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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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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大同九年이요 魏大統九年이요 東魏武定元年이라
東魏御史中尉高仲密 取崔暹之妹하여 旣而棄之하니 由是與暹有隙이라 選用御史 多其親黨이러니 高澄奏令改選하니 仲密疑暹構己하여 愈恨之
仲密後妻李氏 艶而慧注+① 崔暹之妹旣去, 李氏繼室, 故曰後妻. 澄見而悅之어늘 李氏不從하여 以告仲密하니 仲密益怨이러니
尋出爲北豫州刺史하여 陰謀外叛注+② 北豫州治虎牢.이어늘 高歡疑之하여 遣奚壽興하여 典其軍事한대
仲密執之하여 以虎牢降魏어늘 歡以事由崔暹이라하여 將殺之러니 高澄爲之固請한대 歡乃釋之하다
魏宇文泰帥諸軍하여 應仲密하여 三月 圍河橋南城이어늘
高歡將兵十萬하여 至河北하니 泰退軍瀍上하고 縱火船於上流하여 以燒河橋
斛律金使張亮하여 以小艇百餘 載長鎖하여 伺火船將至하여 以釘釘之하고 引鎖向岸하니 橋遂獲全注+① 艇, 小船也. 鎖, 鐵鎖也. 上釘, 音丁, 鐵釘也. 下釘, 丁定切.이라
歡渡河하여 據邙山爲陳한대 數日 泰留輜重하고 夜襲之어늘 歡聞之하고 正陳以待러니
黎明 泰至어늘 東魏彭樂 以數千騎衝魏軍하니 所向奔潰하여 遂馳入魏營하여 虜泰督將僚佐四十하니 諸軍乗勝擊魏하여 大破之하여 斬首三萬餘級하다
歡使樂追泰한대 泰窘하여 謂樂曰 癡男子 今日無我 明日豈有汝邪 何不急還營하여 收汝金寳오하니
樂從其言하여 獲泰金帯一囊以歸하여 言於歡曰 黑獺漏刃이나 破膽矣라하니
歡怒其失泰하여 捽其頭하여 連頓之하고 擧刃將下者三하고 噤齘良久注+① 捽, 昨沒切, 持頭髮也. 頓, 下首也. 噤, 渠飮切, 口閉也. 齘, 下戒切, 齒相切也.어늘
樂曰 乞五千騎하노니 復爲王取之하리라하니 歡曰 汝縱之何意而言復取邪아하다
明日 復戰할새 泰爲中軍하여 與右軍若干惠 合擊東魏하여 大破之하고 悉俘其歩卒注+② 若干, 音惹奸, 虜複姓, 惠其名也.하다
歡失馬어늘 赫連陽順 下馬以授歡하니 歡走할새 從者七人이라 追兵至하니 都督尉興慶 拒戰矢盡而死하다
東魏降者 告泰以歡所在어늘 泰募勇敢三千人하여 皆執短兵하여 配賀拔勝攻之한대
勝執槊逐之하여 馳數里 槊刃垂及하니 歡氣殆絶이러니 段韶射勝馬斃之하니 歡遂逸去 勝歎曰 今日 不執弓矢 天也로다하다
左軍趙貴亦戰不利어늘 東魏兵復振하니 泰與戰 又不利 遂遁入關하여 屯渭上하다
歡進至陝하니 泰使開府儀同三司達奚武 拒之어늘 行臺郎中封子繪言於歡曰 混壹東西 正在今日하니 若復遲疑 後悔何及注+① 子繪, 隆之之子也.이리오하니 歡深然之러라
諸將咸以爲野無靑草하고 人馬疲瘦하니 不可遠追라하여늘
陳元康曰 兩雄交爭하여 歲月已久러니 今幸而大捷하니 天授我也 時不可失이니 當乗勝追之라하다
歡曰 若遇伏兵이면 奈何오하니 元康曰 前沙苑失利에도 彼尙無伏이어든 今奔敗若此하니 何能遠謀리오 若捨而不追 必成後患이리라하다
