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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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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中大通六年이요 魏永熙三年이요 東魏孝靜帝善見天平元年이라 ○是歲 魏分爲二하니 凡三國이라
春正月 魏大丞相歡 攻紇豆陵伊利하여 執之하다
髙歡 使侯景으로 招紇豆陵伊利하되 伊利不從이어늘 撃之於河西하여 擒之하고 遷其部落於河東注+① 河西, 五原河之西也, 河東, 亦五原河之東.하니
魏主 讓之曰 伊利 不侵不叛하여 爲國純臣이어늘 王忽伐之하니 詎有一介行人 先請之乎注+② 一介行人, 猶言一介使者. 或曰 “一介, 喩至微也.”
◑ 魏泰州刺史侯莫陳悅 殺賀抜岳이어늘 以宇文泰 統其軍注+① 泰州, 本傳作秦州.하다
魏賀拔岳 將討曹泥할새 使都督趙貴 至夏州하여 與宇文泰謀之한대 曰 曹泥 孤城阻遠이라 未足憂 侯莫陳悅 貪而無信하니 宜先圖之라하되 不聽하고 召悅하여 會於髙平하여 與共討泥할새
既得翟嵩之言이라 乃謀取岳이러라 數與悅宴語어늘 長史雷紹하되 不聽이러니 果誘岳斬之하니
岳衆 皆不敢動하되 而悅 心猶豫하여 不即撫納하고 還屯水洛城하니 岳衆 散還平涼하여 未有所屬注+① 九域志 “水洛城, 在德順軍西南一百里.”이러라
趙貴 曰 宇文夏州 英略冠世하여 遠近歸心하고 賞罰嚴明하여 士卒用命하니 若迎而奉之하면 大事濟矣리라하다
都督杜朔周 請輕騎告哀且迎之注+② 朔周本姓赫連, 曾祖庫多汗避難改焉, 宇文泰命復其舊姓, 名之曰達.러니
既至 與將佐賓客으로 議去留한대 前太中大夫韓褒 曰 此天授也 又何疑乎 井中蛙耳 使君往하면 必擒之注+③ 後漢馬援往觀公孫述, 歸謂隗囂曰 “子陽, 井底蛙耳.”리라하고
以爲悅 已有賀拔之衆하여 圖之實難하니 願且留以觀變이라한대
曰 悅 既害元帥어든 自應乗勢直據平涼이어늘 而退屯水洛하니 吾知其無能爲也 夫難得易失者 時也 若不早赴하면 衆心將離라하고
因與諸將으로 同盟討悅하고 輕騎赴平涼하니
民間 惶懼하여 逃散者多 軍士 欲掠之어늘 朔周 曰 宇文公 方伐罪弔民이어늘 奈何助賊爲虐乎아하고 撫而遣之하니 遠近 悅附하고 聞而嘉之하다
使侯景으로 招撫岳衆이러니 至安定遇之하여 謂曰 賀拔公 雖死 宇文泰 尙存하니 何爲者오하니 遂還하다
至平涼하여 哭岳哀慟하니 將士 悲喜러라 復使侯景張華原王基 勞泰한대 不受하고 欲刼留之하니 華原 不屈이어늘 乃遣之하다
還言泰 雄傑이니 請及其未定하여 擊滅之라하니 曰 卿 不見賀拔侯莫陳悅乎 吾當以計拱手取之하리라하다
魏主 遣元毗하여 慰勞岳軍하여 召還洛陽하고 并召侯莫陳悅하니 附髙歡이라 不肯應召어늘
泰因毗上表曰 臣岳 忽罹非命하여 都督冦洛等 令臣權掌軍事러니 今髙歡之衆 已至河東하고 侯莫陳悅 猶在水洛하며 士卒 多西人이라 顧戀鄉邑하니 乞少停緩하여 徐就東引注+① 河東, 亦謂五原河之東.하소서하다
魏主 乃以泰爲大都督하여 即統岳軍하다
岳之死也 都督李虎 奔荆州하여 説賀拔勝하여 使収岳衆한대 不從하여 而還이라가 爲歡别將所獲하여 送洛陽하니
魏主 方謀取關中이라 得虎甚喜하여 拜衛將軍하여 使就泰하다 歆之玄孫也
與悅書 責之曰 君 黨附國賊하여 共危宗廟하니 吾已發兵하여 爲賀拔公報讐하노니 指日相見注+② 言進兵討悅也. 左傳曰 “詰朝相見.”이리라하다
夏四月朔 日食하다
宇文泰 引兵上隴할새 軍令嚴肅하여 秋毫無犯하니 百姓大悅이러라 水洛이어늘 退保上邽하여 召南秦刺史李弼하여 與之拒泰注+① 泰州治上邽城. 弼妻, 悅之姨也.러니 擧城降하니 軍潰縊死어늘
入上邽하여 散府庫하여 以賞士卒하다 左右 竊一銀甕以歸어늘 知而罪之하고 剖賜將士하다
悅黨孫定兒 不下하고 有衆數萬注+② 定兒時爲豳州刺史.이러니 遣劉亮襲之한대 先豎纛於近城髙嶺注+③ 竪, 立也.하고 自將二十騎하여 馳入城하니
定兒 方置酒어늘 麾兵斬之하고 遙指城外纛하여 命二騎曰 出召大軍하라하니 城中 皆懾服하여 莫敢動이러라
先是 故氐王楊紹先 乗魏亂하여 逃歸武興하여 復稱王하니 氐羌吐谷渾 所在蜂起하여 自南岐 至瓜鄯 跨州據郡者 不可勝數러라
令弼 鎭原州하고 拔也惡蚝 鎭南秦州하고 可朱渾道元으로 鎭渭州하고 趙貴 行秦州事하여 徵豳涇東秦岐之粟하여 以給軍하니 楊紹先하여 稱藩送質注+④ 拔也, 虜複姓. 蚝, 七吏切. 惡蚝, 名也. 可朱渾, 虜三字姓, 道元其字, 名元.이러라
長史于謹 言於泰曰 明公 據關中險固之地하여 將士驍勇하고 土地膏腴하니 今天子 在洛하여 迫於群凶하니 若陳公懇誠하여 請都關右하여 挾天子以令諸侯하고 奉王命以討暴亂하면 此桓文之業이요 千載一時也라하니 善之하다
髙歡 復遣使하여 甘言厚禮 以結泰하되 不受하고 封其書以聞하니 魏主 命泰하여 引軍而東이어늘
使雍州刺史梁禦 入據長安하니 魏主 以泰爲關西大都督略陽縣公하고 承制封拜하다
六月 하다 秋七月 魏主脩 奔長安한대 入洛陽하여 推淸河王亶하여 承制决事러니 魏主 以宇文泰爲大將軍尙書令하다
侍中封隆之 言於髙歡曰 斛斯椿等 必搆禍亂이라하더니 孫騰 泄其言하여 椿 白魏主한대 隆之 及騰 皆逃就歡注+① 通鑑 “隆之與僕射孫騰爭尚魏主妹平原公主, 公主歸隆之. 騰泄其言於椿, 椿以白帝, 隆之懼, 逃還鄉里, 歡召隆之詣晉陽, 會騰帶仗入省, 擅殺御史, 懼罪, 亦逃就歡.”이러라
華山王鷙 在徐州어늘 使大都督邸珍으로 奪其管鑰注+② 鷙, 斤之玄孫也. 斤, 孤之子. 邸珍, 姓名.하다 建州刺史韓賢濟州刺史蔡儁 歡黨也 魏主 皆罷之하고
又增置勲府庶子騎官各數百人하여 欲伐晉陽注+③ 勳府庶子及騎官, 皆宿衛者也. 高歡時居晉陽.할새 下詔戒嚴云 欲伐梁하노니 發河南兵하여 詣洛陽하라하다
六月 密詔歡曰 宇文黑獺賀拔勝 有異志 故假南伐하여 潜爲之備하노니 王宜近爲形援注+④ 黑獺, 泰字. 近, 通鑑作共.하라
表曰 臣 今潜勒兵馬三萬하여 自河東渡하고 又遣庫狄干等하여 自來違津渡하고 婁昭等 討荆州하고 尉景等 討江左하여 皆勒所部하여 伏聽處分注+⑤ 來違津, 其地當在平城之西, 河津之要也.하노이다
魏主 知歡覺其變하고 乃止歡軍하니 歡亦表云 臣爲嬖佞所間하여 一旦受疑하니 陛下若垂信赤心커시든 願賜斟量하여 亟令廢出注+⑥ 斟, 酌也. 量, 度也. 出, 當作黜.하소서
魏主 使源子恭으로 守陽湖하고 汝陽王暹으로 守石濟注+⑦ 陽胡, 即陽壺城, 在邵郡白水縣. 白水, 漢河東之垣縣也. 按陽壺即崤谷之北岸, 魏主欲入關, 故先使子恭守之, 以防歡邀截.하고 又以賈顯智 爲濟州刺史하니 蔡儁 不受代어늘
魏主 愈怒하여 乃爲敕賜歡曰 聞庫狄干語하니 王云 本欲取懦弱者爲主 無事立此長君하여 使其不可駕御
今但作十五日行하면 自可廢之라하니 此論 自是王間勲人이니 豈出佞臣之口리오
隆之孫騰 逃去하되 不罪하니 王若盡誠이면 何不斬送 啓云 西去 而四道俱進하여 南渡洛陽하고 東臨江左하니 聞者 寧能不疑注+⑧ 西去, 言將西攻宇文泰也. 四道俱進, 謂河東․來違津及婁昭․尉景之兵也. 婁昭討荊州, 尉景臨江左, 皆南指洛陽. 河東․來違津之兵, 則牽制宇文泰, 使不得東下. 高歡之計實出於此, 魏主窺見其心術而言之.리오
