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봄 정월에 구지왕仇池王양난적楊難敵이 졸卒하니, 아들 양의楊毅가 뒤를 이어 즉위하고 〈진晉나라(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와서 번신藩臣을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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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2월에 장준張駿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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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양주涼州(전량前涼)에서는〉 이 뒤로 매년 사자使者가 끊이지 않았다.注+① 仇池가 藩臣을 칭하자, 梁州와 涼州의 〈왕래하는〉 길이 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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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단료段遼가 군대를 보내어 유성柳城을 공격해서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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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단료段遼가 아우 단란段蘭을 보내어 모용한慕容翰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유성柳城을注+① 柳城縣은 漢나라 때에는 遼西郡에 속하였는데, 晉나라 때에 없앴다. 공격하자, 모용황慕容皝이 모용한慕容汗注+② 慕容汗은 慕容皝의 아우이다. 등을 보내어 구원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단란이 승세를 타고 끝까지 추격하려고 하자, 모용한은 마침내 자기의 본국(모용씨慕容氏)이 멸망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만류하기를 “제가 명을 받고 출전한 날에는 다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만약 공功을 탐하여 진격하다가 패한다면, 무슨 낯으로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단란은 말하기를 “이들은 이미 사로잡힌 것과 같다. 경卿은 바로 내가 마침내 경卿의 나라를 멸망시킬까 염려하는 것이다.”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기를 “저는 이미 투신投身하여 귀의歸依하였으므로 다시는 본국으로 돌아갈 이치가 없으니, 본국의 존망存亡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다만 대국大國을注+③ “大國”은 段蘭의 나라를 이른다. 위하여 계책을 말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부하에게 명하여 홀로 돌아가고자 하니, 단란이 부득이 그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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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6월에 태위太尉인 장사공長沙公도간陶侃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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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도간陶侃은 말년에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한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조정의 대권大權에 참여하지 않고 여러 번 치사致仕를 청하여 봉국封國(장사長沙)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보좌하는 관리들이 굳이 만류하였다.
이때 병이 위독해지자, 도간은 표문을 올려 지위를 사양하고 자기에게 빌려주었던 부절符節, 휘麾, 당幢, 곡개曲蓋와 시중侍中의 초선貂蟬, 태위太尉의 인장印章, 팔주자사八州刺史의 인부印符와 부전符傳(부신符信),
을 받들어 조정에 돌려보냈다.注+① 節은 生死與奪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麾는 旗의 등속이니 적진에 임했을 때에 三軍이 이것을 보고 전진하고 후퇴하는 것이다. 幢은 幡幢으로 깃털로 만드니, 繖(비나 햇빛을 가리는 도구)이다. 曲蓋는 일산 자루의 위가 굽은 것이다. 晉나라 제도에 方面을 맡은 諸公에게는 모두 節과 麾, 緹幢, 曲蓋를 주었다. 貂蟬은 侍中의 冠이고, 章은 印章이다. 八州는 荊州, 江州, 雍州, 梁州, 交州, 廣州, 益州, 寧州를 이른다. 傳(부신)은 張戀의 切이니, 符傳이다. 棨戟은 註가 漢나라 宣帝 甘露 3년(B.C.51)에 보인다. 이 이상은 조정에서 陶侃에게 내려주었던 것이므로, 도간이 받들어 조정에 돌려보낸 것이다.
또 군수물자와 병기, 소와 말, 선박은 모두 장부에 기록한 다음 창고에 봉인하여 자신이 손수 자물쇠를 채우고, 사후死後의 일은 우사마右司馬왕건기王愆期에게 부탁하였다.
도간이 수레를 타고 가서 배에 올라 장차 장사長沙로 돌아가려 할 적에, 왕건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늙은이가 그동안 몸이 불편한데도 사직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대들 때문이다.”注+② “婆娑”는 肢體가 느슨하게 풀려서 단속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陶侃은 일찍 물러가지 못해서 몸이 이와 같이 곤핍한 지경에 이른 것은 바로 참모와 보좌들이 굳이 만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一說에 “婆娑는 徘徊한다는 말과 같다.” 하였다. 하였다. 도간이 훙薨하니, 시호를 환桓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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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도간陶侃은 군중軍中에 있었던 41년 동안 밝고 굳세어 결단을 잘하고 세밀한 것도 잘 살펴 아니,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남릉南陵에서 백제성白帝城까지 수천 리 사이에注+① 南陵은 宣城郡의 경계에 있으니, 南陵에서 白帝城까지는 陶侃이 통솔하고 있는 지역의 큰 경계를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사는 백성들이 길에 떨어져 있는 것도 줍지 않았다.
