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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1)

대학연의(1)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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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 煬帝 학문
양제煬帝의 학문
4-14-가2
善屬文하여 不欲人出其右하더니
양제煬帝는 문장을 짓는 데 뛰어나 남이 자신보다 뛰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설도형薛道衡이 죽을 때 양제가 말하였다.
“‘공량낙연니空梁落燕泥(빈 들보에는 제비가 물고 온 진흙만 떨어졌다)’를 또 지을 수 있겠는가.”
帝誦其佳句曰
王冑가 죽을 때, 양제가 왕주의 가구佳句를 외면서 말하였다.
庭草無人隨意綠 復能作此語邪
“‘정초무인수의록庭草無人隨意綠(뜰 풀은 사람이 없는데도 마음대로 푸르다)’이라는 이 구절을 또 지을 수 있겠는가.”
自負才學하고 每驕天下之士하여
양제는 재주와 학문을 자부하고 늘 천하의 선비들에게 오만하게 굴었다.
嘗謂侍臣曰 天下 皆謂朕 承藉緒餘而有四海어니와 設令朕으로 與士大夫高選이라도 亦當爲天子矣리라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천하 사람들은 모두 짐이 선제先帝의 뒤를 계승한 덕분에 사해四海를 소유했다고 말하지만, 설령 짐이 사대부와 함께 시험을 보았더라도 천자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4-14-가2 : 隋 煬帝가 薛道衡과 王冑의 시를 말한 것은 唐나라 사람 劉餗의 《隋唐嘉話》와 《資治通鑑》 卷182 〈隋紀6 煬帝 中〉에 보인다. 양제가 侍臣에게 한 말은 《隋書》 卷22 〈五行志 上 貌不恭〉에 보인다.
역주2 隋煬帝 : 569~618(재위 604~618). 隋나라 2대 황제 楊廣으로, 文帝의 차남이다. 582년(開皇2)에 晉王이 되었으며, 589년(開皇9)에 南朝 陳나라를 멸망시켰다. 중신 楊素와 결탁하여 형인 태자 楊勇을 폐위시키고 태자가 되었다. 즉위 후에는 大業禮‧大業律令을 정비하기도 하였으나, 궁궐과 성들을 수축하고 大運河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며, 吐谷渾‧高句麗 등 대외 원정을 일삼아 국력을 크게 소모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후에 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
역주3 薛道衡 : 540~609. 자는 玄卿으로, 河東 汾陰 사람이다. 문장과 재능이 뛰어나 명성이 있었으며, 北齊 때 五禮를 정비하는 데 참여하였다. 隋나라에서는 南朝 陳나라를 토벌할 때 군사 작전을 논하여 文帝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煬帝가 즉위한 후 〈高祖文皇帝頌〉을 올렸다가 이 글이 隋나라를 헐뜯은 것이라 하여 미움을 받았다. 훗날 자결을 명받고 絞殺되었다. 문집으로 《薛司隷集》이 있다.
역주4 更能 : 사고본에는 ‘能更’으로 되어 있다.
역주5 空梁落燕泥 : 薛道衡의 시 〈昔昔鹽〉에 보인다.
역주6 王冑 : 558~613. 자는 承基로, 琅玡 臨沂 사람이다. 王導의 8대손으로, 어려서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南朝 陳나라에서 벼슬하였으며 隋나라 때에는 晉王 楊廣이 초빙하여 學士로 삼았다. 煬帝가 즉위한 뒤 著作佐郎‧朝散大夫 등을 지냈다. 재주를 믿고 남들에게 오만하게 굴다가 諸葛潁의 참소를 받았으나 당장 죄를 받지는 않았다. 613년(大業9)에 그와 교유했던 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키자 江左로 도주하였는데, 반란이 실패하면서 연좌되어 주살되었다. 시문이 《文苑英華》‧《樂府詩集》 등에 산견되며, 이 밖에 《大業起居注》가 있다.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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