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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4)

자치통감강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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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年(B.C. 82)
기해년(B.C. 82)
五年이라
[綱] 나라 효소황제孝昭皇帝 시원始元 5년이다.
春正月 男子成方遂 詣闕하여 詐稱衛太子라가 伏誅하다
봄 정월에 남자男子성방수成方遂대궐大闕에 나와 위태자衛太子를 사칭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有男子乘黃犢車하고 詣北闕하여 自謂衛太子어늘 公車以聞注+犢, 牛子也.한대
[目] 한 남자가 누런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타고 북쪽 대궐에 와서 스스로 위태자衛太子(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라 하므로 공거公車에서 보고하였다.注+은 송아지이다.
詔公, 卿, 將軍, 中二千石하여 雜識視하니 至者竝莫敢發言注+中, 滿也. 郡守二千石, 正卿及列卿, 皆中二千石. 漢制, 二千石, 一歲得一千四百四十石, 實不滿二千石, 其中二千石者, 一歲得二千一百六十石, 擧成數言之, 故云中二千石. 雜, 共也. 言有素識之者, 令視, 知其是非也.하고 吏民聚觀者 數萬人이라
조령詔令을 내려 공경公卿장군將軍중이천석中二千石에게 여럿이 모여 위태자인지를 식별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이른 자들이 모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고,注+滿이다. 군수郡守이천석二千石이고 정경正卿열경列卿은 모두 중이천석中二千石이다. 나라 제도에, 이천석二千石은 1년에 녹봉 1,440을 얻으니 실제로는 이천석二千石에 차지 못하였고, 중이천석中二千石인 자는 1년에 2,160을 얻으니 큰 를 들어 말하였으므로 중이천석中二千石이라 한 것이다. 은 함께함이니, 〈“잡식시雜識視”는〉 평소 위태자衛太子를 아는 자가 보고서 그가 위태자衛太子인지 아닌지를 식별하게 함을 말한 것이다. 모여서 구경하는 관리와 백성이 수만 명이었다.
右將軍 勒兵闕下하여 以備非常注+右將軍, 天水人王莽也.이러니 京兆尹雋不疑後到하여 叱從吏收縛한대
우장군右將軍이 대궐 아래에 군대를 진열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는데,注+우장군右將軍천수天水 사람인 왕망王莽이다.경조윤京兆尹 준불의雋不疑가 뒤늦게 와서 따라온 관리를 꾸짖으며 그 남자를 포박하게 하였다.
或曰 是非 未可知 且安之注+安, 猶也.하라 不疑曰 諸君 何患於衛太子리오
혹자가 만류하기를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으니, 우선 천천히 하라.”注+(천천히)은 와 같다. 하니, 준불의가 말하기를 “제군諸君들은 어찌 위태자를 염려한단 말인가.
한대 春秋是之注+公羊傳曰 “輒之義, 可以立乎. 曰可. 奈何. 不以父命辭王父命也.”
옛날에 나라의 위괴외衛蒯聵부왕父王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나라로 도망하자 아들 위첩衛輒이 막고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춘추春秋》에 이것을 옳게 여겼다.注+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위첩衛輒의리상義理上 즉위할 수 있는가? 하다. 어째서인가? 아버지의 때문에 할아버지의 을 사양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衛太子得罪先帝하여 亡不卽死하고 今來自詣하니 此罪人也라하고 遂送詔獄注+以罪去國曰亡. 卽, 就也.하다
위태자가 선제先帝에게 죄를 얻고는 도망가서 즉시 죽지 않고 지금 스스로 대궐에 이르렀으니, 이는 죄인이다.” 하고는 마침내 체포하여 조옥詔獄으로 보냈다.注+죄를 짓고서 나라를 떠나가는 것을 이라 한다. 은 즉시이다.
與大將軍光으로 聞而嘉之하여 曰 公卿大臣 當用有經術하여 明於大誼者라하니繇是 不疑名重朝廷하여 在位者皆自以爲不及也러라
[目] 은 대장군 곽광霍光과 함께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공경公卿대신大臣은 마땅히 경학經學이 있어 대의大誼에 밝은 자를 등용해야 한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준불의雋不疑의 명성이 조정에 높아져서 지위에 있는 자들이 모두 자신이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廷尉驗治何人注+凡不知姓名及所從來, 皆曰何人.하여 竟得姦詐하니 本夏陽人이니이요 方遂注+徐廣曰 “夏陽, 在梁山龍門.”
정위廷尉가 〈위태자衛太子를 사칭한〉 어떤 사람을 조사하여注+무릇 성명姓名과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을 모두 “하인何人”이라 한다. 다스려서 끝내 간사한 정황을 알아내니, 그는 본래 하양夏陽 사람으로 이고 이름이 방수方遂였다.注+이 말하기를 “하양夏陽양산梁山 용문龍門에 있다.” 하였다.
