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
에 上
이 年二十九
에 乃生戾太子
하여 甚愛之
注+衛后所生.러시니 及長
에 仁恕溫謹
이라
上
이 嫌其才能
이 少不類己
하고 而所幸王夫人等
이 皆生子
하니 皇后‧太子
가 寵
衰
하여 常有不自安之意
라
上
이 每行幸
에 以後事
로 付太子
하시니 有所平決
에 還白其最
注+最, 凡目也.어든 上亦無異
하시고 有時不省也
러시다
上
이 用法嚴
하여 多任深刻吏
하시고 太子
는 寬厚
하여 多所平反
注+反, 音翻.이라
雖得百姓心이나 而用法大臣은 皆不悅하고 群臣寬厚者가 皆附太子호대
而深酷用法者는 皆毁之하니 邪臣이 多黨與라 故太子가 譽少而毁多하더라
上
이 與諸子疏
하시고 皇后
가 希得見
이러니 太子
가 嘗謁皇后
라가 移日乃出
하니 이 告上曰 太子
가 與宮人戱
라한대
上
이 益太子宮人
하시니 太子
가 知之
하고 心銜文
이라 文
이 與
常融等
으로 常微伺太子過失
하여 輒增加白之
러니
上이 嘗小不平하여 使常融召太子하신대 融이 言 太子가 有喜色이러이다 上이 默然이러시니
及太子가 至하얀 上이 察其貌有泣涕處요 而佯語笑어늘 上이 怪之하사 微問知其情하시고 乃誅融하시다
是時
에 方士及神巫
가 多聚京師
하여 率皆
惑衆
하고 女巫
가 往來宮中
하여 敎
度厄
하여 每屋
에 輒埋木人祭祀之
러니
因妬忌更相告訐
이어늘 上
이 怒
하여 所殺
延及大臣死者
가 數百人
이라
上心
이 旣疑
러시니 嘗晝寢
에 夢木人數千
이 持
欲擊上
이어늘 上
이 驚寤
하여 因是體不平
하여 遂苦忽忽善忘
이러시니
江充
이 自以
太子有隙
이라 見上年老
하고 恐晏駕後
에 爲太子所誅
하여 因是爲姦
하여 言 上疾
이 祟在巫蠱
라한대
於是
에 上
이 以充爲使者
하여 治巫蠱獄
하여 入宮掘地求蠱
하시니
充이 云 於太子宮에 得木人尤多하고 又有帛書不道하니 當奏聞이라하여늘
石德
이 懼幷誅
하여 因謂太子曰 巫與使者
가 掘地得徵驗
하니 不知巫
가 置之邪
아
將實有也
인댄 無以自明
이니 可矯以節
하여 收捕充等繫獄
하여 窮治其姦
요
且上
이 疾在甘泉
하사 皇后與
請問
에 皆不報
하니 上存亡
을 未可知而姦臣
이 如此
하니 太子
는 將不念
邪
아
太子
가 曰 吾
는 人子
라 安得擅誅
리오 不如歸謝
하여 幸得無罪
라하고 將
甘泉而江充
이 持之甚急
하니
太子가 計不知所出하여 遂從德計하여 收捕充等하여 自臨斬之하고
使舍人持
하여 白皇后
하여 出武庫兵
하고 發長樂宮衛卒
하니 長安
이 擾亂
하여 言太子反
이라하더라
蘇文이 亡歸甘泉言狀한대 上이 曰 太子가 心懼하고 又忿充等하여 故有此變이라하고
乃使使召太子한대 使者가 不敢進하여 歸報云 太子가 反已成이라 欲斬臣이어늘 臣이 逃歸호이다
上
이 大怒
하여 賜
曰 捕斬反者
하면 自有賞罰
이니 堅閉城門
하여 毋令反者得出
하라
太子
가 引兵至長樂西闕下
하여 逢丞相軍合戰
하여 太子
가 兵敗出亡
하여 東至
하여 匿泉鳩里
러니
主人家
가 發覺
이어늘 吏
가 圍捕太子
한대 太子
가 入室
하여 距戶自經
하고 하다
後
에 吏民以巫蠱相告言者
가 案驗多不實
이어늘 上
이 頗知太子惶恐無
意
러시니
會
가 上急變訟太子寃
한대 上
이 大感
하여 召見千秋
하시고 謂曰
父子之間은 人所難言也어늘 公이 獨明其不然하니 此는 高廟神靈이 使敎我라하시고
立拜千秋爲大鴻臚而族滅江充家
하시다 上
이 憐太子無辜
하여 乃作思子宮
하고 爲歸來望思之臺於湖
하니 天下
가 聞而
之
하더라
22-12-가2
과거에
한 무제漢 武帝가 29세에야
여태자戾太子를 낳아 매우 사랑하였다.
