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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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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永明十年이요 魏太和十六年이라
魏主始祀明堂하다
魏主宗祀顯祖於明堂하여 以配上帝하고 遂登靈臺以觀雲物하며 降居靑陽左个하여 布政事하고 自是毎朔行之注+明堂四面旁室曰个. 左右爲个, 以其於太廟左右也. 記月令 “孟春, 天子居靑陽左个, 仲春, 居靑陽太廟, 季春, 居靑陽右个.” 注 “皆所以順時氣也. 靑陽左个, 在太寢東堂北偏.”하다
魏主命群臣議行次注+行次, 五行之次也.할새 高閭議하여 以爲帝王莫不以中原正統이요 不以世數爲與奪 善惡爲是非하나니
晉承魏爲金이요 趙承晉爲水이요 燕承趙爲木이요 秦承燕爲火 秦之旣亡 魏乃稱制注+趙, 前趙劉曜. 後趙石勒. 燕, 慕容儁. 秦, 苻堅.하고 且魏得姓 出於軒轅하니 臣愚以爲宜爲土德注+按魏書帝紀 “道武天興元年, 群臣奏國家承黃帝之後, 宜爲土德.” 高閭蓋申前議耳.이로이다
李彪等 以爲神元與晉武往來通好하여 至于桓穆한대 志輔晉室하니 是則司馬祚終而拓跋受命注+神元․桓穆, 皆魏之先祖也. 魏主珪卽帝位, 追諡始祖, 力微曰神元, 皇帝猗㐌曰桓帝, 猗盧曰穆帝.이니이다
昔秦併天下한대 漢猶比之共工하고 卒繼周爲火德注+漢律曆志曰 “祭典曰 ‘共工氏霸九域.’ 言雖有水德, 在火木之間, 非其序也. 任智刑以彊, 故霸而不王. 秦以水德, 在周漢木火之間. 周人遷其行序, 故易不載.”하니 況劉石苻氏 地褊世促이라 豈可捨晉而爲土邪 穆亮等皆附其議하니 乃詔爲水德하여 祖申臘辰注+王者, 各以其行, 盛日爲祖, 墓日爲臘. 魏, 水德王, 水生於申, 墓在辰, 故以申祖辰臘.하다
魏罷하다
◯魏詔䟽屬異姓王公遞降一等하다
魏宗室及功臣子孫封王者衆이라 詔自非烈祖之胄어든 餘王皆降爲公하고 公降爲侯하고 而品如舊이라하여 唯上黨王長孫觀 以其祖有大功이라하여 特不降注+觀, 道生之孫也.하다
丹楊王劉昶 封齊郡公하고 號宋王하다
魏主初朝日于東郊하다
自是朝日夕月皆親之하다
魏修堯舜禹周公孔子之祀하다
祀堯於平陽 舜於廣寗 禹於安邑 周公於洛陽하여 皆令牧守執事注+皆因其故都而祀之. 皇甫謐曰 “舜所都或言蒲阪, 或言潘. 潘, 今上谷也. 廣寧縣本屬上谷.” 又據水經註, 潘當作瀵.하다 其宣尼之廟 祀於中書省하고 改諡曰文聖尼父라하고 親行拜祭注+父, 音甫.하다
夏四月 魏班新律하다
嶷性仁謹廉儉하여 不事財賄러니 齋庫失火하여 燒荆州還資어늘 評直三千餘萬이로되 杖主局數十而已注+齋庫, 齋內之庫. 齊太祖建元二年, 嶷自荊州還爲揚州. 評直, 論量其所宜也.러라
疾篤 遺令諸子曰 才有優劣이요 位有通塞이요 運有貧富하니 此自然之理 無足以相陵侮也注+蓋欲諸子不以位勢相陵.니라 及卒 第庫無見錢이라 勅月給錢百萬하고 諡曰文獻注+見, 賢遍切.이라하다
齊以竟陵王子良爲揚州刺史하다
◑秋七月 吐谷渾遣子入朝于魏하다
魏主召吐谷渾王伏連籌入朝한대 不至어늘 而修洮陽泥和二戍하고 置兵焉注+伏連籌, 度易侯之子也. 後周武帝逐吐谷渾, 置洮陽郡, 唐洮州及臨潭縣所治, 卽洮陽城也. 泥和, 卽水經註所謂迷和城, 洮水逕其南, 又在洮陽城東.이러니 魏遣兵伐之하고 拔二戍하다
