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裴子野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천지에 郊祀를 지내는 것은 연중행사로 하는 것인데, 저들의 죄를 사면해준 것은 무슨 까닭인가.”
綱
[綱] 宋나라가 廬陵王 劉義眞을 司徒로 삼고 徐羨之를 尙書令으로 삼고 揚州刺史 傅亮을 僕射(복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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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北魏가 後苑을 조성하였다.
目
[目] 魏主가注+① 晉나라가 천하를 소유하였을 때는 ≪資治通鑑≫에서 魏主에 대해 〈쓰면서〉 대부분 이름을 아울러 기록하였으나, 宋나라가 선양을 받고서는 바로 ‘魏主’라고 기록하고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남조와 북조는 대등한 관계여서 〈한쪽을〉 경시하거나 중시할 것이 없는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代都에서 6천 명을 동원하여 後苑을 조성하였는데, 후원이 동쪽으로 白登을 포괄하니, 둘레가 30여 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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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北涼이 敦煌을 도륙하고 李恂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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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때에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沮渠蒙遜에게 나아가 稱臣하고 조공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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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여름 4월에 宋나라가 淫祠를 허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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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宋나라가 조서를 내리기를 “각처의 不正한 祠廟(淫祠)는 蔣子文 이하를 모두 없애고, 先賢으로 공훈과 덕행이 있는 사묘는 이러한 규례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注+① 蔣子文은 廣陵 사람이다. 漢나라 말기에 秣陵尉가 되었는데, 적을 쫓다가 鍾山에 이르러 이마를 다쳐서 마침내 죽었다. 吳나라 先主(孫權) 초기에 〈장자문의〉 옛날 부하 관리가 길에서 장자문을 만나 모시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서 놀라 도주하자, 장자문이 쫓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土地神이 되어야 백성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니, 너는 백성들에게 宣告하여 나를 위해 사당을 세우게 하라.”라고 하고, 또 다시 무당에게 내려와서 말하기를 “내가 장차 孫氏의 官運을 크게 열어줄 것이니, 마땅히 나를 위해 祠廟를 세우라.”라고 하였다. 吳主가 마침내 그를 위하여 祠廟를 세우고 中都侯로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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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가을 9월에 宋主 劉裕가 秣陵에서 零陵王(晉 恭帝)을 시해하였다.注+① 향년이 3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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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宋主 劉裕가 독주 한 단지를 이전 琅邪의 郎中令 張偉에게 주어서注+① 甖(단지)은 於耕의 切이니 옹기그릇이다. 張偉는
입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지위는 二千石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나이가 막 서른이고, 도량과 식견이 범용하고 천근한데도 영화가 臺府(宋臺와 宋公府)에서 으뜸입니다.注+① 冠(으뜸)은 古玩의 切이다. 복이 지나가면 재앙이 생겨나 그 응답이 멀지 않으니 다만 바라건대 貶職시켜 쇠미한 가문을 보전해주소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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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謝晦가 혹 조정의 은밀한 일을 謝瞻에게 말하면 사첨은 일부러 친척이나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하여 그 말을 끊었다. 宋主가 즉위하게 되자, 사회가 創業을 도운 功으로 지위와 임무가 더욱 무거워졌으므로 사첨이 더욱 걱정을 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들어 낫지 않으니, 임종할 때 사회에게 편지를 남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불을 걷어봄에 사지가 다행히 온전하니注+① 曾子가 병이 위중하자, 제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이불을 걷고서 내 발을 살펴보고 내 손을 살펴보아라. 이제야 〈부모님이 주신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에서〉 근심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겠다. 제자들아.”라고 하였다. 孔子가 말하기를 “부모가 온전히 낳아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하게 돌아가야만 孝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아우는 스스로 노력하여 나라를 위하고 가정을 위할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것을 생각하라.”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宋나라……6년이다 :
421년에서 588년까지는 無統이다. 朱子의 〈資治通鑑綱目凡例〉를 보면 正統인 경우 歲年(干支) 다음에 國號, 諡號, 姓名, 年號, 年度 등을 大字로 쓰는 데 반해, 無統일 경우 위처럼 小字로 쓴다. 隋나라 文帝가 천하를 통일한 589년 이후로는 隋나라를 정통으로 삼아서 大字로 표시하였다.