若擧旗南指하면 縱無匹馬隻輪이나 猶欲奮拳而爭死하리니 假令還爲王殺하여 幽辱韲粉이라도 了無遺恨注+⑨ 韲, 醢. 粉, 碎也.이리라
王思政 言於魏主曰 髙歡之心 昭然可知 洛陽 非用武之地 宇文泰 乃心王室하니 今往就之하여 還復舊京하면 何慮不克이리잇가
魏主 深然之하여 遣侍郎柳慶하여 見泰於髙平이어늘 請奉迎輿駕한대
魏主 復私謂慶曰 朕欲向荆州하노니 何如注+① 時賀拔勝爲荆州刺史. 曰 關中 形勝이요 宇文泰 才略可依어니와 荆州 地非要害 南逼梁冦하니 臣愚未見其可케이다
東郡太守裴俠 帥兵詣洛이어늘 王思政 問以西巡之計한대 曰 宇文泰 已操戈矛어늘 寧肯授人以柄이리오 雖欲投之 恐無異避湯入火也로라
思政 曰 然則何如而可 曰 圖歡 有立至之憂하고 西巡 有將來之慮하니 且至關右하여 徐思其宜耳로라
思政 然之하여 乃進俠於魏主하여 授左中郎將하다
欲遷都於鄴커늘 魏主不可러니 至是하여 復謀遷都하여 遣騎鎭建興하고 益河東及濟州兵하고 擁諸州和糴粟하여 悉入鄴注+② 慕容永分上黨置建興郡, 魏爲建州.이러라
魏主 又以敕喻歡하여 令歸兵罷戍하고 送相州之粟하고 使蔡儁受代하고 邸珍出徐한대 不奉詔注+③ 相州治鄴城.러라
魏主 以廣寧太守任祥으로 兼僕射한대 棄官走渡河하여 據郡待歡注+④ 五代志 “建州沁水縣, 舊置廣寧郡.”이러라 魏主 乃下制書하여 數歡罪惡하고 召賀拔勝하여 赴行在所어늘
以問掾盧柔한대 曰 髙歡 悖逆하니 席卷赴都하여 與决勝負하여 死生以之 上策也 北阻魯陽하고 南并舊楚하고 東連兗豫하고 西引關中 中策也注+⑤ 江陵, 舊楚之郢都, 在其界內. 擧三荆之地하여 庇身於梁하면 功名皆去리니 下策也라하니 笑而不應注+⑥ 三荊, 荊州․東荊州․南荊州也.이러라
魏主 以宇文泰 爲關西大行臺하고 令遣騎奉迎한대 遂勒兵南出하여 以誅斛斯椿爲名하고 以髙敖曹爲前鋒이어늘 宇文泰 亦移檄州郡하여 數歡罪惡하고 自將大軍하여 發髙平하여 前軍 屯弘農하다
七月 魏主 親勒兵十餘萬하여 屯河橋하고 以斛斯椿으로 爲前驅하여 陳於山之北하니 椿 請帥精騎二千하여 夜渡河하여 掩其勞弊어늘 魏主 然之러니
侍郎楊寛 曰 假兵於人이면 恐生他變이니 椿 若有功이면 是滅一髙歡하고 生一髙歡矣니이다
魏主 敕椿停行하니 椿 歎曰 頃 熒惑 入南斗러니 今上 信左右間構하여 不用吾計하니 豈天道乎注+① 晉天文志曰 “南斗六星, 天廟也, 將有天子之事, 占於斗. 熒惑, 罰星, 入之, 天子不安其位, 後所謂天子下殿走是也.”아하다
宇文泰 聞之하고 謂左右曰 髙歡 數日 行八九百里하니 兵家所忌 當乗便撃之로되 而主上 以萬乗之重으로 不能度河决戰하여 方緣津據守하고 且長河萬里 扞禦爲難이니 若一處得度하며 大事去矣라하고
即以趙貴 自蒲坂濟하여 趣并州하고 遣李賢하여 將精騎一千하여 赴洛陽注+② 赴洛陽, 以迎魏主也.이어늘
魏主 使斛斯椿으로 與潁川王斌之鎭虎牢하고 賈顯智 鎭滑臺注+③ 斌之, 鑒之弟也.러니 顯智 陰約降於歡이어늘
軍司元玄 覺之하고 馳還請益師하니 遣大都督侯幾紹赴之하여 戰於滑臺東이러니 顯智 以軍降하고 戰死注+④ 侯幾, 虜複姓.하며 引軍度河러라
斌之 與椿爭權하여 還紿魏主云 歡兵 已至라한대 魏主 即召椿還하여 與南陽王寳炬淸河王亶廣陽王湛으로 以五千騎宿於瀍西하니
知魏主將西하고 亡者過半이요 亶湛 亦逃歸注+⑤ 亶, 擇之子. 湛, 深之子也. 瀍西, 瀍水之西, 在河南.러라
將軍獨孤信 單騎追魏主注+⑥ 獨孤部與魏俱起, 三十六大姓之一也.어늘 魏主 歎曰 將軍辭父母捐妻子而來하니 世亂識忠臣 豈虗言也아하다
明日 西奔長安이어늘 遂入洛陽하여 遣婁昭髙敖曹하여 帥勁騎하여 追魏主 不及이러라
魏主 糗漿乏絶하여 唯飲澗水러니 至稠桑하여 都督毛鴻賓 迎獻酒食하여 始解飢渴注+⑦ 弘農郡湖城縣有稠桑驛.이러라
集百官하여 責以處不諫諍出不陪從之罪하여 殺僕射辛雄以下數人하고 推淸河王亶爲大司馬하여 承制决事하다
宇文泰 使趙貴梁禦 帥甲騎奉迎魏主하여 循河西上할새 謂禦等曰 此水東流어늘 而朕西上하니 若得復見洛陽하여 親謁陵廟하면 卿等功也라하고 魏主及左右 皆流涕러라
備儀衛迎魏主하고 謁見於東陽驛하여 免冠流涕曰 臣不能式遏冦虐하여 使乗輿播遷하니 臣之罪也注+① 水經注 “渭水過長安城北, 又東過新豊, 東合西陽水, 又東合東陽水. 二水竝南出廣鄉原.”니이다 魏主 曰 朕 不德致冦 方以社稷委公하노니 公其勉之하라
遂入長安하여 以泰 爲大將軍雍州刺史兼尙書令하여 軍國之政 咸取决焉하고 别置二尙書하여 分掌機事하니 以毛遐周惠達 爲之하다 軍國草創이라 二人 積糧儲治器械簡士馬하여 魏朝頼之러라
先是 熒惑 入南斗하여 去而復還하여 留止六旬하니 梁主 以諺云 熒惑 入南斗하면 天子 下殿走라하여 乃跣足下殿하여 以禳之러니 及聞魏主西奔하고 慙曰 虜亦應天象邪아하다
魏大丞相歡 屯華陰하고 使侯景으로 取荆州하니 賀拔勝奔梁하다
髙歡 自追迎魏主하여 至弘農하고 遂攻潼關하여 克之하고 進屯華陰하니 賀拔勝 帥所部하여 西赴關中이라가 至淅陽하여 聞歡已屯華陰하고 欲還注+① 浙, 思曆切. 漢析縣屬弘農郡, 宋永初志屬順陽郡, 魏收志析陽郡屬析州, 五代志析州內鄕縣, 舊置淅陽郡.이어늘
行臺左丞崔謙 曰 今帝室 顚覆하여 主上蒙塵하니 公宜倍道兼行하여 朝於行在하고 然後與宇文行臺 同心戮力하여 唱擧大義하면 天下孰不望風響應이리오
今捨此而退하면 恐人人解體하노니 一失事機하면 後悔何及이리오하되 不聽하고 遂還하다
自發晉陽으로 至是 凡四十啓하되 魏主 皆不報어늘 乃還하여 遣侯景等하여 向荆州러니어늘 逆撃之하니하여 奔梁하다
魏主之在洛陽也 密遣閤内都督趙剛하여 召東荆州刺史馮景昭入援이러니 兵未及發 魏主 入關하니
景昭 集文武議所從할새 馮道和 請待北方處分注+① 北方, 謂高歡也.이어늘 曰 公宜勒兵하여 赴行在所로라 久之 更無言者어늘
抽刀投地曰 公若欲爲忠臣인댄 請斬道和하고 如欲從賊인댄 可速見殺이라하니 景昭感悟하여 即率衆赴關中이러니
侯景 引兵逼穰城하니 東荆州民楊祖歡 起兵應之 以其衆으로 邀景昭於路한대 景昭 戰敗하고 没蠻中注+② 魏東荊州, 本蠻左所據之地.하다
冬十月 魏大丞相歡 立淸河世子善見於洛陽하다
至洛陽하여 又遣僧道榮하여 奉表於魏主曰 陛下若遠賜하사 許還京洛하시면 臣當帥勒文武하여 式淸宮禁이어니와
若返正無日이면 則七廟 不可無主 萬國 須有所歸 臣寧負陛下언정 不負社稷이니이다하되 魏主 亦不答이러라
乃集百官耆老하여 議所立할새 淸河王亶 出入已稱警蹕이라 醜之하여 遂立其世子善見爲帝하고 謂亶曰 欲立王이나 不如立王之子로다
不自安하여 南走어늘 追還之하다 善見 即位하니 時年十一이러라
以宇文泰 爲大丞相하다
攻潼關하여 斬髙歡守將薛瑜하고 還長安하여 進位大丞相하다
◑ 十一月 東魏 遷於鄴하다
髙歡 以洛陽西逼西魏南近梁境으로 乃議遷鄴할새 書下三日即行하여 四十萬戸 狼狽就道注+① 書, 謂歡所下書也.러라
留後部分하고 事畢還晉陽할새 改司州爲洛州하여 以元弼 爲刺史하여 鎭洛陽注+② 魏明元帝取洛陽, 置洛州, 孝文帝徙都洛, 太和十七年改爲司州. 高歡旣逼東魏主遷鄴, 改相州爲司州, 復以洛陽改爲洛州.하고 僕射司馬子如髙隆之 侍中髙岳孫騰으로 留鄴하여 共知朝政注+③ 隆之, 本徐氏養子, 歡命以爲弟.하고 出粟一百三十萬碩하여 以賑遷民注+④ 碩, 通作石.하다
十一月 東魏主 至鄴하여 改相州刺史爲司州牧하고 魏郡太守爲魏尹하다
閏十二月 注+① 壽, 二十五.하다
