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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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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皇帝隆安元年이라
燕永康二 秦皇初四 魏皇始이라 ◯ 南涼王秃髪烏孤太初元年이라 ◯ 北涼王段業神璽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小國二 新小國二 凡七僭國이라
春正月 帝冠하다
◑ 以王珣爲尙書令하고 王國寶爲左僕射하다
◑ 魏拓跋儀 軍潰하니 慕容德 追擊破之하다
賀訥 遣弟賴盧하여 帥騎二萬하고 會東平公儀하여 攻鄴할새 自以王舅라하여 不受儀節度하고 儀司馬丁建 陰與燕通하여 從而間之러라
賴盧營 失火어늘 建曰 賴盧燒營爲變矣라한대 儀遂引退하니 賴盧亦退
帥衆降燕하고 且言儀師老可擊이라한대 范陽王德 遣兵追擊하여 大破之하다
魏王珪 擊信都하여 降之하다
◑ 涼王光 擊西秦하니 西秦與戰하여 殺其弟延하다
涼王光 以西秦主乾歸 數反覆이라하여 擧兵伐之注+① 西秦主, 通鑑作西秦王. 反覆, 謂旣稱藩而悔之也. 武帝太元二十年, 光伐西秦, 乾歸稱藩於光, 以子敕勃爲質, 光引兵還, 乾歸悔之.하니 西秦群臣 請東奔成紀注+② 成紀縣, 自漢以來, 屬天水郡, 治小坑川.어늘
乾歸曰 軍之勝敗 在於巧拙이요 不在衆寡 兵衆而無法하고 弟延 勇而無謀하니 不足憚也 且其精兵 盡在延所하니 延死 自走矣리이다
軍長最하여 遣子太原公纂하여 攻金城하고 天水公延 攻臨洮, 武始, 河關하여 皆克之注+① 長最, 地名, 在西河郡. 臨洮縣, 漢屬隴西郡, 惠帝分屬狄道郡. 武始郡, 故狄道縣地. 河關縣, 前漢屬金城郡, 後漢屬隴西郡, 晉屬狄道郡.하다
乾歸使人紿延曰 乾歸衆潰하여 奔成紀矣라하니 欲引輕騎追之어늘
司馬耿稚諫曰 乾歸 勇略過人하니 安肯望風自潰리오 且告者視高色動하니 殆必有姦이라 宜整陳而前하여 使歩騎相屬하여 俟諸軍畢進然後擊之 無不克矣리이다
不從하고 進與乾歸遇하여 戰死하니 引兵還姑臧하다
秃髪烏孤 自稱西平王하고 攻涼하여 取金城하다
是爲南涼이라
二月 燕主寶 襲擊魏軍이라가 大敗奔還하다
燕主寶 聞魏王珪攻信都하고 悉出珍寶及宮人하여 募群盜以擊之할새 營於滹沱水北하니 魏軍至하여 營水南이러니
寶潛師夜濟하여 襲魏營하여 因風縱火하니 魏軍大亂이라
珪棄營走러니 旣而 燕兵 無故自相斫射하니 珪望見之하고 乃擊鼓收衆하여 多布火炬於營外하여 縱兵衝之하니 燕兵 大敗引還이라
魏兵 隨而擊之하니 燕兵屢敗 寶懼하여 棄軍하고 以二萬騎奔還하니 時大風雪하여 凍死者相枕이라 朝臣將卒 多降於魏러라
先是 張袞 常爲珪言 燕秘書監崔逞之材러니 珪得之하고 甚喜하여 以爲尙書하여 任以政事하다
珪欲撫慰新附하여 甚悔參合之誅러니 幷州刺史素延 坐討反者殺戮過多하여 免官하다
燕尙書郞慕輿皓 謀弑寶立趙王麟이라가 不克奔魏하니 由是不安이러라
三月 하니 慕容麟 作亂出走하다 魏王珪進圍中山한대 燕主寶 奔會軍하니 慕容詳 城守拒魏하다
燕清河王會 表求赴難이로되 而無行意하여 遣將軍庫傉官偉餘崇하여 將兵五千하여 爲前鋒注+① 傉, 奴沃切. 庫傉官, 虜三字姓, 偉, 名也.하니 偉頓盧龍近百日 會不發注+② 遼東新昌縣, 有盧龍山, 唐爲平州盧龍縣. 慕容令所謂守肥如之險, 卽其地也. 此遼東新昌, 後人置於漢遼西郡界, 非漢久郡縣地也.하다
燕主寶怒하여 切責之한대 會不得已하여 以治行簡練爲名하고 復留月餘러라
偉使輕軍으로 前行通道하고 且張聲勢注+① 張, 如字.하니 諸將 皆畏避不欲行이어늘
餘崇 奮曰 今巨寇滔天하여 京都危逼注+② 京都, 謂中山.하니 匹夫 猶思致命以救君父어든 諸君 荷國寵任而更惜生乎 若社稷傾覆하여 臣節不立이면 死有餘辱이니 諸君 安居於此하라 崇請當之호리라
偉給歩騎五百人하니 崇至漁陽하여 遇魏兵擊却之한대 衆心稍振이라
會乃上道하여 至是 始逹薊城하다
魏圍中山旣久 城中將士 皆思出戰이어늘
高陽王隆曰 渉珪雖獲小利 然頓兵經年하여 士馬死傷 大半하니 人心思歸하고 諸部離解注+① 謂賀蘭․紇隣․紇奚三部.
若因我之銳하여 乘彼之衰 往無不克이라 如持重不決하여 將卒氣喪하여 事久變生이면 雖欲用之 不可得也리이다
寶然之로되 而趙王麟 每沮其議하여 成列而罷者 數四 衆大忿恨이러라
以兵刼北地王精하여 使帥禁兵弑寶注+① 精, 垂之從弟也.한대 以義拒之어늘 麟怒하여 殺精하고 出奔西山하여 依丁零餘衆하니 於是 城中震駭注+② 中山西北二百里, 有狼山, 自狼山而西, 南連常山, 山谷深險. 漢末, 黑山張燕, 五代孫方簡兄弟, 皆依阻其地. 丁零餘衆, 翟眞之黨也. 爲燕所敗, 退聚西山. 西山, 曲陽之西山也.
寶恐麟奪會軍하고 據龍城하여 乃召隆及遼西王農하여 謀走保龍城할새 隆曰
今欲北遷 亦事之宜 然龍川 地狹民貧注+③ 龍川, 卽謂和龍之地.하니 若以中國之意 取足其中이면 難望有功이니
若節用愛民하며 務農訓兵이면 數年之中 公私充實이요
而趙魏之間 厭苦冦暴하여 民思燕德하니 庶幾返斾하면 克復故業이요 如其未能인댄 則憑險自固 猶足以優游養銳耳니이다
寶然之하여 遂夜與太子策及隆, 農等萬餘騎 出赴會軍하니 城中無主 百姓惶惑이러라
魏王珪 欲夜入城이러니 將軍王建 志在虜掠하여 乃言恐士卒盜府庫物하니 請俟明旦이라한대 珪乃止하다
燕開封公詳 從寶不及하니 城中 立以爲主하여 閉門拒守注+① 詳, 靑之弟也.
珪盡衆攻之호되 不拔하고 使人臨城諭之하니 皆曰 群小無知 恐復如參合之衆이라 苟延旬月之命耳니이다
珪顧王建而唾其面注+② 建旣鼓成參合之誅, 又沮止珪乘夜入中山, 失計者再. 故唾其面.하다
尊皇太后李氏爲太皇太后하고 立皇后王氏하다
◑ 魏兵 追燕主寶어늘 慕容會撃郤之하다 夏四月 寶至龍城하니 會作亂不克하여 奔中山이라가 伏誅하다
燕主寶出中山하니 清河王會 帥騎卒二萬하여 迎于薊南이어늘
寶怪會有恨色注+① 恨不得爲嗣也.하여 減其兵하여 分給遼西王農 及高陽王隆하고 盡徙薊中府庫하여 北趣龍城하니 魏石河頭 引兵追之하여 及寶於夏謙澤注+② 石, 姓也. 河頭, 其名. 時屯漁陽. 夏謙澤, 在薊北二百餘里.이러니
會整陳與戰하니 農隆等 將南來騎衝之한대 魏軍大敗 追奔百餘里하다
謂陽璆曰 中山 積兵數萬하되 不得展吾意하니 今日之捷 令人遺恨이라하고 因慷慨流涕러라
會旣敗魏兵 矜狠滋甚이어늘 屢訓責之한대 會益忿怒하여 遂謀作亂이러니
寶謂農隆曰 觀道通志趣컨대 必反無疑하니 宜早除之注+① 道通, 會字.하라
農隆曰 會遠赴國難하고 逆狀未彰이어늘 而遽殺之하면 豈徒傷父子之恩이리오 亦恐大損威望이니이다
會聞之하고 益懼하여 夜遣其黨하여 襲殺隆於帳下하니 農被重創하다
寶欲討會하여 乃陽爲好言以安之하고 明日 召群臣食할새 會就坐어늘 寶目慕輿騰斬會한대 傷首不死
走赴其軍하여 勒兵攻寶한대 寶帥數百騎하고 馳至龍城하다
會引兵頓城下하니 城中將士 皆憤怒하여 出戰大破之하고 侍御郞高雲 復夜襲之注+① 寶之爲太子, 雲以武藝給事, 侍東宮, 拜侍御郞.하니 會衆潰하여 奔中山한대 慕容詳 殺之하다
寶以雲爲將軍하여 養以爲子하니 高句麗之支屬也注+② 燕王皝破高句麗, 徙於靑山. 由是世爲燕臣.