상서尙書매도梅陶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도공陶公이 기지機智와 신묘神妙함으로 사물을 밝게 살피는 것은 위魏무제武帝(조조曹操)와 같고, 충순忠順한 마음으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제갈공명諸葛孔明(제갈량諸葛亮)과 같으니, 육항陸抗의 여러 사람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고,
謝文靖
사안謝安은 매번 말하기를 “도공陶公은 비록 법을 적용하였으나 항상 법 밖의 뜻을 알았다.” 하였다. 사안謝安은 사곤謝鯤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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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성주成主(성한成漢) 이웅李雄이 졸卒하니, 태자太子이반李班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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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웅李雄은 머리에 종양이 생기고, 몸에도 평소 칼과 활에 맞은 상처가注+① 瘍은 音이 陽이니, 頭瘡이다. 創은 瘡으로 읽으니, 화살과 칼날에 부상당한 것을 金創이라 한다. 많았다. 병이 위독하여 옛 상처의 흉터가 모두 곪아 터지니, 여러 아들들이 싫어하여 그를 멀리 피하였다.
그러나 유독 태자 이반李班은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옷과 관冠을 벗지 않고 직접 이웅을 위하여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종기를 빨아주었다.
이웅이 건녕왕建寧王이수李壽를注+③ 李壽는 李驤의 아들이다. 불러들여 유조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이웅이 졸卒하자, 이반이 즉위하여 정사를 모두 이수와 사도司徒하점何點, 상서령尙書令왕괴王瓌에게 맡기니, 이반은 궁중에 거처하여 상례喪禮를 행하면서 정사에 관여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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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량庾亮을 도독강都督江․형등주군사荆等州軍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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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량庾亮이 무창武昌에 진주하여 은호殷浩를 벽소辟召하여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삼았다.注+① 陶侃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庾亮이 상류 지역을 專制하였다. 殷浩는 殷羨의 아들이다. 은호는 저부褚裒(저부), 두예杜乂(두예)와 함께 모두 식견과 도량이 깨끗하고 원대하며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을 잘 담론하는 것으로 강동江東에서 이름이 났는데,注+② 褚裒는 褚䂮(저략)의 손자이고, 杜乂는 杜錫의 아들이다. 老는 ≪老子道德經≫을 이르고 易은 ≪周易≫을 이른다. 그는 더욱 풍류가들의 존중을 받았다.
환이桓彝가 일찍이 저부에게 이르기를 “그대는注+③ 季野는 褚裒의 字이다.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다.” 하니, 그가 겉으로는 남을 옳다 그르다 함이 없으나 안으로는 실로 포폄褒貶하는 바가 있음을 말한 것이었다.
사안謝安이 말하기를 “저부가 비록 말하지 않았으나, 사시四時의 기운 또한 구비하고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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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에 모용황慕容皝을 진군대장군평주자사요동공鎮軍大將軍平州刺史遼東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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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성成나라(성한成漢) 이월李越이 군주君主이반李班을 시해하고, 자기의 아우 이기李期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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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월李越은 성주成主이웅李雄의 아들이다. 앞서 강양江陽에注+① 劉璋이 犍爲郡을 나누어 江陽郡으로 삼았다. 나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부친의 상喪에 달려와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아우 이기李期와 함께 난亂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李期等謀班奪位
이반李班의 아우 이오李玝(이오)가注+② 玝는 音이 午이다. 이반에게 이월을 강양江陽으로 돌려보내고, 이기를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반은 아직 부친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하여 차마 돌려보내지 못하고 진심을 다하여 이들을 대하고, 이오를 보내 부涪 지역에 나가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월은 이반이 밤중에 곡하는 틈을 타서 그를 빈궁殯宫에서 시해하고 이기를 받들어 세우니, 이기는 이월을 상국相國으로 삼고 대장군大將軍이수李壽에게 대도독大都督를 가하고서 두 사람 모두를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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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1월에 조趙나라(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그 군주 석홍石弘을 시해하고 스스로 서서 거섭천왕居攝天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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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주趙主석홍石弘이 스스로 옥새와 인끈을 가지고 위궁魏宫에注+① 石虎가 魏王이었으므로 그가 거처하는 곳을 魏宮이라 칭한 것이다. 가서 석호石虎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자, 석호가 말하기를 “제왕帝王의 대업大業은 천하에 마땅히 공론公論이 있을 것이니, 어찌 스스로 이것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석홍이 눈물을 흘리고 환궁還宫하여 태후太后정씨程氏에게 이르기를 “선제先帝의 종자가 참으로 다시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서尙書에서 위대魏臺에 상주上奏하여注+② 여기의 “尙書奏”는 趙나라 조정의 尙書가 아뢴 것이다.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선양禪讓한 고사故事를 따를 것을 청하자, 석호가 말하기를 “석홍은 어리석고 사리에 밝지 못하며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무례無禮하니, 만국萬國의 군주 노릇을 할 수가 없다. 곧바로 폐위해야 마땅하니, 어찌 선양을 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석홍을 폐위하였다.
