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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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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 卷16
大學衍義 卷16
格物致知之要(二)
사물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知性의 힘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방법들(2)
辨人材
人材를 구별하는 방법들
帝王知人之事
역대 聖王이 인재를 알아봤던 사례들
16-1-가1
疾甚이어시늘 呂后 問曰 陛下百歲後 旣死어든 誰令代之잇고하니라
漢 高帝가 병이 깊어지자 呂后가 물었다. “폐하 百歲 후에 蕭相國(蕭何)이 죽고 나면 누구에게 그 후임을 시킵니까?” 고제가 대답하였다. “曹參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
問其次한대어니와 然少戇注+少者, 多少之少, 戇, 謂愚而直也, 言陵之爲人稍愚直也.하니 可以助之 陳平 知有餘 然難獨任이니
여후가 그 다음 후임을 묻자 고제가 대답하였다. “王陵을 시키는 것이 좋지만 조금 우직하니注+‘少’는 ‘多少’라고 할 때의 少이며 ‘戇’은 우둔하면서도 올곧다는 말이니, ‘少戇’은 王陵의 사람됨이 조금 우직하다는 말이다. 陳平이 이를 돕게 하는 것이 좋겠다. 진평이 지략은 넉넉하지만 혼자서 大任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重厚少文하나 然安劉氏者 必勃也 可令爲이니라 呂后 復問其次한대 曰 此後 亦非乃 所知也니라
周勃이 중후하고 文才는 부족하지만 劉氏를 안정시킬 사람은 틀림없이 주발일 것이니 太尉로 임명할 만하다.” 여후가 또 그 다음 후임을 묻자 고제가 대답하였다. “이 다음 후임은 또한 그대가 알 바 아니다.”
역주
역주1 16-1-가1 : 관련 내용이 《前漢書》 卷1下 〈高祖本紀〉, 《資治通鑑》 卷12 〈漢紀4 太祖 下〉 12년(기원전 195) 기사 등에 보인다. 기원전 196년에 韓信이 죽고 한 고조가 彭越의 시신을 젓으로 담가 제후들에게 보내자 이를 두려워한 黥布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고조가 경포를 공격하던 중에 流矢에 맞았다.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병이 심해졌으나 명이 하늘에 달렸다고 하면서 치료를 거부하다가 4월에 죽었다.
역주2 漢高帝 : 기원전 265~기원전 195, 재위 기원전 202~기원전 195. 서한의 초대 황제 劉邦이다. 자는 季, 묘호는 高祖이다. 泗水 沛縣 豐邑 사람이다. 秦나라 말에 泗水亭長이 되었다가 秦 二世 원년(기원전 209) 陳勝‧吳廣의 난 때 군사를 일으켜 沛公을 칭했다. 이후 項梁의 휘하에서 項羽와 함께 反秦 세력으로 활동했다. 기원전 206년에 咸陽으로 들어가 約法三章을 실시하고 漢王에 봉해졌다. 이후 항우와 결전을 벌여 기원전 202년에 승리를 거두고 帝位에 올라 漢나라를 건국하였다. 개국에 공을 세운 이들을 제후로 봉하였으나 상당수를 차례차례 제거하였다.
역주3 蕭相國 : ?~기원전 193. 蕭何를 가리킨다. 泗水 沛縣 사람이다. 처음에 沛縣의 아전인 主吏掾으로 있다가 劉邦의 거병에 협력하였다. 유방과 함께 咸陽으로 들어가서는 秦나라 丞相府와 御史府에 보관된 律令과 圖書들을 거두어들여 천하의 요충지와 郡縣들의 戶口를 파악하였다. 유방이 漢王이 되자 丞相이 되었으며 韓信을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게 하였다. 楚나라와 한나라가 싸울 때에는 關中을 수비하며 군량 보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는데, 유방이 황제가 되자 酇侯로 봉해졌다. 秦나라 때의 법률을 참고하여 《九章律》을 편찬했다. 고조와 呂后를 도와 陳豨‧韓信‧黥布 등을 제거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相國이 되었다. 고조가 죽자 惠帝를 섬겼으며 病死하기에 앞서 曹參을 재상으로 천거했다. 시호는 文終이다. 相國은 백관의 우두머리로 전국시대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相‧宰相 등으로도 불렀다. 漢 高帝가 즉위했을 때에는 승상 1명을 두었다가 고제 11년(기원전 196)에는 이를 相國으로 개칭하였다. 惠帝‧呂后 때에는 左丞相과 右丞相을 두었는데 이때에는 우승상이 좌승상보다 높았다. 文帝 2년(기원전 178)에는 다시 승상 1명을 두었다. 《史記辭典 丞相》
역주4 曹參 : ?~기원전 190. 자는 敬伯으로 泗水 沛縣 사람이다. 원래 沛의 獄掾으로 있으면서 劉邦‧蕭何와 절친하게 지냈다. 유방이 거병하자 그를 도와 무수한 전공을 세웠으며, 漢王 원년(기원전 206)에는 유방을 따라 漢中으로 들어간 뒤 建成侯에 봉해지고 將軍이 되었다. 한나라의 천하 통일에 기여한 戰功으로 高帝 6년(기원전 201)에 平陽侯로 봉해졌으며 齊國 相이 되었다. 이 자리에 9년간 있을 때에는 道家의 大師인 蓋(갑)公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淸淨無爲를 추구하여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여 齊가 잘 다스려졌다. 陳豨의 반란과 黥布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에도 참여했으며 고제가 죽은 뒤 惠帝 2년(기원전 193)에 相國이 되어 혜제를 보좌했다. 조참은 소하의 후임이 되어 소하가 제정한 갖가지 법률들을 충실히 따라 ‘蕭規曹隨’라는 말이 생겼다. 시호는 懿이다.
