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人晝夜攻懸瓠
하여 作高樓
하여 臨城以射之
하니 矢下如雨
라 城中負戶以汲
注+半門曰戶, 謂汲水者背負其戶以禦流矢也.이러라
施大鉤於衝車之端
하여 以牽樓堞
하여 壞其南城
하니 陳憲
이 內設女牆
하고 外立木柵以拒之
注+樓堞, 城上之樓. 櫓, 女垣也.라
魏人塡塹
하고 肉薄登城
注+薄, 迫也. 不用梯衝, 以身迫城, 緣之而上, 謂之肉薄登城.하니 憲督厲將士苦戰
이어늘 積尸與城等
이라
魏人乘尸上城하여 短兵相接이어늘 憲銳氣愈奮하여 戰士無不一當百이라 殺傷萬計요 城中死者亦過半이러라
魏遣永昌王仁
하여 驅所掠六郡生口
하여 北屯汝陽
注+仁, 健之子也. 生口, 生獲之人也. 汝陽縣, 本屬汝南郡, 江左分立汝陽郡.이러니 宋主遣間使
하여 命武陵王駿
하여 發騎襲之
하니 駿發百里內馬
하여 得千五百匹
하여 分爲五軍
하여 遣參軍劉泰之等將之
하여 直趨汝陽
이러라
魏人唯慮救兵自壽陽來요 不備彭城이러니 泰之等이 潛進擊之하여 殺三千餘人하고 燒其輜重하니 魏人奔散하고 諸生口는 悉得東走러라
魏偵知泰之等兵無後繼하고 復引兵擊之하니 士卒驚亂走死하여 免者九百餘人이요 馬還者四百匹이라
魏主攻懸瓠四十二日
에 宋主遣南平內史臧質司馬劉康祖
하여 共救懸瓠
注+康祖, 道錫之從兄也. 道錫, 道産之弟.하니
魏主遣任城公乞地眞하여 逆拒之어늘 質等擊斬乞地眞하니
四月에 魏主引兵還이어늘 宋以陳憲으로 爲龍驤將軍하다
目
初
에 遼東公翟黑子 奉使并州
하여 受布千匹
注+翟, 姓也. 黑子, 其名.이라가 事覺
하여 謀於高允
한대
允曰 公帷幄寵臣
이라 有罪首實
이면 庶或見原
이니 不可重爲欺罔
注+首, 謂有罪自陳也. 原, 赦也. 重, 直用切.이니라
崔覽謂曰 首實
이면 罪不可測
이니 不如諱之
注+覽, 本傳作鑑.라하니
黑子怨允曰 君奈何誘人就死地오 遂不以實對한대 魏主殺之하니라
魏主使允授太子經이러니 及崔浩被收에 太子召允謂曰 吾自導卿하리니 至尊有問이어든 但依吾語하라
太子入言호되 高允小心愼密하고 且制由崔浩하니 請赦其死하소서하니
魏主問曰 國書皆浩所爲乎
아하니 對曰 太祖記
는 前著作郞鄧淵所爲
요 先帝記及今記
는 臣與浩共爲之
라 然浩所領事多
하여 摠裁而已
요 至於著述
은 臣多於浩
注+摠裁, 謂摠其大綱, 裁其可否也.니이다
魏主怒曰 允罪甚於浩하니 何以得生이리오 太子懼曰 天威嚴重하시고 允小臣이라 迷亂失次耳로이다 臣曏問하니 皆云 浩所爲라하니이다
魏主問信如東官所言乎아하니 對曰 臣罪當滅族이어니와 不敢虛妄이니 殿下哀臣하여 欲匄其生耳니이다
魏主顧謂太子曰 直哉
라 此人情所難
이로되 而允能爲之
하니 臨死不易辭
는 信也
요 爲臣不欺君
은 貞也
니 宜特除其罪以旌之
라하고 遂赦之
注+旌, 表異也.하다
目
召浩臨詰한대 浩惶惑不能對하고 允事事申明하여 皆有條理어늘 魏主命允爲詔하여 誅浩及僚屬僮吏凡百二十八人하여 皆夷五族할새 允持疑不爲어늘
帝頻使催切
한대 允曰 浩之所坐 若更有餘釁
이면 非臣敢知
어니와 若直以觸犯
이면 罪不至死
注+餘釁, 猶言別罪也. 觸犯, 謂直書國惡, 不爲尊者諱也.니이다
魏主怒하여 命武士執允한대 太子爲之拜請하니 魏主意解하여 乃曰 無斯人이면 當更有數千口死矣라하다
它日에 太子讓允曰 吾欲爲卿脫死로되 而卿終不從하여 激怒帝如此하니 每念之에 使人心悸러라
允曰 夫史者는 所以記人主善惡하여 爲將來勸戒라 故人主有所畏忌하여 愼其擧措하나니
崔浩孤負聖恩하여 以私欲으로 沒其廉潔하며 愛憎으로 蔽其公直하니 不爲無罪어니와 至於書朝廷起居하고 言國家得失하여는 此爲史之大體니 未爲多違라
臣與浩實同其事
하니 死生榮辱
에 義無獨殊
니 誠荷殿下再造之慈
어니와 違心苟免
은 非臣所願也
니이다하니 太子動容稱歎
注+造, 成也, 謂再使成人.이라
允退謂人曰 我不奉東宮指導者는 恐負翟黑子故也라하다
魏主旣誅浩而悔之
러니 會北部尙書宣城公李孝伯病篤
이어늘 或傳已卒
注+魏北部尚書知北邊州郡.한대 魏主悼之曰 李宣城可惜
이로다하고 旣而曰 朕失言
이라 崔司徒
는 可惜
이요 李宣城
은 可哀
라하다
孝伯은 順從父弟也라 自浩之誅로 軍國謀議皆出孝伯하여 寵眷亞於浩러라
目
宋主欲伐魏할새 丹楊尹徐湛之尙書江湛寧朔將軍王玄謨等이 竝勸之한대 將軍劉康祖以爲歲月已晚하니 請待明年하소서하니
宋主曰 北方苦虜虐政하여 義徒竝起한대 頓兵一周하니 向義之心을 不可沮也라
校尉沈慶之諫曰 我步彼騎
라 其勢不敵
이요 檀道濟再行無功
하고 到彥之失利而返
하니 今料王玄謨等
이 未踰兩將
이요 六軍之盛
이 不過往時
하니 恐重辱王師
注+重, 直用切.하노이다
宋主曰 道濟養寇自資
하고 彥之中塗疾動
注+謂彥之目疾大動也.이라 虜所恃惟馬
니 今夏水浩汗
하여 河道流通
하니 汎舟北下
면 碻磝必走
요 滑臺易拔
이니
克此二城
하여 館穀弔民
하면 虎牢洛陽
이 自然不固
注+館穀, 因其軍之館, 食其軍之穀也. 一說 “館穀就食敵人所積之穀.”리니 比及冬初
에 城守相接
하여 虜馬過河
면 卽成擒也
라
