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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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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徽二年이요 魏延興四年이라
夏五月 宋江州刺史桂陽王休範擧兵反하여 攻建康하니 右衛將軍蕭道成 擊斬之하다
休範하여 帥衆二萬騎五百하고 發尋陽하여 以書與諸執政호되 稱楊運長等 蠱惑先帝하여 使建安巴陵으로 無罪被戮하니 請誅之라하니 朝廷惶駭
蕭道成曰 昔上流謀逆 皆因淹緩致敗注+謂義宣․子勛等也.하니 休範必遠懲前失하여 輕兵急下하여 乘我無備
今宜頓兵新亭白下하여 堅守宮城東府石頭하여 以待賊至注+宮城, 卽臺城也.하면 千里孤軍 後無委積하고 求戰不得하여 自然瓦解하리니 我請頓新亭하여 以當其鋒이면 破賊必矣리라
袁粲聞難하고 扶曳入殿注+粲居喪毀瘠, 故扶曳而入.하니 內外戒嚴하여 道成 出屯新亭하고 張永 屯白下하고 沈懷明 戍石頭러니
道成 治壘未畢 休範前軍 已至新林하여 捨舟步上注+胡三省曰 “新林浦去今建康城二十里.”하고 遣其將丁文豪하여 別趣臺城하고 而自以大衆으로 攻新亭이어늘
道成 拒戰移時하니 外勢愈盛이라 衆皆失色하더라 休範 白服登城하여 以數十人自衛어늘 校尉黃回張敬兒謀詐降以取之하여 乃出城放仗大呼稱降하니
休範信之하여 置於左右한대 回目敬兒하여 奪休範防身刀斬之하고 持首歸新亭하니 道成遣送詣臺할새
道逢南軍하여 送者棄首於水하고 挺身得達하여 唱云 已平而無以爲驗하니 人莫之信이요 休範將士 亦不之知러라
其將杜黑騾 攻新亭甚急이어늘 道成拒戰하여 自晡達旦 矢石不息이러니 會丁文豪 破臺軍進至朱雀桁이어늘 黑騾 遂北趣之하니
王道隆 將羽林精兵하고 在門內하여 召劉勔於石頭한대 勔至하여 命撤桁以折南軍之勢하니 道隆怒曰 賊至 但當急擊이니 寧可開桁自弱邪아하니 勔不敢復言하더라
道隆 趣勔進戰하니 渡戰敗死注+趣, 讀曰促.하다 黑騾等 乘勝渡淮하니 道隆走還이어늘 黑騾追殺之
黃門侍郎王蘊 重傷而踣러니 或扶之以免注+蘊, 景文之兄子也.하니 於是 中外大震하여 白下石頭之衆 皆潰하다
先是 月犯右執法하고 太白犯上將注+太微南蕃中二星曰端門, 東曰左執法, 西曰右執法. 東蕃四星, 其北曰上將. 西蕃四星, 南第一星亦曰上將.이어늘 或勸劉勔解職한대 勔曰 吾執心行己 無愧幽明하니 災眚之來 避何可免이리오
勔晚年 頗慕高尙하여 立園宅하여 名東山하고 罷遣部曲이어늘 蕭道成謂曰 將軍受顧命하여 輔幼主而深尙從容하고 廢省羽翼하니 一朝事至 悔可追乎아하니 勔不從而敗하다
褚淵弟澄 爲撫軍長史하여 開東府門하여 納南軍하고 擁安成王準하여 據東府러니 中書舍人孫千齡 開門出降하니 宮省恇擾하여 衆莫有鬪志러니
俄而丁文豪之衆 知休範已死하고 稍欲退散이어늘 許公輿 詐稱桂陽王在新亭하니 士民惶惑하여 詣壘投刺者以千數어늘
道成 皆焚之하고 登城謂曰 劉休範 已就戮하여 屍在南岡下注+南岡, 即勞山之岡也. 以在新亭城南, 故謂之南岡. 我乃蕭平南也로라 諸君諦視之하라 刺皆已焚하니 勿懼也注+道成之出屯新亭也, 加平南將軍. 諦, 音帝, 審也.하라
