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이광리李廣利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흉노匈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별장別將이릉李陵이 싸우다가 패하여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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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사장군貳師將軍(이광리李廣利)이 주천군酒泉郡에서 출동하여 흉노匈奴를 공격해서 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는데, 군대가 돌아올 적에 흉노가 대병력으로 포위하니, 한漢나라 군대가 며칠 동안 양식이 떨어져서 죽고 부상한 자가 매우 많았다.
이때 가사마假司馬조충국趙充國이 장사壯士 백여 명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적진을 무너뜨리자,注+가假는 임시로 대행한다는 뜻이니, “가사마假司馬”는 군사마軍司馬의 부관副官이다. 이사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뒤따라가서 마침내 포위에서 풀려났는데, 한漢나라 병사로서 물고物故(사망)한 자가 10명에 6, 7명이었고, 조충국은 몸에 20여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황제는 조령詔令을 내려 조충국을 불러 행재소行在所로 나오게 하여 친히 그 상처를 살펴보고 〈그의 용맹에〉 감탄하고는 임명하여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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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처음에 이광李廣에게 손자 이릉李陵이 있었는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겸손하였다.
황제는 이광李廣의 풍모風貌가 있다고 하여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해서, 그로 하여금 단양丹陽과 초楚 지방의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주천군酒泉郡과 장액군張掖郡에서 활쏘기를 가르쳐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注+《속한지續漢志》에 “기도위騎都尉는 품계가 비이천석比二千石이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상上이 이릉으로 하여금 이사장군貳師將軍을 위하여 치중대輜重隊(보급부대)를 거느리고 따라가게 하자,
이릉이 아뢰기를 “신臣이 거느리고 있는 병사들은 모두 형초荊楚 지방의 용사들로 기이한 재주가 있는 검객劍客들이어서, 힘이 호랑이를 잡아 죽일 수 있고 활을 쏘면 명중하니,注+사射(맞추다)은 식역食亦의 절切이다. “명중命中”은 지명한 곳을 똑바로 맞추는 것이다.
원컨대 스스로 한 부대를 담당하여 선우單于의 군대를 분산시켜서 흉노가 이사장군의 군대에게 오로지 향해가지 못하게 했으면 합니다.”注+향鄕(향하다)은 향嚮으로 읽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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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상上이 말하기를 “장군은 이광리李廣利의 부하가 되어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는가?
내 군대를 많이 징발하여 그대에게 줄 기병騎兵이 없다.”注+장將(장수)은 본음대로 읽는다. 오惡(꺼리다)는 거성去聲이다. 속屬은 예속되는 것이다. 여予(주다)는 여與로 읽고, 여女(너)는 여汝로 읽는다. 하였다.
이릉李陵이 대답하기를 “기병을 쓸 것이 없으니, 신臣은 보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선우單于의 왕정王庭에 가기를 원합니다.”注+“무소사기無所事騎”는 굳이 기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하니, 상上이 기특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노박덕路博德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군대를 거느리고 중도에서 이릉의 군대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노박덕 또한 이릉의 후거後距(뒤에서 방어함)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注+“후거後距”는 뒤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주하기를 “지금 한창 가을이어서 흉노匈奴의 말이 살쪘으니, 흉노와 더불어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릉을 만류하여 봄에 함께 출병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上은 이릉이 출정을 자원한 것을 후회하고 노박덕을 사주하여 상서上書한 것이라고 의심해서, 마침내 노박덕에게 조령을 내려 서하西河에서 흉노를 공격하게 하고, 이릉에게는 9월에 출발하도록 조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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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릉李陵이 이때에 거연居延에서 출동하여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러서 선우單于와 서로 만나니, 흉노匈奴의 기병이 3만 명쯤 되었다.
오랑캐들은 한漢나라 군대가 약소한 것을 보고는 곧장 진영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이릉이 육박전을 하고 추격해서 수천 명을 죽이니,注+“박전搏戰”은 맨손으로 상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선우가 크게 놀라 좌우의 지역에 있는 8만여 기병을 불러 이릉을 공격하게 하였다.注+“좌우지左右地”는 바로 흉노匈奴의 좌와 우에 있는 지역이다.