慶之又固陳不可라한대 宋主使湛之等難之하니 慶之曰
治國譬如治家하여 耕當問奴요 織當訪婢어늘 陛下今欲伐國호되 而與白面書生輩謀之하니 事何由濟리오하니
宋主大笑러라 太子劭及將軍蕭思話亦諫호되 皆不從하다
目
建武司馬申元吉이 趣碻磝하니 魏濟靑刺史皆棄城走어늘 蕭斌與沈慶之로 留守碻磝하고 使王玄謨로 進圍滑臺하다
隨王誕
이 遣雍州參軍柳元景將軍尹顯祖曾方平薛安都龐法起
하여 將兵出弘農
注+曾方平, 南史作魯方平.하니
參軍龐季明이 年七十餘라 自以關中豪右로 請入長安招合夷夏어늘 誕許之한대
乃自貲谷入盧氏
하니 盧氏民趙難
이 納之
注+貲谷, 在盧氏縣南山之南. 盧氏縣, 漢屬弘農郡, 晉分屬上洛郡.어늘 季明
이 誘說士民
하니 應者甚衆
이라
安都等因之
하여 自熊耳山出
하고 元景繼進
注+熊耳山, 在盧氏故縣東.하고 南平王鑠
이 遣豫州參軍胡盛之出汝南
하고
梁坦은 出上蔡向長社하고 王陽兒는 擊豫州하니 魏荊豫刺史魯爽僕蘭이 皆棄城走하다 鑠又遣司馬劉康祖하여 助坦進逼虎牢하다
魏群臣이 初聞有宋師하고 言於魏主하여 請遣兵하고 救緣河穀帛한대
魏主曰 馬今未肥
하고 天時尙熱
하니 速出
이면 必無功
이니 若兵來不止
어든 且還陰山避之
라 國人本著羊皮袴
하니 何用綿帛
이리오 展至十月
이면 吾無憂矣
注+火箭 國人, 謂同自北荒來之種人也. 著, 陟略切. 展, 寬也.리라
九月에 魏主引兵南救滑臺하고 命太子晃하여 屯漠南以備柔然하다
目
先是에 玄謨遣垣護之하여 以百舸爲前鋒하여 據石濟러니 護之聞魏兵將至하고 馳書勸玄謨急攻曰
昔에 武皇攻廣固에 死沒甚衆이러니 況今事迫於曩日하니 豈得計士衆傷疲리오 願以屠城爲急하라한대 玄謨不從하다
魏人以所得戰艦으로 連以鐵鎖하여 三重斷河하여 以絶護之還路하니 河水迅急이라 護之中流而下라가 每至鐵鎖에 以長柯斧斷之하니 魏不能禁하여 唯失一舸하고 餘皆完備而返하다
蕭斌遣沈慶之將五千人하여 救玄謨한대 慶之曰 玄謨士衆이 疲老하고 宼虜已逼하니 小軍輕往이 無益也라
斌固遣之
러니 會玄謨遁還
이어늘 斌將斬之
할새 慶之固諫曰 佛貍威震天下
하고 控弦百萬
이니 豈玄謨所能當
이리오 且殺戰將以自弱
은 非良計也
라하니 斌乃止
注+佛音弼. 佛貍, 魏主小字.하다
目
宋略陽太守龐法起等諸軍이 入盧氏하여 斬縣令하고 以趙難爲令하여 使爲鄕導라
柳元景等이 進攻弘農拔之하고 進向潼關이러니 詔以元景爲弘農太守하다
元景使薛安都尹顯祖로 先引兵就法起等於陝하고 元景於後督租러니
陝城險固
라 攻之不拔
한대 魏洛州刺史張是連提 帥衆二萬
하여 度崤救陝
注+張是, 復姓. 連提, 名也. 自洛至陝有三崤之險.이어늘 安都等與戰於城南
이러니
魏人縱突騎하니 諸軍不能敵이라 安都怒하여 脫兜鍪解鎧하고 馬亦去具裝하고 瞋目橫矛하여 單騎突陳하니 所向無前하며 魏人夾射不能中이라
如是數四하니 殺傷不可勝數러라 日暮에 別將魯元保引兵自函谷關至하니 魏兵乃退하다
目
明日에 安都等이 陳於城西南이어늘 曾方平謂安都曰 今勍敵在前하고 堅城在後하니 是吾取死之日이라 卿若不進이면 我當斬卿이요 我若不進이어든 卿斬我也하라하니 安都曰善이라하고
遂合戰
하니 軍副柳元怙引兵自南門鼓譟直出
하여 旌旗甚盛
하니 魏衆驚駭
注+一軍之將, 謂之軍主. 副將, 謂之軍副.라 安都挺身奮擊
하여 流血凝肘
하고 矛折
이어늘 易之更入
하니
諸軍齊奮하여 自旦至日昃하니 魏衆大潰라 斬張是連提及將卒三千餘級하고 其餘赴河塹死者甚衆이요 降者二千餘人이라
明日
에 元景至
하여 讓降者曰 汝輩本中國民
이어늘 今爲虜盡力
하다가 力屈乃降
은 何也
注+爲, 去聲.오하니
皆曰虜驅民使戰하여 後出者滅族하고 以騎蹙步하여 未戰先死하니 此將軍所親見也라
諸將欲盡殺之
어늘 元景曰 王旗北指
에 當令仁聲先路
라하고 盡釋而遣之
하니 皆稱萬歲而去
注+先, 悉薦切, 言當修仁政以爲前導也.러라
遂克陝城
하고 進攻潼關據之
하니 關中豪桀
이 所在蠭起
하고 及四山羌胡 皆來送款
注+關中之地, 四面阻山, 時羌胡皆依山而居, 自爲聚落.이러라
宋以王玄謨敗退魏兵深入하니 柳元景等이 不宜獨進이라하여 皆召還하다 元景使薛安都斷後하고 引兵歸襄陽이어늘 詔以元景爲襄陽太守하다
目
魏主以橐駝名馬로 餉宋主하여 求和請婚한대 宋主亦餉以珍羞異味어늘
魏主以其孫示使者曰 吾遠來至此는 非欲爲功名이라 實欲繼好援이니 宋若能以女妻此孫이면 我以女妻武陵王하고 自今匹馬不復南顧리라
使還에 宋主召群臣議之한대 衆謂宜許어늘 江湛曰 戎狄無親하니 許之無益이니이다
太子劭怒謂湛曰 今三王在阨
하니 詎宜苟執異議
리오 聲色甚厲
注+三王在阨, 謂江夏王義恭․武陵王駿在彭城, 南平王鑠在壽陽也.러라
坐散에 劭又言於宋主曰北伐敗辱하여 數州淪破하니 獨有斬江徐라야 可以謝天下로이다
宋主曰 北伐自是我意니 江徐但不異耳라 由是로 太子與江徐不平이러라 魏亦竟不成婚하다
目
[目] 北魏 사람들이 밤낮으로 懸瓠를 공격하면서 높은 망루를 지어 성을 내려다보며 성안에 화살을 쏘니,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서 성안에서는 문짝을 지고 물을 길었다.