王國寶, 王緒 依附會稽王道子하여 納賄窮奢하여 不知紀極이라 惡王恭, 殷仲堪하여 勸道子하여 裁損其兵權注+① 惡, 烏路切.하다
恭等 繕甲勒兵하여 表請北伐이러니 道子疑之하여 詔以盛夏妨農이라하여 悉使解嚴注+② 解嚴, 謂解散兵嚴也.하다
遣使하여 與仲堪謀하여 討國寶等하고 桓玄 亦以仕不得志 欲假仲堪兵勢以作亂하여 乃說仲堪曰
國寶與君 惟患相斃之不速耳 今旣執大權하니 無不如志 若發詔徴君이면 何以處之
仲堪曰 計將安出 玄曰 孝伯 疾惡深至注+① 孝伯, 王恭字.하니 宜潛與之約하여 興晉陽之甲하여 以除君側之惡注+② 春秋公羊傳曰 “趙鞅興晉陽之甲, 以除君側之惡.”이니 玄雖不肖 願帥荆楚豪傑하여 荷戈先驅하노니 此桓文之勳也니라
仲堪 然之하여 乃外結雍州刺史郗恢하고 内與從兄南蠻校尉覬 南郡相江績謀之注+③ 恢, 曇之子也. 南蠻府, 南郡相與荊州刺史府, 同治江陵.한대
覬曰 人臣 當各守職分이니 朝廷是非 豈藩屏所制也리오 晉陽之事 不敢預聞이로라 亦極言其不可하다
覬恐績及禍하여 和解之한대 績曰 大丈夫 何至以死相脅邪 江仲元 行年六十이니 但未獲死所耳注+① 仲元, 績字.로라
仲堪 憚其堅正하여 以楊佺期代之하니 朝廷 聞之하고 徵績爲御史中丞하다
覬遂以疾辭位어늘 仲堪 往省之하고 曰 兄病 殊可憂로이다 曰 我疾 不過身死어니와 汝病 乃當滅門이니 宜深自愛하여 勿以我爲念하라
郗恢亦不肯從하니 仲堪 疑未決이러니 恭使至하니 仲堪 乃許之한대
大喜하여 上表罪狀國寶하고 擧兵討之하니 表至 内外戒嚴이러라
國寶懼하여 不知所爲하여 遣數百人戍竹里러니 夜遇風雨散歸注+① 胡三省曰 “竹里, 今建康府竹篠鎭, 是其地, 在行宮城東北三十許里.”
緒說國寶하여 殺王珣車㣧하여 以除時望하고 挾君相以討二藩한대 國寶許之러니
珣㣧 不敢害하고 更問計於珣한대 珣曰 王殷 與卿素無深怨하니 所競 不過勢利之間耳니라
國寶曰 將曹爽我乎注+② 謂珣如蔣濟說曹爽釋權, 而司馬懿終族之也. 珣曰 是何言歟 寧有爽之罪 孝伯 豈宣帝之儔邪
又問計於車㣧한대 㣧曰 今朝廷 遣軍 恭必城守 若京口未拔하고 上流奄至 何以待之 國寶遂上疏하여 解職待罪하다
道子闇懦하여 欲求姑息하여 乃賜國寶死하고 斬緒於市하고 遣使謝恭하니 恭乃罷兵하고 還京口하다
仲堪 初猶豫不敢下러니 聞國寶死하고 始抗表擧兵이어늘 道子以書止之하니 仲堪 乃還하다
元顯 年十六 有儁材하여 爲侍中이러니 說會稽王道子호되 以王殷 終必爲患이니 請潛爲之備한대
道子乃拜元顯征虜將軍하고 以其衛府及徐州文武 悉配之하다
涼沮渠蒙遜하여 拔臨松하고 據金山하다
張掖盧水胡沮渠羅仇 匈奴沮渠王之後也注+① 盧水胡, 分居安定․張掖, 史各以其所居郡繫之. 沮, 子余切. 世爲部帥하니 涼王光 以爲尙書러니
及呂延敗死 羅仇弟三河太守麴粥 謂羅仇曰注+② 呂光得涼州, 自號三河王. 此郡, 蓋光置也. 賢曰 “三河, 謂金城河․賜支河․湟河. 此郡, 當置於漢張掖․金城郡界.” 粥, 音育. 主上 荒耄信讒하고 今軍敗將死하니 正其猜忌智勇之時也注+③ 將, 卽亮切. 吾兄弟必不見容이니 不若勒兵向西平하고 出苕藋하여 奮臂一呼 涼州 不足定也注+④ 河西張氏, 置西平郡. 苕, 音條. 藋, 音掉. 苕藋, 地名. 在漢張掖郡番禾縣界.리이다
羅仇曰 吾家世以忠孝 著於西土하니 寧使人負我언정 我不忍負人也로라
已而 果殺羅仇及麴粥하다
羅仇弟子蒙遜 雄傑有策略하고 渉書史러니 以其喪歸葬할새 會者 萬餘人이라
蒙遜 哭謂衆曰 呂王 無道하여 多殺不辜하니 今欲與諸部 雪二父之恥하고 復上世之業하노니 何如 衆稱萬歲
遂結盟起兵하여 攻涼臨松郡하여 拔之하고 屯據金山注+① 臨松郡, 張天錫置. 五代史志 “張掖刪丹縣, 有金山.”하다
燕慕容詳 稱帝於中山하다
中山 城無定主하니 民恐魏兵乘之하여 男女結盟하여 人自爲戰이러니 魏王珪 罷圍하고 就穀河間하고 封東平公儀爲衛王하다
慕容詳 自謂能郤魏兵하니 威德已振이라하여 遂卽帝位하다
涼段業하여 自稱建康公하니 沮渠蒙遜 以衆歸之하다
涼王光 遣呂纂하여 將兵擊沮渠蒙遜하여 破之하다
蒙遜從兄男成 亦合衆攻建康하고 遣使하여 說太守段業曰 呂氏政衰 人無容處하여 瓦解之形 昭然在目하니 府君 柰何以蓋世之才 欲立忠於垂亡之國 男成等 旣唱大義하고 欲屈府君하여 撫臨鄙州하니 何如
許之하니 男成 推業爲涼州牧建康公한대 以男成爲輔國將軍하여 委以軍國之任하다 蒙遜 帥衆歸之어늘 以爲鎭西將軍하다
命呂纂討之러니 不克하니 是爲北涼이라
嗜酒奢淫하여 刑殺無度하니 群下離心하고 城中飢窘이라
麟襲殺之하고 自立以拒魏러니 魏軍大疫하여 人畜多死하니 將士皆思歸
魏王珪問疫於諸將한대 對曰 在者纔什四五니이다
珪曰 此固天命이니 將若之何 四海之民 皆可爲國이니 在吾所以御之耳 何患無民이리오 群臣 乃不敢言하다
八月 涼郭黁楊軌叛하다
涼太郭黁 善天文하니 國人信之注+① 黁, 奴昆切.러니
熒惑 守東井하니 謂僕射王詳曰 涼分野 有大兵注+② 分, 扶問切.하리니 吾欲與公同擧大事하노니 何如 從之러니
事泄被誅하니 遂據東苑以叛注+③ 涼州, 治姑臧, 有東․西苑城.하다
涼王光 召太原公纂하여 討之러니 將還 諸將曰 段業 必躡軍後리니 宜潛師夜發이니이다
纂曰 業無雄才하여 憑城自守하니 若潛師夜去 適足張其氣勢耳注+① 張, 知亮切.라하고
乃遣使告業曰 郭黁作亂이라 吾今還都注+② 都, 謂姑臧.하니 卿能決者어든 可早出戰하라
於是引還하니 業不敢出이러라
纂司馬楊統 欲殺纂而推其從兄桓爲主러니
怒曰 吾爲呂氏臣하여 安享其祿하고 危不能救하니 豈可復增其難乎 呂氏若亡이면 吾爲弘演矣리라 統遂降黁注+① 呂氏春秋 “衛懿公有臣, 曰弘演, 有所於使, 翟人攻衛, 其民曰 ‘君之所與位祿者, 鶴也, 所貴者, 宮人也, 君使宮人與鶴戰. 余焉能戰.’ 遂潰而去, 翟人至, 及懿公於熒澤, 殺之, 盡食其肉, 獨捨其肝. 弘演至, 報使於肝畢, 呼天而啼, 盡哀而止曰 ‘臣請爲襮.’ 因自殺, 先出其腹實, 內懿公之肝.” 襮, 伯各切, 表也. 納公之肝於其腹中. 故曰臣請爲襮. 桓女配纂, 其見親, 異於他臣, 故云然.하다
擊黁大破之하고 乃得入姑臧하니 涼人張捷等 招集戎夏하여 據休屠城하여 與黁으로 共推涼後將軍楊軌하여 爲盟主注+② 休屠, 漢屬武威郡, 因休屠王城, 以爲名也. 晉省縣. 水經註 “姑臧城西, 有馬城․東城, 卽休屠縣故城也.”하다
九月 注+① 蛇, 以者․食遮二切, 又音他, 虜姓也.하다
秦太后卒하니 秦主興 哀毁過禮하여 不親庶政이러라
群臣 請依漢魏故事하여 旣葬卽吉한대 尙書郞李嵩 上疏曰 孝治天下 先王之高事也 宜遵聖性하여 以光道訓이니 旣葬之後 素服臨朝하소서
尹緯駁曰 嵩 矯常越禮하니 請付有司論罪하노이다 興曰 嵩 忠臣孝子 有何罪乎 其如嵩議하라
勤於政事하며 延納善言하니 杜瑾等 以論事得顯拔하고 姜龕等 以儒學見尊禮하고 古成詵等 以文章參機密注+① 古成, 複姓. 詵, 名也.하다
剛介雅正하여 以風教爲己任이러니 京兆韋高 慕阮籍爲人하여 居母喪 弹琴飲酒어늘 聞之而泣하고 持劍欲殺之하니 高懼而逃匿하다
冦陷湖陝하다