卽遣陳顯達等하여 將兵入衛하니 袁粲慷慨하여 謂諸將曰 今寇賊已逼하고 而衆情離沮하니 孤子受先帝付託하여 不能綏靖國家注+粲時居喪, 故自稱孤子.하니 請與諸君으로 同死社稷이라하고
被甲上馬하여 將驅之러니 於是 顯達等 引兵出戰하여 大破黑騾文豪하여 皆斬之하고 進克東府하니 餘黨悉平하다
柔然遣使如宋하다
◑六月 以蕭道成爲中領軍하다
道成 與袁粲褚淵劉秉으로 更日入直決事하니 號爲四貴러라
宋荊州刺史沈攸之等 攻江州克之하다
休範之反也 沈攸之謂僚佐曰 桂陽 必聲言我與之同이니 若不顚沛勤王이면 必增朝野之惑注+顚沛勤王者, 危難之際, 奔走顚仆以從王事也.이라하고
乃與徐郢湘雍으로 同討尋陽하여 殺休範二子而還注+徐․郢․湘․雍, 謂南徐州刺史建平王景素․郢州刺史晉熙王燮․湘州刺史王僧虔․雍州刺史張興世. 景素, 宏之子也.하다
魏罷門房之誅하다
魏詔曰 下民兇戾하여 不顧親戚이어늘 一人爲惡 殃及闔門하니 爲民父母하여 深所愍悼 自今으로 非謀反大逆外叛이면 罪止其身하라 於是 始罷門房之誅注+門誅者, 誅其一門, 房誅者, 誅其一房. 時河北大族如崔如李, 子孫分派, 各自爲房.하다
魏太上 勤於爲治하여 賞罰嚴明하고 愼擇牧守하여 進廉退貪이라 諸曹疑事 舊多奏決하고 又口傳詔勅 或致矯擅이라
至是 命事無大小 皆據律正名하여 不得爲疑하여 奏合則制可하고 違則彈詰하여 盡用墨詔
由是 事皆精審注+合, 謂與律合也. 制可者, 手詔可其所奏. 違, 謂悖於律也. 彈詰者, 劾問之. 墨詔, 非口傳之詔.하고 尤重刑罰하여 大刑 多令覆鞫하여 或囚繫積年하니 群臣頗以爲言注+大刑, 謂死罪.이어늘
太上曰 滯獄誠非善治어니와 不猶愈於倉猝而濫乎 夫人幽苦則思善하나니 故智者 以囹圄爲福堂하니 朕特苦之하여 欲其改悔而矜恕爾
由是 囚繫雖滯 而所刑 多得其宜하고 又以赦令長姦이라하여 故自以後 不復有赦注+長, 展兩切.하다
秋七月 柔然寇魏敦煌하다
柔然寇魏敦煌이어늘 尉多侯擊破之注+多侯, 眷之子也.하다 尙書奏호되 敦煌僻遠하고 介居二寇之間하니 恐不能自固 請徙之涼州注+介, 猶間也. 二寇, 謂吐谷渾․柔然也.하니이다
群臣皆以爲然호되 給事中韓秀曰 敦煌雖逼強寇 然人習戰鬪하니 足以自全而能隔閡二虜하여 使不得通注+閡, 古礙字.하니 今徙就涼州 不唯有蹙國之名이요 且姑臧去敦煌千餘里 防邏甚難이요
二虜交通하리니 騷動涼州 則關中不得安枕이요 又士民重遷하여 或招外寇 爲國深患이니 不可不慮也라하니 乃止하다
粲固辭하여 求反居墓所호되 不許하다
淵以褚澄爲吳郡한대 司徒長史蕭惠明言於朝注+惠明, 惠開之弟也.曰 褚澄 開門納賊이어늘 更爲股肱大郡하고 王蘊 力戰幾死호되 棄而不收하니 賞罰如此하니 何憂不亂이리오하니 淵甚慙하여 乃以蘊爲湘州刺史하다
冬十一月 하다
宋主昱 在東宮時 喜怒乖節이어늘 太宗 屢勅陳太妃하여 痛捶之러니 及即位 內畏太后太妃하고 外憚諸大臣하여 未敢縱逸이러니 自加元服으로 內外稍無以制러라
自以李道兒之子故 每微行 自稱李將軍이라하고 常著小袴衫하고 營署巷陌 無不貫穿하여 或夜宿客店하고 或晝臥道傍하여 排突廝養하여 與之交易하고 或遭慢辱이라도 悅而受之注+析薪爲廝, 炊烹爲養, 又廝給養馬者.하더라
魏建安王陸馛卒하다
諡曰貞이라하다


송주宋主 유욱劉昱 원휘元徽 2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연흥延興 4년이다.
