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諸葛亮이 병력을 인솔하고 雍闓 등을 토벌할 적에 參軍馬謖(마속)에게 계책을 물으니,注+謖은 音이 縮이다. 마속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南中은 지형이 험고하고 거리가 멂을 믿고서 복종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注+南中은 漢나라의 益州郡과 永昌郡 두 지역이다. 오늘 그들을 격파하면 다음날 다시 배반할 것입니다.
더구나 公이 막 북쪽으로 강한 賊과 從事(전쟁)하려 하니,注+〈“北事強賊”은〉 장차 魏나라를 토벌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저들이 우리 국내가 빈 것을 알면 반드시 신속히 배반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남은 부류를 다 죽여서 후환을 없앤다면 또 仁者의 마음이 아닙니다.
用兵하는 방법은 적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上策이고 적의 城을 공격하는 것이 下策이며, 심리전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이 하책입니다. 공이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갈량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마속은 馬良의 아우이다.
綱
【綱】 여름 5월에 魏主曹丕가 水軍을 거느리고 吳나라를 정벌하였다.
目
【目】 魏主曹丕가 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吳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여 여러 신하들이 크게 모여 의논할 적에 鮑勛(포훈)이 간하기를 “지난해 龍舟가 폭풍을 만나 물위를 떠돌아서 宗廟가 거의 전복될 뻔하였는데, 이제 또다시 군대를 수고롭게 하여 멀리 기습해서 中國을 소모시키시니, 불가하다고 여깁니다.”注+勛은 勳과 통한다, 하자, 조비가 노하여 그를 좌천시키니, 포훈은 鮑信의 아들이다.
綱
【綱】 6월에 吳나라가 顧雍을 丞相으로 삼았다.
顧雍
目
【目】 처음에 吳나라가 丞相을 두려 할 적에 衆論이 張昭에게 돌아갔는데, 吳王孫權이 말하기를 “지금은 일이 많아 직책이 큰 자는 책임이 무거우니, 그를 우대하는 방법이 아니다.” 하고 마침내 孫劭를 승상으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손소가 卒하였다.
百官들이 다시 장소를 천거하자, 손권이 말하기를 “내 어찌 子布(장소)에게 관직을 아까워함이 있겠는가. 다만 승상의 일이 번거롭고 이분의 성품이 강직하니, 그가 말한 것을 따르지 않으면 원망과 비난이 장차 생길 것이니, 그를 유익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顧雍을 승상으로 삼았다.
目
【目】 顧雍은 사람됨이 말수가 적고 행동거지가 時宜에 합당하니,注+當(합당하다)은 去聲이다.孫權이 일찍이 감탄하기를 “顧公은 말하지 않을지언정 말하면 반드시 도리에 맞는다.” 하였다.
잔치하여 즐길 적에 左右 측근이 술에 취하여 실수가 있으면, 고옹이 반드시 알아낸다고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그들이 감히 감정대로 행동하지 못
하였다. 손권 또한 말하기를 “고공이 자리에 있으면 사람(나)으로 하여금 감히 쾌락하지 못하게 한다.” 하니, 그가 敬畏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目
【目】 顧雍이 처음에 尙書令을 겸하고 侯에 봉해지고서 관사로 돌아갔을 적에 집안 식구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注+≪資治通鑑≫에는 “陽遂鄕侯로 봉하였는데 侯에 봉해지고서 관사로 돌아갔을 적에 집안 식구들이 알지 못했다.” 하였다. 寺는 官舍이다. 승상이 되자 등용한 文武官에게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겨서 마음에 주장하거나 주장하지 않음이 없었다.注+〈“心無適莫”은〉
때로 民間에게까지 자문하여 政務에 마땅한 바가 있으면 번번이 은밀히 아뢰어서,注+訪은 물음이다. 逮는 미침이다. 이것을 임금이 채용하면 上(孫權)에게 功을 돌리고 채용하지 않더라도 끝내 누설하지 않으니, 손권이 이 때문에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注+宣은 밝힘이고 선포함이다. 泄은 누설함이다.
