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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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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이라
趙建武八年이라
春正月朔 日食하다
◑二月 豫州刺史庾懌 有罪自殺하다
以酒餉江州刺史王允之하니 允之覺其毒하고 飲犬 犬斃
密奏之注+飮, 於禁切.한대 帝曰 大舅已亂天下어늘 小舅復欲爾邪注+大舅, 謂庾亮也.아하니 遂飲鴆而卒하다
夏六月 帝崩注+壽二十二.하니 琅邪王岳 即位하다
帝幼沖嗣位러니 旣長 頗有勤儉之德이라 至是하여 不豫하니 或詐爲尚書符하여 勅宫門하여 無得内宰相한대 衆皆失色注+內, 讀曰納.이라
庾冰曰 此必詐也라하고 推問하니 果然注+推, 考也, 究也.이러라
帝二子丕, 奕 皆在襁褓 恐易世之後 親屬愈疎하여 爲人所間注+間, 去聲.하여 請以母弟琅邪王岳爲嗣한대
帝許之注+岳, 咸和元年封吳王. 二年, 徙封琅邪.하니 中書令何充曰 父子相傳 先王舊典이요 且今將如孺子何잇고 不聽하다
帝乃詔冰, 充及武陵王晞, 會稽王昱, 尚書令諸葛恢하여 竝受顧命而崩注+晞, 元帝子. 太興元年, 受封. 昱, 永昌元年爲琅邪王. 咸和之初, 徙封會稽.하다
琅邪王 即位하여 亮陰不言하고 委政於冰, 充하다
◑秋七月 葬興平陵하고 以何充都督徐州軍事하다
帝徒行送喪하여 至閶闔門하여 乃升素輿注+閶闔門, 建康都城最南門名, 宮門亦有閶闔.하고 旣葬 臨軒하니 庾冰, 何充 侍坐러니
帝曰 朕嗣鴻業 二君之力也니라 充曰 陛下龍飛 臣冰之力也 若如臣議 不覩升平之世리이다 帝有慙色이러라
避諸庾하여 出鎮京口하다
冬十月 遷都龍城注+慕容廆先居徒河之靑山, 後徙棘城. 今自棘城, 徙都龍城.하다
◑十一月 燕王皝 擊髙句麗하여 入丸都하여 載其王釗父屍及母하여 以歸하다
慕容翰 言於燕王皝曰
宇文 屢爲國患이러니 今逸豆歸簒竊得國하니 群情不附하며 加之庸闇하고 將帥非才하여 國無防衛하고 軍無部伍
久在其國하여 悉其地形하니 今若擊之하면 百舉百克이니이다이나 髙句麗去國密邇하여 必乗虛掩吾不備하리니 此心腹之患也
宜先除之하고 還取宇文 如返手耳注+返, 當作反, 下同.니이다 二國旣平이면 利盡東海하여 國富兵彊하여 無返顧之憂하리니 然後 中原 可圖也니이다
皝曰 善하다
髙句麗有二道하니 北道 平闊하고 南道 險狹이라 欲從北道注+北道, 從北置而進. 南道, 從南陝, 入木底城.어늘 翰曰
虜必重北而輕南하리니 王宜帥鋭兵하고 從南道擊之하여 出其不意하시면 丸都 不足取也注+丸都, 高麗國都.니이다
别遣偏師하여 出北道하면 縱有蹉跌이라도 其腹心已潰하여 四支無能爲也리이다
從之하여 自將勁兵四萬하여 出南道하고 以翰及慕容霸爲前鋒하고 别遣長史王㝢等하여 將兵萬五千하여 出北道하여 以伐髙句麗하다
其王釗 果遣弟武하여 帥精兵하여 拒北道하고 自帥羸兵하여 備南道러라
翰等 先至하여 與釗合戰이러니 皝以大衆繼之하니 髙句麗兵 大敗
諸軍 乗勝하여 遂入丸都하니 釗單騎走어늘 獲其母妻하다
王㝢等 戰於北道라가 皆敗沒하니 不復窮追하고 遣使招釗한대 不出하다
韓壽曰
髙句麗之地 不足成守 今其主亡民散하여 潜伏山谷하니 大軍旣去 必復鳩聚하여 收其餘燼이면 猶足爲患注+鳩, 亦聚也. 火餘曰燼, 猶能復然, 以喩收合已敗之遺兵也.이니이다
請載其父屍하고 囚其生母而歸라가 俟其束身自歸然後 返之하여 撫以恩信 策之上也니이다
遂發釗父墓하여 載其屍하고 虜男女五萬餘口하고 毁丸都城而還하다
十二月 立皇后褚氏하다
徵后父豫章太守褚裒하여 爲侍中하니 裒以后父라하여 不願居中任事어늘 乃除江州刺史하여 鎮半洲注+半洲, 在江州界.하다
趙作長安, 洛陽宫하다
趙王虎作臺觀四十餘所於鄴하고 又營長安, 洛陽二宫하니 作者四十餘萬人이라
又勅境内하여 治南伐, 西討, 東征之計하여 皆三五發卒注+西討, 欲攻河西也. 東征, 欲伐燕也. 發, 起也, 遣也. 三丁發一, 五丁發二, 以爲兵卒. 一說 “三丁發二, 五丁發三也.”하고
造甲者五十餘萬人이요 船夫十七萬人이요 公侯, 牧宰 競營私利하니 百姓 失業이라
貝丘人李弘 因衆怨하여 謀作亂이라가 事發誅之하니 連坐者數千家注+貝丘縣, 自漢以來, 屬淸河郡.러라
趙徵兵入宼하다
濟南平陵城北石虎 一夕 移於城東南하고 有狼狐千餘迹随之하여 迹皆成蹊注+漢濟南郡, 有東平陵縣, 晉省, 後復置, 爲平陵縣.
