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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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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8-7-나(按)
按 自昔小人 將竊權寵 必先窺伺主意而迎合之하나니
蓋人主好惡 不同하고 喜怒 難必이니 非潛觀密測하여 得其指則無以爲容悅取媚之地
姦臣事君 多合少忤者 以其能覘上意所在故也 石顯之見於漢元 蓋用此術이니이다


原注
18-7-나()
[신안臣按] 예로부터 소인이 권력과 총애를 훔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군주의 뜻을 엿보아 이에 영합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군주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르고 기뻐할지 노여워할지 자신할 수 없으니, 남몰래 살피고 추측하여 군주가 가리키는 뜻을 알지 않으면 군주의 환심을 사고 비위를 맞출 거리로 삼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공薛公나라 왕을 섬길 때 왕이 애희愛姬가 일곱 명이어서 누구를 부인夫人으로 세울 것인지 알 수 없자 7쌍의 귀고리를 바치되 그중 한 쌍을 아름답게 하고서 다음날 그 아름다운 귀고리가 있는 곳을 살펴서 왕에게 그 여자를 부인으로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왕이 설공의 말을 따랐습니다.
신불해申不害한 소후韓 昭侯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소후가 일을 도모할 때 소후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없자 같은 반열에 있는 두 사람에게 먼저 그들의 계책을 진달하게 하여 소후가 기뻐하는 쪽을 가만히 살펴 말하니 소후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간신이 군주를 섬길 때 군주의 뜻에 맞는 것이 많고 거슬리는 것이 적은 것은 그가 윗사람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엿보는 데 능했기 때문입니다. 석현石顯한 원제漢 元帝에게 신뢰를 받았던 것은 대체로 이 방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역주
역주1 : 사고본에는 ‘意’로 되어 있다.
역주2 薛公事……從之 : 관련 내용이 《戰國策》 〈齊策3〉에 보인다. ‘齊나라 왕’은 춘추전국시대 齊 威王(기원전 378~기원전 320, 재위 기원전 356~기원전 320)의 아들 宣王(기원전 350~기원전 301, 재위 기원전 319~기원전 301)을 이른다. ‘薛公’은 孟嘗君 田文(?~기원전 279)의 아버지 田嬰(?~?)을 이른다. 제나라 威王의 아들이자 宣王의 異母弟이다. 위왕 16년(기원전 341)에 田忌‧孫臏과 함께 魏나라를 쳐서 馬陵에서 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위나라의 태자 申을 사로잡고 장군 龐涓을 죽인 마릉의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처음에는 팽성에 봉해졌으나 뒤에 설에 봉해져 설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왕 9년(기원전 311)에 재상으로 발탁된 뒤 제나라의 재정을 관장하며 이후 11년 동안 권력을 전횡하고 부를 쌓았다.
역주3 申不……大悅 : 관련 내용이 《戰國策》 〈韓策1〉에 보인다. 기원전 354년에 魏나라가 趙나라의 수도인 邯鄲을 포위했을 때 韓 昭侯(?~기원전 333, 재위 기원전 362~기원전 333)가 申不害(?~기원전 341)에게 위나라와 조나라 중 어느 나라를 돕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묻자, 신불해는 나라의 흥망에 관련된 것이어서 깊이 생각해보고 대답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몰래 韓나라의 대신인 趙卓과 韓晁를 찾아가 신하 된 자는 충성을 다할 뿐 어찌 자신이 진달한 말이 모두 채택되기를 바라겠느냐고 하였다. 두 사람이 조정에 나아가 조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에 대해 각각 다른 의견을 피력하자, 신불해는 왕이 어느 주장에 대해 기뻐하는가를 살폈다가 그 주장을 진달하였다. 소후는 신불해의 대답에 매우 기뻐하며 신불해를 재상으로 삼았다. ‘신불해’는 18-2-가 ‘申子’ 주 참조.
역주4 : 사고본에는 ‘用’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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