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宣帝의 조서에서 陰陽과 風雨가 제때에 맞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신이 六藝에 밝지 않아 大道에 어둡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經에 밝지 않아 道를 알지 못하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자신을 수양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일하지 않은 생각 하나, 中道를 잃은 행동 하나가 모두 음양의 조화를 해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書經》 〈洪範〉에서 비‧햇볕‧더위‧추위‧바람이 제때에 맞느냐를 가지고 엄정함[肅]‧조리 있음[乂]‧지혜로움[哲]‧법도 있음[謀]‧통달함[聖]의 징험으로 여겼으며, 다섯 가지 징후가 제때에 맞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망령됨[狂]‧어긋남[僭]‧태만함[豫]‧급박함[急]‧몽매함[蒙]의 징험으로 여겼으니, 임금의 한 마음이 天地와 함께 流行하여 善惡과 吉凶의 징험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른 것이 대체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임금들은 혹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선제가 홀로 이를 알았으니 탁연히 식견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제가 등용한 관리와 백성 가운데 그 자신을 수양하여 올바르며 문학에 통달하고 선왕의 도에 밝은 자 가운데 마침내 寂然히 알려진 경우가 없습니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 도에 밝은 선비가 참으로 세상에 드물기는 하지만, 만일 宣帝가 정말 성심으로 찾았다면 어찌 그에 가까운 사람 한두 명이라도 나와서 선제에게 등용되지 않았겠습니까.
原注
그 당시를 고찰해보면 오직 王吉 한 사람만이 그런대로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세워서 명철한 임금을 융성했던 三代의 임금 수준으로 올려놓고자 했는데, 선제는 그런 것을 벌써 오활하다고 여겼습니다.
만약 子思와 孟子가 그 시대에 태어나 仁義를 시급히 여기고 功利에 급급해하지 않았다면, 둥근 장붓구멍에 모난 장부를 끼우듯 선제와 맞지 않는 것이 왕길보다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바르게 하고 도에 밝은 선비가 선제의 이런 뜻을 엿보고서 선뜻 선제를 위해 출사하려고 했겠습니까.
德을 가지고 仁을 실천하는 것은 王道이며, 무력을 가지고 仁을 가탁하는 것은 霸道입니다.
이 왕도와 패도의 길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이 색을 달리하는 것과 같고 맑은 물과 탁한 물이 물줄기를 달리하는 것과 같아서 섞일 수가 없으니, 섞인다면 검은색과 탁한 물이 끝내 이길 것입니다.
그런데 선제는 패도와 왕도를 병용하는 것을 漢나라의 제도로 여겼으니, 이것이 옳겠습니까.
原注
뿐만 아니라 宣帝는 일찍이 《論語》를 배웠습니다.
《논어》에 이르기를 “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려고 들 뿐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德으로 인도하고 禮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또 善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였으며, 또 “그대가 정사를 행함에 있어 어찌 죽이는 형벌을 쓰겠는가.”라고 하였으니, 孔夫子의 뜻은 바로 임금이 순전히 德敎에 의지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선제는 또 일찍이 《書經》과 《春秋》를 學官에 세웠습니다.
공자는 《서경》을 編定할 때 文王‧武王‧成王‧康王의 정치를 기록하여 후세의 법이 되게 하였으며, 《춘추》에서는 王道를 존숭하고 覇道를 배척하였으니, 공부자의 뜻은 바로 임금이 순전히 周나라 德政을 행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제는 마침내 “德敎는 의지할 수 없으며 周나라의 德政은 행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제가 《논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며 《서경》과 《춘추》를 학관에 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原注
俗儒가 옛것만 옳다 하고 지금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쓸 수 없다지만, 마땅히 眞儒는 찾아서 등용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俗儒가 時宜에 어둡다고 하여 儒者 중에 時務에 능통한 자들까지 아울러 버려둔다면, 이는 목이 메인다 하여 음식을 먹지 않는 격입니다.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하는 임금으로서 治術을 선택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혼신을 다해 정치를 하여 비록 한때의 治世를 이룩할 수는 있었지만, 환관을 周公과 召公처럼 여기고 법률을 《詩經》과 《書經》처럼 여겨서 끝내 훗날의 재앙에 기반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으니,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