及馮后之喪 使人告哀한대 伏連籌拜命又不恭이라 群臣請討之어늘 魏主不許하고
又請還其貢物이어늘 魏主曰 貢物乃人臣之禮 今而不受 是棄絶之 彼雖欲自新이나 其路無由矣라하고 因命歸洮陽泥和之俘하니라
於是吐谷渾遣其世子賀虜頭入朝于魏하다
魏遣使如齊하다
魏散騎常侍宋弁聘于齊러니 及還 魏主問江南何如 弁曰 蕭氏父子無大功於天下어늘 旣以逆取 不能順守하여 政令苛碎하며 賦役繁重하고 朝無股肱之臣하며 野有愁怨之民하니 其得沒身幸矣 非貽厥孫謀之道也니이다
八月 魏敗柔然于大磧하니 柔然殺伏名敦可汗注+初, 柔然伏名敦可汗與其叔父那蓋分道擊高車阿伏至羅, 伏名敦屢敗, 那蓋屢勝. 國人以那蓋爲得天助, 乃殺伏名敦而立那蓋, 號候其伏代庫者可汗.하다
◑魏主養老于明堂하다
魏司徒尉元 大鴻臚卿游明根 累表請老한대 魏主引見하여 賜元玄冠素衣하고 明根委貌靑紗單衣而遣之러니
至是親養老於明堂할새 以元爲三老하고 明根爲五更하다 魏主再拜三老하고 親袒割牲하여 執爵而饋하며 肅拜五更하고 且乞言焉하니 元明根 勸以孝友化民注+肅拜, 直身肅容, 而微下手. 乞言, 從之求善言也.하다
又養國老庶老於階下하고 祿三老以上公하고 五更以元卿注+記王制篇疏云 “國老, 卿․大夫․士之老者, 庶老, 庶人在官之老者.” 唐禮樂志 “所司奏五品以上致仕者爲國老, 六品以下致仕者爲庶老.” 元卿, 卽上卿.하다
九月 魏主謁永固陵하다
魏主以太后再朞 哭於永固陵左어늘 終日不輟聲하고 凡二日不食이러라
齊遣使如魏하다
魏主甚重齊人하여 親與談論하고 顧謂群臣曰 江南多好臣이로다하니 侍臣李元凱對曰 江南多好臣하니 歳一易主하고 江北無好臣하니 百年一易主니이다 魏主甚慙이러라
齊詔太子家令沈約撰宋書하다
約撰宋書할새 疑立袁粲傳한대 齊主曰 袁粲自是宋室忠臣이니라 約又多載宋世祖太宗諸鄙瀆事한대 上曰 孝武事迹不容頓爾 我昔經事明帝하니 卿可思諱惡之義니라 於是多所刪除注+春秋之義, 爲尊者諱.러라
魏南陽公鄭羲卒하다
羲嘗爲西兗州刺史하여 在州貪鄙하니 及卒 尙書奏謚曰宣이라한대 詔以羲雖有文業이나 而治闕廉淸하니 可諡文靈注+諡法, 博聞多見曰文. 不勤成名曰靈.이라하다


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 소이蕭頤 영명永明 10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16년이다.
[] 봄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처음으로 명당明堂에 제사를 지냈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명당明堂에서 현조顯祖(탁발홍拓跋弘)를 종사宗祀하여 상제上帝에 배향하였고, 마침내 영대靈臺에 올라 구름을 관찰하였으며, 내려와 청양좌개靑陽左个注+① 明堂 4면의 곁방을 个라고 한다. ≪禮記≫ 〈月令〉에 “孟春에는 天子가 靑陽左个에 머무르고, 仲春에는 靑陽太廟에 머무르고, 季春에는 靑陽右个에 머무른다.” 하고, 注에 “모두 四時 기운에 따르는 것이다. 靑陽左个는 太寢 東堂의 북쪽 편에 있다.” 하였다. 머물러 정사를 베풀었고, 이로부터 매달 초하루마다 제사를 거행하였다.