歡不從而歸하고 獨使劉豐生將數千騎追泰하다
泰召王思政於玉壁하여 將使鎭虎牢러니 未至而敗
乃以爲并州刺史하여 守恒農한대 思政入城하여 開門解衣而卧하여 慰勉將士하여 示不足畏러니 後數日 豐生至하여 憚之引還이어늘
思政乃修城郭하고 起樓櫓하고 營農田하여 積芻粟하니 由是 恒農始有守禦之備하고 泰亦廣募關隴豪右하여 以增軍旅하다
高仲密之將叛也 陰遣人扇動冀州豪傑하여 使爲内應注+① 高乾兄弟本起兵於信都, 仲密故扇動其豪傑, 使爲應於河北.이어늘 東魏遣高隆之하여 馳驛慰撫하니 由是得安이러라
高澄密書與隆之曰 仲密枝黨與之俱西者 宜悉收其家屬하여 以懲將來라하니
隆之以爲恩旨旣行하여 理無追改하고 若復收治 示民不信이니 脫致驚擾 所虧不細라하여 乃啓歡罷之하다
夏四月 淸水氐叛魏어늘 魏遣使喻降之하다
淸水氐酋李鼠仁 乗魏之敗하여 據險作亂注+① 清水縣, 漢屬天水郡, 晉屬略陽郡. 五代志曰 “後魏置清水郡, 隋廢郡爲縣, 屬秦州.”이어늘 獨孤信屢擊之不克이러니 宇文泰遣典籤趙昶往諭之한대
諸酋長或從或否하여 其不從者 欲刃昶호되 昶神色自若하여 辭氣逾厲하니 鼠仁感悟하여 遂相率降이어늘 泰即以昶爲都督하여 使領之하다
東魏復取虎牢하다
宇文泰遣諜하여 潛入虎牢하여 令守將魏光固守러니 侯景獲之하여 改其書云 宜速去라하고 縱諜入城하니
光宵遁이어늘 景獲高仲密妻子하여 送鄴하니 北豫洛二州復入于東魏하다
高歡以高乾有義勲하고 高昂死王事하고 季式先自告라하여 皆爲之請하여 免其從坐하다 仲密妻當死러니 高澄納之注+① 有義勲, 謂起兵於信都以奉歡也. 死王事, 謂戰死於河陽也. 先自告, 謂先自永安戍奔告歡也. 仲密之叛, 季式在永安戍, 仲密遣信報之, 季式走告歡.하다
魏以侯景爲司空하다
◑ 秋八月 東魏以斛律金爲大司馬하다
◑ 冬十一月 東魏築長城于肆州하다
西自馬陵東至土墱注+① 馬陵, 蓋東魏置戍之地. 墱, 丁鄧切. 土墱, 地名, 在肆州境內.이러라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大同 9년이고, 西魏 文帝 元寶炬 大統 9년이고, 東魏 孝静帝 元善見 武定 원년이다.
【綱】 봄 2월에 東魏의 北豫州刺史 高仲密이 虎牢 지역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였다. 3월에 서위의 大丞相인 宇文泰가 군대를 거느리고 고중밀에게 호응하여 동위 大丞相인 高歡과 邙山에서 전투를 치르다가 대패하여 돌아왔다.
【目】 東魏의 御史中尉 高仲密이 崔暹의 누이동생과 혼인하고서 얼마 뒤에 버리자, 이로 말미암아 최섬과 틈이 벌어졌다. 〈고중밀이〉 선발하여 등용한 御史들이 대부분 그의 親黨이었기에 高澄이 아뢰어서 다시 선발하게 하니, 고중밀은 최섬이 자기를 〈고징에게〉 모함했다고 의심하여 더욱 원망하였다.
고중밀의 후처인 李氏가 아름답고 지혜가 있어注+① 崔暹의 누이동생이 떠난 뒤에 李氏가 繼室이 되었으므로, 後妻라고 한 것이다. 고징이 그녀를 보고서 좋아하였는데, 이씨가 따르지 않고서 고중밀에게 일러바치자 고중밀이 더욱 원망하였다.
