天水, 馮翊, 河東, 京兆, 扶風 咸起兵하여 遣使詣秦하다
秋八月 以符登爲南安王하다
枹罕諸氐 以河州刺史衛平 衰老라하여 議欲廢之注+① 諸氐, 蓋秦王堅, 使毛興領之, 以鎭枹罕者也.러니 會七夕宴 氐啖靑 抽劍而前曰注+② 啖, 徒覽切. 啖靑, 姓名.
天下大亂하니 非賢主 不可濟 衛公 老矣 宜返初服注+③ 衛平, 本毛興部將.이요 狄道長符登 王室疎屬으로 志略雄明하니 共立之하노니 有不同者 卽下異議注+④ 長, 知兩切. 登, 丕之族子也.라하고 乃奮劍攘袂하여 將斬異己者하니 衆皆從之
於是 推登爲雍河二州牧하여 帥衆五萬하고 下隴하여 攻南安拔之하고 馳使請命하니 秦主丕 卽而命之하고 仍封南安王하다
冬十月 西燕 擊秦敗之한대 秦主丕 奔東垣하니 將軍馮該 擊殺之하다
慕容永 遣使詣秦主丕하여 求假道東歸어늘 丕不許한대 與戰于襄陵하여 秦兵大敗하니 丞相王永等 皆死注+① 襄陵縣, 漢屬河東郡, 晉屬平陽郡.
丕帥騎數千하고 南奔東垣하여 謀襲洛陽注+② 東垣縣, 漢已改爲眞定. 此東垣, 在河南新安縣界.이어늘 馮該自陝邀擊殺之하고 執其太子寧等하여 送建康이러니 詔赦不誅하다
西燕慕容永 稱帝於長子하다
進據長子하고 卽帝位하여 將以秦后楊氏 爲上夫人이러니 楊氏引劍刺之라가 爲永所殺하다
注+① 壽, 四十五.하다
◑ 秦符登 及後秦主萇戰하여 大破之하다
旣克南安 夷夏歸之者 三萬餘戶 遂進攻後秦主萇之弟碩德于秦州한대 自往救之어늘 與戰大破之하고 啖靑 射萇中之하니 走保上邽 碩德 代統其衆하다
十一月 秦符登 稱帝於南安하다
秦尙書寇遺 奉渤海王懿하여 自杏城奔南安注+① 懿, 丕之子也.이어늘 登發丕喪하여 行服하고 議立懿爲主러니
衆曰 渤海年幼하여 未堪多難하니 非大王이면 不可라한대 乃卽帝位하고 置百官하다
十二月 呂光 自稱酒泉公하다
得秦主堅凶問하고 擧軍縞素러니 至是하여 自稱涼州牧酒泉公하다
秦主登 立世祖神主於軍中하여 載以輜輧하고 衛以虎賁하여 凡所欲爲 必啓而後行注+① 秦主堅, 廟號世祖. 車四面有屛蔽者, 曰輜輧.하다
引兵五萬하고 東擊後秦할새 將士皆刻鉾鎧爲死休字注+② 鉾, 音牟, 頭牟也. 古人多以兜鍪爲頭牟, 後人因頭牟以鐵爲之, 遂旁加金耳. 鎧, 甲也. 死休, 言欲復讐必死乃休也.하고 每戰 以劍矟爲方圓大陣하여 知有厚薄이면 從中分配 人自爲戰하여 所向無前이러라
長安之將敗也注+① 謂符堅爲慕容沖所困之時. 將軍徐嵩, 胡空 各聚衆하여 結壘自固러니 旣而 受後秦官爵하니 後秦以王禮 塟秦主堅於二壘之間하다
及登至 嵩, 空 以壘降하니 拜嵩雍州刺史空京兆尹하고 改塟堅以天子之禮하다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1년이다.
【目】 秦王(前秦) 符登 太初 원년이고,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 建興 원년이고, 後秦 太祖 姚萇 建初 원년이고, 西燕主 慕容永 中興 원년이다.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登國 원년이다. 涼王(後涼) 呂光 太安 원년이다.