[] 북위北魏오행五行의 차례를 정해 수덕水德으로 삼았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오행五行의 순서를注+① “行次”는 五行의 순서이다. 논의할 때에, 고려高閭가 논의하여 말하기를 “제왕帝王들 가운데 중원中原정통正統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고, 세대의 수를 가지고 주거나 빼앗지 않았으며, 선악을 가지고 시비是非를 삼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나라를 계승하여 금덕金德이 되었고, 나라(전조前趙후조後趙)가 나라를 계승하여 수덕水德이 되었고, 나라(전연前燕)가 나라를 계승하여 목덕木德이 되었고, 나라(전진前秦)가 나라를 계승하여 화덕火德이 되었습니다.注+② 趙는 前趙 劉曜와 後趙 石勒이다. 燕은 慕容儁이다. 秦은 苻堅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나자 북위北魏가 마침내 칭제稱制를 하고, 또 북위北魏을 얻은 것이 헌원軒轅에서 나왔으니, 신이 토덕土德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注+③ 살펴보건대 ≪魏書≫ 〈帝紀〉에 “道武帝 天興 원년(398)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國家가 黃帝의 뒤를 계승하였으니 마땅히 土德을 해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高閭는 이전의 의논을 되풀이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표李彪 등이 말하기를 “신원황제神元皇帝 무제武帝가 왕래하며 우호를 통하여 환제桓帝목제穆帝에 이르렀는데注+④ 神元․桓穆은 모두 北魏의 先祖이다. 魏主 拓跋珪가 즉위하고 추후 始祖로 시호를 올리고, 拓跋力微를 神元이라고 하고, 皇帝 拓跋猗㐌를 桓帝라고 하고, 拓跋猗盧를 穆帝라고 하였다. 나라의 왕실을 돕는 데 뜻을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마씨司馬氏의 국운이 끝나자 탁발씨拓跋氏가 천명을 받은 것입니다.
옛날에 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였는데, 나라는 〈나라를〉 오히려 공공共工에게 비견하고 끝내 나라를 이어서 화덕火德으로 삼았습니다.注+⑤ ≪漢書≫ 〈律曆志〉에 “≪祭典≫에 ‘共工氏는 九州의 霸者가 되었다.’ 하였으니, 비록 共工氏가 水德이 있었으나 火德과 木德의 사이에 있으므로 그 순서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모략과 형벌에 의지하여 강대해졌기 때문에 霸者라고 한 것이고 王者라고 하지 못한 것이니, 秦나라가 水德으로 周나라와 漢나라의 木德과 火德의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周나라 사람들이 共工氏의 行次를 없앴으므로 ≪易≫에서는 〈炮羲氏와 神農氏 사이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하물며 유씨劉氏(전조前趙)․석씨石氏(전진前秦)․부씨苻氏(후조後趙)는 땅이 좁고 세대도 짧았습니다. 어찌 나라를 버리고 토덕土德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목량 등이 모두 그 의견에 동의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수덕水德으로 삼아 〈연초年初의 첫 번째〉 신일申日에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연말年末의 마지막〉 진일辰日납제臘祭를 지냈다.注+⑥ 왕이 된 자는 각각 五行으로 盛日에는 祖(길의 신) 제사를 지내고, 墓日에는 臘 제사(뭇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낸다. 北魏는 水德으로 王 노릇 한 것이니, 水는 申에서 생겨나고 辰에서 墓(水의 운행이 쇠하는 것)가 되므로 申日에 祖 제사를 지내고 辰日에 臘 제사를 지낸다.
[] 북위北魏조과租課(부세賦稅)를 폐지하였다.