目
【目】 顧雍은 公朝에서 아뢰어 말할 것이 있으면 말소리와 얼굴빛이 비록 순하였으나 지키는 것이 正道였고, 軍國의 得失에 대해서는 임금을 대면하여 뵙는 경우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孫權은 항상 中書郞으로 하여금 고옹에게 가서 자문하게 하였는데,注+中書郞은 魏나라에서는 通事郞이라 하였고, 晉나라에서는 中書侍郞이라 하였다. 이때에 만약 일이 시행할 만하면 고옹은 즉시 그와 더불어 반복하여 끝까지 논하고서 그를 위해 술을 진설하여 대접하고,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爲其身”과 “爲國”의〉 爲도 같다. 食(먹이다)는 音이 嗣이다. 만약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정색을 하고 말을 하지 않으니,
손권이 말하기를 “고공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마땅함에 부합한 것이고,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내 마땅히 거듭 생각해야 한다.”注+重(거듭)은 直用의 切이다. 하였다.
目
【目】 江邊의 장수들이 각각 功을 세워 스스로 나타내고자 해서 便利한 방책을 많이 아뢰어 魏나라를 습격하였는데,
顧雍이 말하기를 “兵法에 작은 이익을 경계하였습니다. 이들은 功名을 바라 자기 몸을 위하고자 하는 것이요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니,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자, 孫權이 그의 말을 따랐다.
綱
【綱】 가을 7월에 丞相諸葛亮이 雍闓를 토벌하여 참수하고, 마침내 네 郡을 평정하였다.
目
【目】 諸葛亮이 南中에 이르러 주둔해 있는 곳마다 싸워 승리하고, 越(월수)로부터 쳐들어가서 雍闓 등을 참수하였다.
孟獲은 평소 오랑캐와 漢族들에게 복종을 받고 있었는데,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제갈량에게 항거하자, 제갈량이 현상금을 내걸어 생포해 오게 하였다.
제갈량은 그를 사로잡은 뒤에 맹획에게 진영 사이를 구경하게 하니, 맹획이 말하기를 “지난번에는 군대의 虛實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지만, 지금은 다만 이와 같을 뿐이니 바로 쉽게 승리할 수 있다.” 하였다.
제갈량이 이에 풀어주어 그로 하여금 다시 싸우게 해서 일곱 번 풀어주었다가 일곱 번 사로잡았다. 그런데도 제갈량이 다시 맹획을 보내주니, 맹획이 발걸음을 멈추고 떠나가지 않고서 말하기를 “公은 하늘이 내신 위엄입니다. 남중 사람들이 다시는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諸葛亮이 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다
目
【目】 諸葛亮이 마침내 滇池(전지)에 들어가니, 益州, 永昌, 牂牁, 越巂의 네 郡이 모두 평정되었다.注+≪資治通鑑≫에는 ‘遂’ 위에 ‘亮’자가 있다. 滇池縣은 益州郡에 속하였으니, 滇池澤은 전지현의 서북쪽에 있다. 제갈량이 이곳의 우두머리를 데려다가 〈이곳의 지방관으로〉 즉시 등용하니, 혹자가 이렇게 하지 말도록 간하였다.注+卽은 나아감이다. 渠는 큼이다. 率는 帥와 같다.
이에 제갈량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외부 사람(蜀漢의 관리)을 이곳에 남겨두면 마땅히 兵力을 잔류시켜야 한다. 그런데 병력을 잔류시키면 먹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쉽지 않은 점이다. 오랑캐가 막 격파되어 父兄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런데 외부 사람을 남겨두되 병력이 없으면 반드시 禍患을 이룰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쉽지 않은 점이다.