[] 여름 5월에 나라 강주자사江州刺史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건강建康을 공격하자, 우위장군右衛將軍 소도성蕭道成이 맞서 싸워 목을 베었다.
[] 유휴범劉休範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 2만과 기병 5백을 인솔하고 심양尋陽을 출발하여 편지를 써서 정치를 맡은 자들에게 보내어 “양운장楊運長 등이 선제先帝(유욱劉彧)를 미혹하게 하여 건안왕建安王파릉왕巴陵王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게 하였으니, 주벌하기를 바란다.”라고 하니 조정에서 당황하고 놀랐다.
소도성蕭道成이 말하기를 “옛날에 상류에서 반역을 도모했을 적에 모두 습격이 지연된 것으로 인해 실패를 하였으니注+① 〈“昔上流謀逆 因淹緩致敗”는〉 南郡王 劉義宣과 晉安王 劉子勛 등을 말한다., 유휴범은 반드시 이전의 실패를 깊이 경계하여 경무장한 군사들로 급히 내려와 우리가 방비를 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할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신정新亭백하白下에 병력을 주둔시켜 궁성宮城注+② 宮城은 臺城이다., 동부東府, 석두石頭를 견고히 방비하여 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천 리를 달려온 외로운 군대는 후방에 쌓아놓은 곡식이 없어서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가 없어 자연히 와해될 것입니다. 저는 청컨대 신정新亭에 주둔하면서 그들의 선봉 부대와 맞서고자 하니, 그렇게 하면 필시 적들을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원찬袁粲이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축을 받고 궁전으로 들어오니注+③ 袁粲이 喪中이라 파리하고 수척하였기 때문에 부축해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조정 내외가 엄히 경계를 하였다. 소도성은 신정新亭에 주둔하고, 장영張永백하白下에 주둔하고, 심회명沈懷明석두石頭를 지키고 있었는데,
소도성이 군진을 수리하기도 전에 유휴범의 선봉 부대가 이미 신림新林注+④ 胡三省이 말하기를 “新林浦는 지금 建康城과의 거리가 20리이다.” 하였다. 도착하여 배를 버리고 강안으로 올라와 도보로 이동하였고 유휴범이 장수 정문호丁文豪를 보내어 별도로 대성臺城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유휴범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신정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소도성이 대항하여 전투를 치르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는데, 외부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지자, 무리들이 모두 얼굴색이 변했다. 유휴범이 흰옷을 입고 성(건강성建康城 남쪽 임창관臨滄觀)에 올라 수십 명을 데리고 자신을 호위하였는데, 교위校尉 황회黃回장경아張敬兒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유휴범을 붙잡기를 도모하여 성을 나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겠다고 크게 소리를 지르니,
유휴범이 믿고 곁에 두었는데, 황회가 장경아에게 눈짓을 하여 유휴범의 방신도防身刀를 빼앗아 목을 베고는 수급을 가지고 신정으로 돌아왔다. 소도성이 사람을 보내어 머리를 가지고 대성臺城으로 가도록 하였는데,
수급을 가지고 가던 사람이 가는 길에 유휴범의 남군南軍을 만나서 유휴범의 수급을 물에 버리고 몸만 빠져나와서 도착을 해서는 “이미 평정되었다.”라고 소리쳤으나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자, 사람들이 믿지 않았고, 유휴범의 장사將士들도 이를 알지 못했다.
[] 유휴범劉休範의 장수 두흑나杜黑騾가 아주 급하게 신정新亭을 공격하자, 소도성蕭道成이 그를 대적하면서 에서 아침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활을 쏘고 돌을 던졌다. 마침 정문호丁文豪대군臺軍(관군)을 격파하고 진격하여 에 도착하자, 두흑나가 드디어 북쪽으로 향하였다.
왕도륭王道隆우림군羽林軍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주작문 안에 있었는데, 유면劉勔석두石頭에서 불렀다. 유면이 도착하여 주작항을 철거하여 남군南軍의 공세를 꺾으라고 명령을 내리자, 왕도륭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적이 도착하였으니 급히 공격해야 하는데, 어찌 주작항을 열어 스스로 나약함을 보인단 말인가.”라고 하니, 유면은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왕도륭이 유면에게 나가서 공격하라고 재촉하니注+① 趣(재촉하다)는 促으로 읽는다. 유면이 주작항을 건너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두흑나 등이 승기를 타고 진회하秦淮河를 건너자 왕도륭이 도주하여 돌아가니, 두흑나가 추격하여 그를 죽였다.