虎喜曰 石虎者 朕也 自西北徙而東南 天意欲使朕平蕩江南也 其勅諸州兵하여 明年 悉集하라 朕當親董六師하여 以奉天命注+董, 督也.호리라
群臣 皆賀호되 上皇德頌者 一百七人注+上, 時掌切.이러라호되
征士五人 出車一乗, 牛二頭, 米十五斛, 絹十匹하고 不辦者하라하니
鬻子以供호되 猶不能給하여 自經於道樹者相望이러라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강咸康 8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8년이다.
[] 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2월에 예주자사豫州刺史 유역庾懌(유역)이 죄가 있어 자살하였다.
[] 유역庾懌강주자사江州刺史 왕윤지王允之에게 술을 보내었는데, 왕윤지가 술에 독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 개에게 마시게 하자注+① 飲(마시게 하다)은 於禁의 切이다. 개가 죽었다.
이 사실을 은밀히 황제( 성제成帝)에게 아뢰자, 황제가 말하기를 “큰 외숙이注+② 큰 외숙은 庾亮을 이른다. 이미 천하를 어지럽혔는데 작은 외숙이 또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가.” 하니, 유역이 마침내 짐독鴆毒을 마시고 하였다.
[] 여름 6월에 황제( 성제成帝)가 하니,注+① 〈成帝는〉 향년이 22세였다. 낭야왕琅邪王 사마악司馬岳이 즉위하였다.
[] 황제가 어려서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성장한 뒤에 자못 부지런하고 검소한 덕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몸이 편치 않았는데, 혹자가 거짓으로 상서尙書부서符書를 만들어 궁문宮門에 명하여 재상들을 들이지注+① 內(들이다)은 納으로 읽는다. 못하게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낯빛이 변하였다.
유빙庾冰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속임수이다.” 하고 심문審問하니,注+② 推는 詳考함이요 推究함이다. 과연 그러하였다.
[] 황제의 두 아들인 사마비司馬丕사마혁司馬奕이 모두 나이가 어려 포대기 속에 있었다. 유빙庾冰가 바뀐 뒤에 자신의 친속이 더욱 소원해져서 남에게 이간질을注+① 間(이간질)은 去聲이다.
成帝議立琅琊王成帝議立琅琊王
당할까 두려워하여 황제의 동모제同母弟낭야왕琅邪王 사마악司馬岳注+② 司馬岳은 咸和 원년(326)에 吳王에 封해졌는데, 2년에 琅邪로 옮겨 봉해졌다.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니, 중서령中書令 하충何充이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왕위를 전함은 선왕의 옛 법인데, 〈낭야왕을 후사로 삼으시면〉 지금 장차 저 어린 아들은 어찌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유빙이 듣지 않았다.
황제가 마침내 유빙과 하충, 무릉왕武陵王 사마희司馬晞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注+③ 司馬晞는 元帝의 아들인데 太興 원년(318)에 封地를 받았다. 司馬昱은 永昌 원년(322)에 琅邪王이 되었는데 咸和 연간 초기에 會稽로 옮겨 봉해졌다. 상서령尚書令 제갈회諸葛恢에게 명하여 함께 고명顧命을 받게 하고 하였다.
낭야왕이 즉위하여 상중喪中여막廬幕에 있으면서 〈정사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고 유빙과 하충에게 정사를 맡겼다.