魏孝武 閨門無禮하여 從妹不嫁者三人이러니 平原公主明月 南陽王寳炬之同産也 從入關이어늘 宇文泰 使人殺之注+① 通鑑, “泰使元氏諸王取明月殺之.”한대 魏主 不悅하니
由是 復與泰有隙하여 飲酒遇酖而殂하여 殯於佛寺할새 諫議大夫宋球 慟哭嘔血하고 漿粒不入口者數日이어늘 以其名儒 不之罪也러라
東魏髙歡 聞之하고 啓請擧哀制服한대 東魏主 使群臣議之하니
博士潘崇和 以爲君遇臣不以禮하면 則無反服이라 是以 湯之民 不哭桀하고 周之臣 不服紂注+② 記檀弓 “魯繆公問於子思曰 ‘爲舊君反服, 禮與.’ 子思曰 ‘古之君子, 進人以禮, 退人以禮, 故有舊君反服之禮也. 今之君子, 進人君將加諸膝, 退人君將隊諸淵, 毋爲戎首, 不亦善乎, 又何反服之禮之有.’”니이다
衛既隆李同軌 以髙后於永熙 離絶未彰으로 宜爲之服이라한대 東魏 從之注+③ 歡初立孝武, 納其長女以爲皇后, 魏主之西奔, 后留不從.하다
東魏 既取荆州러니 以獨孤信으로 爲刺史하여 招懷之하다 蠻酋樊五能 攻破淅陽郡하여 以應魏어늘 東魏刺史辛纂 欲討之注+① 纂, 雄之從父兄也.한대
郎中李廣 曰 淅陽 深險하고 表裏群蠻하니 今少遣兵하면 不能制賊이요 多遣이면 則根本虗弱이니 脫不如意인댄 州城難保
聞臺軍 不久應至注+② 臺軍, 謂東魏所遣軍也.라하니 公但約勒屬城하여 使完壘撫民以待之하라 雖失淅陽이라도 不足惜也로라하되 不從이라가 而敗하다
城民 召獨孤信이러니 東魏 遣田八能拒之하고 又遣張齊民하여 出信後어늘
謂其衆曰 今士卒 不滿千人이요 首尾受敵注+③ 謂田八能拒其前, 張齊民出其後也.하니 若還撃齊民하면 士民 謂我退走라하여 必來邀我注+④ 士民, 謂淅陽之民.리니 不如進擊八能破之하면 齊民自潰矣라하고 遂擊破八能하고 乗勝襲穰城하니
辛纂 出戰이라가 大敗하여 還趣城할새 門未及闔이어늘 信前驅武川楊忠 叱門者曰 大軍 已至하고 城中 有應하니 爾等 求生인댄 何不避走오하니 門者 皆散이러라
帥衆入城하여 斬纂以徇하니 城中 懾服이러라
分兵定三荆이러니 居半歳 東魏髙敖曹侯景 將兵奄至城下하니 兵少不敵하여 與楊忠皆犇梁하다


梁나라 高祖 武帝 萧衍 中大通 6년이고 北魏 孝武帝 元脩 永熙 3년이고 東魏 孝靜帝 元善見 天平 원년이다. 이해에 북위가 둘로 나뉘어 모두 세 나라가 되었다.
【綱】 봄 정월에 北魏 大丞相 高歡이 紇豆陵伊利를 공격하여 체포하였다.
【目】 髙歡이 侯景을 시켜서 紇豆陵伊利를 불렀으나 흘두릉이리가 오지 않자 河西에서 그를 공격해 생포하고 그 部落을 河東으로 옮겼다.注+① 河西는 五原河의 서쪽이고, 河東 또한 五原河의 동쪽이다.
魏主(元脩)가 꾸짖기를, “흘두릉이리는 침략하지도 않고 배반하지도 않은 국가의 순수한 신하였는데 王(高歡)이 갑자기 그를 공격하니, 어찌 일개 行人(使者)을 보내서 먼저 이를 요청한 적이 있는가.”라고 하였다.注+② ‘一介行人’이란 ‘一介使者’와 유사하다. 혹자가 말하기를, “‘一介’는 지극히 미약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綱】 北魏 永寧寺의 浮圖가 화재를 입었다.
【綱】 北魏 泰州刺史 侯莫陳悅이 賀抜岳을 살해하자, 北魏가 宇文泰에게 그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注+① 泰州는 ≪魏書≫ 〈侯莫陳悅列傳〉에서 秦州로 썼다.
【目】 北魏 賀拔岳이 曹泥를 정벌하려 할 때, 도독 趙貴를 夏州로 보내 宇文泰와 함께 일을 도모하게 했다. 우문태가 말하기를, “조니는 외딴 城에 막혀 멀리 있으므로 걱정할 것이 못되지만 侯莫陳悅은 탐욕스럽고 신뢰가 없으니 먼저 도모해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따르지 않고 후막진열을 高平으로 불러 함께 조니를 토벌했다.
후막진열이 이미 翟嵩의 말을 들었던 터라 하발악을 해치려고 도모했다. 하발악이 여러 차례 후막진열과 만나며 연회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자 長史 雷紹가 조심하라고 간언을 올렸지만 따르지 않았더니 결국 후막진열이 하발악을 유인해 죽였다.
하발악의 무리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는데 후막진열이 마음에 주저하며 즉시 받아들이지 않고 水洛城으로 되돌아가 주둔하자, 하발악의 무리들이 흩어져 平涼으로 달아나서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았다.注+① ≪九域志≫에 의하면, “水洛城은 德順軍 서남쪽 100리 쯤에 있다.”고 하였다.
조귀가 말하기를, “夏州刺史 우문태는 재략이 세상의 으뜸이어서 원근 사람들이 귀의하고 상과 벌이 엄정하고 공평하여 병사들이 그 명령을 따르니 만일 그를 맞이해서 받들면 큰일을 이룰 것입니다.”라고 했다.
都督 杜朔周가 輕騎를 타고 우문태 쪽에 가서 喪事를 고하고 그를 맞이해 오겠다고 했다.注+② 杜朔周의 본래 성은 赫連이고 曾祖 庫多汗이 난리를 피해 고친 것인데, 宇文泰가 명하여 원래의 성으로 복구하도록 하고 이름을 達이라 했다.
두삭주가 이르자 우문태가 장군, 막료, 빈객들과 함께 가야할 지 여부에 대해 논할 때 前 太中大夫 韓褒가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인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후막진열은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使君께서 가게 되면 반드시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注+③ 後漢의 馬援이 公孫述을 만나본 뒤 돌아와 隗囂에게 이르기를, “子陽(公孫述)은 우물 안 개구리이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후막진열이 이미 하발악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어 그를 도모하는 것이 실로 어려우니 우선 이곳에 머물러 그 변화를 살펴야 합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말하기를, “후막진열이 이미 元帥 하발악을 살해했다면 응당 승세를 타고 곧장 平涼을 점거해야 하는데 水洛城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으니 나는 그가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운 것은 기회이니 만일 일찍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떠날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諸將들과 盟約을 맺어 후막진열을 공격하기로 하고 輕騎를 타고 평량으로 달려갔다.