中山 飢甚이라 魏王珪進攻之하니 太史令鼂崇曰 不吉이라 紂以甲子亡하니 謂之疾日注+① 左傳 “辰在子․卯, 謂之疾日.” 註 “疾, 惡也. 紂以甲子喪, 桀以乙卯亡, 故以爲忌日.”이니이다
珪曰 紂以甲子亡이나 周武不以甲子興乎아하고 遂進하여 與慕容麟으로 戰於義臺하여 大破之注+② 據李延壽北史, 義臺塢名. 魏收地形志 “新市縣, 有義臺城.”하니 奔鄴이어늘
魏克中山하고 得燕璽綬圖書府庫珍寶以萬數하여 班賞將士하다
至鄴하여 復稱趙王하고 說范陽王德曰 魏將乘勝攻鄴하리니 城大難固하고 且人心恇懼하니 不可守也
不如南趣滑臺하여 阻河以待魏하여 伺釁而動이면 河北 庶可復也리이다
魯王和 鎭滑臺러니 亦遣使迎德하니 許之하다


【綱】 晉나라(東晉) 孝安皇帝 隆安 원년이다.
【目】 燕主(後燕) 慕容寶 永康 2년이고, 秦主(後秦) 姚興 皇初 4년이고,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皇始 2년이다. 南涼王 秃髪烏孤 太初 원년이다. 北涼王 段業 神璽 원년이다.
옛날에 있던 큰 나라(後燕, 後秦, 北魏)가 셋이고 西秦과 涼나라(後涼) 등 작은 나라가 둘이고, 새로 생긴 작은 나라(南涼, 北涼)가 둘이니, 합하여 僭國이 일곱이다.
【綱】 봄 정월에 황제(晉 安帝)가 관례를 하였다.
【綱】 〈晉나라(東晉)는〉 王珣을 尙書令으로 삼고, 王國寶를 左僕射로 삼았다.
【綱】 魏나라(北魏) 拓跋儀의 군대가 궤멸하니, 〈燕나라(後燕)〉 慕容德이 추격하여 깨트렸다.
【目】 賀訥이 아우 賀賴盧를 보내어 기병 2만을 거느리고 東平公 拓跋儀를 만나 燕나라의 鄴城을 공격할 적에 자신이 왕(拓跋珪)의 외숙이라 하여 탁발의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며, 탁발의의 司馬인 丁建이 은밀히 연나라와 내통하여 뒤따라 이간질하였다.
이때 마침 하뇌로의 진영에 불이 나자, 정건이 말하기를 “하뇌로가 진영에 불을 놓아 변란을 일으켰다.”라고 하니, 탁발의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자 하뇌로 또한 후퇴하였다.
정건이 군대를 거느리고 연나라에 항복하고 또 탁발의의 군대가 지쳐 있어 공격할 만하다고 말하자, 范陽王 慕容德이 군대를 보내어 추격해서 탁발의를 크게 깨트렸다.
【綱】 魏王 拓跋珪가 〈燕나라(後燕)의〉 信都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綱】 涼王(後涼) 呂光이 西秦을 공격하니, 서진이 그와 싸워서 여광의 아우 呂延을 죽였다.
【目】 涼王 呂光은 西秦主 乞伏乾歸가 자주 번복한다고 하여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니,注+① 西秦主는 ≪資治通鑑≫에는 西秦王으로 되어 있다. ‘反覆’은 이미 藩臣을 칭했다가 후회함을 이른다. 晉 孝武帝 太元 20년(395)에 呂光이 西秦을 공격하자 乞伏乾歸가 여광에게 번신을 칭하고 아들 乞伏敕勃을 인질로 삼았는데, 여광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자 걸복건귀가 이를 후회하였다. 西秦의 신하들이 동쪽에 있는 成紀로 달아날 것을 청하였다.注+② 成紀縣은 漢나라 이래로 天水郡에 속하였으니, 小坑川을 치소로 하였다.
걸복건귀는 말하기를 “군대의 승패는 군대를 잘 운용하느냐 잘못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병력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여광은 군대가 많으나 기강이 없고 아우 呂延은 용맹하기만 하고 지모가 없으니,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또 그들의 정예병이 모두 여연의 처소에 있으니, 여연이 죽으면 여광은 스스로 도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呂光이 長最에 군대를 주둔하고서 아들 太原公 呂纂을 보내어 金城을 공격하고 天水公 呂延은 臨洮와 武始, 河關을 공격하여 모두 점령하였다.注+① 長最는 지명이니, 西河郡에 있었다. 臨洮縣은 漢나라 때에는 隴西郡에 속하였고, 西晉의 惠帝 때에 나누어 狄道郡에 소속시켰다. 武始郡은 옛날 狄道縣의 땅이다. 河關縣은 前漢 때에는 金城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隴西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狄道郡에 소속하였다.
乞伏乾歸가 사람을 시켜서 여연을 속이기를 “걸복건귀의 무리가 궤멸하여 成紀로 달아났다.”라고 하니, 여연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려고 하자,
司馬 耿稚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걸복건귀는 용맹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그가 어찌 우리의 위세를 멀리서 바라보고 스스로 궤멸하겠습니까. 또 이 말을 고하는 자의 시선이 높고 얼굴빛이 동요하니, 아마도 반드시 간사한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진영을 정돈하고 전진하여 보병과 기병이 서로 연결되어서 여러 군대가 모두 전진하기를 기다린 뒤에 공격하면 승리하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연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진군하여 걸복건귀와 만나서 싸우다가 죽으니, 여광이 군대를 이끌고 姑臧으로 돌아갔다.
【綱】 秃髪烏孤가 스스로 西平王을 칭하고 涼나라(後涼)를 공격하여 金城을 점령하였다.
【目】 이를 南涼이라 한다.
【綱】 2월에 燕主(後燕) 慕容寶가 魏나라(北魏) 군대를 습격하였다가 크게 패하고 달아나 돌아갔다.
【目】 燕主 慕容寶는 魏王 拓跋珪가 信都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진귀한 보물과 궁녀들을 모두 내어 여러 도적들을 모집해서 魏나라를 공격하였다. 滹沱水 북쪽에 진영을 세우니, 위나라 군대가 도착하여 호타수 남쪽에 진영을 쳤다.
모용보가 은밀히 군대를 출동하여 밤중에 물을 건너 위나라 진영을 기습해서 바람을 따라 불을 지르니, 위나라 군대가 크게 혼란하였다.
