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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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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康元年이라
趙太祖石虎建武元年이라
◑成主李期玉恒元年이라
春正月朔 帝冠하다
◑三月 하다
司徒導羸疾하여 不堪朝會 帝幸其府하여 與群臣宴於内室하고 拜導及其妻曹氏하니
侍中孔坦 密諫하여 以爲初加元服 動宜顧禮니이다 帝方委政於導
復言曰 陛下春秋已長하사 聖敬日躋하시니 宜博納朝臣하여 諮諏善道注+長, 知兩切. 日躋, 猶日進也.니이다
導聞而惡之하여 出爲廷尉하니 以疾去職하다
丹楊尹桓景 諂巧하니 導親愛之러니 熒惑 守南斗經旬注+晉天文志 “南斗六星, 天廟也, 丞相․太宰之位.”이어늘
導謂將軍陶回曰 斗 揚州之分이니 吾當遜位以厭天譴注+天文志 “斗․牛․女, 揚州. 九江, 入斗一度. 丹楊, 入斗十六度.” 分, 扶問切. 厭, 一葉切.호리라
回曰 公以明徳作輔하여 而與桓景造膝하니 使熒惑何以退舍이닛고 導深愧之注+造, 至也.러라
導辟王濛, 王述爲掾屬注+濛爲掾. 述爲中兵屬. 述, 昶之曾孫也.하니 不修小廉이로되 而以清約見稱하고 與沛國劉惔友善注+惔, 談․淡二音.이러니
常稱濛性至通而自然有節이라하고 濛曰 劉君知我 勝我自知라하니 當時稱風流者 以惔, 濛爲首러라
性沈靜하여 毎坐客辨論蜂起 而述 處之恬如也러라 年三十 尙未知名하니 人謂之癡러라
導以門地辟之注+昶之子, 湛, 湛之子, 承, 世有高名. 述, 承子也.러니 既見 唯問在東米價한대 張目不答注+述, 蓋自東吳至建康.하니 導曰 王掾不癡라하니라
導每發言 一坐莫不賛美어늘 正色曰 人非堯舜이면 何得每事盡善이리오하니 導改容謝之하다
趙王虎南遊하여 臨江而還하니 有游騎十餘至歷陽이라 太守袁耽 表上之할새 不言多少하니 朝廷 震懼하여 加司徒導大司馬都督征討諸軍事하다
帝觀兵廣莫門注+觀, 音貫. 廣莫門, 建康城北門也.하여 分命諸將하여 救歷陽하고 及戍慈湖, 牛渚하니 郗鑒 使廣陵相陳光으로 將兵入衛하다
俄聞趙騎至少하고 又已去 遂解嚴하고 導解司馬하니 坐輕妄免官注+司馬, 通鑑作大司馬.하다
大旱하다
◑秋九月 趙遷都鄴하다
趙主勒 以天竺僧佛圖澄 豫言成敗 數有驗이라하여 敬事之注+佛圖, 虜複姓. 澄, 其名. 晉書藝術傳 “佛圖澄, 本姓帛氏, 常服氣自養, 能積日不食, 善誦神呪, 能役使鬼神. 腹旁有一孔, 常以絮塞之, 每夜讀書, 則拔絮, 孔中出光, 照于一室. 又甞齋時, 平旦至流水側, 從腹旁孔中, 引出五臟六腑洗之, 訖, 還內腹中. 又能聽鈴音, 以言吉凶, 莫不懸驗.”하다
及虎即位 奉之尤謹하여 衣以綾錦하고 乘以彫輦注+衣, 於旣切. 彫輦, 彫鏤以爲飾.하며 朝會之日 太子, 諸公 扶翼上殿注+諸公, 虎諸子也. 虎稱天王, 降諸子封王者爵, 爲公.하니
國人 化之하여 争造寺廟하고 削髮出家러니 至是하여 或避賦役爲姦宄러라
詔中書曰 佛 國家所奉이니 里閭小人無爵秩者 應得事不注+不, 讀曰否.