당시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뿔뿔이 도망가는 자들이 많았는데 우문태의 군사들이 그들을 노략질하려 하자, 두삭주가 말하기를, “宇文公께서 지금 죄 있는 자를 치고 백성들을 위로하려 하는데 어찌하여 적을 도와 학대를 일삼는가.”라고 하고, 백성들을 잘 보살펴 돌려보내니 원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했다. 우문태가 이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겼다.
【目】 高歡이 侯景에게 賀拔岳의 무리를 불러 잘 보살피도록 했는데, 우문태가 安定에서 후경을 만나 말하기를, “賀拔公이 죽었지만 우문태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데 卿은 뭘 하는 사람인가!”라고 하자, 후경이 결국 되돌아갔다.
우문태가 平涼에 이르러 하발악의 죽음에 곡하여 애통해하자 장사들이 슬픔과 함께 기쁨을 나타냈다. 고환이 또다시 후경과 張華原, 王基를 보내 우문태를 위로했으나 우문태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겁주어 그곳에 머물게 하려 했는데, 장화원이 굽히지 않자, 우문태가 돌려보냈다.
왕기가 돌아와 말하기를, “우문태는 영웅호걸이니 그가 안정을 찾기 전에 격멸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고환이 말하기를 “卿은 賀拔岳과 侯莫陳悅을 보지 못했는가. 나는 계책을 써서 힘들이지 않고 그를 취할 것이다.”라고 했다.
魏主(元脩)가 元毗를 보내 하발악의 군사들을 위로하여 그들을 洛陽으로 불러들이게 하고, 아울러 후막진열을 부르니 후막진열이 고환에게 귀의한 터라 부름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우문태가 원비를 통해 表文을 올리기를, “臣 하발악이 갑자기 환란을 당하여 비명에 세상을 떠나서 都督 寇洛 등이 신에게 임시로 軍務를 관장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고환의 무리들이 이미 河東에 도착하고 후막진열이 여전히 水洛城에 있으며 병사들은 대부분 서쪽 지역 사람들이어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부디 잠시 멈추었다 서서히 동쪽으로 이끌고 가게 하소서.”라고 했다.注+① 河東은 또한 五原河의 동쪽을 말한다.
魏主가 우문태를 大都督으로 삼아 즉시 하발악의 군사를 통솔하게 했다.
하발악이 죽자 都督 李虎가 荊州로 달아나 賀拔勝에게 권유하여 하발악의 무리들을 거두도록 했으나 하발승이 따르지 않자 이호가 되돌아가다가 고환의 別將에게 붙잡혀 洛陽으로 보내졌다.
魏主가 마침 關中의 탈취를 도모하고 있던 터이라, 이호를 얻고 나서 대단히 기뻐하여 그를 衛將軍에 임명하여 우문태에게 가게 했다. 이호는 李歆의 玄孫이다.
우문태가 후막진열에게 보낸 편지에서 꾸짖기를, “그대가 국가의 적에게 달라붙어 함께 宗廟를 위태롭게 했다. 내가 이미 병사를 출동시켜 賀拔公을 위해 원수를 갚을 터이니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注+② 〈‘指日相見’은〉 병사를 진격시켜 侯莫陳悅을 토벌한 것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에 이르기를, “아침에 서로 만나자.”라고 하였다.
【綱】 여름 4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北魏 宇文泰가 侯莫陳悅을 토벌하여 죽이고 마침내 秦隴 지역을 평정하자, 북위가 우문태를 關西大都督으로 삼았다.
【目】 宇文泰가 병사를 이끌고 隴으로 올라갈 적에 군령이 엄숙하여 털끝 하나도 범하는 일이 없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水洛城이 항복하자 侯莫陳悅이 上邽로 물러나 지키며 南秦刺史 李弼을 불러 함께 우문태를 막았다.注+① 泰州는 치소가 上邽城에 있다. 李弼의 처는 侯莫陳悅의 이모이다. 그런데 이필이 성 전체를 이끌고 항복하자 후막진열의 군사들이 붕괴되고 후막진열은 목매달아 죽었다.
우문태가 상규에 들어와 관청의 곳간을 열어 병사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측근이 銀甕 하나를 훔쳐 돌아오자 우문태가 인지하여 벌을 가하고 銀甕을 쪼개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후막진열에 속한 孫定兒가 항복하지 않은 채 수만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注+② 孫定兒는 당시에 豳州刺史였다. 우문태가 劉亮을 보내 습격하게 했다. 유량이 먼저 성 부근 높은 산 위에 큰 깃발을 세우고注+③ 竪는 세운다는 뜻이다. 자신은 기마병 20기를 거느려서 달려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손정아가 마침 주연을 베풀고 있었는데 유량이 병사를 지휘하여 그를 죽이고 두 명의 騎兵에게 멀리 성 밖에 있는 깃발을 가리키면서 명하기를, “大軍을 불러 들어오게 하라.”고 하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이에 앞서 옛 氐族王 楊紹先이 北魏의 혼란을 틈타 武興으로 도망해 돌아가서 다시 王이라 칭하였다. 氐族과 羌族, 吐谷渾族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南岐에서부터 瓜, 鄯까지 州와 郡을 차지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우문태가 이필에게 原州를, 拔也惡蚝에게 南秦州를, 可朱渾道元에게 渭州를 수비하게 하고, 趙貴에게 秦州를 임시 관할하게 하여, 豳, 涇, 東秦, 岐 등의 곡식을 징수하여 군량미를 보급하게 하니 양소선이 무서워하여 藩屬이라 칭하며 人質을 보냈다.注+④ 拔也는 오랑캐의 複姓이다. 蚝는 七吏의 切이니 惡蚝는 이름이다. 可朱渾은 오랑캐의 3자 姓이고 道元은 字이며 이름은 元이다.
長史 于謹이 우문태에게 말하기를, “明公께서 關中의 요새를 점거하여, 장수와 병사가 용맹스럽고 토지가 비옥합니다. 지금 天子(元脩)께서 洛陽에 계시어 흉악한 무리들에게 압박을 받고 있으니 만일 公의 진심을 진술하여 關右로 遷都를 요청해서 天子를 끼고서 諸侯를 호령하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포악한 무리들을 정벌한다면 이것은 齊 桓公과 晉 文公과 같은 대업이고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훌륭하게 여겼다.
高歡이 다시 사신을 보내 달콤한 말과 후한 예우로 우문태와 교류를 맺으려 했으나 우문태가 받아들이지 않고 그 내용을 봉함하여 魏主에게 전하자, 魏主가 우문태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게 하였다.
우문태가 雍州刺史 梁禦에게 長安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점령하게 했다. 魏主가 우문태를 關西大都督 略陽縣公으로 삼고 承制(황제의 권한으로 일을 처결함)하여 관작을 임명하게 하였다.
【綱】 6월에 北魏 大丞相 高歡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했다. 가을 7월에 魏主 元脩가 長安으로 달아나자, 고환이 洛陽으로 들어가 淸河王 元亶을 추대하여 承制하여 일을 결재하게 하였다. 魏主(元脩)가 宇文泰를 大將軍 尙書令으로 삼았다.
【目】 侍中 封隆之가 髙歡에게 말하기를, “斛斯椿 등이 반드시 재앙과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孫騰이 그 말을 곡사춘에게 누설하여 곡사춘이 이를 魏主(元脩)에게 보고하자 봉융지와 손등이 모두 고환에게로 달아났다.注+① ≪資治通鑑≫에 의하면, “封隆之와 僕射 孫騰이 다투어 北魏 군주의 누이 平原公主를 아내로 삼으려 했는데 공주가 봉융지에게 돌아갔다. 손등이 그 말을 斛斯椿에게 누설하고 곡사춘이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자 봉융지가 무서워 鄉里로 달아났다. 高歡이 봉융지를 晉陽으로 불렀는데, 때마침 손등이 무장을 한 채 宮省으로 들어와 御史를 멋대로 살해했다가 벌을 받을까 두려워 고환에게 달아났다.”라고 하였다.
華山王 元鷙가 徐州에 있었는데, 고환이 大都督 邸珍에게 〈그 성문의〉 열쇠를 빼앗게 했다.注+② 王鷙는 王斤의 玄孫이고, 王斤은 王孤의 아들이다. 邸珍은 姓名이다. 建州刺史 韓賢, 濟州刺史 蔡儁은 고환의 무리이므로 魏主가 그들을 모두 파직했다.
그리고 와 騎官 등에 수백 명을 증설하여 晉陽을 정벌하려고 할 때注+③ 勳府의 庶子와 騎官은 모두 宿衛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高歡이 晉陽에 있었다. 조칙을 내려 엄히 단속하기를, “梁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황하 남쪽의 병사를 징발하여 洛陽으로 오게 하라.”라고 했다.