탁발규가 진영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얼마 안 되어 연나라 군중에서 이유 없이 자기들끼리 칼로 베고 활을 쏘아 죽이니, 탁발규가 이것을 바라보고는 마침내 북을 치고 무리를 수습하여 횃불을 진영 밖에 많이 진열하고서 군대를 풀어놓아 충돌하니, 연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이끌고 돌아갔다.
위나라 군대가 뒤따라가서 공격하니, 연나라 군대가 여러 번 패하였다. 모용보가 두려워하여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아나 中山으로 돌아가니, 이때 크게 바람이 불며 눈이 내려서 얼어 죽은 자가 서로 이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將卒들이 대부분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目】 이보다 앞서 張袞이 일찍이 拓跋珪에게 燕나라(後燕) 祕書監 崔逞의 재능을 칭찬하였는데, 탁발규는 최영을 얻고는 매우 기뻐해서 그를 尙書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탁발규는 새로 귀부한 자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고자 하면서 마음속으로 매우 후회하였는데, 幷州刺史 素延이 배반한 자들을 토벌하면서 너무 많이 살육한 죄에 걸려서 파면되었다.
燕나라 尙書郞 慕輿皓가 慕容寶를 시해하고 趙王 慕容麟을 세울 것을 모의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魏나라(北魏)로 달아나니, 모용린이 이 때문에 불안해하였다.
【綱】 3월에 燕나라(後燕) 幽平牧 慕容會가 군대를 이끌고 薊州에 이르니, 慕容麟이 난을 일으키고 달아났다. 魏王(北魏) 拓跋珪가 나아가 中山을 포위하자, 燕主 慕容寶가 모용회의 군대로 달아나니, 慕容詳이 성을 지키면서 魏나라에 항거하였다.
【目】 처음에 燕나라 清河王 慕容會가 표문을 올려서 國難에 달려가기를 청하였으나, 갈 뜻이 없어서 장군 庫傉官偉와 餘崇을 보내어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니,注+① 傉은 奴沃의 切이다. 庫傉官은 오랑캐의 세 글자의 姓이고 偉는 이름이다. 고녹관위는 盧龍에 주둔한 지 100일이 다되도록 모용회가 출발하지 못하였다.注+② 遼東의 新昌縣에 盧龍山이 있으니, 唐나라 때에는 平州 盧龍縣이라 하였다. 이 遼東의 新昌은 후인들이 漢나라 遼西郡 경계에 설치한 것이요, 한나라 때 오래전부터 있던 군현의 지역은 아니다.
燕主 慕容寶가 노하여 크게 꾸짖자, 모용회는 마지못해 행장을 꾸리고 병사를 훈련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한 달이 넘도록 머물렀다.
【目】 庫傉官偉가 경무장한 군대로 하여금 앞서 가서 길을 통하고 또 聲勢를 과장하게 하였는데,注+① 張(벌리다)은 본음대로 읽는다.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피하여 가려고 하지 않았다.
餘崇이 분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큰 도적이 하늘에 가득하여 京都(中山)가 위태롭고 핍박받으니,注+② 京都는 中山을 이른다. 필부도 오히려 목숨을 바쳐서 君父를 구원할 것을 생각하는데, 제군들은 나라의 은총과 직임을 받고서도 다시 목숨을 아까워하는가. 만약 사직이 기울고 전복되어서 신하의 절개가 확립되지 못하면 죽어도 남은 치욕이 있을 것이니, 제군들은 여기에 편안히 있으라. 나는 가서 맞서겠다.”
고녹관위가 보병과 기병 500명을 주었다. 여숭이 漁陽에 이르러 魏나라(北魏) 군대를 만나 공격하여 물리치니,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진작되었다.
慕容會가 마침내 길에 올라 이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薊城에 도달하였다.
【目】 魏나라(北魏)가 中山을 포위한 지 오래되었다. 성안의 장병들이 모두 나가 싸울 것을 생각하였는데,
高陽王 慕容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渉珪(拓跋珪)가 비록 작은 이익을 얻었으나 주둔한 지 1년이 넘어서 죽고 부상한 군사와 말이 태반이니, 병사들이 마음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여러 部가 이산되어 흩어졌습니다.注+① 〈여러 部는〉 賀蘭, 紇隣, 紇奚의 세 部를 이른다.
만약 우리 군대의 정예로움을 이용하여 저들의 쇠퇴한 틈을 타면 쳐들어가서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신중함을 견지하며 결전하지 않아서 장병들의 사기가 저상되고 일이 오래되어 변란이 생기면 비록 장병들을 쓰고자 하나 될 수 없을 것입니다.”
慕容寶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趙王 慕容麟이 매번 그의 의논을 저지하였다. 모용륭이 대열을 갖추었다가 해산하기를 서너 번하니, 무리가 크게 분노하고 원망하였다.
【目】 慕容麟이 군대를 가지고 北地王 慕容精을 위협해서 그로 하여금 禁軍을 거느리고 慕容寶를 시해하게 하자,注+① 慕容精은 慕容垂의 從弟이다. 모용정은 의리로 거절하였다. 모용린이 노하여 모용정을 죽이고 西山으로 달아나 丁零의 남은 무리에게 의지하니, 이에 성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注+② 中山 서북쪽 200리 지점에 狼山이 있으니, 낭산으로부터 서쪽으로 가면 남쪽의 常山과 연결되는데 산골짜기가 깊고 험하다. 漢나라 말기 黑山의 張燕과 五代時代 孫方簡의 형제가 모두 이 지역을 의지하였다. ‘丁零餘衆(丁零의 남은 무리)’은 翟眞의 무리이니, 燕나라(後燕)에게 패하고서 후퇴하여 西山에 모여 있었다. 西山은 曲陽의 西山이다.
모용보는 모용린이 慕容會의 군대를 빼앗아 龍城을 점거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모용륭과 遼西王 慕容農을 불러 용성으로 달려가 지킬 것을 모의하였는데, 모용륭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북쪽으로 옮겨가려는 것이 또한 사세에 마땅합니다. 그러나 龍川은 지역이 협소하고 백성들이 가난하니,注+③ 龍川은 바로 和龍 지역을 이른다. 만약 中國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서 용천 안에서 만족을 취하려고 한다면 功이 있기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만약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농업에 힘쓰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면 수년 안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재정이 충실해지고 부유해질 것입니다.
趙와 魏 지역은 도적의 포악함을 싫어하여 백성들이 燕나라의 은덕을 생각할 것이니, 이때 거의 깃발을 되돌리면 충분히 옛 基業을 회복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험요한 지역에 의지하여 스스로 견고히 지키면 오히려 한가로이 지내면서 銳氣를 기를 수 있습니다.”
모용보가 이 말을 옳게 여겨서 마침내 밤중에 태자 慕容策과 慕容隆, 慕容農 등 만여 명의 기병과 함께 나가 모용회의 군대로 달려가니, 성안에 주인이 없어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의혹하였다.
【目】 魏王 拓跋珪가 밤에 中山城으로 쳐들어가고자 하였는데, 장군 王建은 노략질하는 데에 뜻이 있어서 마침내 “士卒들이 府庫의 물건을 도둑질할까 염려되니, 내일 새벽을 기다리십시오.”라고 하니, 탁발규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燕나라 開封公 慕容詳이 慕容寶를 따라가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니, 성안에서는 그를 세워 군주로 삼아서 성문을 닫고 지키며 항거하였다.注+① 慕容詳은 慕容靑의 아우이다.
탁발규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성에 가서 타이르니, 모두들 말하기를 “소인들은 무지하여 다시 參合에서 죽은 무리들처럼 죽게 될까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구차하게 열흘이나 한 달을 연명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탁발규는 왕건의 얼굴을 돌아보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注+② 王建이 이미 參合의 주살을 부추기어 이루었고 또 拓跋珪가 밤을 틈타 中山에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였으니, 계책을 잃은 것이 두 번이었므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다.
【綱】 〈晉나라(東晉)가〉 皇太后 李氏를 높여 太皇太后로 삼고 王氏를 皇后로 세웠다.
【綱】 魏나라(北魏) 군대가 燕主(後燕) 慕容寶를 추격하자 慕容會가 공격하여 퇴각시켰다. 여름 4월에 모용보가 龍城에 이르니, 모용회가 난을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고서 中山으로 달아났다가 誅殺을 당하였다.
【目】 燕主 慕容寶가 中山에서 나오니, 清河王 慕容會가 기병 2만을 거느리고서 薊城 남쪽에서 맞이하였다.
모용보는 모용회가 원망하는 기색이 있음을 괴이하게 여기고는注+① 〈慕容會가 원망하는 기색이 있음은〉 자기가 후사가 되지 못함을 한한 것이다. 그의 병력을 줄여 遼西王 慕容農과 高陽王 慕容隆에게 나누어 주고, 계성 안의 府庫의 물자를 모두 옮겨서 북쪽의 龍城으로 달려가니, 魏나라 石河頭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모용보를 夏謙澤에서 따라잡았다.注+② 石은 성이고 河頭는 그의 이름이니, 이때 漁陽에 주둔하였다. 夏謙澤은 薊城 북쪽 200여 리 지점에 있었다.