이릉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군대를 이끌고서 남쪽으로 행군한 지 며칠에 3천여 명의 수급을 베니, 선우가 말하기를 “이는 한漢나라의 정예병이어서 공격하여도 항복시킬 수가 없으며, 밤낮으로 우리 군대를 유인하여 남쪽 변방으로 가까이 가니, 복병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는 떠나고자 하였다.注+근近(가까이 가다)은 기근其靳의 절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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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그런데 마침 군후軍候인 관감管敢이 도망하여 흉노匈奴에 항복해서, 이릉李陵의 군대가 뒤에 구원병이 없고 화살이 곧 다하게 될 것이라는 상황을 자세히 말하였다.注+《속한지續漢志》에 “무릇 군대를 거느릴 적에는 모두 부곡部曲이 있으니, 부部에는 교위校尉가 있으며, 부部 아래에 곡曲이 있고 곡曲에는 군후軍候 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관감管敢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선우가 크게 기뻐하여 길을 가로막고 이릉의 군대를 급히 공격하니, 이릉의 군대는 남쪽으로 행군해서 제한산鞮汗山에 이르기 전에注+한汗은 음이 한寒이다. 하루 동안 50만 개의 화살이 모두 다하였다.
이릉은 크게 탄식하기를 “군대가 패하여 죽게 되었다.” 하고는, 병사들로 하여금 각각 흩어지게 하고서 차로장遮虜障에 이르러 기다리기로 약속하였다.注+병사들과 기약하기를 ‘먼저 차로장遮虜障에 이른 자가 있으면 그곳에 머물면서 뒤에 이르는 병사를 기다리라.’고 한 것이다. 차로장遮虜障은 장액군張掖郡거연현居延縣에 있으니, 노박덕路博德이 축조한 것이다.
이때 오랑캐 기병 수천 명이 추격해오자, 이릉은 “폐하에게 보답할 면목이 없다.” 하고 마침내 항복하니, 빠져나와 변방에 이른 병사가 겨우 400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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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상上이 이릉李陵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노하니, 여러 신하들은 모두 이릉의 죄를 책망하였으나, 오직 태사령太史令사마천司馬遷은 다음과 같이 강력히 변호하였다.
“이릉은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병사들과 신의를 지키며, 항상 분발하여 자기 한 몸을 돌아보지 아니해서 국가의 위급함에 희생하려 한 것이 그가 평소 품고 있던 마음이니,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습니다.注+순徇은 경영함이니, 일설에 “따름이다.” 하였다. “소소축적素所畜積”은 그의 가슴속에 평소 간직한 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지금 출전한 일이 한 번 불행하게 되자,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식을 보호한 신하들이 따라서 그의 단점을 비난하여 죄를 만들어내니, 진실로 애통할 만합니다.注+제齊나라 사람은 누룩 떡을 매媒라 하니, “매얼媒糵”은 그 죄를 만들어 냄을 비유한 것이다.
또 이릉이 데리고 간 보병이 채 5천 명이 되지 못하는데, 융마戎馬(군마軍馬)가 있는 적진을 깊숙이 유린하여 수만 명의 적군을 꺾었습니다.注+유蹂는 인구人九의 절切이니, 밟음이다. 억抑은 음이 억憶이니, 군대로 짓밟음을 이른다.
오랑캐들이 죽는 자를 구원하고 부상한 자를 부축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서 활을 당기는 병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함께 공격해서 포위하였는데, 이릉은 천 리나 멀리 행군하여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고 길이 막혀서 병사들이 빈 활을 당기고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며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여 적과 결사적으로 싸웠으니,注+환弮은 거권去權의 절切이고 또 음이 권眷이니, 활과 쇠뇌의 줄이다. 화살이 다하였기 때문에 쇠뇌의 빈 활만 편 것이다. 모冒는 막북莫北의 절切로 범함이고, 수首는 식구式救의 절切로 향함이니, 〈“북수쟁사적北首爭死敵”은〉 북쪽을 향하여 다투어 적과 싸워 목숨을 다하였음을 이른다. 장병들이 사력死力을 다하게 한 것은 비록 옛날의 명장名將이라도 그보다 더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함몰陷沒되어 패하였으나, 그가 적을 꺾고 무너뜨린 것은 또한 충분히 천하에 드러내어 보일 만합니다.注+“소최패所摧敗”는 흉노匈奴의 군대를 격파함을 이른다. “폭어천하暴於天下”는 그 공로를 천하에 드러내 보일 수 있음이다.