注+① 반쪽 門을 戶라고 하니, 물을 긷는 자가 외짝문을 등지고 날아오는 화살을 막은 것을 말한다.
衝車의 끝에다 큰 갈고리를 설치하여 망루와 성가퀴에 〈갈고리를 걸어〉 끌어당겨 남쪽 성벽을 파괴하니, 陳憲이 안쪽에는 성가퀴를 설치하고 바깥쪽에는 木柵을 세워서 그들을 막았다.
注+② “樓堞”은 성 위의 망루이다. 櫓는 성가퀴이다.
北魏 사람들이 참호를 메우고 몸으로 직접 성을 기어오르자
注+③ 薄은 접근하다는 뜻이다. 사다리와 충차를 쓰지 않고, 제 몸으로 성벽에 다가가 기어올라가는 것이니, 이를 “肉薄登城”이라 한 것이다., 진헌은 장수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힘겹게 싸웠는데, 쌓인 시체가 성의 높이와 비슷해졌다.
北魏 사람들이 시체를 타고 성에 올라 짧은 병기로 서로 맞붙어 싸웠는데, 진헌의 銳氣가 더욱 분발하니 병사들이 한 명당 백 명을 상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죽거나 부상을 당한 北魏 사람이 1만을 헤아렸으며, 성안에도 죽은 사람이 역시 절반이 넘었다.
北魏가 永昌王 拓跋仁을 파견하여 노략질한 6郡의 포로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가서 汝陽에 주둔하였는데
注+④ 拓跋仁은 拓跋健의 아들이다. 生口는 생포한 사람이다. 汝陽縣은 본래 汝南郡에 속하였는데, 江左 때에 분리하여 汝陽郡을 세웠다.,
유준이 100리 안에 있는 말을 징발하여 1,500필을 얻어 5軍으로 나누어 參軍 劉泰之 등을 파견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여양으로 가게 하였다.
北魏 사람들이 오직 구원병이 壽陽에서 올 것이라 생각하고 彭城을 방비하지 않았는데, 유태지 등이 몰래 진군하여 그들을 공격하여 3천여 명을 죽이고 그들의 輜重을 불태우니, 北魏 사람들이 도망하여 흩어졌고 여러 포로들은 모두 동쪽으로 도주하였다.
北魏에서 정탐하여 유태지 등의 군대에게 후속부대가 없음을 알고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니, 士卒들이 놀라 혼란에 빠져 도주하다가 죽고 살아남은 사람이 900여 명이었으며, 말 가운데 돌아온 것이 400필이었다.
魏主가 현호를 42일 동안 공격하였는데, 宋主가 南平內史 臧質과 司馬 劉康祖를
注+⑤ 劉康祖는 劉道錫의 종형이고, 劉道錫은 劉道産의 아우이다. 파견하여 현호를 구원하게 하였다.
魏主가 任城公 拓跋乞地眞을 파견하여 그들을 맞아서 막게 하였는데, 장질 등이 탁발걸지진을 공격하여 목을 베었다.
4월에 魏主가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니, 宋나라가 진헌을 龍驤將軍으로 삼았다.
目
[目] 魏主가 宋主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이전에 蓋吳가 반역하여 關中과 隴西를 선동하였다. 그대가 다시 합오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유인하려 하였는데, 그들이
注+① “是曹”는 대개 蓋吳를 가리킨 것이다. 바로 그대를 속여서 보내준 재물을 취하려고 한 것이지, 어찌 멀리에서 그대에게 복종하는 도리가 있겠는가.
대장부가 되어서 어찌 직접 와서 〈관중․농서 지역을〉 취하지 않고 재물을 가지고 우리 변방의 백성들을 유인하는 것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데, 획득한 땅이 그대와 비교하면 누가 더 많은가.
그대는 또 북쪽으로 蠕蠕을 왕래하고 서쪽으로는 赫連, 沮渠, 吐谷渾과 결탁하고, 동쪽으로는 馮弘, 高句麗와 결탁하였는데, 이들 여러 나라를 모두 내가 멸망시켰으니, 그대가 어찌 홀로 설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북쪽을 정벌하여 발이 있는
注+② 柔然에는 말이 많기 때문에 발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도적을 먼저 제거한 것이고, 그대는 발이 없으므로 먼저 토벌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당당하게 揚州를 빼앗으러 갈 것이니, 그대가 군대를 숨겨서 몰래 보내는 것과는
注+③ 翳는 가린다는 뜻이니, “翳行”은 몸을 가리고 가는 것을 말한다. 같지 않다.
그대는 이전에 裴方明을 시켜서 仇池를 취하게 하였는데, 그곳을 얻고 나자 그의 용기와 공로를 질투하여 자신이 포용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신하가 있었는데도 오히려 그를 죽였으니, 어찌 나와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늘 나와 한 차례 서로 싸우길 원하였지만, 나 역시 어리석지 않고 또
언제 그대와 서로 交戰을 하겠는가. 낮에는 기병을 보내어 포위하고, 밤에는 그대와 100리 떨어진 밖에 묵을 것이니, 吳人(宋나라 사람)이 확실히 밤에 군영을 습격할 기량은
注+④ 伎(재주)는 巨綺의 切이니, 재주라는 뜻이다. 있지만, 50리도 가지 못하여 날이 이미 밝을 것이니, 그들의 머리가 어찌 나의 소유가 되지 않겠는가.