모용회가 진영을 정돈하고 석하두와 싸우니, 모용농과 모용륭 등이 남쪽에서 온 기병을 거느리고 충돌하자, 위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으므로 달아나는 위나라 군대를 추격한 것이 백여 리였다.
모용륭이 陽璆에게 이르기를 “중산에는 수만 명의 병력이 있으나 내 뜻을 펼 수가 없으니, 오늘의 승리는 나로 하여금 한을 남기게 한다.” 하고는 인하여 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렸다.
【目】 慕容會가 이미 魏나라(北魏) 군대를 패퇴시키자 잘난 체하며 사납게 구는 것이 더욱 심해지니, 慕容隆이 여러 번 훈계하고 책망하였다. 모용회는 더욱 분노하여 마침내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慕容寶가 慕容農과 모용륭에게 이르기를 “道通의 의향을 보건대 틀림없이 배반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니, 마땅히 일찍 제거해야 한다.” 하였다.注+① 道通은 慕容會의 字이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말하기를 “모용회가 국난에 멀리서 달려왔고 반역의 정황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를 죽이면 어찌 다만 부자간의 은혜를 손상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대왕의 위엄과 명망을 크게 손상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모용회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밤에 자기 당을 보내어 기습하여 장막 아래에서 모용륭을 죽이려 하니, 모용륭이 큰 부상을 입었다.
【目】 慕容寶가 慕容會를 토벌하고자 하여 마침내 거짓으로 좋게 말을 하여 안심시키고, 다음 날 신하들을 불러 회식할 적에 모용회가 자리에 나오자, 모용보가 慕輿騰에게 눈짓하여 모용회의 목을 치게 하였는데, 머리만 다치고 죽지 않았다.
모용회가 달아나 자기 군중으로 가서 군대를 무장하여 모용보를 공격하니, 모용보가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내달려 龍城에 이르렀다.
모용회가 군대를 이끌고 성 아래에 주둔하니, 성안의 장병들이 모두 분노하여 나와 싸워서 모용회를 크게 격파하고, 侍御郞 高雲이 다시 밤중에 기습하니,注+① 慕容寶가 태자였을 때에 高雲이 武藝給事로서 東宮을 모셔 侍御郞에 제수되었다. 모용회의 무리가 궤멸하여 中山으로 달아나자 慕容詳이 그를 죽였다.
모용보는 고운을 장군으로 삼고 길러 양자로 삼으니, 고운은 高句麗의 支屬이었다.注+② 燕王 慕容皝이 高句麗를 격파하고 고구려의 지속들을 靑山으로 옮겼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지속들이 대대로 연나라의 신하가 된 것이다.
【綱】 王恭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자, 晉나라(東晉) 조정에서는 조명을 내려 僕射 王國寶와 將軍 王緒를 죽이니, 왕공이 군대를 해산하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目】 王國寶와 王緒가 會稽王 司馬道子에게 의지하여 뇌물을 받고 심하게 사치를 부려 끝을 알지 못하였다. 이들은 王恭과 殷仲堪을 미워하여 사마도자에게 권해서 그들의 병권을 약화시키게 하였다.注+① 惡(미워하다)는 烏路의 切이다.
왕공 등이 갑옷을 수리하고 군대를 무장하고서 표문을 올려 북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마도자가 의심하고는 조명을 내려 한여름에 농사에 방해된다고 하여 계엄한 군대를 모두 해산하게 하였다.注+② ‘解嚴’은 군대의 계엄을 해제함을 이른다.
왕공이 사자를 보내서 은중감과 상의하여 왕국보 등을 토벌하기로 하고 桓玄 또한 벼슬에 뜻을 얻지 못했으므로 은중감의 군대의 세력을 빌려 내란을 일으키고자 해서 마침내 은중감을 설득하기를
“왕국보와 그대는 오직 서로 빨리 죽이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이다. 왕국보가 이제 이미 큰 권력을 잡았으니, 뜻대로 못 할 것이 없다. 만약 조령을 내어 그대를 부르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라고 하였다.
【目】 殷仲堪이 묻기를 “장차 어떻게 계책을 내야 하는가.”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孝伯은 매우 악을 미워하니,注+① 孝伯은 王恭의 자이다. 마땅히 그와 은밀히 맹약하여 晉陽의 군대를 일으켜서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사람을 제거하여야 한다.注+② ≪春秋公羊傳≫에 “趙鞅이 晉陽의 군대를 일으켜서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자들을 제거했다.”라고 하였다. 내 비록 불초하나 荆楚 지역의 호걸들을 거느리고서 창을 메고 먼저 앞장서고자 하니, 이는 齊 桓公과 晉 文公이 세운 공훈과 같다.”라고 하였다.
은중감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밖으로는 雍州刺史 郗恢(치회)와 결탁하고 안으로는 從兄인 南蠻校尉 殷覬와 南郡相 江績과 모의하였다.注+③ 郗恢는 郗曇의 아들이다. 南蠻府는 南郡의 相이 荊州刺史의 府와 함께 江陵을 치소로 하였다.
은기가 말하기를 “신하는 마땅히 각각 자신의 직분을 지켜야 하니, 조정의 옳고 그름을 어찌 藩屏의 신하가 제재할 수 있겠는가. 진양의 일은 내가 감히 참여하여 듣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적 또한 그 불가함을 극구 말하였다.
【目】 殷覬는 江績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둘을 화해시켰는데, 강적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목숨을 가지고 서로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이 江仲元이 나이가 60인데, 다만 아직까지 죽을 곳을 얻지 못했다.”라고 하였다.注+① 仲元은 江績의 자이다.
殷仲堪은 그가 의지가 굳세고 바름을 두려워하여 楊佺期로 대신하게 하니, 조정에서는 이 말을 듣고 강적을 불러 御史中丞으로 삼았다.
【目】 殷覬가 마침내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자, 殷仲堪이 가서 문안하며 말하기를 “형의 병세가 자못 우려할 만합니다.” 하니, 은기가 말하기를 “나의 병은 내 몸이 죽는 데 불과하지만 너의 병은 마땅히 너의 가문을 멸하게 할 것이니, 마땅히 깊이 스스로를 아끼고 나를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郗恢 또한 따르려고 하지 않으니 은중감이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했는데, 마침 王恭의 사자가 이르자, 은중감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왕공은 크게 기뻐하여 표문을 올려서 王國寶의 죄상을 나열하고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표문이 이르자 온 나라가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다.
【目】 王國寶가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수백 명을 보내어 竹里를 수비하게 하였는데, 밤에 비바람을 만나 해산하고 돌아갔다.注+① 胡三省이 말하였다. “竹里는 지금의 建康府 竹篠鎭이 바로 이 지역이니, 行宮의 성 동북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王緒가 왕국보를 설득하여 王珣과 車㣧을 죽여서 당시의 명망이 있는 자들을 제거하고 임금과 정승을 위협하여 두 번진(王恭과 殷仲堪)을 토벌하게 하자, 왕국보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왕순과 차윤이 왔는데도 왕국보는 감히 이들을 살해하지 못하고 다시 왕순에게 계책을 물었다. 왕순이 대답하기를 “왕공과 은중감은 경과 평소 깊은 원한이 없으니, 경과 다투는 것은 권세와 이익의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왕국보가 말하기를 “장차 나를 曹爽으로 만들려는가.” 하니,注+② 〈“장차 나를 曹爽으로 만들려는가.”라고 한 것은〉 王珣이 마치 과 같이 함을 이른다. 왕순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경이 어찌 조상의 죄가 있으며 효백이 어찌 宣帝(司馬懿)의 무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왕국보가 또다시 차윤에게 계책을 묻자, 차윤이 대답하기를 “지금 조정이 군대를 보내면 왕공이 반드시 성을 지킬 것이니, 만약 京口를 함락하지 못하고 상류에 있는 왕공의 부대가 갑자기 쳐들어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국보는 마침내 글을 올려 직위를 내려놓고 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目】 司馬道子는 어리석고 나약하여 구차히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서 마침내 王國寶에게 사약을 내리고 王緒를 시장에서 참수하고 사자를 보내어 王恭에게 사죄하니, 왕공이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고 京口로 돌아갔다.
殷仲堪은 처음에 주저하여 감히 내려가지 못하였다가 왕국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표문을 올려 군대를 일으켰는데, 사마도자가 편지로 중지하게 하니, 은중감이 비로소 돌아왔다.
【綱】 〈晉나라(東晉)〉 會稽王의 세자 司馬元顯을 征虜將軍으로 삼았다.