[] 성제成帝의 아들 사마비司馬丕를 봉하여 낭야왕琅邪王으로 삼고 사마혁司馬奕동해왕東海王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성제成帝를〉 흥평릉興平陵에 장례하고 하충何充도독서주군사都督徐州軍事로 삼았다.
[] 황제( 강제康帝)가 도보로 〈성제成帝의〉 상여를 전송하여 창합문閶闔門注+① 閶闔門은 建康 都城의 가장 남쪽에 있는 문 이름인데, 宮門에도 창합문이 있다. 이르러 마침내 흰 수레에 오르고 장례를 마친 다음 평대平臺에 나아가니, 유빙과 하충이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황제가 말하기를 “짐이 대업을 계승함은 두 군의 이다.” 하였다. 하충이 말하기를 “폐하가 황제가 되심은 유빙의 공이니, 만약 신의 의논대로 했다면 성상께서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하충은 여러 유씨庾氏를 피하여 지방으로 나가 경구京口에 진주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전연前燕)가 용성龍城으로 천도遷都하였다.注+① 慕容廆가 먼저는 徒河의 靑山에 거주하였는데, 나중에 棘城으로 옮겼다. 지금은 극성에서 龍城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 11월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여 환도성丸都城으로 쳐들어가서 그 왕 고소高釗(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버지(미천왕美川王) 시신과 어머니를 수레에 싣고 돌아갔다.
[] 모용한慕容翰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문씨宇文氏가 여러 번 우리나라의 우환이 되었는데, 이제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가 찬탈하고 도둑질하여 나라를 얻었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용렬하고 어리석으며 장수들은 훌륭한 재주 있는 자들이 아니어서 나라에는 방위가 없고 군대에는 대오가 없습니다.
신이 그 나라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지형을 자세히 압니다. 지금 만약 그들을 공격한다면 백 번 군대를 일으켜 백 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는 우리 국토와 매우 가까워서 반드시 빈틈을 타고서 우리가 대비하지 않은 곳을 엄습할 것이니, 이는 심복心腹의 우환입니다.
마땅히 먼저 고구려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와 우문宇文을 취하는 일은 손을 뒤집는注+① 返은 마땅히 反이 되어야 하니, 아래 “返之”의 返도 이와 같다.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두 나라가 평정되고 나면 동해 지방의 이익을 우리가 모두 차지하게 되므로 나라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해서 뒤를 돌아보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중원中原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모용황이 “좋다.” 하였다.
[] 고구려를 쳐들어가는 데에는 두 길이 있으니,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고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注+① 북쪽 길은 北置를 따라 나아가고, 남쪽 길은 南陝을 따라 木底城(목지성)으로 들어간다. 여러 사람들이 북쪽 길을 따라 쳐들어가려 하자, 모용한이 말하기를
“오랑캐(고구려)는 반드시 북쪽을 중시하고 남쪽을 경시할 것이니, 왕(모용황)께서는 마땅히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따라 공격하여 저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동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환도丸都注+② 丸都는 고구려의 國都이다. 점령할 거리도 못 됩니다.
그리고 따로 한 군대를 보내어서 북쪽 길로 진출하게 하면 비록 〈북쪽 길을 공격하는 데〉 차질이 생기더라도 저들의 중심부(환도성)가 이미 무너진 뒤여서 사지四肢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모용황이 그의 말을 따라 자신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출하여 모용한慕容翰모용패慕容霸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長史 王㝢 등을 보내어 1만 5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가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 고구려 왕 고소高釗가 과연 아우 고무高武를 보내어 정예병을 거느려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잔약한 군대를 거느리고서 남쪽 길을 방비하였다.
모용한慕容翰 등이 먼저 이르러서 고소와 맞붙어 싸웠는데 모용황이 대군을 거느리고 계속해서 오니, 고구려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여러 군대가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환도성丸都城으로 쳐들어가니, 고소가 필마匹馬를 타고 달아나므로 그의 모친과 아내를 사로잡았다.
마침 王㝢 등이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전몰하니, 모용황이 더 이상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고소를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 한수韓壽가 말하였다.
“고구려의 땅은 군대를 주둔시켜 지킬 것이 못 됩니다. 지금 그 군주가 도망하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니, 우리의 대군이 떠나가고 나면 반드시 다시 모여서 잔존 세력을 거둘 것입니다.注+① 鳩 또한 모임이다. 불타고 남은 것을 燼이라 한다. 불씨도 오히려 다시 불탈 수 있으니, 이로써 이미 패한 남은 군대를 收合함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하면 오히려 우환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청컨대 그 왕의 아비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그 생모生母수금囚禁하여 돌아갔다가 고소高釗가 몸을 속박하여 스스로 귀부하기를 기다린 뒤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져주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입니다.”