그가 죽지 않고 항복한 것은 마땅히 죄를 상쇄하는 큰 공을 세워서 한漢나라에 보답하고자 해서일 것입니다.”注+“욕득당欲得當”은 훌륭한 공을 세워 그 죄를 상쇄하고자 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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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상上은 ‘사마천司馬遷이 군주를 기망하고 이사장군貳師將軍을 저해하고자 하여 이릉李陵을 위해 유세한다.’고 여겨, 사마천을 하옥하여 부형腐刑(궁형宮刑)에 처하게 하였다.注+저沮(저해하다)는 재려才呂의 절切이다.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부腐는 음이 보輔이니, 궁형宮刑이다. 장부丈夫가 거세去勢를 하면 다시는 자식을 낳지 못하니, 마치 썩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랜 뒤에 상上은 후회하기를 “이릉이 색塞를 출발할 적에 때맞춰 강노도위彊弩都尉(노박덕路博德)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이릉의 군대를 맞이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미리 명령함으로 인해서 늙은 장수에게 간사한 꾀를 내게 하였다.”注+노박덕路博德이 강노도위彊弩都尉였다. 좌坐(인연하다)는 연緣과 같다. 예預는 미리이다. 황제의 마음에 이미 후회하고 예전의 일을 추억하여, 이르기를 “이릉李陵이 변방을 출발할 적에 때맞춰 노박덕에게 명해서 그의 뒤를 이어 이릉의 군대를 맞이하게 했어야 하는데, 이릉이 길을 떠나기 전에 미리 명령해서 노박덕으로 하여금 이릉李陵의 후거後距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노박덕이 간사한 꾀를 내어 상주해서, 마침내 노박덕으로 하여금 별도로 서하西河로 진출하게 함으로써 이릉의 군대에 구원병이 없게 만들었다.”고 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사자를 보내 이릉의 장병將兵 중에 살아남아 빠져나온 자들을 위로하고 물건을 하사하였다.注+노勞(위로하다)는 거성去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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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수의직지사자繡衣直指使者를 보내 군대를 징발해서 동방의 도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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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상上이 법제法制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고 혹리酷吏를 높여 등용하기를 좋아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더욱 쉽게 법을 범해서 동방에 도적떼가 더욱 일어나 성읍城邑을 공격하여 무기고의 병기를 탈취하고, 사형수들을 석방하고 이천석二千石의 장리長吏(수守ㆍ상相)를 죽이며, 향리鄕里를 노략질해서 도로가 통하지 못하였다.注+한漢나라의 군郡ㆍ국國에는 각기 창고에 병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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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상上이 처음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과 승상장사丞相長史로 하여금 이들을 살피게 하였으나 감당하지 못하니,注+독督은 살핌이다. 금禁은 거금居禽의 절切이니, 감당함(이겨냄)이다. 이에 광록대부光祿大夫범곤范昆 등으로 하여금 수의繡衣(수놓은 옷)를 입고 절節과 호부虎符(병부兵符)를 가지고 군대를 징발하여 군흥軍興의 법法(전시戰時의 법령, 제도)으로 토벌하게 해서注+
수의繡衣를 입힘은 높이고 총애한 것이다. “이흥격以興擊”은 군흥軍興의 법法으로 토격討擊하는 것이다. 이르는 곳마다 도적을 잡지 못한 이천석二千石 이하를 마음대로 참수하게 하니, 주살한 죄인이 매우 많아서 한 군郡에 많으면 만여 명에 이르렀다.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못 큰 괴수들을 잡았는데,注+거渠는 큼이다. 솔率(우두머리)는 소류所類의 절切이다. 흩어진 졸개로서 도망갔던 자들이 다시 무리를 모아 산천山川을 의지해 가로막고 있는 자가 도처에 떼 지어 있어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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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에 침명법沈命法을 만드니, 여기에 이르기를 “도적을 발각하지 못하거나 발각해도 체포한 것이 비율에 차지 못하는 관리는 이천석二千石 이하로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주관하는 자를 모두 죽인다.”注+침沈(죽이다)은 몰沒이니, 감히 도적을 은폐하고 감춘 자는 그 목숨을 죽이는 것이다. 품品은 비율이니, 인원수로 비율을 삼은 것이다. 하였다.
이 뒤로는 낮은 관리들이 주벌誅罰을 두려워해서, 비록 도적이 있더라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군부郡府에서도 또한 현縣을 시켜서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注+부府는 군부郡府이다. 현縣에 도적이 있으면 군부郡府 또한 함께 연좌되므로 현縣으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적이 점점 많아졌으나 상하上下가 서로 숨겨주어 허위로 문서를 만들어서 법을 회피하였다.注+〈“이문사피법언以文辭避法焉”은〉 거짓으로 허위 문서를 만들어서 도적이 없다고 보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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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때 포승지暴勝之가 직지사자直指使者가 되어서 수의繡衣를 입고 도끼를 잡고서 주살한 이천석二千石 이하가 더욱 많으니, 위엄이 주군州郡에 떨쳤다.注+포暴은 성姓이다. “직지直指”는 일을 곧바로 가리켜 행해서 아부하고 사사로이 봐주는 바가 없는 것이다. 장杖(잡다)은 상성上聲이다. 도끼를 하사한 것은 마음대로 단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발해渤海에 이르러 발해군渤海郡 사람인 준불의雋不疑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는 만나볼 것을 청하였는데,注+준雋은 조연徂兗과 사연辭兗의 두 가지 절切이니, 성姓이다. 불의不疑는 이름이다. 준불의는 용모가 존엄하고 의관이 매우 거룩하였다.