【目】 司馬元顯이 나이 16세에 걸출한 재능이 있어 侍中이 되었는데, 會稽王 司馬道子를 설득하기를 “王恭과 殷仲堪이 끝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니, 은밀히 대비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사마도자는 마침내 사마원현을 征虜將軍으로 임명하고 그의 衛府와 徐州의 文武 관원을 모두 그에게 배속하였다.
【綱】 涼나라(後涼) 沮渠蒙遜이 배반하여 臨松을 함락하고 金山을 점거하였다.
【目】 처음에 張掖의 盧水胡인 沮渠羅仇는 匈奴 沮渠王의 후손이다.注+① 盧水胡는 安定과 張掖에 나누어 살았으니, 史書에서는 각각 그들이 거처하는 郡을 가지고 이름을 붙였다. 沮는 子余의 切이다. 대대로 匈奴 部落의 수령이 되니, 涼王 呂光이 그를 尙書로 삼았는데,
呂延이 패하여 죽자 저거나구의 아우인 三河太守 沮渠麴粥이 저거나구에게 이르기를注+② 呂光이 涼州를 얻고 스스로 三河王이라 하였으니, 이 삼하군은 아마도 여광이 설치했을 것이다. 李賢이 말하기를 “三河는 金城河, 賜支河, 湟河를 이르니, 이 군은 마땅히 漢나라의 張掖郡과 金城郡 경계에 설치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粥은 음이 育이다. “主上이 나이가 많아 혼몽하고 참소를 믿는데, 지금 군대가 패하여 장수가 죽었으니, 바로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을 시기할 때입니다.注+③ 將(장수)은 卽亮의 切이다. 우리 형제가 반드시 용납받지 못할 것이니, 군대를 무장하여 西平으로 향하고 苕藋(초조)로 출동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한 번 고함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涼州는 굳이 평정할 것이 못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注+④ 河西의 張氏가 西平郡을 설치하였다. 苕는 음이 條이고, 藋는 음이 掉이다. 苕藋는 지명이니, 漢나라 張掖郡 番禾縣 경계에 있었다.
저거나구가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忠孝로써 서쪽 지방에 이름이 났으니,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할지언정 내가 차마 남을 저버릴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여광이 과연 저거나구와 저거국육을 죽였다.
【目】 沮渠羅仇의 아우의 아들인 沮渠蒙遜은 웅대하고 걸출하며 지략이 있었고 經書와 史書를 두루 읽었는데, 저거나구의 상여를 가지고 돌아가 장례할 적에 모인 자들이 만여 명이었다.
저거몽손이 통곡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呂王(呂光)이 무도하여 죄가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니, 이제 내가 여러 부족과 함께 두 숙부(沮渠羅仇․沮渠麴粥)의 치욕을 갚고 선대의 기업을 회복하고자 하노니, 어떠한가.”라고 하니,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
마침내 이들과 맹약을 맺고 군대를 일으켜 涼나라(後涼)의 臨松郡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金山에 주둔하여 점거하였다.注+① 臨松郡은 〈前涼의〉 張天錫이 설치하였다. ≪五代志≫(≪隋書≫ 〈地理志〉)에 “張掖郡 刪丹縣에 金山이 있다.”라고 하였다.
【綱】 燕나라(後燕) 慕容詳이 中山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目】 中山城에 정해진 주인이 없으니, 백성들이 魏나라(北魏) 군대가 이 틈을 타고 쳐들어올까 염려해서 백성들이 맹약을 맺고서 스스로 싸우기로 하였는데, 魏王 拓跋珪가 포위를 풀고 河間으로 가서 곡식을 취하고서 東平公 拓跋儀를 봉하여 衛王을 삼았다.
慕容詳은 자신이 위나라 군대를 퇴각시켰으므로, 위엄과 덕이 이미 떨쳐졌다고 여겨 마침내 帝位에 올랐다.
【綱】 涼나라(後涼) 段業이 배반하여 스스로 建康公이라고 칭하니, 沮渠蒙遜이 무리를 데리고 그에게 귀의하였다.(北涼의 건국)
【目】 涼王 呂光이 呂纂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沮渠蒙遜을 공격하여 깨트렸다.
저거몽손의 從兄인 沮渠男成이 또한 병력을 모아 建康을 공격하고 사자를 보내어 太守 段業을 설득하기를 “呂氏의 정사가 쇠함에 사람들이 용납될 곳이 없어서 무너져 흩어질 형상이 분명하게 눈앞에 있습니다. 府君은 어찌하여 세상을 뒤덮는 재주를 가지고도 망해가는 나라에 충성을 세우려고 하십니까. 우리들이 이미 大義를 제창하고 府君에게 굽혀서 우리의 州를 다스려주기를 바라노니,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단업이 이를 허락하니, 저거남성이 단업을 涼州牧 建康公으로 추대하자, 저거남성을 輔國將軍으로 삼아서 軍國의 임무를 맡겼다. 거저몽손이 군대를 거느리고 그에게 귀의하자, 단업은 그를 鎭西將軍으로 삼았다.
여광이 여찬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니, 이것이 北涼이다.
【綱】 가을 7월에 燕나라(後燕) 慕容麟이 慕容詳을 기습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魏나라(北魏)가 中山을 기습하여 郛城까지 쳐들어갔다가 돌아왔다.
【目】 慕容詳이 술을 좋아하며 사치하고 음탕하여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한도가 없으니, 부하들의 마음이 떠나가고 성안이 굶주려 몹시 곤궁하였다.
慕容麟이 기습하여 그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여 魏나라를 막았는데, 위나라 군대에 큰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으니, 대다수의 장병들이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魏王 拓跋珪가 장수들에게 역병의 피해를 묻자, 대답하기를 “살아 있는 자가 열 명에 고작 네다섯 명입니다.” 하니,
탁발규가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天命이니,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四海의 백성들이 다 나라의 백성으로 삼을 수 있으니, 내가 이들을 통제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백성이 없음을 어찌 근심하겠는가.”라고 하니, 신하들이 마침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綱】 8월에 涼나라(後涼) 郭黁(곽논)과 楊軌가 배반하였다.
【目】 涼나라 太常 郭黁(곽논)이 天文을 잘 관찰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注+① 黁은 奴昆의 切이다.
마침 熒惑城이 東井을 지키니, 곽논이 僕射 王詳에게 이르기를 “양나라 분야에 큰 병란이 있을 것이다.注+② 分(분야)은 扶問의 切이다. 내 公과 함께 대사를 함께 일으키고자 하노니, 어떠한가.” 하자, 왕상이 그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일이 누설되어 주살을 당하니, 곽논이 마침내 東苑에서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였다.注+③ 涼州는 姑臧을 치소로 삼으니, 東苑城과 西苑城이 있었다.
【目】 涼王 呂光이 太原公 呂纂을 불러 郭黁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여찬이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장수들이 말하기를 “段業이 반드시 우리 군대의 뒤를 추격할 것이니, 마땅히 군대를 은밀히 하여 밤에 출발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여찬이 말하기를 “단업은 뛰어난 재주가 없어서 성을 의지하여 스스로 지킬 뿐이니, 만약 우리가 군대를 은밀히 하여 밤에 떠나면 다만 그의 기세를 커지게 할 뿐이다.” 하고는注+① 張(확장시키다)은 知亮의 切이다.
마침내 사자를 보내어 단업에게 고하기를 “곽논이 난을 일으켰다. 내 지금 도성(姑臧)으로 돌아가노니,注+② 都는 姑臧을 이른다. 卿이 나와 결전할 수 있거든 빨리 나와 싸워라.” 하였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니, 단업이 감히 출전하지 못하였다.
