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숙종 효장황제肅宗 孝章皇帝장화章和 원년이다. 봄 3월에 호강교위 부육護羌校尉 傅育이 강족羌族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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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6월에 사도 환우司徒 桓虞가 면직되니, 원안袁安을 사도司徒로 삼고 임외任隗를 사공司空으로 삼았다.注+임외任隗는 임광任光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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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에 선비鮮卑가 북흉노北匈奴를 공격하여 우류선우優留單于를 참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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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호강교위 장우護羌校尉 張紆가 강족羌族을 공격하여 그 추장 미오迷吾를 참살하니, 그의 아들 미당迷唐이 대유곡大榆谷과 소유곡小榆谷을 점거하고서 배반하였다.注+≪수경水經≫에 “하수河水가 서해군西海郡 남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윤천允川을 지나 대유곡大楡谷과 소유곡小楡谷 북쪽을 지나가는데, 대유곡과 소유곡은 토지가 비옥하여 강족羌族들이 의지해 사는 곳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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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개원改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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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여러 번 아름다운 상서가 있었는데 말하는 자들이 모두 좋은 징조라고 아뢰자注+≪후한서後漢書≫ 〈장제본기章帝本紀〉에 “근자에 봉황鳳凰이 잇달아 모여들고 기린이 함께 이르고 감로甘露가 밤중에 내리고 아름다운 곡식이 번식하고 지초芝草의 종류가 매년 매월 나타나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마침내 명하여 장화章和로 개원하였다.注+경章은 밝힘이니, 〈“장화章和”는〉 화기和氣가 상서를 이르게 함을 밝힌 것이다.
태위연 하창太尉掾 何敞이 홀로 이것을 싫어하여 송유宋由와 원안袁安에게 이르기를 “상서祥瑞의 응험은 덕德에 따라 이르고 재이災異는 정사政事에 인연하여 생겨난다.
지금 이상한 새가 궁전의 지붕에 날아 앉고 괴이한 풀이 뜰가에 자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송유와 원안은 두려워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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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8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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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흉노北匈奴의 58개 부락部落이 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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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조포曹褒가 찬撰한 제도制度를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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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포曹褒가 옛 전장典章을 그대로 따르고 오경五經과 도참설圖讖說의 글을 섞어서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의 관례冠禮와 혼례婚禮, 길례吉禮와 흉례凶禮 등이 갖추어진 제도制度 총 150편을 차례로 엮어서 아뢰니注+“종시제도終始制度”는 제도를 차례로 엮어서 처음과 끝을 갖춤을 이른다.,
황제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통일되기 어렵다 하여 일단 받아들이고 다시 유사有司로 하여금 평론하여 아뢰게 하지 않았다.注+“평주平奏”는 행할 만한가의 여부를 평론하여 아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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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반초班超가 여러 나라의 병력을 징발하여 사차莎車를 공격해서 항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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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반초班超가 우전于窴 등 여러 나라의 병력 2만 명을 징발하여 사차莎車를 공격하니, 구자왕龜玆王이 온숙温宿 등의 병력 도합 5만 명을 징발하여 사차를 구원하였다.注+온숙溫宿은 서역西域에 있던 소국小國의 명칭으로 온숙성溫宿城을 치소治所로 하였는데, 장안長安과 8,350리 떨어져 있었다.
반초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 병력이 적어서 상대할 수가 없으니, 각각 흩어져 가서 밤에 북소리를 기다려 출발한다.” 하고는, 은밀히 사로잡은 포로들을 풀어주었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그 계책이 각각 흩어져 가는 것만 못하니, 우전于窴은 이로부터 동쪽으로 가고 장사長史인 나(반초班超) 또한 여기에서 서쪽으로 돌아간다.” 하였다. 수須는 기다림이다. “야고성夜鼓聲”은 척鼜(척)을 치는 소리이다. ≪주례周禮≫ 〈지관 고인地官 鼓人〉에 “군대에서는 밤에 척鼜을 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注에 “척鼜은 밤에 경계하고 수비할 때 치는 북이다. ≪사마법司馬法≫에 ‘날이 저물 때에 북을 4번 치는 것을 대척大鼜이라 하고, 한밤중에 3번 치는 것을 신계晨戒라 하고, 날이 밝을 때에 5번 치는 것을 발구發昫라 한다.’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삼척三鼜’이란 것이다. 여기에서는 한밤중의 북소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음완소득생구陰緩所得生口”는 포로들로 하여금 돌아가서 반초가 장차 흩어져 갈 것임을 말하게 한 것이다. 척鼜은 천력千歷의 절切이다. 구昫는 휴구休具의 절切이다.