6월에 은밀히 고환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宇文黑獺, 賀拔勝이 반역의 뜻을 품고 있으므로, 남쪽(양나라)을 정벌한다고 핑계를 대며 조용히 대비하려 하니 왕(고환)은 가까이서 호응하는 군세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자,注+④ 宇文黑獺은 宇文泰의 字이다. 近은 ≪資治通鑑≫에 共으로 되어 있다.
宇文黑獺宇文黑獺
고환이 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臣이 지금 조용히 병마 3만을 이끌고 河東으로부터 黃河를 건너고 또 庫狄干 등을 보내 來違津으로부터 黃河를 건너고 婁昭 등이 荊州를 토벌하고 尉景 등이 江左를 공격하게 하는 등 모두 소속 부대를 이끌어서 삼가 皇上의 처분을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注+⑤ 來違津은 平城 서쪽에 있을 것이니, 河津의 중요 지점이다.
魏主가 고환이 사변의 발생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고 고환의 군사를 멈추게 하자, 고환 역시 표문을 올려 이르기를, “신이 간신들의 이간질에 의해 하루아침에 의심을 받고 있으니 폐하께서 저의 충심을 믿으신다면 사정을 잘 헤아리시어 속히 간신들을 내쫓으소서.”라고 했다.注+⑥ 斟은 짐작이다. 量은 헤아림이다. 出은 黜이 되어야 한다.
魏主가 源子恭에게 陽湖를 지키게 하고, 汝陽王 元暹(원섬)에게 石濟를 지키게 하고,注+⑦ 陽胡는 陽壺城으로 邵郡 白水縣에 있다. 白水縣은 漢나라 때의 河東의 垣縣이다. 살펴보면, 陽壺는 崤谷의 북쪽 언덕인데 魏主가 關中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므로 먼저 源子恭에게 이곳을 지키며 高歡이 길을 막고 습격할 것을 대비한 것이다. 또 賈顯智를 濟州刺史로 삼았는데, 채준이 그 代任을 받아들이지 않자,
魏主가 더욱 노여워하여 고환에게 칙서를 내리기를, “고적간의 말을 들으니 왕이 ‘본디 유약한 이를 군주로 삼으려 했는데 쓸데없이 나이 많은 임금을 세워서 제어할 수 없게 됐다.
지금 15일 만 출병을 하게 되면 저절로 황제를 폐위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하니, 이 이야기는 왕 쪽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 한 말이지 어찌 간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봉융지와 손등이 그쪽으로 도망갔는데도 처벌하지 않으니 왕이 정말 충성을 다한다면 어찌 참수하여 보내지 않는가. 表文에서 서쪽으로 간다고 했지만, 사방 길로 전진하여 남쪽으로 강을 건너 洛陽으로 향하고 한편으로는 동쪽으로 江左에 다가가니, 이 이야기를 들은 자가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注+⑧ ‘西去’란 서쪽으로 가서 宇文泰를 공격함을 말한다. ‘四道俱進’이란 河東, 來違津, 婁昭, 尉景의 군대를 말한다. 누소가 荊州를 토벌하고 위경이 江左에 다가선 것은 모두 남쪽으로 洛陽을 향한 것이다. 하동과 내위진의 군대가 宇文泰를 견제하여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高歡의 계책이 실제 여기에서 나온 것인데, 魏主가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왕이 깃발을 들고 남쪽으로 내려온다면 내 비록 한 필의 말과 한 량의 수레가 없다 해도 맨주먹을 불끈 쥐고 분투하여 죽을힘을 다할 것이니 가령 왕에게 죽임을 당하여 능욕을 입고 분신쇄골이 된다 해도 아무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注+⑨ 韲는 젓갈이다. 粉은 분쇄이다.
【目】 王思政이 魏主에게 말하기를, “高歡의 마음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洛陽은 무공을 펼칠 곳이 아닙니다. 宇文泰가 왕실에 충심을 다하고 있으니 지금 그곳으로 가서, 다시 옛 서울로 복귀한다면 어찌 성공하지 못할 우려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魏主가 적극 동의하여, 侍郎 柳慶을 보내, 高平에서 우문태를 만났는데 우문태가 직접 御駕를 맞이하겠다고 했다.
魏主가 다시 조용히 유경에게 말하기를, “짐이 荊州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注+① 당시 賀拔勝이 荆州刺史였다. 유경이 “관중은 지세가 뛰어나고 우문태의 지략이 의지할 만하지만 荊州는 要害地가 아닐뿐더러 남쪽으로 梁나라 도적과 가까우니 신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東郡太守 裴俠이 병사를 이끌고 洛陽으로 오자, 왕사정이 서쪽으로 巡行할 계책을 묻자, 배협이 말하기를, “우문태가 이미 무기를 갖고 있는데 어찌 남에게 그 자루를 내주려 하겠습니까. 비록 그에게 의지하고 싶다 해도 끓는 물을 피하려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라고 하니
왕사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하자, 배협이 말하기를, “고환을 도모하게 되면 곧장 다가올 우환이 있고 서쪽으로 巡行하게 되면 장래의 염려가 있으니 우선 關右로 가서 가만히 적당한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사정이 동의하여 배협을 魏主에게 추천해서, 左中郞將에 임명했다.
예전에 고환이 鄴城으로 천도하려 하자, 魏主가 안 된다고 했었는데, 이때 다시 遷都를 도모하여 기병을 보내 建興을 지키게 하고 河東과 濟州에 병사를 증파하고, 각 州의 한 곡식을 모아 모두 업성으로 들여오게 했다.注+② 〈西燕의〉 慕容永이 上黨을 나눠 建興郡을 설치했는데 北魏 때에 建州로 삼았다.
魏主가 고환에게 勅書를 다시 보내어 병사들을 철회하고 수비를 중지하고 相州의 곡식을 보내고 蔡儁에게 代任을 받도록 하고 邸珍에게 徐州를 나가게 하라고 했지만, 고환이 그 조칙을 받들지 않았다.注+③ 相州의 치소는 鄴城이다.
魏主가 廣寧太守 任祥에게 僕射를 겸직하게 하자, 임상이 관직을 버리고 黃河를 건너가 郡을 점거한 채 고환을 기다렸다.注+④ ≪五代志≫를 살펴보면 “建州 沁水縣은 과거에 廣寧郡을 설치했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칙서를 내려 고환의 죄악을 낱낱이 거론하고 賀拔勝을 불러 行在所로 달려오게 했는데,
하발승이 掾吏 盧柔에게 의견을 묻자, 노유가 말하기를, “고환이 명령을 어기고 거역하니 公께서 모든 군사를 이끌고 都城으로 가서 목숨을 걸고 그와 승부를 겨루어 생사를 여기에 거는 것이 上策이고, 북쪽으로 魯陽을 막고, 남쪽으로 옛 楚나라 땅을 병합하고, 동쪽으로 兗州ㆍ豫州와 연계하고, 서쪽으로 關中을 끌어들이는 것이 中策이고,注+⑤ 江陵은 옛 楚나라의 郢都로, 그 경계 안에 있다. 三荊의 땅을 전부 주어 梁나라에 보호를 청하게 되면 공로와 명성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下策입니다.”라고 하니, 하발승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注+⑥ 三荊은 荊州, 東荊州, 南荊州이다.
魏主가 우문태를 關西大行臺로 삼고 기병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했다. 고환이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나가서, 斛斯椿을 처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髙敖曹를 선봉으로 삼자, 우문태 또한 각 州와 郡에 檄文을 보내, 고환의 죄악을 낱낱이 거론하고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高平을 출발하여, 그 선발대가 弘農에 주둔했다.
【目】 7월에 魏主가 직접 십여만의 병사를 이끌고 河橋에 주둔하고 斛斯椿을 선봉으로 삼아 邙山 북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곡사춘이 정예 기병 2천을 이끌고 밤에 黃河를 건너 피로한 적들을 엄습하겠다고 하니, 魏主가 동의하였다.
侍郎 楊寛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병마를 내어주면 다른 변고가 발생될까 우려됩니다. 곡사춘이 만일 공을 세우게 되면, 이는 하나의 高歡을 멸망시키고 또 다른 고환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魏主가 곡사춘에게 칙서를 내려 발길을 멈추라고 하자, 곡사춘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요사이 熒惑이 南斗로 들어갔는데 지금 皇上이 근신의 이간질하는 말을 믿고 나의 계책을 쓰지 않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注+① ≪晉書≫ 〈天文志〉를 살펴보면 “南斗의 6개 별이 天廟인데 天子의 일이 있게 되면 南斗로 점을 친다. 熒惑은 罰星인데 이곳으로 들어오면 天子의 자리가 불안하다. 훗날 이른바 ‘天子가 전각을 내려와 달아났다.’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宇文泰가 이 말을 듣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고환이 며칠 사이에 8, 9백 리를 행군했으니 이는 병법에서 꺼리는 일이다. 마땅히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해야 하나, 主上이 萬乘의 중하신 몸으로 황하를 건너 결전을 벌일 수 없어 나루를 따라 굳게 지키고 계시고, 또 만 리의 황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어려운데 만일 한 곳이라도 건너오게 되면 大事는 끝장이다.”라고 하고,
즉시 趙貴에게 蒲坂에서 황하를 건너 幷州로 가게 하고 李賢에게 정예 기병 1천을 거느리고 洛陽으로 가게 했다.注+② 洛陽으로 가서 魏主를 맞이하는 것이다.