【目】 呂纂의 司馬인 楊統이 여찬을 죽이고 그의 종형인 楊桓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고자 하였는데,
양환이 노하기를 “나는 呂氏의 신하가 되어서 편안히 녹봉을 누리면서도 위태로울 때 구원하지 못하였다. 어찌 다시 병란을 더하겠는가. 여씨가 만약 망하면 나는 弘演이 되겠다.”라고 하니, 양통이 마침내 郭黁에게 항복하였다.注+① ≪呂氏春秋≫에 “衛나라 懿公에게 弘演이라는 한 신하가 있었는데, 사명을 받들고 사신을 갔었다. 그 사이 翟人이 위나라를 공격하자, 위나라 백성들이 말하기를 ‘임금이 지위와 녹봉을 준 것은 鶴이요 귀하게 여긴 것은 궁녀이니, 임금은 궁녀와 학을 데리고 싸워라. 우리들이 어찌 싸우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흩어져 떠나갔다. 적인이 쳐들어와서 熒澤에서 懿公을 따라잡아 그를 죽이고서 그의 살덩이를 다 먹고 홀로 간만 버렸다. 홍연이 사신 갔다가 돌아와서 〈죽은 의공을 대신하여〉 버려진 간에 사신으로 갔던 일을 復命하고 이를 마친 뒤에 하늘을 부르짖고 울면서 지극히 애통해하다가 눈물을 그치고 말하기를 ‘신이 청컨대 시신의 겉싸개[襮]가 되겠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자살하였는데, 먼저 자기 뱃속에 있는 것을 다 꺼낸 뒤 거기에 의공의 간을 넣었다.”라고 하였다. 襮은 伯各의 切이니, 겉이다. 의공의 간을 자신의 뱃속에 넣었으므로 신이 겉싸개가 되겠다고 청한 것이다. 楊桓의 딸이 呂纂에게 시집가서 다른 신하와 다르게 친애를 받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찬이 곽논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마침내 姑臧으로 들어가니, 涼나라(後涼) 사람 張捷 등이 戎族과 夏族을 불러모아 休屠城을 점거하고 곽논과 함께 涼나라 後將軍 楊軌를 추대하여 盟主로 삼았다.注+② 休屠縣은 漢나라 때에는 武威郡에 속하였으니, 休屠王의 城을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晉나라 때에 縣을 없앴다. ≪水經註≫에 “姑臧城 서쪽에 馬城과 東城이 있으니, 休屠縣의 옛 성이다.”라고 하였다.
【綱】 9월에 秦나라(後秦) 太后 虵氏가 卒하였다.注+① 蛇는 以者와 食遮의 두 切이고 또 음이 他이니, 오랑캐의 姓이다.
【目】 秦나라 太后가 卒하니, 秦主 姚興이 禮를 넘어 슬퍼하여 여러 정사를 친히 다스리지 않았다.
신하들이 漢나라와 魏나라의 故事를 따라서 장례하는 즉시 吉服을 입을 것을 청하자, 尙書郞 李嵩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효도로 천하를 다스림은 선왕의 훌륭한 일입니다. 마땅히 성상의 성품을 따라 道의 가르침을 빛내어야 하니, 장례한 뒤에 소복으로 조정에 임하소서.” 하였다.
尹緯가 논박하기를 “이숭이 常規를 바꾸고 禮法에서 벗어나니, 有司에게 맡겨서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요흥이 말하기를 “이숭은 충신이고 효자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숭의 의논과 같이 하라.”라고 하였다.
【目】 姚興은 정사에 부지런하였으며 좋은 말을 잘 받아들이니, 杜瑾 등이 일을 논함으로 인하여 크게 발탁되었고, 姜龕 등은 儒學으로 존경과 예우를 받았고, 古成詵 등은 文學으로 정사의 機密에 참여하였다.注+① 古成은 複姓이고 詵은 이름이다.
고성선은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며 전아하고 순정하여 風教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는데, 京兆 韋高가 의 인품을 흠모하여 모친상에 있으면서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자, 고성선이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는 검을 잡고 죽이려 하니, 위고가 두려워하여 도망해 숨었다.
【綱】 秦나라(後秦)가 〈晉나라(東晉)의〉 湖縣과 陝縣을 침략하여 함락하였다.
【綱】 겨울 10월에 魏王(北魏) 拓跋珪가 燕나라(後燕) 慕容麟과 싸워서 그를 대파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中山을 점령하였다.
【目】 中山에 기근이 심하였다. 魏王 拓跋珪가 진격하니, 太史令 鼂崇이 아뢰기를 “지금은 불길합니다. 紂王이 甲子日에 망하였으니, 이것을 ‘疾日’이라 합니다.”라고 하였다.注+① ≪春秋左氏傳≫에 “일진이 子와 卯에 있는 것을 疾日이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註에 “疾은 미워함이다. 紂王이 甲子日에 망하고 桀王이 乙卯日에 망하였다. 그러므로 갑자일과 을묘일을 꺼리는 날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탁발규가 말하기를 “주왕은 갑자일에 망했으나 周나라 武王은 갑자일에 흥왕하지 않았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진격하여 慕容麟과 義臺에서 싸워 대파시키니,注+② 李延壽의 ≪北史≫를 근거해보면 義臺는 塢의 이름이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新市縣에 義臺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모용린이 鄴城으로 달아났다.
魏나라가 中山을 함락하고 燕나라의 옥새와 인끈, 圖書와 府庫, 진귀한 보물을 얻은 것이 만으로 헤아려졌는데, 탁발규는 이것을 가지고 장병들에게 상을 주었다.
【目】 慕容麟이 鄴城에 이르러 다시 趙王을 칭하고 范陽王 慕容德을 설득하기를 “魏나라(北魏)가 장차 승세를 타고 업성을 공격할 것이니, 업성은 성이 커서 견고하게 지키기 어렵고 또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으니,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남쪽으로 滑臺로 달려가서 河水를 막아 위나라 군대를 대비하면서 틈을 기다려 출동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河北 지역을 거의 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魯王 慕容和가 활대에 진주하였는데, 모용화 또한 사자를 보내어 모용덕을 맞이하니, 모용덕이 이를 허락하였다.


역주
역주1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2 參合에서……것을 : 본서 太元 20년(395) 11월 北魏 拓跋珪가 後燕 慕容寶의 군대를 參合陂에서 격파하고 後燕의 사람 4, 5만 명을 사로잡았다. 탁발규가 이들을 돌려보내어 中原의 사람들을 회유하고자 하였는데, 북위의 신하 王建이 이들을 모두 죽여 후연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하자 모두 묻어 죽였다.
역주3 燕幽平牧慕容會 引兵至薊 : “‘至’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늦었다는 말이다. 燕나라가 지난해 병란을 받은 뒤로 군주가 직접 달아나 패하였으니, 위급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慕容會가 표문을 올려 달려가 구원한다고 하였으나 오랜 뒤에야 비로소 이르렀으니, 그가 君父를 급하게 여기지 않음이 어떠한가. 그러므로 ‘赴援’이라고 쓰지 않고 ‘至’라고 써서 비난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번 溫嶠에 대해서 ‘尋陽에 이르렀다.[至尋陽]’고 쓴 것은 어째서 비난하는 말이 되지 않는가. 온교가 심양에 이른 것은 陶侃 때문에 지체된 것이니, ‘至’라고 쓴 것은 도간을 죄책한 것이다.(晉나라 成帝 咸和 3년(328)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溫嶠以兵赴難至尋陽(온교가 군대를 이끌고 국난에 달려와서 尋陽에 이르렀다.)’라고 쓴 것이다. 모용회는 출발할 생각이 없어서 천천히 이르렀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에 ‘赴難’이라고 쓰지 않고 다만 ‘慕容會引兵至薊’라고 썼으니, 筆削하는 판단이 분명하다.[至者 何 緩辭也 燕自往歲受兵 君親奔敗 可謂急矣 會表赴援 久之乃至 其不急君父爲何如 故不書赴援 書至譏之 然則溫嶠書至尋陽 則曷爲非譏辭 嶠至尋陽 稽於陶侃 書至 所以罪侃也(晉成帝咸和三年) 故綱目書曰溫嶠以兵赴難 至尋陽 會無行意 徐徐而至 故綱目不書赴難 止書曰慕容會引兵至薊 筆削之權衡審矣]” ≪書法≫
역주4 慕容令이……이곳이다 : 이 내용은 본서 太和 4년(369) 11월 조에 보인다.