얼마 뒤에 〈고중밀이〉 北豫州刺史로 나가게 되어 몰래 외부에서 반란을 모의하였는데,注+② 北豫州는 虎牢에 治所를 두었다. 高歡이 의심하여 奚壽興을 파견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고중밀이 그를 잡아서 虎牢 지역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자 고환은 고중밀의 배반한 일이 최섬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고징이 그를 위해 살려달라고 굳게 요청하자 고환이 최섬을 풀어주었다.
【目】 西魏의 宇文泰가 군사들을 인솔하여 高仲密에게 호응하여 3월에 河橋의 南城을 포위하였다.
火船火船
高歡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황하 북쪽에 도착하니, 우문태가 군대를 瀍水 가로 퇴각시키고 상류에서 火船을 내려보내어 하교를 불사르려 하였다.
斛律金이 하교가 마침내 온전하게 되었다.注+① 艇은 작은 배이다. 鎖는 쇠사슬이다. 위의 釘은 음이 丁이니, 쇠못이다. 아래의 釘(못을 박다)은 丁定의 切이다.
고환이 黃河를 건너 邙山을 점거하여 진을 쳤는데, 며칠 뒤에 우문태가 輜重을 남겨두고 밤중에 기습하자 고환이 이 소식을 듣고 진영을 정돈하고서 기다렸다.
동틀 무렵에 우문태의 군사가 도착하자 東魏의 彭樂이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서위의 군대에 돌진하니, 향하는 곳마다 서위의 군사가 무너져 마침내 서위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가 우문태의 督將과 僚佐 48명을 포로로 잡으니, 諸軍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서위를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3만여 명을 참수하였다.
【目】 高歡이 彭樂을 시켜 宇文泰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우문태가 급박해지자 팽락에게 말하기를 “어리석은 놈아, 오늘 나를 없애면 내일 어찌 네가 있겠느냐. 어찌 군영으로 급히 돌아가 너의 금은보화를 가지지 않느냐.”라고 하니,
彭樂彭樂
팽락이 그 말대로 우문태의 金帶 한 자루를 가지고 돌아와 고환에게 말하기를 “宇文黑獺(우문태)이 요행이 제 칼날을 면했으나, 간담이 서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환은 그가 우문태를 놓친 것에 분노하여 그의 머리를 잡아 연속으로 처박고 칼을 들어 내리치려고 한 것이 세 차례나 되었으며, 오래도록 입을 다문 채 이를 갈았다.注+① 捽(잡다)은 昨沒의 切이니, 머리카락을 잡는다는 뜻이다. 頓은 머리를 처박는 것이다. 噤은 渠飮의 切이니, 입을 닫는다는 뜻이다. 齘는 下戒의 切이니, 이빨을 간다는 뜻이다.
팽락이 말하기를 “5천 명의 기병을 내어주시기 바라오니 다시 왕을 위하여 그를 잡아오겠습니다.”라고 하니, 고환이 말하기를 “그대가 그를 놓아준 것이 무슨 생각에서 한 짓인데, 다시 잡아오겠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다음 날 다시 전투를 치루는데, 우문태가 中軍이 되어 右軍인 若干惠(야간혜)와 함께 합세하여 東魏를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步卒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注+② 若干의 음은 惹奸이니, 오랑캐의 複姓이며, 惠는 이름이다.
고환이 말[馬]을 잃자 赫連陽順이 말에서 내려 고환에게 말을 내주었는데, 고환이 말을 타고 도주할 적에 따르는 자들은 7명뿐이었다. 추격하던 군사가 뒤따르자, 都督 尉興慶이 맞서 싸우다가 화살이 모두 떨어져서 죽었다.
【目】 東魏에서 항복한 군사들이 宇文泰에게 高歡이 있는 곳을 알려주자, 우문태가 용맹한 군사 3천 명을 모아서 모두 짧은 무기로 무장시켜서 賀拔勝에게 배속시켜 공격하도록 하였다.