그대 아버지(宋 高祖)
注+⑤ “彼公”은 武帝(劉裕)를 가리킨다. “舊臣”은 謝晦와 檀道濟의 무리를 말한다. 때의 옛 신하들은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오히려 지혜로운 계책을 지니고 있었는데, 지금 이미 그대가 다 죽인 것을 알고 있으니, 하늘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目
[目] 崔浩는 재주와 지략을 자부하였는데, 魏主에게 총애를 받게 되어서는 조정의 권한을 마음대로 통제하여 일찍이 수십 명의 선비를 천거하여 모두가 가문을 일으키고 郡守에 기용되었다.
太子 拓跋晃이 말하기를 “먼저 徵召한 사람들도
注+① “先徵之人”은 游雅․李靈․高允 등을 말한다. 州와 郡에서 선발한 사람들이고, 관직에 재임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노고에 보답이 없으니, 마땅히 먼저 郡과 縣에 보임하고, 새로 징소한 사람들을 대신 郞吏로 삼게 하소서. 또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은 일을 겪어본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최호가 굳게 간쟁하여 그들을 파견하였는데, 中書侍郞 高允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崔公이 죽음을 면하기 어렵겠구나. 진실로 그릇된 일을 끝까지 하면서 윗사람에게 이기고자 하니 장차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魏主가 최호와 고윤 등에게 함께
를 저술하게
注+② 譔(찬술하다)은 撰과 통용된다. 하면서 말하기를 “힘써 사실에 따라 기록하라.”라고 하였다.
著作令史 閔湛과 郗標가 성품이 아첨을 잘하여 최호가 일찍이 ≪周易≫․≪論語≫․≪詩經≫․≪書經≫을 注釋할 때 민담과 치표가 상소를 올려 “馬融․鄭玄․王肅․賈逵의
注+③ “馬鄭王賈”는 馬融․鄭玄․王肅․賈逵를 말한다. 주석은 최호의 정밀한 주석만 못하니, 청컨대 경내에 그들의 모든 책을 수거하고 최호가 주석한 것을 반포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학습하여 家業으로 삼게 하소서.”
注+④ 崔浩가 주석을 한 經書를 익혀 家業으로 삼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호 역시 민담과 치표가 저술하는 일에 재주가 있다고 하여 천거하였다. 민담과 치표가 또 최호에게 그가 저술한 ≪國史≫를 돌에 새겨서 直筆을 빛내라고 권하였는데, 고윤이 이 소식을 듣고 著作郞 宗欽에게 말하기를
“민담과 치표가 꾀한 일이 잠깐 사이에 최씨 가문에 만세의 재앙이 될까 두렵다. 우리들 역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호는 마침내 〈≪國史≫의 내용을〉 돌에 새겨 교단의
注+⑤ ≪水經註≫에 의하면 平城 서쪽 성곽 밖에 郊天壇이 있다. 동쪽 100보 되는 곳에 세웠다. 기록한 北魏 선조의 일이 모두 상세하고 이를 길거리에 나열하니, 〈이를 본〉 北人들
注+⑥ 北人은 그 先代가 拓跋氏를 따라 北荒에서 온 사람들을 말한다. 중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없어 서로 더불어 최호를 참소하여 나라의 잘못된 점을 폭로하였다고 하였다.
魏主가 크게 성을 내어 有司를 시켜서 최호와 秘書省 郞吏 등의 죄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目
[目] 예전에 遼東公 翟黑子가
注+① 翟은 姓이고, 黑子는 이름이다. 使命을 받들고 并州에 가서 베 1천 필을 뇌물로 받았다가 일이 발각되어 高允과 방책을 모의하였는데,
고윤이 말하기를 “공은 궁정에서 총애를 받는 신하이니, 罪狀을 사실대로 자백하면 아마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거듭 임금을 속이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注+② 首는 지은 죄를 스스로 아뢰는 것이다. 原은 용서한다는 뜻이다. 重(거듭)은 直用의 切이다.라고 하였다.
崔覽이
注+③ 覽은 ≪魏書≫ 〈高允列傳〉에 鑑으로 되어 있다. 적흑자에게 말하기를 “사실대로 자백하면 어떤 죄를 받을지 예측할 수 없으니, 은폐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적흑자가 고윤을 원망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람을 꾀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魏主가 그를 죽였다.
魏主가 고윤을 시켜서 太子에게 경전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崔浩가 체포되기에 이르자 태자가 고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卿을 인도할 것이니, 군주께서 묻거든 단지 내 말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태자가 군주를 알현하고 말하기를 “고윤이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인데 또 최호에게 통제를 받았으니, 청컨대 그에게 내린 사형을 사면해주소서.”라고 하였다.
魏主가 묻기를 “≪國書≫는 모두 최호가 쓴 것인가?”라고 하니, 고윤이 대답하기를 “〈太祖記〉는 前 著作郞 鄧淵이 저술하였고, 〈先帝記〉와 〈今記〉는 臣이 최호와 공동으로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호는 관장한 일이 많아 대강을 총괄했을 뿐이며
注+④ “摠裁”는 大綱을 총괄하여 可否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저술은 臣이 최호보다 많이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고윤의 죄가 최호보다 심한데 어찌 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니, 태자가 두려워 말하기를 “천자께서 위엄을 엄중히 하시니 고윤은 小臣이라 정신이 헷갈리고 어지러워 평상심을 잃어 이렇게 대답한 것일 뿐입니다. 臣이 종전에 물어보니 모두가 최호의 소행이라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묻기를 “진실로 東官이 말한 바와 같은가?”라고 하니, 고윤이 대답하기를 “신의 죄는 멸족을 당해야 마땅하거니와 감히 헛되고 망령된 말을 아뢸 수가 없는데, 太子 殿下께서 臣을 애달피 여겨 신의 목숨을 빌어 구해주려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정직하구나, 이는 사람의 情理로 보면 어려운 일인데 고윤이 능히 그렇게 하는구나. 죽음에 임박해서도 말을 바꾸지 않았으니 믿음직하고, 신하가 되어 임금을 속이지 않았으니 바른 것이다. 특별히 그의 죄를 사면하여 표창한다.”
注+⑤ 旌은 특별함을 표창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사면해주었다.