석호는 거섭천왕居攝天王이라 칭하고 석홍과 태후太后를 유폐하였는데, 얼마 후 두 사람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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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요익중姚弋仲이 병을 칭탁하고 〈석호石虎의 제위帝位에 오른 것을〉 축하하지 않다가, 부름을 여러 번 받고서야 와서는, 정색을 하고 석호에게 말하기를 “저는 항상 대왕大王을 세상에 이름난 영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군先君께서 팔뚝을 잡고서 어린 군주를 잘 보필하라고 부탁하셨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그 지위를 빼앗았습니까.” 하였다.
석호가 마음속으로는 비록 불평하였으나, 요익중의 성실함을 살펴서 또한 죄를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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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모용황慕容皝이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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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모용황慕容皝이 요동遼東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고후髙詡(고후)가 간諫하기를
“지금 원악元惡이注+① 元惡은 慕容仁을 이른다. 여전히 남아 있는데, 처음 이 성城을 점령하자마자 대번에 도륙하여 멸한다면,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城들이 선善으로 돌아올 길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니, 모용황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역주
역주1棨戟 :
일명 油戟으로 자루에 적색과 흑색의 비단을 입힌 창인데, 벼슬아치가 출행할 때 선봉대가 들고 갔다.
역주3成李越……而立其弟期 :
“‘其弟’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군주를 시해하는 데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 형이 군주를 시해하여 역적질을 하였는데 자기가 그 지위를 받아들였으니, 李期가 그 죄를 나누어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군주를 시해하고서 ‘立其兄(그 형을 세웠다.)’이라고 쓴 것이 1번이고(晉나라 安帝 隆安 5년(401) 吕超), ‘立其弟(그 아우를 세웠다)’라고 쓴 것이 2번이니(이해(334) 李越, 五代 丙戌年(926) 王延稟), 이들 모두 시해에 가담한 자들이다.[其弟 何 與聞乎弑也 其兄弑逆而己受之 期不得不分受其罪矣 終綱目 弑 書立其兄者一(安帝隆安五年吕超) 立其弟者二(是年李越 五代丙戌年王延稟)皆與聞乎弑者也]” ≪書法≫
역주4趙石虎……自立爲居攝天王 :
“羯賊(石勒의 무리)이 中原을 도탄에 빠뜨려서 사람과 신명이 모두 분노하였으니, 그 種類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도륙한 것은 본래 기록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런데도 石虎가 태후 劉氏와 군주 石弘을 시해한 것과, 石生 등이 군대를 일으켜 석호를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을 모두 책에 자세히 썼으니, 이는 군신간의 大義는 비록 오랑캐들이 뒤섞여 있는 사이에서도 분명하여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 분별을 어지럽힐 수 없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예전의 史冊에서는 단지 석호가 태후 유씨를 폐위하여 죽인 것과 석홍을 유폐하여 죽인 것만을 기재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에 이르러서는 명분을 바로잡고 죄인을 결정하였다. 그 나머지 僭偽國(한 지역에 할거하여 正統性이 없는 나라)에도 이렇게 한 類가 많이 있으니, 이는 모두 三綱을 붙들고 사람의 표준을 위한 것이니, 夷狄이 참람하게 정권을 도둑질했다 하여 이 의리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후세에 가르침을 남김이 크니, 내 이 때문에 인하여 논하는 것이다.[羯賊塗炭中原 人神奮怒 其種類自相屠滅 本無足錄 然而石虎弑太后及其主弘 與夫石生等舉兵討之 不克而死 皆詳書於冊 所以見君臣大義 雖夷狄雜揉之中 亦昭然 天冠地履之不可紊也 前史 止載虎廢殺劉氏及幽殺石弘 至綱目之正名定罪 其餘僭偽之國 亦多有此類 皆所以扶三綱 立人極 不以夷狄僭竊之故而廢斯義 其埀訓也大矣 臣故因而論之]”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