魏主가 곡사춘에게 潁川王 元斌之와 함께 虎牢를 지키게 하고 賈顯智에게 滑臺를 지키게 했는데,注+③ 元斌之는 元鑒의 아우이다. 가현지가 남몰래 고환에게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軍司 元玄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돌아와 병사의 증파를 요청하자, 魏主는 大都督 侯幾紹를 보내 滑臺 동쪽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가현지가 군사를 이끌고서 항복하고, 후기소는 전사했으며,注+④ 侯幾는 오랑캐의 複姓이다. 고환이 병사를 이끌고 黃河를 건넜다.
원빈지가 곡사춘과 권력을 다툰 터여서, 돌아와서 魏主를 속여, “고환의 병사가 이미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자, 魏主가 곧장 곡사춘을 불러들여 南陽王 元寳炬, 淸河王 元亶, 廣陽王 元湛과 함께 5천의 騎兵을 이끌고 瀍水 서쪽에 야영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魏主가 서쪽으로 갈 것이라 짐작하고 도망가는 자들이 절반이 넘고 이때 원단, 원담도 도망해 돌아갔다.注+⑤ 王亶은 王擇의 아들이고 王湛은 王深의 아들이다. ‘瀍西’는 瀍水의 서쪽이며 河南에 있다.
장군 獨孤信이 單騎로 魏主를 뒤따르자注+⑥ 獨孤部는 北魏와 함께 일어났는데, 〈북위의〉 서른여섯 大姓 가운데 하나이다. 魏主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장군이 부모를 떠나고 처자를 버린 채 따라왔으니 세상이 혼란할 때 충신을 알아본다는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라고 했다.
이튿날 魏主는 서쪽 長安으로 달려갔는데, 고환이 결국 洛陽으로 들어온 뒤 婁昭와 髙敖曹를 보내 날랜 기병을 이끌고 魏主를 추격하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魏主가 곡식과 마실 거리가 다 떨어져 시냇물만 마셨는데 稠桑에 이르자 都督 毛鴻賓이 맞이하여 술과 음식을 올리면서 비로소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소되었다.注+⑦ 弘農郡 湖城縣에 稠桑驛이 있다.
고환이 백관을 모아서, 皇上이 조정에 있을 때 간언하지 않고 밖에 나갈 때 따르지 않은 죄를 물어 僕射 辛雄 이하 몇몇 사람들을 처형한 뒤 淸河王 원단을 大司馬로 삼아 承制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目】 宇文泰가 趙貴와 梁禦에게 기병을 이끌고 魏主(元脩)를 맞이하여 黃河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갈 때 魏主가 양어 등에게 말하기를, “이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짐은 서쪽으로 올라가니 만일 다시 洛陽을 보게 되어 皇陵과 宗廟를 친히 拜謁하게 되면 이는 卿들의 공이다.”라고 하고, 魏主와 좌우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우문태가 儀仗과 護衛를 갖춰 魏主를 맞이하고 東陽驛에서 알현하며 冠을 벗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신이 도적의 포학을 막지 못하여 御駕를 播遷하게 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라고 하자,注+① ≪水經注≫를 살펴보면 “渭水가 長安城 북쪽을 지난 뒤 또 동쪽으로 新豊을 지나고 동쪽으로 西陽水와 합류한 뒤 또다시 동쪽으로 東陽水와 합류한다. 두 강물은 모두 남쪽으로 廣鄉原으로 나간다.”고 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짐이 부덕하여 도적의 침략을 불러왔다. 지금 社稷을 공에게 맡기노니, 公은 힘쓰도록 하라.”고 했다.
마침내 長安으로 들어와서 우문태를 大將軍 雍州刺史 兼尙書令으로 삼아 軍事와 國政을 모두 결정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尙書 두 자리를 별도로 설치하여 機務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는데 毛遐와 周惠達에게 맡도록 했다. 당시 軍國 사무가 막 시작한 즈음이라, 두 사람이 양식을 저장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여, 北魏의 조정이 이들에게 의뢰했다.
이에 앞서 熒惑이 南斗에 들어와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60일을 머물렀는데 梁主(蕭衍)가, 속담에 ‘형혹이 남두에 들어오면 천자가 전각을 내려와 달아난다.’라고 하여, 맨발로 전각을 내려가 재앙의 소멸을 기도했었는데, 魏主가 서쪽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오랑캐들도 天象에 호응하는 것인가.”라고 했다.
【綱】 北魏 大丞相 高歡이 華陰에 주둔하고 侯景에게 荆州를 공격하게 하니 賀拔勝이 梁나라로 도망갔다.
【目】 高歡이 직접 뒤쫓아서 魏主(元脩)를 맞이해 오려 하여 弘農에 이르고 마침내 潼關을 공격하여 무찌르고 華陰으로 전진하여 주둔했다. 賀拔勝이 부대를 이끌고 서쪽 關中을 향하다가 淅陽에 이르러 고환이 이미 화음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려 하자注+① 淅은 思曆의 切이다. 漢나라 때에는 析縣은 弘農郡에 속하였고, 宋나라 ≪永初志≫에는 順陽郡에 속하였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의거하면 析陽郡은 析州에 속하였고, ≪五代志≫에 의거하면 과거에 析州 內鄕縣에 淅陽郡을 설치했었다.
行臺左丞 崔謙이 말하기를, “지금 황실이 전복되어 主上이 蒙塵하고 있으니 公께서는 의당 이틀에 갈 길을 하루에 달려가 行在所에서 主上을 뵌 뒤 宇文行臺(宇文泰)와 함께 힘을 합쳐서 大義를 소리쳐 거행한다면 천하가 어찌 멀리서 감지하고 소리 울림처럼 호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를 버리고 물러난다면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니, 기회를 한 번 잃으면 후회해도 다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으나, 따르지 않고 결국 돌아갔다.
고환이 晉陽을 출발할 때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40차례의 表文을 올렸지만 魏主가 답하지 않자, 이내 되돌아가 侯景 등을 荊州로 향하게 하였다. 하발승이 도착하자, 후경이 이를 맞아 공격하니, 하발승이 패하여 梁나라로 달아났다.
【綱】 北魏 閤内都督 趙剛이 東荆州 병사를 이끌고 長安으로 향하다가 도적을 만나 패망했다.
【目】 魏主(元脩)가 洛陽에 있으면서 은밀하게 閤内都督 趙剛을 보내어 東荊州刺史 馮景昭를 불러서 들어와 돕게 했는데 병사가 미처 출발하기 전에 魏主가 이미 關中에 들어왔다.
풍경소가 문무 관리들을 모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할 때, 馮道和가 북방의 高歡의 처분을 기다리자고 하자,注+① 北方은 高歡을 말한다. 조강이 말하기를, “公은 병사를 이끌고 行在所로 달려가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했는데, 오래도록 다시 이야기하는 자가 없자,
조강이 칼을 뽑아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공이 만일 충신이 되고 싶다면 풍도화를 참수하고, 적을 따르고 싶다면 속히 나를 죽이시오.”라고 하니 馮景昭가 정신이 들어 즉시 무리들을 이끌고 關中으로 달려갔다.
侯景이 병사를 이끌고 穰城을 압박하니 東荊州 백성 楊祖歡이 병사를 일으켜 호응하여, 후경이 그 무리들을 가지고 중도에 풍경소를 邀擊하였는데 풍경소는 전투에 패하고 조강은 蠻族 속으로 사라졌다.注+② 北魏 東荊州는 원래 蠻左(蠻夷)가 점거한 지역이다.
【目】 高歡이 洛陽에 이르러서 승려 道榮을 보내 魏主(元脩)에게 表文을 올리기를, “폐하께서 만일 멀리 勅書 한 통을 내리시어 도성 洛陽으로 돌아오실 것을 허락해주시면 신은 마땅히 문무백관을 이끌고 궁전을 깨끗이 청소하겠습니다.
만일 되돌아오실 날짜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가 주인이 없을 수 없고, 모든 나라가 반드시 귀의할 곳이 있어야 하니 신은 폐하를 져버릴지언정 社稷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으나, 魏主가 또한 답하지 않았다.
고환이 百官과 원로들을 모아 옹립할 황제에 대해 논의할 때, 淸河王 元亶이 출입할 적에 이미 이라 칭했으므로 고환이 이를 추하게 여겨 결국 〈원단의〉 世子 元善見을 황제로 옹립하고, 원단에게 이르기를, “왕을 황제로 세우고 싶었으나 왕의 아들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원단이 스스로 불안해하여 남쪽으로 달아나자 고환이 뒤쫓아가서 데려왔다. 원선견이 帝位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11세였다.