目
[目] 〈魏主가〉 崔浩를 불러와 직접 그를 힐문하니, 최호는 당혹해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였고, 高允은 일마다 분명히 설명하여 모두 조리가 있었다. 魏主가 고윤에게 명령을 내려 최호와 僚屬․僮吏(胥吏) 등 128명을 죽이고 모두 5族을 멸하라는 詔書를 만들게 하였는데, 고윤이 주저하며 조서를 짓지 않았다.
황제가 자주 사람을 보내 재촉하자, 고윤이 말하기를 “최호가 연루된 것이 만약 다시 또 다른 죄가 있는 것이라면 이는 臣이 감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直書한 것으로 죄에 저촉한 것이라면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注+① “餘釁”은 別罪(별도의 죄)라는 말과 같다. “觸犯”은 곧바로 나라의 문제점을 써서 높은 사람을 위해 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성을 내어 武士에게 명을 내려 고윤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태자가 그를 위해 절을 하며 용서해주기를 청하였다. 魏主가 마음이 누그러져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없었으면 응당 다시 수천 명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6월에 조서를 내려 최호를 죽이고 그 종족을 멸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해당하는 사람만 죽였다.
다른 날에 태자가 고윤을 질책하며 말하기를 “내가 卿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주려 하였는데, 경이 끝내 따르지 않아 황제의 분노를 산 것이 이와 같으니, 매번 생각할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라고 하였다.
고윤이 말하기를 “무릇 역사란 人主의 善惡을 기록하여 장래를 위해 권고하거나 경계하는 것이므로, 人主는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게 되어 행동거지를 신중히 하는 법입니다.
최호는 홀로 聖恩을 입어 개인적인 욕망으로 인해 청렴함을 버렸으며 애증으로 인해 공평함과 정직함을 가렸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조정(임금)의 거둥을 기록하고 국가(임금)의 득실을 말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역사의 대체가 되니, 많은 것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臣은 최호와 실제로 그 일을 함께하였으니, 삶과 죽음, 영예와 치욕에는 의리상 별다른 점이 없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다시 살려 주신
注+② 造는 이룬다는 뜻이니, 다시 사람을 이루어주는 것을 말한다. 은혜는 참으로 감사하지만, 마음을 어기고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는 것은 臣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태자가 안색을 바꾸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고윤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궁이 이끌어주는 대로 받들지 않은 것은 翟黑子에게 죄를 지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최호를 죽이고 나서 그 일을 후회하였다. 때마침 北部尙書
注+③ 北魏의 北部尚書는 북쪽 변방의 州郡을 관할하였다. 宣城公 李孝伯이 병으로 위독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전하자 魏主가 애도하며 말하기를 “李宣城은 애석하도다.”라고 하고는, 잠시 후에 말하기를 “짐이 실언을 하였구나. 崔司徒(崔浩)는 애석하고, 李宣城은 애달프구나.”라고 하였다.
이효백은 李順의 사촌동생인데, 최호가 죽은 뒤로는 軍國의 모의가 모두 이효백에게서 나와서 총애가 최호에 버금갔다.
目
[目] 宋主가 北魏를 정벌하고자 하니, 丹楊尹 徐湛之, 尙書 江湛, 寧朔將軍 王玄謨 등이 모두 권하였는데, 將軍 劉康祖가 말하기를 “한 해가 이미 저물어가니, 내년을 기다리소서.”라고 하였다.
宋主가 말하기를 “북방 사람들이 오랑캐의 포악한 정치에 고통을 받아서 의로운 무리들이 나란히 일어나고 있다. 전쟁을 멈춘 지 1년이 되었으니 의리를 향하는 저들의 마음을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校尉 沈慶之가 간언하기를 “우리는 보병이고 저들은 기병이니, 그 형세상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헤아려보건대 王玄謨 등이 두 장수보다 못하고, 六軍의 강성함도 예전보다 낫지 않으니, 王師(제왕의 군사)들이 거듭
注+① 重(거듭)은 直用의 切이다. 치욕을 당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宋主가 말하기를 “
도언지는 중도에 병이 난 것이다.
注+② 〈“彥之中塗疾動”은〉 到彥之에게 눈병이 크게 난 것을 말한 것이다. 오랑캐들이 믿는 것은 오직 말뿐인데, 지금은 여름철이라 물이 풍부하여 水路가 통하니, 배를 띄워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碻磝의 적군들은 반드시 도주할 것이고, 滑臺는 쉽게 함락할 것이다.
이 두 성을 점령하여 적들이 쌓아놓은 곡식을 먹고
注+③ “館穀”은 군대가 머무는 곳을 따라 그 군대의 곡식을 먹는 것이다. 일설에 “‘館穀’은 적들이 쌓아둔 곡식에 나아가서 먹는 것이다.”라 하였다. 백성들을 위로하면 虎牢․洛陽은 자연히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초겨울에 이르면 점령한 성들의 방비가 서로 긴밀해져서 오랑캐의 기병이 黃河를 건너면 즉시 사로잡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심경지가 또다시 불가하다고 굳게 아뢰었는데, 宋主가 서담지 등을 시켜서 그를 논란하게 하였다. 심경지가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집안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서 농사짓는 일은 응당 노복에게 물어야 하며, 베 짜는 일은 응당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데, 폐하께서는 지금 다른 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시면서 白面書生들과 더불어 그 일을 도모하고 있으시니, 일이 어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宋主가 크게 웃었다. 太子 劉劭와 將軍 蕭思話가 역시 간언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目
[目] 建武司馬 申元吉이 〈군사를 이끌고〉 碻磝로 달려가니 北魏 濟州刺史와 靑州刺史가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蕭斌이 沈慶之와 남아서 碻磝를 지키고 왕현모에게 나아가 滑臺를 포위하게 하였다.
隨王 劉誕이 雍州參軍 柳元景, 將軍 尹顯祖, 曾方平
注+① 曾方平은 ≪南史≫ 〈柳元景列傳〉에 魯方平으로 되어 있다., 薛安都, 龐法起를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弘農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參軍 龐季明이 나이가 70여 세였는데, 스스로 關中의 豪族이라고 하면서 長安으로 들어가 오랑캐와 중원 사람을 불러 모으겠다고 청하자, 유탄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마침내 방계명이 貲谷에서 盧氏縣으로 들어가니
注+② 貲谷은 盧氏縣 南山의 남쪽에 있다. 盧氏縣은 漢나라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분리되어 上洛郡에 속하였다., 盧氏縣의 백성 趙難이 그를 받아들여 머물게 하였다. 방계명이 병사들과 백성들을 유도하고 설득하니, 호응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설안도 등이 그로 인해 熊耳山에서
注+③ 熊耳山은 盧氏故縣의 동쪽에 있다. 출병하였고, 유원경이 군사를 이끌고 이어서 진격하였으며, 南平王 劉鑠이 豫州參軍 胡盛之를 파견하여 汝南으로 출동하였고,
梁坦은 上蔡에서 출동하여 長社로 향하였으며, 王陽兒는 豫州를 공격하니, 北魏의 荊州刺史 魯爽과 豫州刺史 僕蘭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유삭이 또 司馬 劉康祖를 파견하여 양탄을 원조하고 진격하여 虎牢를 압박하게 하였다.