著作郞王度等 議曰 王者祭祀 典禮具存이어니와 外國之神이니 非天子所應祠也니이다 漢魏唯聽西域人立寺都邑하고 漢人 皆不得出家하니
今宜禁公卿以下하여 毋得詣寺燒香禮拜하고 其趙人爲沙門者 皆返初服注+謂使還服華人之服.이니이다 虎詔曰
生自邊鄙하여 忝君諸夏하니 至於饗祀하야는 應從本俗이라 其夷, 趙百姓 樂事佛者 特聽之하노라
成太子班之舅羅演等 謀殺成主期하고 立班子라가 事覺하니 期殺演等及班母羅氏하다
期自得志 輕諸舊臣하고 信任景騫, 姚華, 田褒, 中常侍許涪等하여 刑賞大政 皆决於數人하니
褒無他才 嘗勸雄立期爲太子 故有寵하니 由是 紀綱隳紊하여 雄業 衰矣러라
冬十月朔 日食하다
◑建安君荀氏卒하다
荀氏 明帝母也러라 在禁中하여 尊重 同於太后러니 贈豫章郡君注+荀氏, 元帝宮人也. 生明帝, 自以位卑, 每懷怨望, 爲帝所譴, 漸見疎薄. 及明帝卽位, 封建安君, 別立第宅. 太寧元年, 迎還臺內, 供奉隆厚. 及帝立, 尊重同於太后.하다
代王紇那復入하니 翳槐奔趙하다
張軌及寔, 茂 保據河右로되 軍旅之事 無歲無之러니 及駿嗣位 境内漸平하다
駿 勤修庶政하고 總御文武하여 咸得其用하고 民富兵强하니 遠近 稱爲賢君이라
駿 遣將伐龜兹, 鄯善하니 於是 西域諸國 皆詣姑臧朝貢이러라
駿 有兼秦, 雍之志하여 遣使上疏하여
以爲勒, 雄既死 虎, 期繼逆하니 先老消落하고 後生不識하여 慕戀之心 日遠日忘이라 乞敕司空鑒 征西亮等하여 汎舟江, 沔하여 首尾齊舉注+時, 郗鑒鎭京口, 庾亮爲征西將軍, 鎭武昌.하노이다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강咸康 원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원년이다.
성주成主 이기李期 옥항玉恒 원년이다.
[] 봄 정월 초하루에 황제( 성제成帝)가 관례冠禮를 하였다.
[] 3월에 황제( 성제成帝)가 사도司徒 왕도王導에 행차하였다.
[]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몸이 쇠약하여 병이 나서 조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그의 에 행차하여 여러 신하들과 내실内室에서 잔치하고 왕도와 왕도의 처인 조씨曹氏에게 절하니,
시중侍中 공탄孔坦이 은밀히 하기를 “막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니, 행동할 때마다 마땅히 예법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황제는 한창 왕도에게 정사를 맡기고 있었다.
공탄이 다시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이미 장성하시어注+① 長(자라다)은 知兩의 切이다. “日躋”는 날로 나아감과 같다. 예지叡智공경恭敬이 날로 진전되시니, 마땅히 조정 신하들의 의견을 널리 받아들여서 좋은 방도를 자문하여 헤아리셔야 합니다.” 하였다.
왕도가 이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여 정위廷尉로 내보내니, 공탄은 병을 칭탁하고 관직을 떠나갔다.
[] 단양윤丹楊尹 환경桓景이 아첨을 잘하고 기교가 많으니, 왕도王導가 그를 친애하였다. 마침 형혹성熒惑星남두성南斗星注+① ≪晉書≫ 〈天文志〉에 “南斗星 여섯 개의 별은 天廟이니, 丞相과 太宰의 자리이다.” 하였다. 머문 지가 열흘이 넘었다.
왕도가 장군 도회陶回에게 이르기를 “남두성南斗星양주揚州의 분야이니, 내 마땅히 지위를 사양하여 하늘의 견책을 누르겠다.”注+② ≪晉書≫ 〈天文志〉에 “斗星, 牛星, 女星은 揚州의 분야이다. 九江은 斗星에 一度 들어가고, 丹楊은 斗星에 16度 들어간다.” 하였다. 分(분야)는 扶問의 切이다. 厭(누른다)은 一葉의 切이다. 하자,
도회가 말하기를 “은 밝은 덕으로 〈황제의〉 보필이 되어서 〈소인인〉 환경과 무릎을 가까이 하시니,注+③ 造는 이름이다. 형혹성을 어떻게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도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 왕도王導왕몽王濛왕술王述을 불러 연속掾屬으로 삼았다.注+① 王濛은 掾이 되고, 王述은 中兵屬이 되었다. 왕술은 王昶의 曾孫이다. 왕몽은 작은 청렴은 닦지 않았으나 깨끗하고 검약함으로 칭찬을 받았고, 패국沛國유담劉惔(유담)과注+② 惔은 談과 淡의 두 가지 音이다. 매우 친하였다.