포승지가 일어나 신을 끌고 나가서 맞이하여 당堂에 올라 좌정하자,注+사躧는 사蹝‧사屣와 통하니, 신에 발꿈치를 넣지 않은 것을 사躧라 한다. 사躧는 신을 바르게 신지 못하고 끌고 감이니, 급히 달려감을 말한 것이다. 준불의가 바닥을 짚어 예禮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바닷가에 살면서 폭공자暴公子의 명성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얼굴을 받들어 뵙고 말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注+“거지據地”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공경하는 예를 표한 것이다. 빈瀕은 음이 빈頻이니, 물가이다. 공자公子는 승勝의 자字이다. 구舊는 오램이다.
무릇 관리가 된 자는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너무 유순하면 폐해지니(쓰러지니), 위엄이 행해지거든 은혜를 베푼 뒤에야 공功을 세우고 이름을 드날려서 하늘의 복록福祿을 영원히 끝마칠 수 있습니다.”
포승지는 그의 경계하는 말을 깊이 받아들였는데, 돌아올 적에 표문表文을 올려 천거해서 불러 청주자사靑州刺史를 제수하였다.
그리하여 사명使命을 받듦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하여 면직되자,注+“불칭不稱”은 위임한 바에 부응하지 못함을 이른다. 탄식하기를 “내 들으니, ‘천 사람을 살려주면 자손들이 후侯에 봉해진다.’ 하였다.
내가 살려준 자는 만여 명이니, 후세에 아마도 흥성할 것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遣李廣利……戰敗降虜 :
“李廣利는 노예나 될 만한 하찮은 재주를 지녔다. 전에 大宛을 정벌할 적에 士卒들이 매우 많이 죽었는데, 이광리는 誅罰을 면하고 侯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그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으니, 한갓 병사들을 더 많이 죽게 할 뿐이다. 李陵이 패전한 이유 또한 貳師將軍에게 예속되기를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한 부대를 담당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李陵은 ‘군주의 군대를 운용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죽어야 하니, 항복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司馬遷은 이릉의 충성과 용맹을 말했다가 형벌을 받았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삭제하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이릉이 이미 오랑캐에게 항복한 죄가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기타 아름다운 일로 속죄할 수가 없는 것이니, 사마천 또한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로 筆削하는 書法의 깊은 뜻이다.[李廣利奴材也 前伐大宛 士卒物故甚衆 免誅而侯 今又使之將兵 徒益多殺而已 李陵之敗 亦以恥於屬役 故請自當一隊 然不知謀人之軍 師敗則死之 降則不可也 馬遷言陵忠勇 以致受刑 綱目削而不書 蓋陵旣有降虜之罪 他美擧不足以贖之 則遷亦無足言者矣 此固筆削之深意也]” 《發明》
역주2위의……去聲이니 :
衣는 ‘옷’으로 訓할 경우에는 平聲이고, ‘입다’ 또는 ‘입히다’로 訓할 경우에는 去聲으로 읽는바, 원문의 ‘衣繡衣’는 ‘자수를 놓은 옷을 입게 한다.’는 뜻으로, 위에 있는 衣자가 去聲임을 밝힌 것이다.
역주3王賀는……조부이다 :
孝元皇后는 元帝의 王皇后를 가리킨다. 宣帝 甘露 3년(B.C. 51) 綱에 “皇孫 劉驁가 태어났다.” 하였는데, 目에 “皇太子[元帝]가 총애하던 司馬良娣가 병으로 죽자, 太子가 서운하여 즐겁지 못하였다. 皇帝가 皇后로 하여금 後宮과 家人子를 가려 뽑아 王政君을 얻어 太子宮으로 보내니, 왕정군은 옛 繡衣御史인 王賀의 손녀였다. 그녀가 이해에 成帝(劉驁)를 甲館의 畵堂에서 낳으니, 世適皇帝孫이라 칭하였다. 황제는 皇孫을 사랑하여 직접 이름을 驁, 字를 太孫이라 하여 항상 左右에 두었다.”라고 보인다. 왕정군은 王賀의 長子인 王禁의 長女였는데, 그녀가 황후가 됨으로 인하여 成帝 때에 王氏 집안은 크게 번창하여 一門五侯(한 가문에 다섯 명의 형제가 모두 侯에 봉해짐)가 되어 富貴가 극에 이르렀으나, 결국 王莽의 찬탈로 一族이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