北魏의 여러 신하들은 애초에 宋나라가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魏主에게 말을 하여 군사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고 〈군수품으로 사용할〉 黃河 연안의 곡식과 비단을 요청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지금 말은 살이 찌지도 않았고, 날씨가 여전히 더우니, 빨리 나아가면 반드시 공로를 세울 수가 없다. 만약 군사들이 계속해서 몰려오면 우선 陰山으로 돌아가 그들을 피할 것이다. 國人들은 본래 양가죽 바지를 입는데, 어찌 솜과 비단을 쓰겠는가. 10월까지 끌면 나는 염려할 것이 없다.”
注+④ 國人은 〈拓跋氏와〉 함께 北荒에서 온 종족을 말한다. 著(붙다)은 陟略의 切이다. 展은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9월에 魏主가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滑臺를 구원하고 太子 拓跋晃에게 명령하여 漠南에 주둔하여 柔然을 방비하게 하였다.
目
[目] 王玄謨의 군사들이 아주 강성하고 무기가 정교하며 정비되어 있었지만, 왕현모는 탐욕스럽고 괴팍하여 죽이는 것을 좋아하였다. 처음 滑臺를 포위하였을 때에 성안에는 초가집이 많아 군사들이 火箭으로
注+① 杜佑가 말하기를 “작은 표주박에 기름을 담아 화살의 끝에 매달아 성의 樓櫓(지붕이 없는 망루)에 설치된 板木 위에다 발사하면 표주박이 깨지면서 기름이 흩뿌려진다. 뒤이어 화살 안쪽 조릿대 가운데에 불을 붙여 이를 기름이 흩뿌려진 곳으로 쏘아서 불길이 일어나게 하고, 다시 기름이 담긴 표주박을 계속해서 쏘면 樓櫓가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는데, 이를 일러 火箭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것을 태울 것을 요청하였다.
왕현모가 말하기를 “저것은 우리 재산이니, 어찌 급히 태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성안에서는 즉시 초가집을 철거하고 땅을 파서 거처하였다.
당시에 黃河와 洛水의 백성들 중에 다투어 곡식을 내오고 무기를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하루에 천 명을 헤아렸으나, 왕현모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등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에게 이들을 분배하였으며
注+② 即은 나아간다는 뜻이니, 〈“不卽其長帥而以配私暱”은〉 그 우두머리를 취하여 등용해서, 각각 부대를 만들게 하지 않고, 자원한 사람들을 사적으로 친애하는 사람에게 분배한 것을 말한다., 집집마다 한 필의 포를 요구하고, 큰 배 800개를 책임 지우니, 이로 말미암아 民心이 실망하여 성을 공격해도 몇 달 동안이나 함락하지 못했다.
北魏의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이 수레를 징발하여 군영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현모가 따르지 않았다.
10월에 魏主가 밤에 황하를 건너니, 그 무리가 1백만이라 칭하였다. 진군의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자 왕현모가 두려워 후퇴하였는데, 北魏 사람들이 추격하니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고, 휘하의 군사들은 흩어지거나 도망가서 거의 사라졌으며 버리고 간 군수물자와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目
[目] 이에 앞서 王玄謨는 垣護之를 파견하여 100척의 전함을 가지고 선봉에 서게 하여 石濟를 점거하였는데, 원호지는 北魏 군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왕현모에게 급히 공격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옛날 武皇(宋 武帝 劉裕)께서 廣固를 공격하였을 때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사정은 예전보다 급박한데 어찌 군사들이 손상되고 피로해지는 것을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을 도륙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십시오.”라고 하니, 왕현모가 따르지 않았다.
北魏의 군사들은 획득한 전함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세 겹으로 黃河를 차단하여 원호지가 돌아가는 길을 끊어버렸다. 황하의 물살이 빠르고 급하였기에 원호지가 강 가운데서 물살을 타고 내려가다가 쇠사슬을 만날 때마다 자루가 긴 도끼로 그것을 절단하니, 北魏 군사들이 저지하지 못하여 〈원호지가〉 오직 한 척의 배만 잃고 나머지는 모두 온전하게 돌아갔다.
蕭斌이 沈慶之를 파견하여 5천 명을 거느리고서 왕현모를 구하게 하였는데, 심경지가 말하기를 “왕현모의 군사가 피로하고 적들은 이미 가까이 다다랐으니 적은 군대로 경솔히 가는 것은 무익합니다.” 하였다.
소빈이 억지로 그를 보내고자 하였는데, 마침 왕현모가 도망쳐 돌아오자 소빈이 왕현모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심경지가 굳게 간언하기를 “佛貍(拓拔燾)의
注+① 佛(돕다)는 음이 弼이니, 佛貍는 魏主 拓拔燾의 어릴 때 字이다. 위엄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활을 당길 수 있는 병사가 백 만 명인데, 왕현모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투를 잘하는 장수를 죽여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소빈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目
[目] 宋나라의 略陽太守 龐法起 등 여러 군대가 盧氏縣에 들어가서 縣令을 참수하고 趙難을 현령으로 삼아 鄕導가 되게 하였다.
柳元景 등이 나아가 弘農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潼關으로 진격하니, 조서를 내려 유원경을 弘農太守로 삼았다.
유원경이 薛安都와 尹顯祖를 시켜서 먼저 병력을 이끌고 陝城에 있는 방법기 등에게 가도록 하고, 유원경은 후방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陝城이 험준하고 견고하여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北魏 洛州刺史 張是連提가 군사 2만 명을 인솔하여 崤山을 넘어 陝城을 구원하자
注+① 張是는 復姓이고, 連提는 이름이다. 洛水에서 陝城에 이르기까지 三崤의 험한 지형이 있다., 설안도 등이 이들과 성의 남쪽에서 싸웠다.