[]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소원한 친속親屬이성異姓왕공王公들은 작위爵位를 등급에 따라 1등급씩 강등시켰다.
[] 북위北魏 종실宗室공신功臣자손子孫 가운데 왕으로 책봉된 사람이 많았다. 위주魏主(탁발굉)가 조서를 내리기를 “열조烈祖(도무제道武帝)의 후손이 아닌 나머지 들은 모두 강등하여 으로 삼고, 은 강등하여 로 삼고 품급品級은 옛날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오직 상당왕上黨王 장손관長孫觀注+① 長孫觀은 長孫道生의 손자이다. 그의 조상의 큰 공이 있다 하여 특별히 강등되지 않았다.
단양왕丹楊王 유창劉昶제군공齊郡公에 봉하고 송왕宋王이라고 호칭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처음으로 동교東郊에서 조일朝日의 제사를 행하였다.
[] 이로부터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조일朝日석월夕月의 제사를 모두 직접 거행하였다.
[] 북위北魏주공周公공자孔子의 제사를 지냈다.
[] 북위北魏평양平陽에서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광녕廣寗에서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안읍安邑에서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낙양洛陽에서 주공周公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 모두 해당 주목州牧수령守令에게 의식을 주관하게 하였다.注+① 모두 그들의 옛 도읍에 인하여 제사를 지낸 것이다. 皇甫謐이 말하기를 “舜임금이 도읍한 곳이 혹은 蒲阪이라고 말하고, 혹은 潘이라고 말한다. 潘은 지금 上谷이다. 廣寧縣은 본래 上谷에 속하였다.” 하였다. 또 ≪水經註≫에 의거하면, 潘은 마땅히 瀵이 되어야 한다. 선니宣尼(공자孔子)의 사당은 중서성中書省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시호를 고쳐서 문성이보文聖尼父라고注+② 父(남자의 미칭)는 음이 甫이다. 하고,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직접 가서 제사를 올렸다.
[] 여름 4월에 북위北魏가 새로운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 나라 대사마大司馬 태부太傅 예장왕豫章王 소억蕭嶷하였다.
[] 소억蕭嶷은 성품이 인자하고 근면하며 청렴하고 검소하여 재물이나 뇌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재내齋內의 창고에서 불이 나서 형주荆州에서 가지고 돌아온 물건을 불탔는데, 가치를 평가하니 3,000여만 이나 되었으나注+① 齋庫는 齋內의 창고이다. 齊나라 太祖 建元 2년(480)에 蕭嶷이 荊州에서 돌아와 揚州刺史가 되었다. “評直”는 그 마땅함을 논하여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주관하는 관리에게는 을 수십 대를 치는데 그쳤다.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아들에게 유언으로 명하기를 “재주에는 우열優劣이 있고, 지위에는 통색通塞이 있고, 운수에는 빈부貧富가 있다. 이는 자연自然의 이치이니, 서로 능멸하고 모욕할 것이 없다.”注+② 이는 여러 아들에게 지위와 세력으로 서로 능멸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함에 미쳐서는 소억의 집 창고에 현금이 없었다.注+③ 見(현재)은 賢遍의 切이다.제주齊主가〉 조칙을 내려서 매월 백만 을 주도록 하고, 시호를 문헌文獻이라고 하였다.
[] 나라가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토욕혼吐谷渾이 아들을 보내 북위北魏에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 예전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토욕혼왕吐谷渾王 모용복련주慕容伏連籌를 불러 들어와 조회를 하라고 하자 오지 않고서 조양성洮陽城이화성泥和城을 수리하고 군사를 배치하였다.注+① 慕容伏連籌는 慕容度易侯의 아들이다. 後周(北周) 武帝가 吐谷渾을 내쫓아 洮陽郡에 두었고, 唐나라 洮州 및 臨潭縣의 治所가 바로 洮陽城이다. 泥和는 곧 ≪水經註≫에 말한 迷和城이니, 洮水가 그 남쪽을 지나고, 또 洮陽城의 동쪽에 있다. 북위北魏는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고 두 보루를 함락하였다.