모용황이 마침내 고소의 아비의 묘소를 발굴하여 그 시신을 수레에 싣고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잡고서 환도성을 부수고 돌아갔다.
[] 12월에 〈나라(동진東晉)가〉 저씨褚氏를 황후로 세웠다.
[] 이때 황후의 아버지 예장태수豫章太守 저부褚裒를 불러 시중侍中을 삼으니, 저부는 자신이 황후의 아버지라 하여 중앙(조정)에 있으면서 일을 맡기를 원치 않으므로 마침내 강주자사江州刺史를 제수하여 반주半洲注+① 半洲는 江州의 경계에 있다. 진주하게 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장안長安낙양洛陽에 궁궐을 지었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누대樓臺궁관宮觀 40여 개를 업성鄴城에 만들고 또 장안長安낙양洛陽에 각기 궁궐을 경영하여 지으니, 이에 부역하는 자가 40여만 명이었다.
또 경내에 명하여 남쪽(동진東晉)을 정벌하고 서쪽(전량前涼)을 토벌하고 동쪽(전연前燕)을 정벌하는 계책을 마련하게 해서 3명의 장정 중에 1명, 5명의 장정 중에 2명을 모두 군인으로 징발하게 하였다.注+① “西討”는 河西(前涼)를 공격하고자 하는 것이고, 東征은 燕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發은 일으킴이요 보냄이다. 〈“三五發卒”은〉 세 명의 장정 중에 한 명을 징발하고 다섯 명의 장정 중에 두 명을 징발하여 병졸로 삼는 것이다. 일설에는 “세 명의 장정 중에 두 명을 징발하고 다섯 명의 장정 중에 세 명을 징발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갑옷을 만드는 자가 50여만 명이고, 배를 만드는 인부가 17만 명이었다. 게다가 공후公侯주목州牧 수령이 앞 다투어 사사로운 이익을 경영하여 취하니, 백성들이 생업을 잃었다.
패구貝丘注+② 貝丘縣은 漢나라 때 이후로 淸河郡에 속하였다. 사람 이홍李弘이 여러 사람이 원망하는 것을 틈타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주살되었는데, 여기에 연좌된 자가 수천 가호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군대를 징집하여 〈나라를〉 침략하다.
[] 제남濟南 평릉성平陵城注+① 漢나라 濟南郡에 東平陵縣이 있었는데, 晉나라가 없앴다가 뒤에 다시 설치하여 平陵縣으로 삼았다. 북쪽에 있는 돌 호랑이[석호石虎]가 하루저녁에 성의 동남쪽으로 옮겨갔는데 이리와 여우 천여 마리가 발자취를 따라가서, 이어진 발자취가 모두 작은 길이 되었다.
석호石虎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돌 호랑이는 짐이니,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옮겨 간 것은 하늘의 뜻이 짐으로 하여금 강남 지방을 소탕하여 평정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 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명년明年에 모두 모이게 하라. 짐이 친히 육군六軍을 독려하여注+② 董은 督(감독하다)이다. 천명天命을 받들겠다.”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는데, 〈황덕송皇德頌〉을 지어 올린注+③ 上(올리다)은 時掌의 切이다. 자가 107명이었다. 석호가 조령을 내리기를
“출정하는 군사 다섯 사람에게 병거 1과 소 2마리, 쌀 15, 비단 10필을 내게 하고, 이것을 마련하지 못하는 자는 참수하라.” 하니,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비용을 대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비용을 댈 수가 없어서 스스로 길가의 나무에 목을 매 죽은 자가 끊이지 않았다.


역주
역주1 封成帝子丕……奕爲東海王 : “司馬丕와 司馬奕은 황제(康帝 司馬岳)의 형(成帝 司馬衍)의 아들인데, 成帝의 아들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명칭을 바로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폐하여 海西公으로 삼은 자는 그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없을 것이다.[丕奕 其兄子也 書成帝子 何 正名也 然則廢爲海西公者 其罪 不可勝誅矣]” ≪書法≫
훗날 司馬奕이 帝位에 있은 지 6년 만에 그의 신하 桓溫이 태후의 명령을 선포하여 폐위시켜 海西公으로 삼았으므로 역사에서는 사마혁을 廢帝라고 부른다. ≪書法≫의 마지막 내용은 사마혁을 폐위시킨 桓溫을 두고 한 말이다.(≪晉書≫ 권8 〈帝紀 廢帝海西公奕〉)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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