옛날에 있던 큰 나라(前秦, 後燕, 後秦, 西燕)가 넷이고, 西秦 같은 작은 나라가 하나이고, 새로 생긴 큰 나라(北魏)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後涼)가 하나이니, 합하여 僭國이 일곱이다.
【綱】 봄 정월에 拓跋珪가 다시 즉위하여 代王이 되었다.
【目】 拓跋珪의 從曾祖 拓跋紇羅(탁발흘라)가 여러 部의 大人들과 함께 賀訥에게 청하여 탁발규를 추대하여 군주로 삼으니, 牛川에서 크게 모여 탁발규를 代王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注+① 武周塞(무주새)로부터 서쪽으로 나와 牛川에 이르니, 우천 이북은 모두 大漠이다.
長孫嵩과 叔孫普洛을 南部와 北部의 大人으로 삼아서 나누어 그 무리를 다스리게 하고,注+② 長孫嵩은 南部大人이 되고 叔孫普洛은 北部大人이 되었다. ≪魏書≫에 “魏나라(北魏) 초기에 북쪽 변방에서 남쪽으로 옮겨와 四部大人을 설치하고 王庭에 앉아 詞訟를 다스리되 말로 약속하고 문자를 새겨 일을 기록하며, 감옥과 심문하는 법이 없이 범죄자들을 모두 그때마다 판결하여 처리하였다.”라고 하였다. 張袞을 左長史로, 許謙을 右司馬로, 王建 등을 外朝大人으로, 奚牧을 治民長으로 삼아서 모두 宿衛를 관장하고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으며,注+③ 王建은 拓跋什翼犍의 사위이다. 外朝大人은 정해진 인원수가 없으니, 주로 조명을 받으며 외부로 사신을 나가고 대궐을 출입하며 나라에 큰 喪과 큰 禮가 있으면 다 참여하여 일에 따라 맡은 임무가 있었다. 長孫道生 등이 教命을 출납하게 하였다.注+④ 長孫道生은 長孫嵩의 從子이다.
【綱】 燕王(後燕) 慕容垂가 皇帝를 칭하였다.
【目】 처음으로 公卿과 百官을 설치하고 宗廟와 社稷을 수리하였다.
【綱】 丁零의 翟遼가 黎陽을 점거하였다.
【目】 翟眞이 죽자 翟遼가 黎陽으로 달아나니, 太守 滕恬之가 매우 그를 아끼고 신임하였다.注+① 翟遼는 翟眞의 從兄이다.
등염지가 사냥을 좋아하고 사졸들을 보살피지 않으니, 적료가 은밀하게 간악한 은혜를 베풀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마침내 등염지를 사로잡고 그 郡을 점거하였다.
【綱】 2월에 西燕이 그 군주 慕容沖을 시해하고 段隨를 세워 燕王으로 삼았다.
【目】 慕容沖은 長安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또 燕主 慕容垂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궁실을 지어 오랫동안 편안할 계책을 삼으니, 鮮卑族이 모두 원망하였다.注+① 鮮卑族은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는데, 慕容沖이 장안에 있는 것을 편안히 여겼으므로 원망한 것이다.
장군 韓延이 대중의 마음을 따라 모용충을 죽이고 모용충의 장수 段隨를 세워 燕王으로 삼았다.
【綱】 張大豫가 군대를 일으켜 姑臧을 공격하였다.
【目】 처음에 〈前涼의 군주〉 張天錫이 남쪽으로 달아날 적에 秦나라(前秦) 長水校尉 王穆이 장천석의 世子 張大豫를 숨기고서 함께 河西로 달아났는데, 이때에 魏安 사람 焦松이 병력을 모아 장대예를 맞이해 군주로 삼아서, 昌松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전진하여 姑臧을 핍박하였다.注+① 魏安縣은 武威郡 昌松縣 경계에 있으니, 대개 曹魏(삼국시대 魏나라) 때에 설치한 것인데, ≪晉書≫ 〈地理志〉에는 보이지 않는다. 後魏(北魏) 때에는 魏安郡을 설치하였다. 昌松은 바로 漢나라 倉松縣 지역이다. 본래 武威郡에 속하였는데, 대개 河西의 張氏(前涼) 때에 나누어 군을 설치하였다. 呂光은 뒤에 郭靡의 말을 따라 昌松을 東張掖郡으로 고쳤다.