역주2宋永初二年 魏泰常六年 :
“宋나라가 庚申年(420) 4월에 즉위하고 연호를 바꾼 뒤로부터 ≪資治通鑑綱目≫에서 大字로 晉나라 曆年의 뒤를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은 大字로 歲年을 기록할 만한데 어째서 分注(小字雙行)로 기록하여 北魏 이하의 나라들과 나란히 列國으로 기록하였는가. 이것이 ≪자치통감강목≫의 큰 절도이다. 晉나라가 〈천도하여〉 江左의 한 구석에서 안주하여 영토가 분열되었어도 ≪자치통감강목≫에서 여전히 大字로 歲年을 기록한 것은 西晉의 正統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宋나라가 晉나라를 찬탈하여 옛 강토를 이어받았으나 통일되었던 지역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북쪽에 있는 北魏와 비교하여 같을 뿐이다. 北魏의 시조 拓跋猗盧도 애초에 晉나라에서 봉작을 받아 이때에 이르러 황제를 칭하고, 2代 동안 점차 변하여 中華의 기풍을 계승한 것은 더욱 기술할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宋과 北魏를〉 ≪자치통감강목≫에서 나란히 기록하였으니,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 이로부터 齊․梁․陳나라를 거쳐 隋 文帝 9년(589)에 이르러 江南을 평정하고 나서 천하가 통일되자, 그 뒤에 開皇(隋 文帝의 연호)을 大字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朱子의 〈資治通鑑綱目凡例〉에〉 ‘國統이 아래에서 바르게 되어 人道가 안정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北魏 등 다른 나라들보다〉 宋나라를 먼저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中華를 중시한 것이다.[宋自庚申四月即位改元 綱目不以大書者 紀晉歷之餘也 今則可以大書紀年矣 曷爲於分注書之 而與魏以下竝爲列國 曰 此綱目之大節也 晉自江左偏安 土宇分裂 綱目猶大書其紀年者 以承西晉之正統也 宋氏簒晉 承其舊疆 非能恢復混一 其視魏之在北等耳 而魏祖猗盧 初亦受封於晉 至是稱帝 再世漸變 華風繼者 益可稱述 綱目竝而書之 夫豈過哉 自是曆齊梁陳至隋文九年 旣平江南 天下爲一 而後以開皇大書 故曰 統正於下而人道定矣 然則其先宋 何 内諸夏也]” ≪書法≫
역주3宋主劉裕弑零陵王於秣陵 :
“‘宋主’라고 기록하고 ‘弑’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임금과 신하의 분수 때문이다. 東堂에서 劉裕가 安帝를 시해하였을 때 〈보통 이름만 쓰는데〉 유유를 지척해서 ‘劉裕’라고 기록하였고, 이윽고 恭帝를 폐위하였을 때 〈성을 생략하고〉 ‘裕’라고만 기록하였는데, 여기에서 다시 ‘劉裕’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를 시해한 죄를 무겁게 여긴 것이다. 나라가 흥망하는 때가 많았는데, 滅國의 군주가 죽은 것을 ‘弑’라고 기록한 것은 유유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다시 배척하여 ‘劉裕’라고 기록한 것은 유유를 무겁게 죄준 것이다. 蕭道成(齊 高帝)이 汝陰王을 시해한 데에는 〈‘道成’이라고만 쓰고〉 ‘蕭’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시작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다. ‘道成’으로 성씨를 생략하여 기록한 것은 처음 시작한 사람을 무겁게 죄준 것이다.[書宋主矣 其書弑 何 君臣之分也 東堂之弑 裕斥書劉 旣而廢帝 書裕而已 此其再書劉 何 重弑也 廢興之際 多矣 滅國之主書弑 自裕始 再斥書劉 所以重罪裕也 至道成弑汝陰 則不書蕭矣 非創也 故略之 略道成 所以重罪創者也]” ≪書法≫ ‘東堂之弑’의 기사는 同書 제24권 상 晉 安帝 義熙 14년(418)에 “宋公劉裕 弑帝于東堂”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至道成弑汝陰’의 기사는 同書 제27권 하 宋 順帝 昇明 3년(479)에 “齊王道成 弑汝陰王 滅其族”이라고 하여 성씨인 ‘蕭’를 쓰지 않았다.“劉裕는 이미 帝를 칭하였는데 여기에서 다시 그 성명을 기록한 것은 임금(靈陵王) 앞에 신하(劉裕)의 이름을 써서 弑逆의 죄를 바로잡은 것이다. 유유는 평민으로 晉나라 국운을 바꾸고 이미 국가를 얻었는데도 여전히 다시 亡國의 한 사내인 영릉왕에게 속을 태워 반드시 영릉왕을 모두 死地에 둔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으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 사람의 마음에 後患을 끊어놓아야 자손들이 길이 보존되어 근심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지 얼마 뒤에 두 아들이 온당하게 죽지 못했고, 帝位를 전한 지 8世 동안 여섯 군주가 수명대로 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司馬氏가 해친 것이 아니다. 