【綱】 西魏가 宇文泰를 大丞相으로 삼았다.
【目】 宇文泰가 潼關을 공격해 髙歡의 潼關 守將 薛瑜를 참수하고 長安으로 돌아와 大丞相에 올랐다.
【綱】 梁나라가 東魏를 정벌했다.
【綱】 11월에 東魏가 鄴城으로 천도했다.
【目】 髙歡은 洛陽이 서쪽으로 西魏와 가깝고 남쪽으로 梁나라 국경과 가깝다 하여 鄴城으로 遷都를 검토했는데 문서가 하달된 지 3일 만에 바로 실행해 옮겨 40만 호가 경황없이 길을 나섰다.注+① 書는 高歡이 내린 글을 말한다.
고환이 뒤에 남아 관련 일들을 처리하고 일을 마친 뒤에 晉陽으로 돌아와서, 司州를 洛州로 개칭하여 元弼을 刺史로 삼아 洛陽에 진수하게 하고,注+② 北魏 明元帝가 洛陽을 차지한 뒤 洛州를 설치했는데 孝文帝가 洛으로 천도하고 太和 17년(493)에 司州로 개칭했다. 高歡이 東魏主를 압박해 鄴城으로 천도한 뒤 相州를 司州로 개칭하고 洛陽을 다시 洛州로 개칭했다. 僕射 司馬子如, 髙隆之, 侍中 髙岳, 孫騰에게 鄴城에 남아 조정의 일을 함께 주재하게 하고,注+③ 高隆之는 원래 徐氏의 養子인데 高歡이 명하여 아우로 삼았다. 곡식 130만 석을 방출하여 옮겨온 백성들을 진휼했다.注+④ 碩은 石과 통용된다.
11월에 東魏主(孝靜帝 元善見)가 鄴城에 이르러 相州刺史를 司州牧으로 개칭하고 魏郡太守를 魏尹으로 개칭했다.
【綱】 윤12월에 西魏 大丞相 宇文泰가 毒을 올려 임금 元脩를 시해했다.注+① 향년이 25세였다.
【目】 魏主(元脩)는 宮中이 문란하여 시집가지 않은 사촌누이가 셋이었는데, 平原公主 明月은 南陽王 元寶炬와 동복형제였다. 魏主를 따라 關中으로 들어왔는데 宇文泰가 사람을 시켜 살해하자注+① ≪資治通鑑≫에 의하면, “宇文泰가 元氏 諸王에게 明月公主를 잡아서 살해하게 했다.”고 하였다. 魏主가 언짢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우문태와 틈이 생겨서, 술을 마시다 를 먹여 죽게 하여 사찰에 빈소를 차렸다. 諫議大夫 宋球가 통곡하며 피를 토하고 며칠 동안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입에 대지 않자 우문태가 명망 높은 儒者라 하여 처벌하지 않았다.
東魏 高歡이 이 소식을 듣고 表文을 올려 魏主의 상을 알리고 喪服을 입을 것을 요청하자, 東魏主(孝靜帝 元善見)가 신하들에게 이를 논의하게 하자,
博士 潘崇和가, “임금이 신하를 대우할 때 예의에 맞게 하지 않으면 신하는 되돌아가 喪服을 입지 않습니다. 그래서 湯王의 백성들이 桀에게 哭하지 않고 周나라 신하가 紂에게 喪服을 입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으나,注+② ≪禮記≫ 〈檀弓〉에서, “魯 繆公이 子思에게 묻기를, ‘옛 임금을 위하여 돌아와 복을 입는 것이 예법입니까?’라고 하자, 자사가 말하기를, ‘옛날 군자는 사람을 등용할 때도 예로 하고 사람을 물리칠 때도 예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옛 임금을 위하여 돌아와 복을 입는 예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군자는 사람을 등용할 땐 임금이 무릎 위에 올려놓을 것처럼 하려다가 사람을 물리칠 땐 임금이 마치 깊은 연못에 빠뜨릴 것처럼 하려 하니, 오랑캐의 괴수가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어찌 돌아와 복을 입는 예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衛既隆과 李同軌가, “高皇后(高歡의 장녀)와 永熙(孝武帝)의 단절 사실이 공포되지 않았으므로 의당 喪服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자, 東魏(孝靜帝)가 이를 따랐다.注+③ 예전에 高歡이 魏主(孝武帝)를 帝位에 세우고는 자신의 長女를 皇后로 삼게 했는데, 魏主가 서쪽으로 달아날 때 황후가 따라가지 않고 남았다.
【綱】 西魏 獨孤信이 荆州를 함락했는데, 東魏가 습격하자 독고신이 梁나라로 달아났다.
【目】 東魏가 이미 荊州를 탈취했는데 西魏가 獨孤信을 荊州刺史로 삼아 그를 달랬다. 蠻族의 추장 樊五能이 淅陽郡을 격파하여 西魏에 호응하자 東魏의 荊州刺史 辛纂이 그를 공격하려 하였는데,注+① 辛纂은 辛雄의 從父兄이다.
郎中 李廣이 말하기를, “석양은 지세가 깊으며 험난하고 안팎에 수많은 蠻族들이 있으니, 지금 병력을 조금 파견하면 적을 제압할 수 없고 병력을 많이 파견하면 뿌리가 허약해질 것입니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州城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臺軍(朝廷의 군대)이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라 하니,注+② 臺軍은 東魏가 파견한 군사를 말한다. 公은 荊州 소속 성들과 굳게 약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벽을 굳게 갖추고 백성들을 돌보며 기회를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설령 석양을 잃는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지만 신찬이 따르지 않았다가 패하였다.
성안의 백성들이 獨孤信을 부르자 東魏가 田八能을 보내 이를 가로막고, 또 張齊民을 보내 독고신의 후미로 출격하게 하자,
독고신이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병사들이 1천 명이 안 되고 앞뒤로 공격을 받고 있으니注+③ 〈‘首尾受敵’은〉 田八能이 그 앞을 막고 張齊民이 그 뒤를 공격한 것을 말한다. 만약 뒤돌아 장제민을 공격하게 되면 土民들이 우리가 후퇴하는 것이라 하여 반드시 와서 우리를 요격할 것이다.注+④ 士民은 淅陽의 백성을 말한다. 그러니 진격해 전팔능을 공격하면 장제민이 저절로 붕괴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고 결국 전팔능을 공격하고 승세를 틈타 穰城을 습격했다.
신찬이 나와 싸우다가 대패하여 성안으로 되돌아갔는데, 성문이 미처 닫히기 전에 독고신의 선봉장 武川 출신 楊忠이 문지기에게 소리쳐 꾸짖기를, “대군이 이미 도착했고 성안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는데 너희들이 살려고 한다면 어찌 피해 달아나지 않는가.”라고 하니, 문지기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양충이 무리들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와서 신찬을 참수해서 뭇사람들에게 내보이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굴복했다.
독고신이 병사를 나눠 三荊을 평정했는데 그로부터 반년 뒤에 東魏 髙敖曹와 侯景이 병사들을 이끌고 갑자기 성 아래로 이르자, 독고신이 병사의 부족으로 대적하지 못하여 양충과 함께 모두 梁나라로 도망갔다.