왕목이 말하기를 “呂光은 양식이 풍족하고 성이 견고하며 갑옷과 병기가 정교하고 날카로우니, 嶺西 지역을 석권하여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모은 뒤에 동쪽으로 향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1년이 안 되어 여광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대예가 따르지 않고 스스로 涼州牧이라 칭하고 왕목으로 하여금 영서의 여러 郡을 설득하고 회유하게 하니, 모두 군대를 일으켜 그에게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楊塢를 확보하여 점거하였다.注+② 西郡에서부터 張掖, 酒泉, 建康, 晉昌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이 모두 嶺西이다. 楊塢는 姑臧城 서쪽에 있다.
【綱】 代나라가 盛樂으로 천도하였다.
【目】 代王 拓跋珪가 定襄의 盛樂으로 천도하여 농업에 힘쓰고 백성들을 쉬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綱】 3월에 泰山太守 張願이 〈晉나라(東晉)를〉 배반하니, 謝玄이 후퇴하여 淮陰에 주둔하였다.
【目】 처음에 謝玄이 朱序를 梁國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彭城에 주둔하여 북쪽으로 河上을 견고히 하고 서쪽으로 洛陽을 구원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은 군사들이 이미 오랜 시간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이유로 사현으로 하여금 수비병을 설치하고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 張願이 泰山郡을 가지고 배반하여 翟遼에게 항복하니, 북방이 소란스러웠다.
사현이 사죄하고 해직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위로하여 타이르고 淮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綱】 燕主(後秦) 慕容垂가 모친인 蘭氏를 추존하여 文昭皇后라 하였다.
【目】 燕主 慕容垂가 注+① 段氏는 慕容皝의 元妃이니, 慕容儁의 어미이다. 蘭氏는 모용황의 側室이다. 慕容皝은 廟號가 太祖이고 시호가 文明皇帝이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당연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博士 劉詳과 董謐은 말하기를 “堯임금의 어머니가 帝嚳의 妃가 되었는데, 지위가 세 번째였습니다. 아들이 귀하다 하여 姜原을 능멸하지 않았으니,注+② 帝嚳에게는 4명의 妃가 있었으니, 元妃 姜嫄은 有邰氏의 따님으로 后稷을 낳았고, 다음 妃인 簡狄은 有娀氏의 따님으로 卨[契]을 낳았고, 다음 비인 慶都는 陳豐氏의 따님으로 堯임금[放勛]을 낳았고, 다음 비인 常義는 娵訾氏의 따님으로 伊尹[摯]을 낳았다. 文昭后는 마땅히 别廟를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모용수가 노하여 협박하자, 유상과 동밀이 말하기를 “임금이 하고자 하시는 바를 신에게 묻지 마소서. 신은 ≪禮經≫을 상고하여 예를 받들어 행하니, 감히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모용수는 마침내 더 이상 묻지 않고 끝내 행하였다.
모용수는 또 注+③ 可足渾后은 慕容儁의 元妃이니, 慕容垂와 옛 원한이 있었는바, 晉 穆帝 升平 2년(358)과 帝 司馬奕 太和 4년(369)에 보인다. 모용준은 廟號가 烈祖이고 시호가 景昭皇帝이다. 段氏는 모용준의 側室이다.
【目】 崔鴻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齊 桓公이 제후들에게 명할 적에 라고 하였으니,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도 오히려 妾으로 대신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자식으로서 그 어머니를 바꾼단 말인가.
≪春秋≫에서 라고 한 것은 가 이미 죽었으면 첩의 신분의 어머니를 小君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享祀의 경우에는 배향할 수 없는 것이다.