또 자기가 이미 시해를 저지르고서 또다시 百官을 인솔하여 朝堂에 임석하였으니 과연 무슨 의리인가. 장차 하늘을 속이려 한 것이라면 하늘은 진실로 속일 수가 없고 장차 사람을 속이려 한 것이라면 사람은 더욱 쉽게 속이지 못하니, 다만 자신의 분잡한 짓만 보인 것일 뿐이다. 속이는 짓을 하여 마음이 고단하고 날마다 졸렬하게 되는 것은 유유를 두고 이른 말인 듯하니, 애석하다.[劉裕已稱帝矣 而此復書其姓名者 君前臣名 正其弑逆之罪也 裕以布衣 而移晉祚 旣已得鼎 猶復介介然於亡國之一夫 必欲置之死地而後已 自謂一人心絶後患 子孫可以長保無虞 然而身没未幾 二子不得其死 傳之八葉 六主不以壽終 固非司馬氏害之也 且己旣弑之 又復帥百官臨之 果何義邪 將以欺天 則天固不可欺 將以欺人 則人尤未易欺 徒見其自爲紛紛而已 作僞心勞日拙 其劉裕之謂乎 噫]” ≪發明≫
역주4張卲 :
?~440. 字는 茂宗이다. 宋 武帝 劉裕의 謀士이자 開國功臣으로, 벼슬은 臨沮伯․左衛將軍․湘州刺史․吳興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5葬晉恭帝于沖平陵 :
“〈≪資治通鑑綱目≫에서〉 晉나라 惠帝의 篇에 위에는 ‘陳留王 曹奐이 卒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아래에는 ‘晉나라 사람들이 장사 지냈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晉나라 篇이라도 다시 거듭 ‘晉’이라고 기록한 것은 晉나라의 후대함을 허여한 것이다. 여기는 宋나라 篇이 아닌데 宋나라가 晉나라 황제를 장사 지냈음에도 ‘宋’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삭제한 것이다. 어째서 삭제한 것인가. 자신이 직접 시해하고 예우하여 장사를 지내 기만하였으니, 晉나라 사람들과는 똑같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魏나라가 漢나라 孝獻皇帝를 장사 지낼 적에 ‘魏’라고 기록하였고, 晉나라가 陳留王을 장사를 지낼 적에 ‘晉’이라고 기록하였고, 陳나라가 梁나라 孝元帝를 장사 지낼 적에 ‘陳’이라고 기록하였고, 石晉이 예전의 唐主를 장사 지낼 적에 ‘晉’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오직 宋나라가 晉나라 恭帝를 장사 지낼 적에는 ‘宋’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資治通鑑綱目≫의 뜻이 은미하다.[晉惠之篇 上書陳留王曹奐卒 下書晉人葬之 雖晉篇也 復再書晉 予晉厚也 於是非宋篇也 宋葬晉帝 其不書宋 何 削之也 曷爲削之 身親弑焉 而禮葬之 以爲欺 與晉人不可同日語矣 是故魏葬漢孝獻 書魏 晉葬陳留王 書晉 陳葬梁孝元 書陳 石晉葬故唐主 書晉 惟宋葬晉恭帝 不書宋 綱目之意 微矣]” ≪書法≫ ‘晉惠之篇’은 ≪자치통감강목≫ 제17권 하 晉 惠帝 太安 元年(302)을 말하는데, 그 기사는 “陳留王曹奐卒 晉人葬之 諡曰魏元皇帝”라고 되어 있다.
역주6宋豫章太守謝瞻卒 :
“太守는 ‘卒’을 기록하지 않는데 謝瞻을 ‘卒’이라고 한 것은 현명함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宋․北魏로부터 陳나라까지 여러 신하들이 卒하였을 적에 관직을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현명하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官爵을 갖추어 ‘卒’이라고 기록한 사람은 19명이다.[太守不卒 卒瞻 錄賢也 綱目自宋魏至陳 諸臣卒 無不書官者 非賢不錄也 具官爵卒者十九人]” ≪書法≫
역주7宋臺 :
東晉 시기에 劉裕가 宋公이 되었을 때 彭城에 宋臺(宋公의 정치기구)를 세웠다. 臺는 後漢 때에는 尙書臺나 御史臺의 약칭으로 쓰였으나, 晉나라와 南朝 시대에는 朝廷이나 禁省, 중추가 되는 정치기구의 대칭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禁城을 臺城, 禁軍을 臺軍이라 하였다.
역주8布衣의 선비 :
원문 ‘素士’를 번역한 것으로 布衣는 베로 만든 의복으로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보통 평민을 지칭하나 여기서는 문벌귀족이 아닌 한미한 가문 출신을 가리킨 것이다. 본서 28쪽에 나오는 布衣도 같다.(≪資治通鑑新註≫, 陝西人民出版社,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