居湖할새 有故太子舍人 謂曰 子狀貌甚似衛太子라하니
호현湖縣에 살고 있었는데, 옛날 위태자의 사인舍人이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모습이 위태자와 매우 흡사하다.” 하였다.
方遂利其言하여 冀以得富貴라가 坐誣罔不道하여 腰斬하다
이에 성방수成方遂는 그의 말을 이롭게 여겨 부귀를 얻기를 바라다가, 무망부도죄誣罔不道罪에 걸려 요참형腰斬刑을 당하였다.
程子曰
[目] 정자程子(정이천程伊川)가 말씀하였다.
雋不疑說春秋非是
준불의雋不疑가 《춘추春秋》를 말한 것은 옳지 않다.
이나 其處事應機 則不異於古人矣로다
그러나 일을 처리함에 임기응변臨機應變한 것은 고인古人과 다르지 않다.”
胡氏曰
[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蒯聵 衛靈公之世子也
위괴외衛蒯聵나라 영공靈公세자世子이다.
出犇於宋하니 靈公 未嘗有命廢之而更立他子也어늘
〈국경을〉 나가 나라로 도망하였으니, 영공靈公이 일찍이 명을 내려 그를 폐하고 다른 아들을 다시 세우라고 한 적이 없었다.
靈公卒 蒯聵之子輒 遂自立以拒蒯聵하니 亦未嘗有靈公之命也
영공이 죽자 위괴외의 아들 위첩衛輒이 마침내 스스로 즉위하여 위괴외를 막았으니, 이 또한 영공의 명이 있은 적이 없었다.
蒯聵叛父殺母하니 當黜何疑리오
위괴외가 아버지를 배반하고 어머니를 죽이려 하였으니, 마땅히 쫓겨나야 함을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이나 輒拒之 則失人子之道矣
그러나 위첩이 막은 것은 자식의 도리를 잃은 것이다.
春秋於趙鞅納蒯聵 書曰世子라하니 明其位之未絶也 於石曼姑圍戚 書齊國夏爲首하니惡其黨輒也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조앙趙鞅이 위괴외를 나라에 들여보낼 적에 “세자世子이다.”라고 썼으니, 그 지위가 아직 끊기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요, 석만고石曼姑 땅을 포위했을 적에 “나라 국하國夏가 괴수가 되었다.”라고 썼으니, 그가 위첩衛輒당여黨與가 됨을 미워한 것이다.
然則謂春秋是輒者 非經旨矣
그렇다면 ‘《춘추春秋》에 위첩衛輒을 옳게 여겼다.’고 말한 것은 경문經文의 뜻이 아니다.
彼據也 稱兵闕下하여 與父兵戰注+據, 衛太子名.하니 正使不死而父宥之라도 其位亦不得有矣
유거劉據(위태자衛太子)가 대궐 아래에서 군대를 일으켜 아버지의 군대와 싸웠으니,注+위태자衛太子의 이름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아버지가 용서했다 하더라도 태자太子의 지위를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果來自詣인댄 但當以此下令하여 叱吏收縛이라도 亦足以成獄而議刑矣 不必引春秋也
그런데 과연 스스로 와서 대궐에 이르렀다면, 의당 이것만 가지고 명령을 내려 관리를 책망해서 포박하게 하였더라도 충분히 옥사를 이루어 형벌을 의논할 수 있었을 것이니, 굳이 《춘추春秋》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
霍光 不學故 不能辨이라
곽광霍光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분변分辨하지 못하였다.
이나 其謂公卿當用有經術明大誼者 則格言也니라
그러나 ‘공경公卿은 마땅히 경학經學이 있어서 대의大誼에 밝은 자를 등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罷儋耳, 眞番郡하다
[綱] 담이군儋耳郡진번군眞番郡을 파하였다.
역주
역주1 蒯聵違命出犇……距而不納 : 蒯聵는 춘추시대 衛나라 靈公의 太子였는데, 靈公이 총애하던 南子가 음행을 저지르자 南子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靈公의 노여움을 사고 晉나라로 망명하였다. 靈公이 죽고, 蒯聵의 아들 衛輒이 즉위하니, 괴외는 晉나라의 세력을 믿고 衛나라로 쳐들어와 부자간에 싸움이 벌어져 결국 위첩이 쫓겨났다.
역주2 (餘)[徐] : 저본에는 ‘餘’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徐’로 바로잡았다.
역주3 徐廣 : 晉나라 사람으로 字는 野民이며 徐邈의 아우이다. 집안이 대대로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徐廣은 특히 百家와 數術에 정통하여 《車服儀注》와 《晉紀》 등을 撰하였다.

자치통감강목(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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