구자왕이 이 말을 듣고, 자신은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서쪽 경계에서 반초를 막고, 온숙왕温宿王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동쪽 경계에서 우전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注+요徼는 이소伊消의 절切이니 가로막음이다.
반초가 두 오랑캐가 이미 출동한 것을 알고는 은밀히 여러 부部를 불러 무장시키고서 닭이 울 무렵 말을 달려 사차의 진영으로 가니, 호인胡人들이 크게 놀라 혼란하여 사방으로 급히 달아났다.
사차가 마침내 항복하고 구자 등이 각각 후퇴하여 흩어지니, 이로부터 위엄이 서역西域에 진동하였다.
역주
역주1改元 :
“改元한 것을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아첨하는 말을 믿은 것을 비난한 것이다. 이 때문에 漢나라가 말하는 자들의 아첨을 좋아하여 章和로 개원하자 ‘改元’이라고 썼고, 魏나라가 寇謙之의 허탄한 말에 혹하여 眞君이라고 개원하자 ‘改元’이라고 썼고, 隋나라가 袁充의 거짓말을 믿고 仁壽로 개원하자 ‘改元’이라고 썼으니, 이는 모두 비난한 것이다.[改元不書(改) 此何以書 譏信諛也 是故漢好言者之諛而改章和 則書改元 魏惑謙之之誕而改眞君 則書改元 隋信袁充之誣而改仁壽 則書改元 皆譏之也]다” ≪書法≫
역주2(霄)[宵] :
저본에는 ‘霄’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에 의거하여 ‘宵’로 바로잡았다.
역주3曹褒奏所撰制度 :
“制度는 무엇인가. 전에 詔令을 내려 禮를 정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禮라고 쓰지 않았는가. 예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圖讖記까지 뒤섞어 넣었으니 이것을 예라고 할 수 있겠는가. ‘撰한 制度[所撰制度]’라고 쓴 것은 다만 曹褒가 撰한 것이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 이 때문에 예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조포처럼 앞에서는 ‘예를 정했다.[定禮]’고 쓰고, 뒤에서는 ‘撰한 제도[所撰制度]’라고 쓴 것이다. 만일 예가 되는 것을 인정한 경우에는 唐나라의 張說처럼 앞에서는 ‘예를 정했다.[定禮]’고 쓰고 뒤에서는 ‘開元禮가 이루어졌다.[開元禮成]’고 쓴 것이다.[制度 何 前所詔定禮也 然則曷爲不以禮書之 不成之爲禮也 雜以讖記 是可以爲禮乎 書曰所撰制度 以爲徒褒之所撰云耳 是故不成之爲禮 則曹褒前書定禮而後書所撰制度 苟成之爲禮 則張說前書定禮而後書開元禮成]” ≪書法≫ “지난해에 막 ‘曹褒에게 詔令을 내려 漢나라의 禮를 제정하도록 했다.’고 썼었는데, 금년에는 ‘撰한 制度를 아뢰었다.’고 썼으니, 어쩌면 그리도 쉽단 말인가. 前漢의 禮儀는 叔孫通에게서 정해졌고, 後漢의 儀禮는 曹褒에게서 정해져서 한 왕조의 큰 법전이 마침내 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왔으니, 그 잘잘못은 진실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去年方書詔曹褒定漢禮 今年已書奏所撰制度 何其易耶 夫以先漢禮儀 定於叔孫 後漢儀禮 定於曹褒 一代大典 乃出此二人之手 其得失 固自不言 可知矣]”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