황문시랑黃門侍郎 왕온王蘊注+② 王蘊은 王景文의 형의 아들이다. 중상을 입고 넘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부축해주어 화를 면했다. 이때에 궁전 안팎이 크게 떨게 되었고, 백하白下석두石頭의 군대가 모두 궤멸되었다.
이에 앞서 달이 우집범성右執法星을 침범하고, 태백太白상장성上將星을 침범하자注+③ 太微垣 南蕃 중의 두 星을 ‘端門’이라 하는데, 동쪽을 ‘左執法’, 서쪽을 ‘右執法’이라 한다. 東蕃에 네 星이 있으니, 북쪽을 ‘上將’이라 하고, 西蕃에 네 星이 있는데, 네 星 중 남쪽 첫 번째 星도 ‘上將’이라 한다., 어떤 이가 유면에게 사직하라고 권하였다. 유면이 말하기를 “나는 심지가 굳고 행실이 바라서 천지신명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닥쳐오는 재앙을 피한다고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유면은 만년에 고상한 풍모를 몹시 좋아하여 정원과 집을 짓고서 ‘동산東山’이라 이름하고는 부곡部曲도 풀어 보내주니, 소도성이 말하기를 “장군은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군주를 보필하면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없애시니, 하루아침에 일이 닥치면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면이 따르지 않았다가 패하였다.
[] 저연褚淵의 동생 저징褚澄무군장사撫軍長史가 되어 을 열어 남군南軍을 받아들이고, 안성왕安成王 유준劉準을 옹립하여 동부를 점거하였는데, 중서사인中書舍人 손천령孫千齡이 문을 열고 나가서 항복하니 궁중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동요하여 군사들이 싸울 의지가 없었다.
얼마 뒤에 정문호丁文豪의 군대가 유휴범劉休範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차츰 물러나 흩어지려고 하니 허공여許公輿가 거짓으로 계양왕桂陽王(유휴범)이 신정新亭에 있다고 말하자, 사민士民들이 두려워하고 당혹스러워하여 소도성蕭道成의 진지로 와서 명함을 내던진 사람이 천 명을 헤아렸는데,
소도성이 모두 불태우고는 성에 올라 말하기를 “유휴범이 이미 죽어 시체가 남강南岡注+① 南岡은 勞山의 산등성이이다. 新亭城 남쪽에 있기 때문에 南岡이라 한 것이다. 아래에 있다. 나는 소평남장군蕭平南將軍이니, 여러분들은 자세히 보시오.注+② 蕭道成이 나와서 新亭에 주둔할 때에 平南將軍의 직위를 더해주었다. 諦는 음이 帝이니, 살핀다는 뜻이다. 명함은 모두 이미 불태웠으니, 두려워 마시오.”라고 하였다.
곧장 진현달陳顯達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원찬袁粲이 비분강개하여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지금 도적이 이미 핍박하고 군대는 마음이 떠나서 기가 꺾였으니, 나는注+③ 袁粲이 당시에 喪中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孤子라고 한 것이다. 돌아가신 황제의 부탁을 받고서 나라를 안정시킬 수가 없으니, 그대들과 사직을 위해 죽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그들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때에 진현달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전투를 벌여 두흑나杜黑騾정문호丁文豪를 크게 격파하여 모두 목을 베고 진군하여 동부에서 승리하니 남은 무리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 유연柔然이 사신을 나라에 보냈다.
[] 6월에 소도성蕭道成중령군中領軍으로 삼았다.
[] 소도성蕭道成원찬袁粲, 저연褚淵, 유병劉秉과 함께 날을 바꾸어가며 당직을 서면서 정사를 결정하도록 하니 사귀四貴라고 불렀다.
[] 나라 형주자사荊州刺史 심유지沈攸之 등이 강주江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유휴범劉休範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심유지沈攸之가 속관들에게 말하기를 “계양왕桂陽王(유휴범)은 반드시 내가 자신과 함께했다는 것을 떠들어 말할 것이니, 만일 위태롭고 곤란한 시기에 근왕勤王하지注+① “顚沛勤王”은 위태롭고 곤란한 시기에 전복된 곳에 달려가서 왕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 못한다면 필시 조야朝野의 의혹만 증대시킬 것이다.”라고 하고,
서주徐州, 영주郢州, 상주湘州, 옹주雍州注+② “徐․郢․湘․雍”은 南徐州刺史인 建平王 劉景素, 郢州刺史인 晉熙王 劉燮, 湘州刺史인 王僧虔, 雍州刺史인 張興世를 말한다. 劉景素는 劉宏의 아들이다. 함께 심양尋陽을 토벌하여 유휴범劉休範의 두 아들을 죽이고 돌아왔다.