풍후馮后이 났을 때에 북위北魏에서 사람을 보내 토욕혼吐谷渾에게 상사喪事를 알리자 모용복련주가 명령을 받들면서 또다시 공손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그를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위주魏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신하들이 토욕혼의 공물貢物을 돌려주기를 청하자,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공물은 곧 신하의 이니, 지금 받지 않으면 이는 그들을 버리고 단절하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조양성․니화성의 포로를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토욕혼이 세자世子 모용하로두慕容賀虜頭를 파견하여 북위北魏에 들어와 조회하였다.
[] 북위北魏가 사신을 나라에 보냈다.
[] 북위北魏산기상시散騎常侍 송변宋弁나라에 빙문聘問을 갔는데, 본국으로 돌아온 뒤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묻기를 “강남江南은 어떠한가?”라고 하니, 송변宋弁이 말하기를 “소씨蕭氏 부자父子천하天下에 큰 공적이 없었는데, 이미 반역을 하여 탈취하고는 순리대로 지키지 못하여 정령政令이 가혹하고 번잡하며, 부역賦役은 번거롭고 무거우며, 조정에는 고굉股肱의 신하가 없고, 들에는 근심하고 원망하는 백성이 있습니다. 온전히 죽을 수 있으면 다행이니, 그 자손들에게 계책을 남겨주는 방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 8월에 북위北魏유연柔然대적大磧(대막大漠)에서 격파하니 유연이 복명돈가한伏名敦可汗을 죽였다.注+① 예전에 柔然이 伏名敦可汗(郁久閭豆崙侖)이 그 숙부 郁久閭那蓋와 길을 나누어 高車의 阿伏至羅를 공격하였는데, 복명돈가한은 자주 패하고, 욱구려나개는 자주 승리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욱구려나개가 하늘의 도움을 얻었다고 하여, 마침내 복명돈가한을 죽이고 욱구려나개를 세우고서 候其伏代庫者可汗이라고 호칭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명당明堂에서 양로례養老禮를 거행하였다.
[] 북위北魏 사도司徒 울원尉元대홍려경大鴻臚卿 유명근游明根이 누차 표문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인견引見하여 울원에게 현관玄冠소의素衣를 내려주고, 유명근에게는 위모관委貌冠청사단의靑紗單衣를 보냈다.
이때에 이르러 위주魏主가 친히 명당明堂에서 양로례養老禮를 할 때 울원을 삼로三老로 삼고, 유명근을 오경五更으로 삼았다. 위주魏主삼로三老에게 두 번 절하고, 직접 웃옷의 왼쪽 소매를 걷고 희생을 베어서 술잔을 잡고 올렸으며 오경五更에게 숙배肅拜하였고, 또 선언善言을 말해주기를 청하니, 울원․유명근이 효도와 우애로 백성을 교화할 것을 권하였다.
또 계단 아래에서 국로國老서로庶老에게注+① “肅拜”는 몸을 곧게 펴고 엄숙한 모양을 하고서 손을 조금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乞言”은 그에게 善言을 구하는 것이다. 양로례를 행하였고, 삼로三老에게 상공上公의 녹봉을 주었으며, 오경五更에게 원경元卿의 녹봉을 주었다.注+② ≪禮記≫ 〈王制篇〉 疏에, “國老는 卿․大夫․士 중에 연로한 자이고, 庶老는 관직에 있는 庶人 중 연로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新唐書≫ 〈禮樂志〉에 “有司가 아뢰어 5品 이상으로 사직한 자를 國老로 삼았고, 6品 이하로 사직한 자를 庶老로 삼았다.” 하였다. 元卿은 곧 上卿이다.