역주5 王恭……罷兵還鎭 : “‘王恭이 배반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명분을 바로잡은 것이다. 왕공을 ‘反’이라고 쓰지 않으면 趙鞅을 가지고 구실 삼는 자가 서로 이어질 것이다. 殷仲堪을 어찌하여 ‘反’이라고 쓰지 않았는가. 왕공이 처음으로 일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王國寶와 王緒는 어찌하여 관직을 썼는가. 晉나라에 政事가 없음을 비난한 것이다. 왕공이 한 번 군대를 일으켜서 이 때문에 한 명의 僕射와 한 명의 將軍을 죽여 姑息적으로 처리하였으니, 정사가 없음이 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殺’이라고 쓰지 않았는가. ‘殺’이라고 쓰면 漢나라가 鼂錯를 죽인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국보와 왕서는 죽일 만하나 왕공이 배반했다 하여 마침내 그들을 죽이는 것도 옳지 않다. ‘罷兵還鎭’이라고 쓴 것은 왕공을 좋게 여긴 것이 아닌가. 두 대신을 죽인 뒤에야 돌아갔으니, 이를 쓴 것은 그가 군주를 강요하는 기세를 드러낸 것이다.[恭書反 何 正名也 不書反 則以趙鞅藉口者接跡矣 仲堪何以不書 恭首事也 國寶緒曷爲書官 譏晉之無政也 恭一擧兵 而爲之殺一僕射一將軍 以姑息之 無政甚矣 然則曷爲不書殺 書殺則疑於漢鼂錯 故國寶緒可誅 不當以恭反遂誅之也 書罷兵還鎭 非善恭歟 殺二大臣而後還 書 所以著其要君之勢也]” ≪書法≫“살펴보건대 ≪春秋≫ 定公 13년(B.C. 497)에 ‘晉나라 趙鞅이 자신의 食邑인 晉陽으로 들어가서 배반하였다. 晉나라 荀寅과 士吉射가 朝歌로 들어가서 배반하였다. 晉나라 趙鞅이 晉나라로 돌아왔다.’라고 썼다. 그런데 ≪春秋公羊傳≫에 이것을 ‘조앙이 진양의 군대를 취하여 순인과 사길야를 쫓아냈으니, 순인과 사길야는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宋나라에 이르러서 胡安國이 ≪춘추≫에 傳을 지으면서 ≪春秋左氏傳≫에 실려 있는 韓氏와 魏氏가 趙氏를 위하여 晉侯에게 청한 일을 참작해서 비로소 세 사람의 반란이 그 죄가 똑같은데 조앙은 구원하는 자가 있으므로 다시 회복되었고, 순인과 사길야는 도와주는 이가 없기 때문에 끝내 배반한 것임을 알게 하였으니, ≪춘추≫에 조앙이 진나라로 돌아왔다고 쓴 것은 그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반역은 신하의 큰 죄악인데 晉侯가 天討를 받들어 행하지 못하고, 마침내 한씨와 위씨의 요청을 따랐다. 그러므로 ≪춘추≫에 이것을 써서 죄책한 것이다. 만약 조앙이 진양의 군대를 취하여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사람을 쫓아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군주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요 신하가 제멋대로 군대를 일으키는데도 죄가 없는 것이어서 군대로써 간하는 자는 참으로 그 군주를 사랑하는 것이 되니, 후세의 賊臣으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향해서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사람을 주살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 실로 군주를 위협하고 나라를 탈취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이 말 때문에 나올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춘추≫에 애당초 악한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이 있지 않음이 매우 분명하다. 지금 王恭이 王國寶와 王緒가 국가의 정사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힌다는 죄상으로 그를 토벌하였고, 桓玄 또한 晉陽의 일을 가지고 말하였다. 더구나 ≪資治通鑑綱目≫에 ‘조명을 내려 왕국보와 왕서를 죽이자, 왕공이 군대를 해산하고 진영으로 돌아갔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왕국보와 왕서 두 사람은 실로 주벌할 만한 죄가 있고, 왕공이 진영으로 돌아간 것도 또한 이 두 사람을 이미 주살하였기 때문이니, 그들이 임금 곁의 악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왕공이 군대를 일으켜 배반했다.’라고 씀을 면치 못함은 어째서인가. 아, 만일 왕국보와 왕서가 과연 죄가 있다면 군주가 직접 그들을 주살하는 것이 옳으니, 신하가 어찌 참여하여 이 일에 관여하겠는가. 저 왕공이라는 자는 평소 다른 마음을 품고서 跋扈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는데, 하루아침에 이유 없이 군대를 일으켜 조정을 위협하여 제재하였다. 비록 왕국보와 왕서 두 사람의 죄를 빌어서 구실로 삼았으나 逆으로서 順을 범하고 신하로서 군주를 위협하여 그 일이 도리에 어긋난다. ‘反’으로써 썼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후세에 晉陽의 일을 빌려서 군주를 위협하고 제재하는 일을 하는 자들은 모두 ≪춘추≫에서 주벌한 바이고, ≪자치통감강목≫에서 이른바 ‘反’이라는 것이다. 이 의리가 행해지면 난신적자의 무리가 구실로 삼아 군대를 일으키는 단서로 삼을 수가 없어서 반란하는 화가 거의 그칠 수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按春秋定十三年 書晉趙鞅入于晉陽以叛 晉荀寅士吉射入于朝歌以叛 晉趙鞅歸于晉 公羊傳之 以謂趙鞅取晉陽之甲 以逐荀寅士吉射 荀寅士吉射者 君側之惡人也 至我朝 胡公安國傳春秋 參之左氏所載韓魏爲趙氏請於晉侯之事 乃知三子之叛 其罪則一 鞅以有援 故得復 寅吉射以無助 故終叛 春秋書鞅歸于晉者 非與之也 叛逆 人臣之大惡 晉侯不能奉行天討 乃徇韓魏之請 故春秋書以罪之 若謂取晉陽之甲 以逐君側之惡人 則是人主可得而脅 人臣擅興無罪 以兵諫者 眞愛其君 使後世賊臣 稱兵向闕 以誅君側爲名 而實欲脅君取國者 皆此說啓之 由是而觀 則春秋初 未嘗有逐惡人之說 曉然甚明 今王恭 以王國寶王緒濁亂國政 罪狀討之 而桓玄亦以晉陽之事爲言 況綱目 書詔誅王國寶王緒 恭罷兵還鎭 則二人實有可誅之罪 而恭之還鎭 亦以二人旣誅之故 其爲君側之惡明矣 然王恭則未免書擧兵反者 何哉 嗚呼 使國寶與緒 果有罪耶 則人主自誅之可也 人臣烏得而與聞之 彼王恭者 素懐異志 跋扈不臣 一旦無故稱兵 脅制朝廷 雖假二人之罪 以爲口實 而以逆犯順 以臣脅君 其事悖矣 以反書之 夫復何說 然則後世有假晉陽之事 以爲脅制之擧者 皆春秋之所誅 而綱目之所謂反者也 此義行 則賊亂之徒 無以藉口爲擧兵之端 而反叛之禍 庶乎其可熄矣 吁]” ≪發明≫
역주6 蔣濟가……것 : 蔣濟는 자가 子通으로, 都鄕侯에 봉해졌다. 魏나라(曹魏) 曹芳의 嘉平 원년(249) 정월에 大將軍 曹爽이 魏主 조방을 따라 高平陵을 배알할 적에, 司馬懿가 皇太后의 詔令으로 모든 성문을 닫아걸고 병권을 장악한 뒤, 조상의 죄목을 上奏하였다. 한편 장제를 시켜 免官만 될 뿐이라고 조상을 설득하여 조상이 죄를 자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마의는 조상에게 반역죄를 덮어 曹羲 등과 함께 三族을 멸하였다.(≪資治通鑑綱目≫ 제15권 하, ≪資治通鑑≫ 권75)
역주7 以會稽世子……征虜將軍 : “公侯가 대를 이을 적에 世子를 썼으나 벼슬을 제수할 적에 세자를 쓴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여기서 ‘會稽王의 세자’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대대로 권력을 잡음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征虜將軍을 삼았을 적에 세자라고 쓰고 錄尙書事를 삼았을 적에 세자라고 쓰고 都督十六州軍事를 삼았을 적에 세자라고 쓴 것이다.[公侯繼世 書世子 除拜 未有書世子者 此其書會稽世子 何 譏世權也 故爲征虜將軍書世子 錄尙書事 書世子 都督十六州軍事 書世子]” ≪書法≫
역주8 燕慕容麟……入其郛而還 : “慕容詳이 ‘帝’를 칭하였는데, 어찌하여 ‘殺’이라고 썼는가. 모용상이 황제가 됨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인정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慕容寶가 살아 있는데 모용상이 또다시 참칭하였으니, 이는 두 군주인 것이다.[詳稱帝矣 何以書殺 不予詳之爲帝也 其不予 何 寶在而詳又僭焉 是二君也]” ≪書法≫
역주9 (當)[常] : 저본에는 ‘當’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常’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爲)[縣] : 저본에는 ‘爲’라고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縣’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秦太后虵氏卒 : “‘虵氏’를 쓴 것은 어째서인가. 孝를 일으킨 것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僭國의 태후는 모두 쓰지 않았지만 여기에서는 특별히 쓴 것이다.[書虵氏 何 嘉興孝也 故僭國太后不悉書 於是特書]” ≪書法≫
역주12 阮籍 : 210~263. 자는 嗣宗이고, 陳留 출신이다. 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특히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조문을 오면서 술과 거문고를 갖고 온 嵇康을 크게 기뻐하며 맞이하였다 한다.(≪晉書≫ 권49 〈阮籍列傳〉)
역주13 魏王珪……遂克中山 : “慕容麟이 慕容詳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어찌하여 배척하여 이름을 썼는가. 모용린이 스스로 황제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慕容寶가 살아 있는데 모용린이 또 참람하였으니, 이는 군주가 둘인 것이다.[麟殺詳自立矣 何以斥書名 不予麟之自帝也 其不予 何 寶在而麟又僭焉 是二君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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