[] 북위北魏문주門誅방주房誅의 형벌을 폐지하였다.
[] 북위北魏에서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백성들이 흉폭하고 사나워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데, 한 사람이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이 가문에까지 미치게 된다. 짐은 백성의 부모가 되어 깊이 우려하고 애도하니 지금부터 모반을 꾀하여 대역죄를 짓거나 외부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처벌은 당사자에게만 제한한다.”라고 하니, 비로소 문주門誅방주房誅 같은 형벌을注+① 門誅는 一門을 죽이는 것이고, 房誅는 一房을 죽이는 것이다. 당시에 河北의 崔氏, 李氏와 같은 이름난 종족은 자손이 분파하여 각자 房을 만들었다. 폐지하였다.
북위北魏 태상太上(탁발홍拓跋弘)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힘을 써서 상벌을 엄격히 하고 분명하게 하고, 지방관을 신중히 선발하여 청렴한 사람을 진급시키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물러나게 하였다. 여러 관청에서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옛날에는 대부분 상주하여 결정하게 하였으며, 또 입으로 전달한 조칙이 고쳐지기도 하고 제멋대로 전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명을 내려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모두 법률에 의거하여 명칭을 바르게 해서 의심이 생기는 것이 없도록 하여 상주한 것이 법률에 합치하면 제가制可를 해주고 어긋나면 탄핵하였는데, 모두 묵조墨詔를 사용하였다.注+② 合은 법률과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制可”는 손수 조서를 써서 상주한 문서에 可하다고 하는 것이다. 違는 법률에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 “彈詰”은 탄핵하여 따지는 것이다. “墨詔”는 입으로 전하는 명령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이 모두 정밀하고 상세해지고, 형벌을 더욱 중시하여 사형死刑注+③ “大刑”은 사형이다. 대부분 반복해서 국문을 하게 하여 때로는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기도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제법 이 일에 대해 말을 하자,
태상太上이 말하기를 “옥에 가두는 것은 진실로 좋은 통치 방법이 아니지만, 오히려 별안간에 결정하여 남용하는 것보다 좋지 않은가. 사람이 갇혀서 고초를 겪으면 생각이 착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감옥을 복당福堂으로 여기니, 짐이 특별히 고통스럽게 하여 그들이 허물을 고치고 뉘우치게 하여 가엾게 여겨 용서해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비록 오래 갇혀 있더라도 형별의 판결은 대부분 정당하게 이루어졌고, 또 사면령이 간사함을 조장한다고注+④ 長(조장하다)은 展兩의 切이다. 하여 이 때문에 연흥延興 연간 이후로 다시 사면하는 일이 없었다.
[] 가을 7월에 유연柔然북위北魏 돈황敦煌을 침입하였다.
[] 유연柔然북위北魏돈황敦煌을 침입하자, 위다후尉多侯注+① 尉多侯는 尉眷之의 아들이다.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상서尙書에서 상주하기를 “돈황은 한쪽에 치우쳐 멀리 있는데다 두 적들 사이에 끼어 있어注+② 介(끼이다)는 間과 같다. “二寇”는 吐谷渾과 柔然을 말한다. 스스로 지키지 못할까 두려우니, 양주涼州로 옮기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한수韓秀가 말하기를 “돈황이 비록 강한 적들에게 핍박을 받지만, 사람들이 전투에 익숙하니 충분히 스스로를 보존하고 두 오랑캐를 가로막아注+③ 閡(막다)는 礙의 古字이다. 내통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옮겨서 양주涼州로 가게 하면 나라를 축소시켰다는 말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고장姑臧에서 돈황까지의 거리가 1천여 리나 되니 방어와 순찰이 몹시 어렵습니다.
두 오랑캐가 서로 내통을 할 것이니, 그리하여 양주涼州를 시끄럽게 하고 어수선하게 하면 관중關中의 사람들이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할 것이며, 또 관리와 백성들 중에는 옮기는 것을 어렵게 여겨 외부의 적을 끌어들이게 되면 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 9월에 나라가 원찬袁粲중서감中書監으로 삼고 사도司徒를 겸하게 하고, 저연褚淵상서령尙書令으로 삼고, 유병劉秉단양윤丹陽尹으로 삼았다.