유담은 항상 왕몽을 성품이 지극히 통창通暢하여 자연스럽게 절도가 있다고 칭찬하였고, 왕몽은 말하기를 “유군劉君은 내가 나 스스로를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안다.” 하니, 당시에 풍류를 칭하는 자들은 유담과 왕몽을 으뜸으로 여겼다.
왕술은注+③ 王昶의 아들이 王湛이고 왕담의 아들이 王承이니, 대대로 높은 명성이 있었다. 王述은 왕승의 아들이다. 성품이 침착하고 고요하여, 좌중의 손님들의 논변論辯이 벌 떼처럼 어지러이 일어날 때에도, 왕술은 매번 태연히 대처하였다. 나이가 30이 되었는데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칭하였다.
왕도는 그가 명문사족名門士族 출신이라 하여 그를 벽소辟召하였는데, 만나서는 오직 강동江東의 쌀값만 물었다.注+④ 王述은 아마도 東吳에서 建康으로 온 듯하다. 왕술이 눈을 부릅뜨고 대답하지 않으니, 왕도가 말하기를 “왕연속王掾屬은 어리석지 않다.” 하였다.
왕도가 말할 때마다 온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찬미하자, 왕술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니면 어찌 매사를 다 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왕도가 용모를 고치고 그에게 사과하였다.
[] 여름 4월에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남쪽으로 유람하여 대강大江(장강長江)까지 왔다가 돌아가니, 황제( 성제成帝)가 친히 군대를 무장하여 삼엄하게 경계하다가 6일 만에 무장을 해제하였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남쪽으로 유람하여 대강大江까지 왔다가 돌아갔는데, 그 유기游騎(유격 기병) 10여 명이 역양歷陽에 도착하였다. 역양태수歷陽太守 원탐袁耽이 표문을 올려 아뢸 적에 기병의 숫자를 말하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사도司徒 왕도王導에게 대사마大司馬 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를 가하였다.
황제가 광막문廣莫門에서 군대를 열병하고서注+① 觀(보여주다)은 音이 貫이다. 廣莫門은 建康城 북쪽에 있는 문이다. 제장諸將들에게 나누어 명하여 역양을 구원하게 하고 또 자호慈湖우저牛渚를 수비하게 하니, 치감郗鑒광릉상廣陵相 진광陳光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도성에 들어가 황제를 호위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나라의 기병이 매우 적었고 또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계엄을 해제하고 왕도는 대사마大司馬의 직임을注+② 司馬는 ≪資治通鑑≫에 大司馬로 되어 있다. 벗었다. 원탐은 경거망동한 죄에 걸려서 파면당하였다.
[] 가뭄이 크게 들었다.
[] 가을 9월에 나라(후조後趙)가 업성鄴城으로 천도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백성들이 부처를 섬기는 것을 허락하였다.
[] 처음에 조주趙主 석륵石勒천축국天竺國(인도印度)의 승려인 불도징佛圖澄성패成敗를 예언함에 자주 응험이 있다 하여注+① 佛圖는 오랑캐의 複姓이고, 澄은 그 이름이다. ≪晉書≫ 〈藝術傳〉에 “佛圖澄은 本姓이 帛氏이니, 항상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스스로를 수양하여 여러 날 동안 밥을 먹지 않을 수 있었으며, 주문을 잘 외워서 귀신을 부릴 수 있었다. 배[腹] 옆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항상 솜으로 이 구멍을 막아두었다가 밤중에 책을 읽을 때마다 솜을 뽑아내면, 구멍 안에서 광채가 나와 온 방안을 비추었다. 또 일찍이 齋戒할 때에 이른 새벽 흐르는 물가에 가서 배 옆의 구멍에서 五臟六腑를 꺼내어 깨끗이 씻고, 씻기를 마치면 다시 배 안으로 넣었다. 또 방울 소리를 잘 들어서 吉凶을 말하였는데, 徵驗이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그를 공경히 섬겼다.