北魏 사람들이 돌격기병을 보내니 여러 군대들이 대적하지 못하였다. 설안도가 성을 내어 투구와 갑옷을 벗고 말에도 馬甲을 떼어버리고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든 채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진하자 가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없었으며, 北魏 사람들이 양쪽에서 활을 쏘아도 맞출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네 차례를 하니,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해가 저물어 別將 魯元保가 군사를 이끌고 函谷關에서 도착하니, 北魏 군대가 그제야 물러갔다.
目
[目] 다음 날에 薛安都 등이 성의 서남쪽에 陣을 쳤는데, 曾方平이 설안도에게 말하기를 “지금 강한 적들이 앞에 있고 견고한 성이 뒤에 있으니, 이는 우리가 죽을 날이다. 경이 만약 진격하지 않는다면 내가 응당 경의 목을 벨 것이고, 내가 만약 진격하지 않는다면 경이 나의 목을 베라.”라고 하니, 설안도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교전을 하였는데, 軍副
注+① 一軍의 장수를 軍主라 하고, 副將을 軍副라고 한다. 柳元怙가 군사를 이끌고 남문에서부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곧바로 나가서 旌旗가 대단히 성대하니 北魏 군사들이 크게 놀랐다. 설안도가 앞장서서 나아가 분전하여 흐르는 피가 팔꿈치에 고이고 창이 부러지자 바꾸어서 다시 진격하였다.
그러자 여러 군사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아침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싸우니, 北魏 군대가 크게 궤멸되었다. 張是連提와 장졸 3천여 명의 수급을 베었고, 그 남은 자 중에 강이나 해자에 빠져 죽은 이가 아주 많았으며, 투항한 자들이 2천여 명이었다.
다음 날 유원경이 도착하여 투항한 자들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본래 중국의 백성들인데 지금 오랑캐들을 위하여
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힘을 다해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자 마침내 투항한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오랑캐가 백성들을 내몰아서 싸우게 하면서 뒤에 나오는 사람은 一族을 없애고, 기병으로 보병을 몰아세워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죽게 하니, 이는 장군이 직접 목격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諸將들이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자 하니, 유원경이 말하기를 “王師의 깃발이 북쪽을 향해 가고 있으니, 응당 인자하다는 소문이 앞서 퍼져나가도록 해야 한다.”
注+③ 先(앞장서다)은 悉薦의 切이니, 〈“當令仁聲先路”는〉 마땅히 어진 정치를 닦아 앞장서서 인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여 전부 풀어주어 보내니,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돌아갔다.
드디어 陝城을 함락하고 潼關으로 진격하여 점거하니, 關中의 호걸이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고, 사방의 산에 살던 羌族과 胡族이
注+④ 關中 지역은 사방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당시에 羌族과 胡族이 모두 산에 의지하여 거처하며 스스로 취락을 형성하였다. 모두 와서 충성을 표하였다.
宋나라는 王玄謨가 패퇴하고 北魏 군대가 깊숙이 들어오자, 유원경 등이 홀로 진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모두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유원경이 설안도를 시켜서 후방을 차단하게 하고 군대를 이끌고 襄陽으로 돌아오자, 조서를 내려 유원경을 襄陽太守로 삼았다.
目
[目] 北魏 永昌王 拓跋仁이 懸瓠와 項城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宋主는 北魏 군대가 壽陽에 이를까 두려워 劉康祖를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탁발인이 8만 기병을 거느리고서 추격하여 유강조를 尉武에서
注+① 尉武는 정자의 이름으로, 壽陽과의 거리가 겨우 수십 리이다. 따라잡았다.
유강조에게는 8천의 병력이 있었는데, 軍副 胡盛之가 험한 산악 지형을 의지하여 샛길로 행군하여 〈壽陽에〉 도달하고자 하니
注+② “取至”는 壽陽에 도달함을 말한 것이다., 유강조가 성을 내며 말하기를 “黃河에 임하여 적을 찾아 싸우려 해도 마침내 적을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그들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어찌 피하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수레를 연결한 진영을 만들어 진격하면서 군중에 명을 내려 말하기를 “뒤돌아보는 자는 목을 벨 것이며, 발걸음을 돌리는 자는 발을 자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北魏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아침부터 晡時(오후 3~5시)까지 北魏 병사 1만여 명을 죽이니, 흐르는 피가 복사뼈까지
注+③ 踝(복사뼈)는 戶瓦의 切이니, 정강이의 양쪽을 안팎 복사뼈라고 한다. 잠겼고, 유강조는 몸에 열 군데의 창상을 입었으나 의기는 더욱 맹렬하였다.
北魏는 무리를 나누어 셋으로 만들어 한편으로는 쉬고 한편으로는 전투를 치르게 하였다. 때마침 날이 저물고 갑자기 바람이 불자 北魏는 기병들을 시켜서 풀을 짊어져다가 수레를 연결한 宋나라의 진영을 불태우게 하니, 유강조가 수시로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였다. 그러다가 날아온 화살이 유강조의 목을 관통하여 말에서 떨어져 죽자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궤멸되니, 北魏 사람들이 엄습하여 거의 모두를 죽였다.
南平王 劉鑠이 參軍 王羅漢을 시켜서 300명으로 尉武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北魏 군대가 도착하자 무리들은 남쪽으로 작은 나무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왕나한은 명령을 받고서 이곳에 머무르며 떠나지 않았다.
북위 사람들이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아 쇠사슬로 목을 묶고
을
注+④ 三郎將은 內三郞을 주관하니, 北魏에서는 衛士를 三郞將이라고 하였다. 시켜서 잡고 있게 하였는데, 왕나한이 밤중에 삼랑장의 목을 베고 쇠사슬을 안은 채 盱眙(우이)로 도망쳤다.
탁발인이 진군하여 壽陽을 압박하였는데, 남평왕 유삭이 성곽을 둘러싸고 굳게 지켰다.
目
[目] 魏主가 彭城에 이르러 尙書 李孝伯을 시켜서 남문에 이르게 하여 劉義恭에게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보내고, 劉駿에게는 낙타와 노새를 보내고서 또 말하기를 “魏主께서 安北將軍에게
注+① 위의 元嘉 25년(448)에 宋나라가 劉駿을 安北將軍 徐州刺史로 삼았다. 안부를 물으셨으니, 잠시 나와서 저를 보시지요.”라고 하였다.