君父의 행위를 臣子가 반드시 익혀 본받는 것이니, 慕容寶가 제 어머니를 죽인 것은 慕容垂가 조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注+① 慕容寶가 모친을 죽인 것은 일이 아래 太元 21년(396)에 보인다. 可足渾氏가 비록 前朝에 죄가 있었으나, 小君의 禮를 이루었는데, 모용수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폐위하고 또 형의 첩 중에 자식이 없는 자를 세웠으니, 모두 예가 아니다.”注+② ‘私憾’은 可足渾后가 참소하여 慕容垂의 비인 段氏를 죽이고 또 모용수를 참소하여 내쫓아 秦나라(前秦)로 도망가게 한 것을 이른다.
【綱】 西燕 사람이 段隨를 죽이고 동쪽으로 갔는데, 聞喜에 이르러 慕容忠을 세워서 다시 황제라 칭하였다.
【目】 燕나라(西燕) 慕容恒과 慕容永이 段隨를 죽이고 宜都王(慕容桓)의 아들 慕容顗를 세워서 鮮卑族 남녀 40여만 명을 거느리고 長安을 떠나 동쪽으로 갔는데,注+① 慕容顗는 燕나라(前燕) 宜都王 慕容桓의 아들이다. 모용항의 아우 慕容韜가 모용의와 모용항을 죽이고 또 慕容沖의 아들 慕容瑤를 세웠다.
모용영이 또다시 모용요를 죽이고 마침내 慕容泓의 아들 慕容忠을 세워 황제로 삼았다. 모용충이 모용영을 승상으로 삼자, 모용영은 관대하고 공평하게 법을 집행하니, 선비족들이 안정되었다.
聞喜縣에 이르러 燕主 慕容垂가 이미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燕熙城을 쌓아 거주하니,注+② 聞喜縣은 河東郡에 속하였으니, 春秋時代에 晉 武公이 거주했던 曲沃이다. 秦나라 때에 명칭을 左邑으로 바꾸었는데 漢 武帝가 이곳에서 南越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을 고쳐 ‘聞喜(기쁜 소식을 듣다)’라고 하였다. 後魏(北魏) 때에 나누어 絳郡에 소속시켰다. 모용영은 慕容廆 아우의 손자이다.
【綱】 여름 4월에 代나라가 魏나라(北魏)로 국명을 바꾸었다.
【綱】 後秦王 姚萇이 長安을 점령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目】 鮮卑族(西燕)이 동쪽으로 가자 長安이 텅비었다. 姚萇이 장안을 점령하고 처음으로 황제를 칭하고 백관을 두었다.
【綱】 6월에 〈晉나라(東晉)가〉 楊亮을 雍州刺史로 삼아서 〈洛陽에〉 진주하여 山陵을 지키게 하고, 荆州刺史 桓石民이 弘農을 취하고는 처음으로 湖縣과 陝縣에 두 수비하는 곳을 설치하였다.注+① 황제(晉 孝武帝)가 襄陽에 雍州를 설치하였는데, 이제 楊亮을 보내어 옹주자사를 겸하고 洛陽에 진주하였다. 湖縣과 陝縣 두 현은 모두 弘農에 속하였다.
【綱】 西燕이 그 군주 慕容忠을 시해하고 慕容永을 세워 河東王이라 하였다.
【綱】 秦나라(前秦) 河北의 州郡이 다시 燕나라(後燕)에 항복하였다.
【綱】 關中과 隴 지역의 여러 郡이 다시 군대를 일으켜 秦나라(前秦)가 되었다.
【目】 秦主 符丕가 王永을 左丞相으로 삼아서 사방에 격문을 돌려 함께 姚萇과 慕容垂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天水, 馮翊, 河東, 京兆, 扶風이 모두 군대를 일으켜 사자를 보내어 秦나라에 왔다.
【綱】 가을 8월에 秦나라(前秦)가 符登을 南安王으로 삼았다.
【目】 枹罕의 여러 氐族은 河州刺史 衛平이 노쇠했다 하여 의논하고 폐위하려 하였는데,注+① 여러 氐族은 秦王 符堅이 毛興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해서 枹罕에 진주했던 자들이다. 마침 七夕날 잔치에 저족인 啖靑이 검을 빼들고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注+② 啖은 徒覽의 切이니, 啖靑은 성명이다.