석호石虎가 즉위하자 그를 더욱 공경히 받들어서 비단 옷을 입히고 조각한 에 태웠으며,注+② 衣(입다)는 於旣의 切이다. “彫輦”은 조각하여 장식한 수레이다. 조회朝會하는 날에 태자太子제공諸公注+③ 諸公은 石虎의 여러 아들이니, 석호를 天王이라 칭하고, 여러 아들 중에 왕으로 봉한 자의 작위를 강등하여 公이라 하였다. 그를 부축하여 궁전에 오르니,
국도國都의 백성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다투어 사찰을 짓고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승려가 된 자 중에〉 혹 나라의 부역을 피하거나 간악한 짓을 하는 자도 있었다.
[] 석호石虎조령詔令을 내려 중서성中書省에 묻기를 “부처는 국가에서 받드는 바인데, 작위와 품계가 없는 여항閭巷의 백성들이 부처를 섬길 수 있는가?”注+① 不는 否로 읽는다. 하자,
저작랑著作郞 왕도王度 등이 의논하기를 “왕자王者제사祭祀전례典禮에 모두 구비되어 있지만, 부처는 외국의 이니 천자天子가 마땅히 제사할 대상이 아닙니다. 나라와 나라는 오직 서역西域 사람들이 도읍都邑에 사찰을 세우는 것만 허락하였고, 한족漢族은 모두 출가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마땅히 공경公卿 이하에게는 금령禁令을 내려 사찰에 가서 을 사르고 부처에게 예배하지 못하게 하고, 나라 사람 중에 승려가 된 자는 모두 처음 옷을 다시 입게 하여야 합니다.”注+② 〈“皆返初服”은〉 그들로 하여금 中華 사람의 옷을 다시 입게 함을 이른다. 하니, 석호가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렸다.
은 변방에서 생장하여 외람되이 제하諸夏에서 군주가 되었으니, 향사饗祀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본래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 오랑캐와 나라 백성들 중에 부처를 섬기기 좋아하는 자에게는 특별히 섬기는 것을 허락하노라.”
[] 나라(성한成漢)가 신하인 나연羅演고주故主 이반李班의 어머니인 나씨羅氏를 죽였다.
[] 나라 태자 이반李班의 외숙인 나연羅演 등이 성주成主 이기李期를 살해하고 이반의 아들을 세울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니, 이기가 나연 등과 이반의 어미인 나씨羅氏를 죽였다.
이기는 뜻을 얻은 뒤로부터 옛 신하들을 경시하고, 경건景騫, 요화姚華, 전포田褒중상시中常侍 허부許涪(허부) 등을 신임하여, 형벌하고 상을 주는 큰 정사가 모두 이들 몇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포는 다른 재능은 없고 일찍이 이웅李雄에게 이기李期를 태자로 세울 것을 권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문란하여 이웅의 기업基業이 쇠망하게 되었다.
[]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건안군建安君 순씨荀氏하였다.
[] 순씨荀氏 명제明帝의 어머니이다. 궁중에 있으면서 태후太后와 똑같이 존중을 받았는데, 하자 예장군군豫章郡君을 추증하였다.注+① 荀氏는 晉 元帝의 宮人이다. 明帝를 낳았는데 스스로 지위가 낮다 하여 매번 원망을 품다가, 원제에게 譴責을 당하고서 점점 박대를 당하였다. 명제가 즉위하자, 建安君으로 봉하고 별도로 저택을 세우고는, 太寧 원년(323)에 臺內로 맞아들여 융숭하게 받들었다. 成帝가 즉위하자, 太后와 똑같이 존중하였다.
[] 대왕代王 탁발흘나拓跋紇那가 다시 〈나라로〉 들어오니, 탁발예괴拓跋翳槐나라(후조後趙)로 달아났다.
[] 〈전량前涼의〉 장준張駿이 〈나라(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 상소上疏하여 북벌北伐을 청하였다.
[] 처음에 장궤張軌장식張寔, 장무張茂하우河右(하서河西) 지역을 점거하였으나 군대를 출동하여 전쟁하지 않는 해가 없었는데, 장준張駿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경내境内가 점점 평안해졌다.
장준은 여러 정사를 부지런히 닦고 문무관文武官을 잘 통제하여 모두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백성들이 부유하고 군대가 강하니, 원근遠近에서 어진 군주라고 칭찬하였다.
장준이 장수를 보내어 구자龜兹선선鄯善을 정벌하니, 이에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장姑臧에 나와 조공朝貢을 바쳤다.