또 오랑캐가 여러 번 軍將(太守)을 폐위하고 죽인 죄가 있어서 스스로 죄가 무거움을 혐의하고 있다. 그런데 외부 사람을 남겨두면 끝내 서로 믿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쉽지 않은 점이다.
지금 나는 병력을 잔류시키지 않고 식량을 운반해오지 않고서 기강이 대강 정해지고 오랑캐와 漢族이 다소 편안해지게 하려 할 뿐이다.”注+粗(대강)는 坐五의 切이다.
이에 제갈량은 俊傑인 孟獲 등을 모두 거둬서 官屬으로 삼고, 金과 銀, 丹沙와 漆, 밭가는 소와 전투하는 말을 내어서 軍國의 비용을 지급하니, 제갈량의 생애를 마치도록 오랑캐가 다시는 배반하지 않았다.
綱
【綱】 겨울 10월에 魏나라 군대가 長江에 임했다가 돌아갔다.
目
【目】 8월에 魏主曹丕가 水軍을 거느리고 譙郡으로부터 渦水(와수)를 따라 淮水로 들어갔는데,注+渦는 古禾의 切이다. ≪水經≫에 “陰溝水는 河南陽武縣浪蕩渠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沛縣에 이르러 渦水가 되고, 와수는 동쪽으로 譙郡을 지나 또 동남쪽으로 下邳의 淮陵縣에 이르러 淮水로 들어간다.” 하였다.蔣濟가 물길이 통하기 어렵다고 말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에 廣陵의 옛 城에 가서 長江에 임하여 군대의 위엄을 보이니,注+觀은 보임이다. 병졸이 10여만 명이고 깃발이 수백 리에 이어졌다.
장강을 건너갈 뜻이 있었는데, 吳나라 사람이 군대를 엄격히 통제하여 굳게 수비하였다.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워서 얼음이 얼어 배가 강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曹丕는 파도가 크게 일렁이는 것을 보고注+“洶湧”은 물의 형세이다. 탄식하기를 “아! 이는 하늘이 진실로 남쪽과 북쪽을 한계 지은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돌아갔는데,
吳나라 孫韶 등이 결사적으로 싸우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지름길에서 밤에 조비를 요격해서 副車와 깃으로 만든 日傘을 빼앗으니,注+孫韶는 본래 姓이 兪氏였는데, 孫策이 그를 사랑하여 孫氏姓을 하사해서 종친의 족보에 나열하였다. 要(요격하다)는 平聲이다. 이에 戰船 수천 척이 모두 막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目
【目】 軍事를 의논하는 자들이 군대를 잔류시켜 屯田하고자 하였는데, 蔣濟가 말하기를 “이곳은 동쪽으로 湖水와 가깝고 북쪽으로 淮水에 임하였습니다. 만약 강물이 불어날 때면 賊이 침략하기 쉬우니, 편안히 주둔할 수 없습니다.” 하자, 曹丕는 그의 말을 따라 즉시 돌아오고, 배는 장제에게 맡겨두었다.
장제는 땅을 파서 4, 5곳의 수로를 만들고 〈수로에〉 배를 밀어서 모아놓고는 미리 흙으로 돈대를 만들어서 호수를 막아두었다가 뒤에 있는 배들을 다 끌어들인 후에 막아 놓았던 물을 일시에 터서 회수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니, 그제야 배들이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다.注+豚(돈대)은 徒魂의 切이다. 이 글자는 墩과 통하니,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것이다.
綱
【綱】 12월에 吳나라 番陽(파양)의 賊彭綺(팽기)가 배반하였다.
역주
역주1(卲)[劭] :
저본에는 ‘卲’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과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劭’로 바로잡았다.
역주2論語……하였다 :
≪論語≫ 〈里仁〉에 孔子께서 “君子는 천하의 〈일에〉 있어서 오로지 주장함도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어서, 義를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하였다. 適과 莫은 어떤 일을 지나치게 주장하거나 반대함을 이른다.
역주3(師)[帥] :
저본에는 ‘師’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帥’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