“천하가 크게 혼란하니, 현능한 주군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한다. 衛公은 늙었으니, 마땅히 〈관복을 벗고〉 예전에 입던 의복(예전의 신분)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요,注+③ 衛平은 본래 毛興의 部將이었다. 狄道長 符登은 왕실의 먼 친족으로 뜻이 웅대하고 지략이 밝으니, 함께 세우기를 청한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즉시 이의를 제기하라.” 하고는注+④ 長(우두머리)은 知兩의 切이니, 符登은 符丕의 族子이다. 마침내 검을 휘두르며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장차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자를 베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따랐다.
이에 부등을 추대하여 雍州와 河州 두 州의 牧으로 삼아서, 5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隴으로 내려가 南安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사자를 급히 보내 명을 청하니, 秦主(前秦) 符丕가 즉시 명하고 이어서 南安王에 봉하였다.
【綱】 겨울 10월에 西燕이 秦나라(前秦)를 공격하여 패주시키자, 秦主 符丕가 東垣으로 달아나니, 〈晉나라(東晉)〉 장군 馮該가 그를 공격하여 죽였다.
【目】 〈西燕의〉 慕容永이 사자를 보내어 秦主 符丕에게 가서 길을 빌려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부비가 허락하지 않고 그와 더불어 襄陵에서 싸웠는데, 秦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丞相 王永 등이 모두 죽었다.注+① 襄陵縣은 漢나라 때에는 河東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平陽郡에 속하였다.
부비가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남쪽 東垣으로 달아나서 洛陽을 기습할 것을 모의하자,注+② 東垣縣은 漢나라 때에 이미 眞定으로 고쳤으니, 여기의 東垣은 河南 新安縣 경계에 있다. 馮該가 陝城에서 그를 요격해 죽이고 태자 符寧 등을 잡아 建康으로 보냈는데, 조령을 내려 용서하고 죽이지 않았다.
【綱】 西燕의 慕容永이 長子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目】 慕容永이 전진하여 長子를 점거하고서 제위에 올라 장차 秦나라(前秦)의 后인 楊氏를 上夫人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양씨가 검을 가지고 모용영을 죽이려다가 모용영에게 살해당하였다.
【綱】 〈晉나라(東晉)〉 海西公 司馬奕이 呉에서 薨하였다.注+① 향년이 45세였다.
【綱】 秦나라(前秦) 符登이 後秦主 姚萇과 싸워서 대파하였다.
【目】 符登이 이미 南安을 점령하자 오랑캐와 漢族 중에 귀의한 자가 3만여 가호였다. 마침내 전진하여 秦州에서 後秦主 姚萇의 아우 姚碩德을 공격하니, 요장이 직접 가서 구원하였는데 부등이 그와 싸워 크게 격파하고 啖靑이 화살을 쏘아 요장을 맞추니 요장이 달아나 上邽를 지켰다. 요석덕이 대신 그 무리를 통솔하였다.
【綱】 11월에 秦나라(前秦) 符登이 南安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目】 秦나라 尙書 寇遺가 渤海王 符懿를 받들어 杏城에서 南安으로 달려오자注+① 符懿는 符丕의 아들이다. 符登이 符丕의 상을 발표하고 상복을 입고서 부의를 세워 군주로 삼을 것을 의논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발해왕은 나이가 어려서 많은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니, 대왕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자, 부등이 마침내 제위에 오르고 백관을 설치하였다.
【綱】 12월에 呂光이 스스로 酒泉公이라 칭하였다.
【目】 처음에 呂光이 秦主 符堅의 부음을 듣고 전군에게 소복을 입혔는데,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涼州牧 酒泉公이라 칭하였다.
【綱】 秦主(前秦) 符登이 後秦을 정벌하였다.
【目】 秦主 符登이 世祖(符堅)의 神主를 軍中에 세우고서 輜輧(치병)에 싣고 虎賁으로 호위하게 하고는 무릇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신주에게 아뢴 뒤에 행하였다.注+① 秦主 符堅의 廟號가 世祖이다. 수레 4면을 병풍으로 가린 것을 輜輧이라 한다.