하발승이 긴 창을 쥐고 추격하여 몇 리를 달려가서 긴 창의 끝이 고환에게 닿아 고환의 숨이 거의 끊어질 뻔 했는데, 段韶가 하발승의 말을 쏘아 넘어뜨려 죽이자, 고환이 마침내 도망쳤다. 하발승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늘 활과 화살을 잡지 않은 것은 하늘의 뜻이구나.”라고 하였다.
左軍 趙貴 역시 전세가 불리했는데, 동위의 군사들이 다시 떨쳐 일어나니, 우문태가 함께 싸워도 전세가 불리하여 마침내 달아나 關中으로 들어가서 渭水 가에 주둔하였다.
고환이 전진하여 陝州에 도착하니, 우문태가 開府儀同三司 達奚武를 파견하여 방어하게 하자, 行臺郎中 封子繪가 고환에게 말하기를 “東西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다시 지체하고 주저하신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注+① 封子繪는 封隆之의 아들이다. 고환이 깊이 수긍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들판에는 푸른 풀이 없고 병사와 군마가 피로에 지쳐 있으니 먼 곳까지 추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陳元康이 말하기를 “두 영웅이 교전한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다행히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것이어서 때를 놓쳐서는 안 되니, 승리의 기세를 타고 추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고환이 말하기를 “만약 복병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오.”라고 하니, 진원강이 말하기를 “이전에 沙苑에서 전세가 불리했을 때에도 저들은 오히려 복병을 두지 않았는데, 지금 이처럼 달아나고 패배한 상황에서 어찌 멀리까지 계책을 도모하겠습니까. 만약 놓아두고 추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환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돌아갔고, 다만 劉豐生을 시켜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우문태를 추격하게 하였다.
【目】 예전에 宇文泰가 王思政을 玉壁에서 불러들여 虎牢 지역을 지키게 하려고 하였는데, 부임하기 전에 우문태가 패배하였다.
高澄高澄
마침내 并州刺史로 삼아서 恒農 지역을 지키게 하였는데, 왕사정이 성에 들어와서는 성문을 열고 갑옷을 벗고 누워서 장수와 병졸들을 위로하는 데에 힘쓰면서 두려워할 것이 못 됨을 보였다. 며칠 뒤에 劉豐生이 도착하였는데, 왕사정을 꺼려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왕사정이 마침내 성곽을 보수하고 城樓와 望樓를 세우고, 농경지를 경영하여 꼴과 군량을 비축하니, 이로 말미암아 恒農 지역은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우문태도 關中과 隴右에 사는 세력 있는 자들을 폭넓게 모집하여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高仲密이 배반을 꾀할 적에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冀州의 호걸들을 선동하여 안에서 호응하게 하였는데,注+① 高乾 형제가 본래 信都에서 병사를 일으켰는데, 高仲密이 일부러 그 호걸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시켜 河北에서 호응하도록 하였다. 東魏에서 高隆之를 파견하여 역마를 타고 달려가서 위무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안정될 수 있었다.
高澄이 고륭지에게 음밀히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고중밀의 일파 가운데 함께 西魏로 간 사람들은 그들의 가솔들을 체포하여 장래의 일을 징계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고륭지가 은혜로운 聖旨가 이미 시행되어 이치상 다시 고칠 수가 없고, 만약 다시 체포하여 죄를 다스린다면 백성들에게 불신을 보이는 것이니, 혹시라도 분란이 일어난다면 손실이 적지 않다고 하고서 마침내 高歡에게 아뢰어 그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綱】 여름 4월에 淸水의 氐族이 西魏를 배반하자, 서위에서 使者를 파견하여 그들을 회유하여 항복시켰다.