역주
역주1 魏永寧浮圖災 : “火災는 宮闕ㆍ宗廟가 아니면 기록하지 않는데 ‘浮圖가 화재를 입었다[浮圖災]’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나무란 것이다. 北魏의 임금과 신하는 異端의 교화를 崇信하여 그 효과가 이 지경이 되었으므로 기록하여 나무란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火災를 기록한 것은 15번이고, 浮圖의 화재를 기록한 것은 2번이니(이해(534), 梁나라 병인년(546)) 모두 경계를 내린 것이다.[火災非宮闕宗廟不書 書浮圖災 何 譏也 魏之君臣 崇信異教 而其效乃爾 故書譏之 終綱目書災十五 而書浮圖災者二(是年 梁丙寅年) 皆所以垂戒也]” ≪書法≫
역주2 魏宇文泰……爲關西大都督 : “侯莫陳悅과 賀拔岳은 쌍방이 서로 죽였을 뿐인데, ‘토벌하여 죽였다[討誅]’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후막진열을 죄준 것이다. 魏主가 장차 하발악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구원하려 하였는데 후막진열이 하발악을 죽이고, 또 다시 高歡에게 결부하여 부르는 명령을 거부하였으니 이는 賊黨이다. ‘토벌하였다[討]’라고 기록하고, ‘죽였다[誅]’라고 기록한 것이 마땅하다.[悅岳兩下相殺耳 其書討誅 何 罪悅也 魏主方將仗岳自救 而悅殺之 且復附歡以拒召命 是黨賊也 書討 書誅 宜矣]” ≪書法≫“侯莫陳悅과 賀拔岳은 똑같이 方鎭의 大臣인데 후막진열이 갑자기 까닭 없이 하발악을 도륙하였다. 그렇지만 ≪資治通鑑綱目≫은 앞에서 ‘하발악을 죽였다[殺岳]’라고 기록하고 여전히 후막진열의 죄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지금 宇文泰가 후막진열을 공격하여 ‘토벌하였다[討]’라고 기록하고, ‘죽였다[誅]’라고 기록한 뒤에 후막진열의 죄가 비로소 바로잡혔다. 이때에 藩方이 번갈아 일어나서 서로 잡아먹어 오직 무력으로 비교하였다. 그러나 ≪자치통감강목≫은 是非를 구별해 밝혀 書法의 사이에 갖추어 드러내 진실로 亂世라고 해서 그 실상을 조금도 문란하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이른바 曲直에 대한 繩墨(尺度)이라는 것이다.[侯莫陳悅賀拔岳均爲方鎭大臣 而悅一旦無故屠之 綱目前書殺岳 猶未見悅之罪也 今宇文泰攻之 書討 書誅 然後悅之罪始正矣 是時藩方錯立 互相吞食 惟力是視 然綱目辨明是非 備見於書法之間 固不以亂世而少紊其實 此所謂曲直之繩墨也]” ≪發明≫
역주3 魏大丞相歡 擧兵反 : “髙歡이 재앙을 일으킬 마음을 품은 것은 이미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爾朱氏에 견주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이미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였으니 반란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환은 이전에 이주씨를 토벌하고 스스로 반란이라고 말했었는데 지금 이것은 진정 반란한 것이면서 마침내 斛斯椿을 주살하여 스스로 속여 그 是非가 뒤바뀜이 이와 같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그 명분을 각각 바로잡은 연후에 亂臣賊子들의 죄가 비로소 도피할 곳이 없게 되었다.[髙歡包藏禍心 已非一日 特比之爾朱氏有間爾 今既擧兵向闕 非反而何 歡前討爾朱 自謂之反 今此眞反 乃以誅斛斯椿自詭 其是非顚倒若此 綱目各正其名 然後亂臣賊子之罪 始無所逃矣]” ≪發明≫
역주4 勳府의 庶子 : 勳府는 軍府의 명칭으로 勳衛의 府이니, 궁중 숙위를 담당한다. 庶子는 勳貴의 자제들이다.(張大可 等 注釋, ≪新譯資治通鑑≫, 三民書局, 2017)
역주5 和糴 : 관청에서 물가를 의논하여 교역한다는 명목으로 백성에게 강제로 식량을 징수하는 제도이다. 北魏에서 시작되었다.
역주6 (䢵)[邙] : 저본에는 ‘䢵’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邙’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魏閤内都督趙剛……遇盗敗没 : “이에 趙剛이 馮景昭를 불러서 들어와 돕게 했는데 이윽고 그것을 따랐으나 풍경소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趙剛의 공을 아름다워한 것이다. 풍경소가 관망할 적에 조강이 아니면 병사가 출동하지 않았으므로 풍경소를 삭제하였다. 기록하기를 ‘조강이 東荆州 병사를 이끌고 長安으로 향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공을 조강에게 돌린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도적을 만나 패망했더라도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반드시 그것을 기록하였다. 이 까닭으로 九江王 黥布가 漢나라에 귀부함이 결정 나지 않았을 적에 隨何가 능히 그것을 하였으니 ‘수하가 그것을 하였다.[随何以]’라고 기록하였고(漢王 劉邦 3년(B.C. 204)), 陶侃이 난리의 평정에 나아가는 데에 용기를 못 내자 温嶠가 능히 그것을 하였으니 ‘温嶠가 그것을 하였다.[温嶠以]’라고 기록하였고(晉 成帝 咸和 3년(328)), 東荆州가 들어와 원조하기를 결행하지 못하자 조강이 능히 그것을 하였으니 ‘조강이 그것을 하였다.[趙剛以]’라고 기록하였으니(이해(534)) 모두 공을 그것을 한 사람에게 돌린 것이다.[於是剛召馮景昭入援 既而從之 不書景昭 何 美剛功也 景昭顧望 非剛 兵不行矣 故削之 書曰 趙剛以東荆州兵赴長安 歸功剛也 故雖遇盗敗没 綱目必書之 是故九江之歸漢未决 而隨何能以之 則書随何以(漢王邦三年) 陶侃之赴難未勇 而温嶠能以之 則書温嶠以(晉成帝咸和三年) 東荆州之入援未果 而趙剛能以之 則書趙剛以(是年) 皆歸功以之者也]” ≪書法≫
역주8 겨울……옹립했다 : 이때부터 北魏가 東魏와 西魏로 분열한다. 元善見을 옹립한 高歡의 정권이 동위라 하고 宇文泰를 중심으로 關中 지역의 정권을 서위라 한다.
역주9 七廟 : 천자의 宗廟. 太祖와 三昭ㆍ三穆 사당의 총칭이다.
역주10 警蹕 : 황제가 거동할 때 경호하기 위하여 통행을 금하는 것이다.
역주11 一制 : ≪資治通鑑新注≫(陝西人民出版社, 1998)에는 ‘一制’를 ‘一紙制書’로 풀었다.
역주12 梁伐東魏 : “北魏의 난리가 오래되었는데, 梁나라가 전쟁을 걸어오니 ‘습격했다[襲]’라고 기록하고, ‘취하였다[取]’라고 기록하고, ‘포위했다[圍]’라고 기록하고, ‘침략했다[侵]’라고 기록할 뿐이었다. 여기서 ‘정벌했다[伐]’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元善見이 즉위한 것은 정식이 아니었으므로 ‘정벌했다[伐]’라고 기록한 것이다.[魏亂久矣 梁之加兵 書襲 書取 書圍 書侵而已 此其書伐 何 善見之立 非正也 故書伐]” ≪書法≫
역주13 魏大丞相泰進毒 弑其君脩 : “衰亂한 시대에 임금이 진실로 自立하려 하면 세력이 미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진실로 남에게 의지하여 즉위하게 되면 또다시 재앙을 받지 않는 자가 없다. 北魏의 孝武帝는 髙歡에게 압박받아 믿는 이는 한 사람 宇文泰뿐이었는데 갑자기 고환이 병사를 들어 반란하니 北魏 군주는 도주하여 關中으로 들어가 겨우 호랑이 아가리에서 벗어나 마치 의지함을 얻은 듯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몸에 酖毒을 받아 그 재앙이 더욱 참혹하였다. 그러한 뒤에 임금이 남에게 목숨을 붙어 있는 경우는 어디 가든지 온당함이 없음을 알겠으니 이것이 바로 裴俠이 말한 ‘끓는 물을 피하려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無異避湯入火]’라는 것이다. 임금이 ≪資治通鑑綱目≫에 기록한 것을 살펴보고 北魏 군주의 終始를 증험해보면 조심조심 선행에 힘쓰지 않겠는가. 반드시 국가를 편안케 하고 禍亂이 일어나지 않게 하며 姦雄이 일어날 원인을 없애야만 거의 자손들이 타인의 손에 제압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 大勢가 한 번 떠나가면 비록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서글프다![衰亂之世 其君茍欲自立 則勢微力弱 不克振起 茍依人而立 則又未有不受其禍者 魏之孝武 迫於髙歡 所恃者 一宇文泰爾 一旦歡擧兵反叛 魏君奔竄入關 僅脫虎口 若可以爲得所依矣 曾未旋踵 而身被酖毒 其禍尤慘 然後知人君寄命於人者 無適而可 此正裴俠所謂無異避湯入火者也 人主觀綱目之所書 騐魏君之終始 其可不兢兢業業 強於爲善 必使國家乂安 禍亂不作 姦雄無自而起 庶幾子孫不受制於他人之手 不然 大勢一去 雖有智者 亦末如之何矣 吁]” ≪發明≫
역주14 鴆酒 : 짐새의 깃털로 담근 술이니, 일종의 독주이다.
역주15 魏獨孤信克荆州……信奔梁 : “앞에서 ‘高歡이 형주를 취하였다.[歡取荆州]’라고 기록하였고, 지금에 이겼는데 ‘東魏 荆州’라고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땅이 西魏 땅이니 東魏가 소유할 수 없으므로, 이로부터 동위가 서위를 공격하면 ‘침략했다[侵]’라고 기록하고, 서위가 동위를 공격하면 ‘정벌했다[伐]’라고 기록하고, 동위가 서위의 땅을 빼앗으면 ‘서위의 어느 땅을 빼앗았다.[取魏某地]’라고 기록하고, 서위가 동위의 땅을 빼앗으면 곧바로 ‘어느 땅이다.[某地]’라고 기록할 뿐이니 서위가 정통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의 인정해주거나 않는 것이 분명하다.[前書歡取荆州矣 於是克之 不爲東魏荆州 何 土魏土也 東魏不得而有之 故自是東魏攻魏 則書侵 魏攻東魏 則書伐 東魏取魏地 則書取魏某地 魏取東魏地 則直書某地而已 魏正也 綱目之予奪明矣]” ≪書法≫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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