유준이 張暢을 시켜서 성문을 열고 나가서 그를 만나보게 하였다. 이효백이 말하기를 “魏主께서 이 성을 포위하지 않고 친히 대군을 인솔하여 곧바로 瓜步로 가서
注+② 造는 이른다는 뜻이다. 瓜步는 산 이름으로, 秦郡 尉氏縣 경계에 있다. 長江과 太湖의 물을 마시고 갈증을 면하려고 하실 뿐이다.”라고 하니,
장창이 말하기를 “떠나고 머무르는 일은 너희 마음대로 하면 되지만 만약 오랑캐의 말이 마침내 장강의 물을 마시게 되면 天道가 회복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童謠에 이르기를 “오랑캐의 말이 長江의 물을 마시면 佛貍(太武帝)가 卯年에 죽는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장창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장창은 목소리와 용모가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이효백 역시 언변이 넉넉했다.
떠나는 길에 이효백이 장창에게 말하기를 “長史(장창)는 깊이 스스로를 아끼라. 지금 서로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데도
注+③ 발을 들어서 가는 것을 步라고 하고, 발자취를 武라고 하니, 〈“步武”는〉 아주 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손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하였다.
왕창이 말하기를 “君도 스스로를 잘 아끼라. 천하가 평정될 날에 君이 宋나라 조정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니, 〈그렇게 되면〉 지금이 서로 알고 지낸 것의 시작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目] 예전에 盱眙太守 沈璞이
注+① 沈璞은 沈林子의 아들이다. 임지에 부임하였을 때 王玄謨는 아직 滑臺에 있어서 江淮 사람들이 경계함이 없었다. 그러나 심박은 盱眙郡이 요충지에 해당한다고 여겨 마침내 성을 보수하고 해자를 깊게 팠으며, 재물과 곡식을 비축하고 화살과 돌을 저장해놓고서 성을 지킬 대비를 하니, 속료들이 모두 그 일을 비난하고 조정에서도 역시 지나치다고 생각하였다.
北魏 군대가 南下하기에 이르자, 守宰들이 대부분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어떤 사람이 심박에게 建康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자, 심박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약 성이 작다고 여겨 돌아보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으며, 만약 적들이 다가와서 공격해오면 이는 마침내 내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고, 諸君이 제후에 책봉될 때이니, 어찌 이곳을 떠나겠는가. 제군은 적군 수십만이 작은 성 아래에 모여 있다가 패배하지 않은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昆陽과 合肥의 옛일이 명확한 증거이다.”
注+② 王尋과 王邑은 백만의 군사로 昆陽에서 패배하였고, 諸葛恪은 20만의 군사로 合肥에서 패배하였다.라고 하니, 무리들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심박은 군사를 모아 2천 명의 정예 군사를 얻고서 “이걸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臧質이 〈패한 뒤에〉 성을 향해 오자 군사들이 심박에게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일 성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많은 병사를 부릴 것이 없겠지만, 만약 그들이 성을 공격하면 성안에는 단지 현재의 병력만을
注+③ “見力”은 현재 성곽 안에 소유한 병력을 말한다.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니, 땅은 좁고 사람들은 많으면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만약 장질의 무리가 적을 물리치고 성을 온전히 지켜낸다면 모든 공로는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만약 적을 피하여 都城으로 돌아가고자 배와 노를 모은다면 반드시 〈사람들이 도망가고자〉 서로를 짓밟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근심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니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심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랑캐는 반드시 성곽을 오르지 못할 것이니, 감히 제군을 위하여 보장하겠다. 배를 타고 돌아갈 계책은 진실로 이미 오래 전에 막혀버렸고, 오랑캐의 잔학함은 고금에 아직까지 없었으며, 죽임을 당하거나 겁탈당하는 고난은 그대들이 함께 본 것이니, 그 가운데 다행스러운 것은 사람들을 북쪽 나라로 데리고 돌아가서 노비로 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장질의 군사들이 비록 오합지졸이지만 어찌 이를 두렵게 여기지 않겠는가. 이른바 배를 함께 타고 건널 때에는 胡族과 越族이 한마음이라고 하였다.
注+④ 王弼이 말하기를 “배를 함께 타고 건너는 경우에는 배 안의 胡族과 越族이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 군사들의 수가 많으면 오랑캐들이 빨리 물러갈 것이며, 수가 적으면 천천히 물러갈 것이니, 내가 어찌 공로를 독점하고자 하여 오랑캐를 머무르게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문을 열고 장질을 받아들였다.
장질이 성안에 물자가 충실한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이로 인해 심박과 함께 성을 지켰다.
北魏 사람들이 남쪽을 침략했을 때 군량과 군수품을 가지고 오지 않고 노략질한 것을 밑천으로 삼았는데, 淮水를 지나면서는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버렸으므로 노략질을 해도 얻은 것이 없어서 사람과 말이 굶주리고 盱眙에 쌓아놓은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북쪽으로 돌아가는 밑천으로 삼고자 하여 성을 공격했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즉시 수천 명을 남겨 盱眙를 지키도록 하고는 〈魏主가〉 스스로 대군을 인솔하고 남쪽으로 갔다. 이로 말미암아 盱眙의 수비가 더욱 완비되었다.
目
[目] 魏主가 낙타와 名馬를 宋主에게 보내어 화친을 구하고 혼인을 요청하자, 宋主 역시 진수성찬과 진기한 음식을 보냈다.
魏主가 그의 손자를 使者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내가 멀리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功名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 계속하여 우호관계를 맺고자 해서이다. 宋나라가 만약 딸을 내 손자에게 시집보내면 나도 딸을 武陵王에게 시집보낼 것이고, 지금부터 한 필의 말도 다시는 남쪽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오자 宋主가 군신들을 불러 그 일을 의논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마땅히 허락해야 한다고 말하자, 江湛이 말하기를 “戎狄은 친하게 대함이 없고 〈이익만을 탐하니,〉 이를 허락하여도 유익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太子 劉劭가 화를 내며 강담에게 말하기를 “지금 세 王이 험한 곳에 있는데
注+① “三王在阨”은 江夏王 劉義恭과 武陵王 劉駿이 彭城에 있고, 南平王 劉鑠이 壽陽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어찌 구차하게 다른 의견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는데 목소리와 안색이 아주 엄중하였다.
자리가 파하자, 유소가 또 宋主에게 말하기를 “북벌이 실패하고 치욕을 당하여 여러 州가 함락되고 파괴되었으니, 오직 江湛과 徐湛之의 목을 베어야만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宋主가 말하기를 “북벌은 내 뜻에서 나온 것이니, 강담과 서담지는 다만 다른 이견이 없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태자는 강담․서담지와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北魏 역시 결국에는 혼인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