【目】 淸水에 사는 氐族의 酋長 李鼠仁이 西魏가 패배한 틈을 타서 요충지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注+① 清水縣은 漢나라 때에는 天水郡에 소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略陽郡에 소속하였다. ≪五代志≫에 이르기를 “後魏(北魏)에서 清水郡을 설치하였는데, 隋나라에서 郡을 없애고 縣으로 만들어 秦州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였다. 獨孤信이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宇文泰가 典籤인 趙昶을 보내어 타이르도록 하였다.
여러 추장들 중에 따르려는 자도 있었고 거부하는 자도 있었는데, 거부하던 자가 조창에게 칼을 들이대 죽이려 하였으나 조창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하여 말투와 기운이 더욱 엄정해지니, 이서인이 감동하고 깨달아 결국 무리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우문태는 곧장 조창을 都督으로 삼아 그곳을 관할하게 하였다.
【綱】 東魏가 다시 虎牢를 빼앗았다.
【目】 宇文泰가 첩자를 보내어 몰래 虎牢에 들어가게 하여 守將 魏光에게 굳게 지키도록 시켰는데, 侯景이 그를 사로잡아서 편지의 내용을 고쳐서 “신속히 퇴각하라.”라고 하고서 첩자를 놓아주어 성으로 들여보냈다.
위광이 밤중에 도주하였는데, 후경이 高仲密의 처자식을 사로잡아서 鄴城으로 압송하니 北豫州와 洛州가 다시 東魏의 영토가 되었다.
高歡이 高乾은 의로운 공훈이 있고, 高昂은 왕을 위하여 죽은 일이 있으며, 高季式은 앞서 고중밀의 반란을 스스로 보고하였다고 여겨서 모두 그들을 위하여 連坐에서 면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고중밀의 처는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高澄이 그녀를 〈妾으로〉 받아들였다.注+① 의로운 공훈이 있다는 것은 信都에서 군사를 일으켜 高歡을 받든 일을 말한다. 왕을 위하여 죽은 일은 河陽에서 전사한 일을 말한다. 앞서 스스로 보고하였다는 것은 먼저 永安戍에서 도망쳐 고환에게 보고한 일을 말한다. 高仲密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高季式이 영안수에 있었는데, 고중밀이 소식을 전해 알리자 고계식이 달려가 고환에게 보고하였다.
【綱】 西魏가 侯景을 司空으로 삼았다.
【綱】 가을 8월에 東魏가 斛律金을 大司馬로 삼았다.
【綱】 겨울 11월에 東魏가 肆州에 長城을 축조하였다.
【目】 서쪽으로는 馬陵에서부터 동쪽으로는 土墱에 이르렀다.注+① 馬陵은 東魏에서 수자리를 설치한 지역이다. 墱은 丁鄧의 切이다. 土墱은 지명으로, 肆州의 경내에 있다.


역주
역주1 東魏北豫州刺史高仲密……大敗而還 : “高仲密은 실로 반란하였는데 어째서 기록하지 않았는가. 高澄은 無道하여 男女의 구별을 어지럽혔고 심지어 변방의 재앙을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은 특별히 ‘虎牢 지역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였다.[以虎牢降魏]’라고 기록하고 반란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고징을 죄준 것이다.[仲密實叛 何以不書 高澄無道 亂男女之别 至啓邊禍 故綱目特書以虎牢降魏 而不書叛者 罪高澄也]” ≪發明≫
역주2 張亮을……하니 : 쇠사슬 끝에 못을 달아 그 못을 火船에 박아 끌어낸 것이다. ≪北史≫ 〈張亮列傳〉에 “張亮이 작은 전함 100여 척을 마련하여 긴 쇠사슬을 싣고 쇠사슬 끝에 못을 달고서 火船이 도착하려 하자 즉시 작은 배를 빨리 몰아 못을 가지고 화선에 박고 쇠사슬을 끌어서 연안 쪽으로 향하게 하니 화선이 다리에 도달할 수 없었다.[亮乃備小艇百餘 皆載長鎻 鎻頭施釘 火船將至 即馳小船 以釘釘之 引鎻向岸 火船不得及橋]”라고 하였다.
역주3 (入)[八] : 저본에는 ‘入’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八’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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