[] 원찬袁粲이 굳이 사양하여 돌아가서 〈삼년상三年喪을 마치기 위해〉 시묘살이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저연褚淵저징褚澄오군태수吳郡太守로 삼았는데, 사도장사司徒長史 소혜명蕭惠明注+① 蕭惠明은 蕭惠開의 아우이다. 조정에 아뢰기를 “저징이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는데, 다시 팔다리와 같은 큰 을 다스리게 하고, 왕온王蘊은 힘써 싸우다가 거의 죽을 뻔했는데 내치고 등용하지 않으니, 상벌이 이와 같아서야 어찌 천하가 어지럽지 않을까를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저연이 몹시 부끄러워하였고, 마침내 왕온을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삼았다.
[] 겨울 11월에 송주宋主(유욱劉昱)가 관례冠禮를 올렸다.
[] 처음에 송주宋主 유욱劉昱동궁東宮 시절에 좋아하고 성을 내는 것이 일정함이 없었는데, 태종太宗(유욱劉彧)가 누차 에게 명하여 심하게 회초리를 치게 하였다. 즉위하고 나서는 안으로는 태후太后태비太妃를 두려워하고 밖으로는 여러 대신을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는데,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는 안팎으로 차츰 재제를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스스로 이도아李道兒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행을 나갈 때마다 늘 짧은 바지와 적삼을 입고서 관청과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밤에는 객점에서 묵기도 하고 낮에는 길가에 누워서 땔나무를 하거나 밥 짓는 사람들과注+① 장작을 쪼개는 것이 廝이고, 불을 때어 익히는 것이 養이다. 또 〈“廝養”은〉 노역하고 말을 기르는 자이다. 다투기도 하였고, 그들과 물건을 주고받기도 하였으며, 그들에게 모욕을 당하더라도 기뻐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 북위北魏 건안왕建安王 육발陸馛하다.
[] 시호諡號이라 하였다.


역주
역주1 晡時 : 申時를 말하며 오후 3시에서 5시까지이다.
역주2 朱雀桁 : 커다란 부교를 말한다. 이 다리가 주작문 밖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역주3 東府門 : 建康城 남쪽의 宰相府 문을 말한다.
역주4 延興 : 北魏 孝文帝 재위 시기인 471년에서 476년을 가리킨다.
역주5 宋以袁粲……劉秉爲丹陽尹 : “지난해에 袁粲이 모친상으로 관직을 떠난 것을 기록하고 이때에 다시 기용하였는데 服中에 기용한 것[起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원찬을 인정해준 것이다. 원찬이 모친상을 만나 관직을 떠났다가 國難으로 조정에 들어와 부임하고 이때에 또 굳이 돌아가서 시묘살이하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은 뒤에 받아들였으니 進退의 임기응변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起復’을 기록하지 않았다. 무릇 ‘起復’을 기록한 것은 나무란 것이다. 이 까닭으로 袁粲에게는 國難 때문에 ‘起復’을 기록하지 않고(이해(474)) 杜暹은 전쟁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唐 玄宗 開元 12년(724)).[去年書粲以母喪去職矣 於是復用 則其不書起復 何 予粲也 粲以母喪去職 以國難入赴 於是又固求反墓 不許而後受之 可謂得進退之權矣 故不書起復 凡書起復 譏也 是故袁粲以國難不書(是年) 杜暹以金革不書(唐玄宗開元十二年)]” ≪書法≫
역주6 宋主冠 : “이때에 宋主(劉昱)는 나이가 12세였는데 元服(冠禮)를 한 이후로 더욱 꺼리는 것이 없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황제의 관례를 기록한 것이 13번인데(漢 惠帝 4년(B.C.191)에 자세하다.), 漢 昭帝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가 없었고 宋主 劉昱보다 나이가 적은 경우가 없어서 이 이외에 나이가 많거나 적은 경우에 황제의 관례를 기록한 것이 없다.[於是 宋主年十有二 自加元服 益無所憚矣 綱目書帝冠十有三(詳漢惠帝四年) 莫長於漢昭帝 莫少於宋主昱 舍是無書帝冠者矣]” ≪書法≫
역주7 陳太妃 : 劉昱의 생모인 陳妙登을 말한다.
역주8 자신을……하고 : 劉昱이 본래 李道兒의 첩이었던 陳氏를 明帝가 후궁으로 삼고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태어났으므로 유욱은 劉氏가 아니라 李氏라는 설에서 나온 말이다.(≪南史≫ 권3 〈明帝本紀〉)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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