[] 장준張駿 지역을 점령할 뜻을 품고서 황제( 성제成帝)에게 사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하였다.
석륵石勒이웅李雄이 죽자, 잇따라 석호石虎이기李期가 역적질을 하여 찬탈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로先老(서진西晉 때의 구신舊臣)들은 다 죽고 강동江東(강동江東)을 연모하는 마음이 날로 소원해지고 날로 잊히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사공司空 치감郗鑒정서장군征西將軍 유량庾亮 등에게 명하여 장강長江면수沔水에 배를 띄워 앞뒤에서 일제히 출동하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注+① 이때 郗鑒은 京口에 진주하고, 庾亮은 征西將軍이 되어 武昌에 진주하고 있었다.


역주
역주1 幸司徒導府 : “≪資治通鑑綱目≫에 ‘군주가 여러 신하들의 집에 왕림했다’라고 쓴 것이 5번이고, ‘그 府에 행차했다.’라고 쓴 것이 2번이다(漢나라 安帝 建光 원년(121), 이해(335), 隋나라 煬帝 大業 3년(607), 唐나라 太宗 貞觀 14년(640)과 20년, 辛未年(911) 梁主 朱温, 甲申年(924) 唐主 李存朂). 그런데 오직 이해와 貞觀 20년에는 비난하는 내용이 없으며, 황제가 微行하여 梁胤의 府舍에 간 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漢나라 桓帝 元嘉 원년(151)).[綱目書君臨諸臣之家五 幸其府二(漢安帝建光元年 是年 隋煬帝大業三年 唐太宗貞觀十四年 二十年 辛未年梁主温甲申年唐主存朂) 唯此與貞觀二十年無譏辭 而微行梁胤府舍 不與焉(漢桓帝元嘉元年)]” ≪書法≫
역주2 趙王虎南遊……六日罷 : “밝게 살피지 못함을 기롱한 것이다. 저(石虎)는 이미 돌아갔는데, 이쪽(황제)은 친히 군대를 무장하고 삼엄하게 경계하다가 오래 지나고서야 깨달았으니, 밝게 살피지 못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먼저 ‘還(돌아갔다)’이라고 쓴 것은 몹시 기롱한 것이다.[譏不詳也 彼且還矣 而此方親勒戒嚴 久而後悟 不詳莫甚焉 先書還 所以深譏之也]” ≪書法≫
역주3 趙聽其民事佛 : “〈부처를 섬기는 것은〉 본래 오랑캐의 풍속이니, 趙나라가 이런 풍속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漢人이 沙門이 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삼가 이를 쓴 것이다. 이로부터 ‘백성들이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라고 쓴 것이 2번이다(南朝 宋나라 壬辰年(452)의 北魏, 梁나라 辛丑年(521)의 北魏).[本胡俗也 趙之有此宜矣 而漢人之爲沙門 自此始 故謹書之 自是書聴民出家二(宋壬辰年魏 梁辛丑年魏)]” ≪書法≫
역주4 成殺其臣羅演及故主班母羅 : “李班에게 ‘故主’라고 썼는데 그 어머니에게 ‘弑(시해했다)’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반은 본래 李雄의 형의 아들로, 그 어미가 后가 아니었으므로 ‘殺’이라고 쓴 것이다.[班書故主矣 則其母不書弑 何 班本雄兄子 其母非后也 故書殺]” ≪書法≫
역주5 張駿……請北伐 : “張駿이 뒤를 이어 즉위한 후에 일찍이 ‘張淳을 보내와서 표문을 올렸다.’라고 쓰고, 이때 또다시 ‘上疏하여 北伐을 청하였다.’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모두 쓴 것은 장준의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張氏가 4대 동안 晉나라에 충성하였는데, 장준 이후로는 제대로 계승한 자가 적었다.[駿自嗣立 嘗書遣張淳上表矣 於是 又書上疏請北伐 綱目悉書之 予義也 張氏四世忠晉 自駿而後 鮮克繼者矣]” ≪書法≫
역주6 後生들……못해서 : ≪新譯資治通鑑≫(張大可 等 注釋, 三民書局, 2017)에서는 東晉時代에 사람들이 西晉이 오랑캐들에게 침입을 당하여 화북 지역을 상실한 치욕을 알지 못하여 西晉을 이은 東晉을 추향하는 마음이 점차 없어진다고 풀었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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