[] 9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영고릉永固陵을 배알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는 문명태후文明太后(풍태후馮太后)의 재기再朞(대상大祥)가 되었으므로, 영고릉永固陵 왼편에서 을 하였는데, 종일토록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2일 동안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 겨울에 나라가 사신을 북위北魏에 보냈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나라 사람(사신使臣)을 매우 소중하게 여겨서 친히 함께 담론을 하고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강남江南에는 좋은 신하가 많구나.”라고 하니, 시신侍臣 이원개李元凱가 대답하기를 “강남江南에는 좋은 신하가 많으니 1년에 한 번씩 임금을 바꾸고, 강북江北에는 좋은 신하가 없으니, 백 년에 한 번씩 임금을 바꿉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 나라가 조서를 내려 태자가령太子家令 심약沈約에게 ≪송서宋書≫를 찬술하도록 하였다.
[] 심약沈約이 ≪송서宋書≫를 찬술할 때에 〈원찬전袁粲傳〉을 편성할지 의심하였는데,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말하기를 “원찬은 이제부터 나라의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였다. 심약이 또 나라의 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태종太宗(명제明帝)의 여러 가지 비천하고 황음荒淫한 일을 많이 기록하자, 제주齊主가 말하기를 “효무제의 사적이 이처럼 버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나는 예전에 명제를 섬겼으니, 은 잘못을 숨겨주는 의리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注+① ≪春秋≫의 대의는 높은 자를 위하여 숨겨준다.라고 하니, 이에 산제刪除한 것이 많았다.
[] 북위北魏 남양공南陽公 정희鄭羲하였다.
[] 정희鄭羲는 일찍이 서연주자사西兗州刺史가 되어서 에 있을 때에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하였다. 하게 되자 상서尙書시호諡號이라 해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조서를 내려 “정희가 비록 문학文學에 업적을 세웠지만 다스릴 적에 청렴결백하지 않았으니, 시호諡號문령文靈이라고注+① 諡法에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文이라 한다. 훌륭한 이름을 남기는 데 힘쓰지 않는 것을 靈이라 한다.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明堂……때문이다 : ‘明堂四面旁室曰个’는 ≪禮記正義≫ 〈月令〉 鄭玄의 注에 ‘四面旁室謂之个’라 하였고, ‘左右爲个’는 ≪禮記註疏≫ 〈月令〉 考證에 ‘明堂四面各三室 其中為堂 其左右為个’라고 하였다. 訓義에서는 같기 다른 설의 내용을 같이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2 (个)[介] : 저본에는 ‘个’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介’로 바로잡았다.
역주3 魏定行次爲水德 : “五德의 운행은 秦 始皇이 창도하여 행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1번 기록했는데, 이때에 비로소 다시 北魏를 기록하였으니, 秦나라와 北魏 모두 水德이다. 이를 제외하고는 기록한 것이 없다.[五德之運 秦始倡行之 綱目嘗一書矣 於是始復書魏 皆水德也 舍是無書者矣]” ≪書法≫“魏主(拓跋宏)가 文治를 일으켜서 그 풍속을 변화시킨 것은 진실로 가상히 여길 만하나 반드시 五德의 운수를 정한 것은 역시 지나치다. 기록한 것은 아름답게 여긴 것이 아니라 역시 나무란 것이다.[魏主興文治以變其俗 固可嘉尙 至於必定五德之運 則亦過矣 書非美之 亦譏之耳]” ≪發明≫
역주4 租課 : ≪資治通鑑≫ 註에는 李延壽 ≪北史≫ 〈魏紀〉에 ‘袒裸’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백성들이 옷을 벗는 풍습을 금지시킨 것이다. ≪魏書≫ 考證에는 ≪北史≫의 ‘袒裸’는 의심하면서 拓跋氏의 언어를 잘못 음역한 것일 수 있다고 보았다.
역주5 齊大司馬太傅豫章王嶷卒 : “宗臣에게 관직을 갖추어 卒이라고 한 것은 齊王 司馬攸 이후 듣지 못했는데(晉 武帝 太康 4년(283)) 이때에 다시 보이니, 蕭嶷을 현명하게 여긴 것이다.[宗臣具官卒 自齊王攸後無聞焉(晉武帝太康四年) 於是復見 賢嶷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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