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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1)

대학연의(1)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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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4-1-나(按)
按 光武 早爲儒生이러시니 及卽位 孜孜經術 又如此하시니 宜其光復舊物하여 身致升平이니
蓋庶幾焉이로되 惜其時 儒臣作輔 皆章句書生으로 未明乎古人格心之業이라
故在位三十餘年 雖鮮有過事 而以無罪하니 則有媿 하니 則有乖從諫如流之美
蓋其所學 未至於明善誠身之地하여 故於父子‧夫婦‧君臣之際 不能無可憾者焉하니
聖學 하여 雖有不世之資如光武者라도 迄不能追帝王之盛하니
然則人主之於務學 其可苟也哉잇가


原注
4-1-나(按)
【臣按】 光武帝는 일찍이 儒生이었는데 즉위하고 나서 經術에 부지런히 힘쓴 것이 또 이와 같았으니, 예전의 漢나라를 되찾고 그 자신의 대에 태평을 이룩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夏 少康‧周 宣王과 비교했을 때 거의 가까웠으나, 아쉽게도 그 당시에 伏湛‧侯霸의 무리처럼 儒臣으로서 황제를 보좌하는 이들이 모두 章句之學을 일삼는 書生으로 옛사람이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았던 일에 밝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광무제가 재위했던 30여 년 동안 비록 잘못한 일은 드물었으나,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正后를 폐위하고 太子를 바꾸었으니 집안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리에 부끄러운 점이 있었으며, 直諫한다는 이유로 大臣을 죽였으니 물 흐르듯 순순히 간언을 따르는 미덕에 어긋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광무제의 학문이 善을 밝히고 자신을 성실하게 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父子‧夫婦‧君臣 관계에 있어 유감스러움이 없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聖學이 밝아지지 않아 비록 광무제처럼 불세출의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침내 역대 聖王의 盛世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군주가 학문에 힘쓰는 데에 있어 구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역주
역주1 少康 : 夏나라 6대 임금으로, 相의 아들이다. 寒浞이 아들 澆를 시켜 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자, 相의 후비인 緡은 少康을 임신한 상태에서 有仍國으로 피하여 소강을 낳았다. 후에 하나라의 遺臣인 靡가 한착을 죽이고 소강을 옹립하여 하나라를 중흥시켰다.
역주2 周宣 : ?~기원전 782(재위 기원전 827~기원전 782). 西周의 宣王을 가리킨다. 厲王의 아들로, 여왕이 잔혹한 정치를 펴 國人들에 의해 쫓겨났을 때 召公에게 숨어 있다가 여왕이 죽자 왕으로 옹립되었다. 안으로는 召穆公‧方叔‧尹吉甫‧仲山甫 등을 중용하여 쇠했던 周나라 왕실을 중흥시켰으며, 밖으로는 玁狁을 격퇴하고 荊楚와 淮夷 일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역주3 伏湛 : ?~37. 자는 惠公으로, 琅邪 東武 사람이다. 濟南 伏生의 후손이며, 아버지 伏理에게 《齊詩》를 배우고 제자 수백 명을 가르쳤다. 西漢 成帝 때 博士弟子가 되었으며 東漢 광무제 때에는 尙書가 되었다. 이후 司直‧大司徒 등을 역임하고 陽都侯에 봉해졌다.
역주4 侯覇 : ?~37. 자는 君房으로, 河南 密 사람이다.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春秋穀梁傳》을 연구하였다. 西漢 成帝 때에는 太子舍人을, 王莽 때에는 淮平大尹을 지냈다. 28년(建武4)에는 東漢 光武帝의 부름을 받아 尙書令이 되었으며, 후에 大司徒가 되고 關內侯에 봉해졌다. 광무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고 동한 초 정권 수립에 공헌하였다. 시호는 哀이다.
역주5 廢正后 : 41년(建武17) 10월에 光武帝가 황후 郭氏를 폐하고 貴人 陰氏를 황후에 책봉한 것을 말한다.
역주6 易太子 : 43년(建武19) 6월에 광무제가 郭皇后 소생의 태자 劉彊을 폐하여 東海王으로 삼고, 陰皇后 소생의 東海王 劉陽을 태자로 세운 것을 말한다. 이때 유양은 莊으로 개명하였는데, 이가 바로 漢 明帝이다.
역주7 刑家之義 : 《詩經》 〈大雅 思齊〉에 “寡妻에게 모범이 되고 兄弟에게 모범이 되어서 이러한 방법으로 집과 나라를 다스린다.[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8 以直諫殺大臣 : 39년(建武15) 1월에 大司徒였던 韓歆이 자살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한흠은 평소 거리낌 없이 직언을 하여 광무제가 싫어하였는데, 한번은 격렬한 어조로 흉년이 들 것이라고 논증한 일로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광무제가 파면을 철회하지 않고 사자를 보내 조서를 내려 꾸짖자 한흠은 아들 韓嬰과 함께 자살하였다. 평소 중망이 있었던 한흠이 이렇게 죽자 광무제는 한흠의 유족에게 錢穀을 내리고 한흠 부자를 성대한 禮로 장사 지냈다. 《資治通鑑 卷43 漢紀35 光武帝 中之下》
역주9 : 사고본에는 ‘不’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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