注+여태자戾太子는 위황후衛皇后의 소생이다. 여태자가 장성해서는 인자하고 너그러우며 온화하고 신중하였으므로,
무제가 여태자의 재능이 자신을 조금도 닮지 않은 점을 싫어하고 총애하는 왕부인王夫人 등이 모두 아들을 낳으니, 위황후衛皇后와 여태자는 총애가 점점 쇠하여 항상 스스로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었다.
무제가 거둥할 때마다 뒷일을 여태자에게 맡기니, 판결하여 처리한 일이 있어 무제가 돌아왔을 때 여태자가 그 개요를 무제에게 보고하면,
注+‘최最’는 개요이다. 무제 역시 이견이 없었으며 때로는 살펴보지 않기도 하였다.
무제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엄하여 매우 가혹한 관리를 임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태자는 관후하여 판결을 뒤집어 관대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注+‘번反’은 음이 ‘번翻(번)’이다.
비록 백성들의 마음은 얻었지만 법을 운용하는 대신들은 모두 좋아하지 않았고 신하들 가운데 관후한 자들은 모두 태자를 따랐다.
그러나 매우 가혹하게 법을 운용하는 자들은 모두 여태자를 비방하였으니, 간사한 신하들이 당여가 많았기 때문에 여태자는 칭송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비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무제가 황자들과 소원해지고 위황후衛皇后가 무제를 알현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여태자가 한번은 위황후를 알현했다가 이튿날이 되어서야 위황후의 처소에서 나오자 황문 소문黃門 蘇文이 무제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태자가 궁인宮人과 놀아났습니다.”
무제가 여태자의 궁인을 늘려주자 여태자가 이를 알고는 마음속으로 소문에게 원한을 품었다. 소문이 소황문 상융小黃門 常融 등과 늘 태자의 과실을 몰래 살펴 번번이 부풀려 무제에게 보고했다.
무제가 한번은 몸이 약간 좋지 않아 상융을 시켜 태자를 부르게 하자 상융이 아뢰었다. “태자에게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무제가 묵묵히 아무 말이 없었다.
여태자가 도착해서는 무제가 태자의 얼굴에 눈물을 흘린 흔적을 살폈는데 태자가 억지로 이야기하며 웃자, 무제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 은밀하게 탐문하여 그 진상을 알아내고서 마침내 상융을 주살하였다.
이때에 방사方士와 신무神巫가 경사京師에 많이 모여들어 대체로 모두 좌도左道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리고 여무女巫가 궁중을 왕래하면서 미인美人들에게 액막이하는 법을 가르쳐주어서 거처마다 목인木人을 묻고 제사를 지냈다.
투기로 인하여 서로 번갈아 고자질을 하자 무제가 노하여 죽인 궁인들과 연루되어 죽은 대신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무제의 마음속에 이미 의심이 생겼는데, 한번은 낮잠을 잘 때 꿈에서 목인 수천 명이 몽둥이를 가지고 무제를 치려고 하자 무제가 놀라 잠에서 깼다. 이로 인하여 몸이 안 좋아져 마침내 건망증에 시달렸다.