역주5 王陵 : ?~기원전 181. 泗水 沛縣 사람이다. 패현의 토호 출신으로 직언을 잘했으며, 한미한 시절의 劉邦을 잘 대해주었다. 유방이 거병했을 때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다가 項羽를 공격하고 丹水에 이르자 병력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후 유방을 따라 전공을 세워 襄侯에 봉해졌다. 高帝 6년(기원전 201)에는 다시 安國侯로 봉해졌으며, 혜제 6년(기원전 189)에는 右丞相이 되었다. 呂后가 여씨들을 왕으로 앉히려고 했을 때 강력하게 반대하여 太傅로 밀려나 실권을 빼앗겼다. 마침내 稱病하고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시호는 武이다.
역주6 陳平 : ?~기원전 178. 陽武 戶牖 사람이다. 秦나라 말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魏王 咎의 밑에서 太僕을 지냈으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참소를 당하자 項羽를 섬겨 信武君이 되었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도망하여 劉邦을 섬겼다. 이후 숱한 책략으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기여하여 高帝 6년(기원전 202)에 戶牖侯에 봉해졌다. 이후에도 韓信을 사로잡고 平城에서 匈奴에게 포위당한 유방을 구출하는 데에도 계책을 내어 마침내 曲逆侯로 轉封되었다. 惠帝가 즉위하고 나서는 郎中令으로 있다가 左丞相이 되었으며, 高后 원년(기원전 187)에는 王陵의 후임으로 右丞相이 되었다. 이때에는 날마다 주색에 탐닉하여 화를 면하였는데 呂后가 죽자 周勃 등과 공모하여 呂氏들을 주멸하였다. 이후 文帝를 옹립하고 나서 단독으로 丞相이 되었다. 시호는 獻이다.
역주7 周勃 : ?~기원전 169. 泗水 沛縣 사람이다. 劉邦을 따라 패에서 일어나 秦나라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는데, 유방이 漢王이 되자 威武侯에 봉해지고 將軍이 되었다. 項羽를 멸하고 나서 高帝 6년(기원전 201)에 絳侯로 봉해졌다. 한나라 초기에는 유방을 도와 韓信‧陳豨‧盧綰 등 異姓 제후들의 반란을 평정했으며 匈奴를 공격하는 등 공을 세워 太尉가 되었다. 惠帝와 呂后 때에도 태위로 있었는데, 여후가 죽은 뒤 陳平과 공모하여 여씨들을 주살하고 文帝를 옹립하였다. 그 후 右丞相에 올랐으나 공이 높으면 재앙을 초래한다고 여겨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진평이 죽자 다시 승상이 되었으나 10여 달 뒤에 그만두었다. 시호는 武侯이다.
역주8 太尉 : 전국시대 秦나라 때 설치한 國尉가 진나라의 천하 통일 후 그 명칭이 태위로 변경되었는데, 온 나라의 軍務를 담당하는 最高 長官이다. 漢나라에서도 襲用하였으나 시기에 따라 置廢를 거듭하여 武帝 때에는 大司馬大將軍이 태위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丞相‧御史大夫와 함께 三公으로 불렸다. 《中國官制大辭典 太尉》 《中國歷代官制大詞典 太尉》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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