5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동쪽으로 後秦을 공격할 적에 장병들이 모두 투구와 갑옷에 ‘死休(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라는 글자를 새기고注+② 鉾는 음이 牟이니, 머리의 투구[頭牟]이다. 옛사람은 대부분 兜鍪를 頭牟라 하였는데, 후대의 사람들은 頭牟를 쇠로 만드는 것에 인하여 牟의 偏傍에 ‘金’자를 더하여 〈‘鉾’자를〉 만든 것일 뿐이다. 鎧는 갑옷이다. ‘死休’는 복수하기를 원하여 반드시 죽어야 비로소 그만둠을 말한 것이다. 매번 싸울 때마다 검과 창을 잡은 병력으로 방형과 원형의 큰 陣을 만들어서 병력이 너무 몰려 있거나 부족한 곳이 있으면 중앙에서 군대를 분배하였다. 그러므로 병사들이 각자 전투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적이 없었다.
【目】 처음에 長安이 장차 함락될 적에注+① 〈장안이 함락될 때는〉 符堅이 慕容沖에게 곤궁을 당했을 때를 말한다. 장군 徐嵩과 胡空이 각각 병력을 모아 보루를 만들어 스스로 견고히 방비하였는데, 이윽고 後秦의 관작을 받으니, 후진이 왕의 예로서 秦主 符堅을 서숭과 호공 두 보루의 사이에서 장례하였다.
符登이 이곳에 오자 서숭과 호공이 보루를 가지고 항복하니, 부등은 서숭을 雍州刺史에, 호공을 京兆尹에 임명하고 부견을 천자의 예로 改塟하였다.


역주
역주1 [入] : 저본에는 ‘入’이 없으나, ≪魏書≫ 권113 〈官氏志〉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 文明段后를……하니 : 前燕 太祖 慕容皝은 시호가 文明이다. 황후는 文明皇后인데, 이때 慕容垂가 자신의 모친 蘭氏(모용황의 妃)를 추존하여 文昭皇后로 삼은 것이다.
역주3 可足渾后가……배향하였다 : 可足渾后는 烈祖 慕容儁의 황후로 시호는 景昭皇后이다. 중신 慕容恪이 죽자 慕容評과 권력을 휘두르며 慕容垂를 쫓아내었다. 이때 모용수가 그녀를 폐위하고 모용준의 昭儀 段氏를 景德皇后로 추존하였다.
역주4 姜原 : 姜嫄으로도 표기한다.
역주5 (雋)[儁] : 저본에는 ‘雋’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므로 ‘儁’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6 妾을……말라 : 춘추시대 패자였던 齊 桓公이 제후들과 葵丘에서 會盟할 적에 했던 다섯 가지 명령 중 첫 번째 명령이다.(≪孟子≫ 〈告子 下〉)
역주7 어머니가……귀해진다 : 庶子가 지위를 계승한 경우 그 생모 또한 아들로 인하여 지위가 높아지는 것으로, ≪春秋公羊傳≫ 隱公 원년에 “환공은 어찌하여 귀한가? 어머니의 신분이 귀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신분이 귀하면 자식은 어찌하여 귀해지는가? 자식은 어머니 덕분에 귀해지고 어머니는 자식 덕분에 귀해지는 것이다.[桓 何以貴 母貴也 母貴則子何以貴 子以母貴 母以子貴]”라고 하였다.
역주8 君母 : 庶子가 아버지의 正妻를 부르는 호칭이다.