강충이 스스로 태자와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제가 연로한 것을 보고 무제가 붕어한 후에 태자에게 주살될까 두려웠다. 이로 인하여 농간을 부려 무제의 병은 원인이 무고巫蠱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무제가 강충을 사자로 임명하여 무고 사건을 처리하게 하여 입궁하여 땅을 파내 무고의 증거를 찾게 하니,
강충이 말하였다. “태자궁에서 목인을 찾아낸 것이 특히 많고 또 부도不道한 내용이 적힌 백서帛書가 있으니, 폐하께 보고해야 한다.”
소부 석덕少傅 石德이 함께 주살될까 두려워서 여태자에게 말하였다. “무당과 사자가 땅을 파내 증거를 찾아냈으니, 무당이 증거를 묻어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증거가 있었다면 스스로 해명할 수 없으니, 절節을 가지고 조서詔書를 칭탁해 강충 등을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그 간계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병으로
감천궁甘泉宮에 계셔서 황후와 황후의
가리家吏가 문안을 청했을 때 모두 회답이 없었으니, 폐하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없는데 간신이 이와 같이 행동하니 태자께서는
진秦나라
부소扶蘇의 일을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長樂宮
여태자가 말하였다. “나는 자식이니 어떻게 제멋대로 주살할 수 있겠습니까. 감천궁으로 가서 죄를 청하여 무죄를 얻어내기를 바라는 것이 낫겠습니다.” 여태자가 감천궁으로 가려고 했는데 강충이 매우 급하게 태자를 압박하였다.
여태자가 어떻게 계책을 내야 할지 몰라, 마침내 석덕의 계책을 따라서 강충 등을 체포하여 직접 가서 그를 참수하였다.
그리고 사인舍人을 시켜 절을 가지고 입궁하여 위황후에게 보고하게 하고서 무기고의 병기들을 꺼내고 장락궁長樂宮의 위졸衛卒들을 징발하니, 장안長安이 소란스러워져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였다.
소문蘇文이 도망쳐 감천궁甘泉宮으로 돌아와 상황을 아뢰자 무제가 말하였다. “태자가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또 강충 등에게 분노하여 이러한 변고가 생긴 것이다.”
이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여태자를 불렀는데, 사자가 감히 선뜻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태자가 반란을 이미 작정했으므로 신을 참수하려고 하기에, 신이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무제가 크게 노하여 승상丞相에게 새서璽書를 내리고 말하였다. “반역자를 체포하거나 참살하면 응당 상을 내릴 것이니, 성문을 굳게 봉쇄하여 반역자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여태자가 병사들을 이끌고 장락궁 서궐長樂宮 西闕 아래에 이르러 승상의 군대와 만나 교전을 벌였다. 병사들이 패하자 몸을 빼내 도망쳐서 동쪽으로 호현湖縣에 이르러서 천구리泉鳩里에 숨었다.
그런데 주인집이 발각되자 관리들이 태자를 에워싸고서 체포하려고 하였다. 여태자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막고서 스스로 목을 매고 황손 두 사람도 함께 살해되었다.
후에 관리나 백성이 무고巫蠱 사건을 가지고 고발한 것들이 조사 결과 대부분 사실이 아니자, 무제는 태자가 두려워하여 벌인 일이지 다른 뜻이 없었음을 잘 알게 되었다.
마침 고침랑 전천추高寢郞 田千秋가 긴급을 요하는 상주문上奏文을 올려 태자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무제가 크게 깨닫고서 전천추를 소견하여 말하였다.
“부자父子 사이의 일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인데, 공公만이 태자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주었으니, 이는 고묘高廟(한 고조漢 高祖)의 신령이 나를 가르쳐주게 한 것이오.”
무제가 즉시 전천추를 대홍려大鴻臚로 임명하고 강충의 집안을 멸족시켰다. 무제가 태자의 무고함을 불쌍하게 여겨 마침내 호현湖縣에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쌓으니, 천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