역주9 西燕人 殺段隨而東 : “段隨를 세워서 왕을 삼았다고 썼는데 弑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그를 외면한 것이다. 어찌하여 그를 외면한 것인가. 세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정상적인 군주로 인정하지 않아서 동등한 쌍방이 상대를 죽인 것으로 쓴 것이다.[段隨書立爲王矣 不書弑 何 外之也 曷爲外之 不當立也 故不成其君 而以兩下相殺書之]” ≪書法≫
역주10 西燕……爲河東王 : “西燕이 이미 慕容沖을 시해하고 段隨를 세웠는데, 또다시 단수를 죽이고[殺] 慕容忠을 세웠다가 오래지 않아 모용충이 또다시 시해당하고 慕容永이 즉위하였다. 반년 사이에 4번 그 군주가 바뀌었으니, 추악한 무리들이 서로 잔악한 짓을 하는 것이 이와 같다. ≪資治通鑑綱目≫에서 모두 그 죄를 바로잡은 것은 夷狄이 혼란하다는 이유로 上下의 구분을 폐하지 않은 것이다. 단수를 ‘殺’이라고 쓴 것은 慕容氏의 족속이 아니기 때문에 정식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西燕旣弑沖而立段隨 又殺隨而立忠 未幾 忠又見弑而永立矣 半年之間 四易其主 醜類相殘如此 綱目皆正其罪者 不以夷狄昏亂之故 而廢上下之分也 段隨書殺 非慕容氏之族 故不成乎君]” ≪發明≫
역주11 秦河北州郡 復降於燕 : “앞에서는 河北의 州郡이 다시 秦나라에 항복했다고 쓰고 燕나라의 河北이라고 쓰지 않았는데, 이때 다시 연나라에 항복하였는데도 ‘秦나라 河北’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하북을 연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북은 옛날 연나라 땅인데 어찌하여 연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인가. 慕容垂는 배반한 자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 모용수가 〈진나라를〉 배반했다고 썼으니, 하북을 그의 영토로 인정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西燕에서 군대를 일으켰다고 썼으니 배반한 자가 아니요, 關中과 隴의 여러 군을 서연이 일찍이 얻었는데, 어찌하여 서연에 귀속시키지 않았는가. 서연이 이미 동쪽으로 갔으면 관중과 농 지역은 진나라의 옛 영토인 것이다. 혹은 귀속시키고 혹은 귀속시키지 않았으니, ≪자치통감강목≫의 판단이 정확하다.[前書河北州郡復降於秦 不書燕河北 於是 復降於燕 則書秦河北 何 不以河北予燕也 河北故燕土 曷爲不以予燕 垂 叛者也 綱目書垂以叛 固不得以河北予之矣 然則西燕書起兵 非叛者也 關隴諸郡 西燕嘗得之 何以不繫之西燕 西燕而旣東矣 關隴則秦舊地 或繫 或不繫 綱目之權衡審矣]” ≪書法≫
역주12 (諸)[請] : 저본에는 ‘諸’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海西公奕 薨於呉 : “일찍이 ‘帝奕’이라고 썼었는데 여기서 ‘帝’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지금의 황제를 피한 것이다. ‘薨’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옛 晉나라 군주이기 때문이니, 여러 신하와 구별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전국시대에〉 지역을 나누어 왕 노릇 한 것[分王]’ 외에 薨이라고 쓴 것이 14번인데, 廢主에 薨이라고 쓴 것이 2번이다.(晉나라 海西公과 唐나라 酅公이다.)[嘗書帝奕矣 此其不書帝 何 避今帝也 書薨 何 故晉主也 所以别於諸臣也 綱目自分王外書薨十有四 而廢主書薨者二(晉海西公 唐酅公)]” ≪書法≫“여기에서 어찌하여 海西公이라고 썼는가. 지금의 황제를 피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름을 쓴 것은 나라를 잃은 군주이기 때문이요, 薨이라고 쓴 것은 여러 신하와 달리한 것이다.[此何以書海西公 避今帝也 名之 失國之君也 書薨 異乎臣也]” ≪發明≫
역주14 秦主登 伐後秦 : “‘伐’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符登을 의롭게 여긴 것이다. 이때에 부등이 世祖(符堅)를 軍中에서 제사하고 하는 바를 반드시 세조의 신주에게 아뢰었으며, 장병들이 모두 투구와 갑옷에 ‘死休’라는 글자를 새겼으니, 거의 그 복수할 뜻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伐’이라고 썼다. 얼마 있다가 군대가 각각 병력을 인솔해 돌아갔으니, 義로써 토벌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뒤에는 다시 ‘擊’이라고 쓴 것이다.[書伐 何 義登也 於是登祀世祖於軍中 所爲必啓 將士皆刻鉾鎧爲死休字 庶乎其有復讐之志矣 故特書伐 旣而兵各引還 則非能義討者也 故後復書擊]”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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