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3)

대학연의(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濠泗 惡幕僚하여 誣奏藩 搖動軍情이라한대 大怒하사 召詣長安이러니
16-8-가
唐 德宗 때 濠泗 觀察使 杜兼이 막료 李藩을 미워하여, 이번이 군사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다고 황제에게 誣告하였는데 덕종이 크게 노해 이번을 소환하여 長安으로 오게 하였다.
望見藩儀度安雅하고 乃曰 此豈爲惡者耶
書郞注+藩後事憲宗, 爲元和賢相.하시다
그런데 이번의 威儀와 법도가 침착하고 단아한 것을 멀리서 보고 이에 말하였다. “이러한 사람이 어찌 나쁜 짓을 할 사람이겠는가.” 이번을 秘書郞으로 발탁하였다.注+李藩은 후에 憲宗을 섬겨 元和 연간(806~820)의 賢相이 되었다.
역주
역주1 16-8-가 : 관련 내용이 《資治通鑑》 卷235 〈唐紀51 德宗〉 貞元 16년(800) 조에 보인다.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있었던 徐泗濠節度使 張建封은 정원 16년에 병이 심해지자 자신의 후임을 임명해달라고 청하였다. 성품이 음험한 濠泗觀察使 杜兼은 암암리에 자신이 그 후임이 되고자 하여 濠州에서 장봉건에게 달려갔다. 이때 幕僚 李藩은 그와 同列이었는데 장건봉에게 병문안을 다녀오면서 두겸을 보고는, 장봉건의 병이 위중한데 왜 호주를 내버려두고 여기에 왔느냐고 나무라면서 속히 돌아가지 않으면 조정에 보고하겠다고 말하였다. 두겸은 마침내 호주로 돌아갔다. 그 후 장건봉이 죽고 나서 두겸이 이번을 무함하자 덕종이 격노하여 은밀히 杜佑에게 이번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렸다. 두우는 평소 이번을 중히 여겨 조서를 품에 품고 열흘이 되도록 꺼내지 않고 있다가 이번과 대화를 나눌 때 조서를 보여주었으나 이번은 안색이 바뀌지 않았다. 한편 덕종은 그래도 의심스러워 이번을 장안으로 소환하였는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서 즉시 秘書郞으로 제수하였다.
역주2 唐德宗 : 742~805. 재위 779~805. 당나라의 황제 李适(괄)로 덕종은 묘호이다. 시호는 神武孝文皇帝이다. 代宗의 장자로, 玄宗 때 궁중에서 태어나 奉節郡王이 되었다. 대종 寶應 원년(762)에 天下兵馬元帥가 되어 史朝義를 토벌하고 東都를 수복하여 이 공으로 中書令에 올랐다. 廣德 2년(764)에 태자가 되고 大曆 14년(779)에 즉위하였다. 초기에는 楊炎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그의 의견에 따라 租‧庸‧調 제도를 철폐하고 兩稅法을 시행하였으나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剛明하다고 자임하며 참소하는 말을 믿었는데, 간사한 盧杞를 재상으로 삼았으며 국가의 재정을 증대시킨 劉晏을 楊炎의 모함만 듣고 무고하게 죽였다. 建中 2년(781)에 李正己‧田悅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윽고 평정되었으며 얼마 후 朱滔‧田悅‧王武俊‧李納‧李希烈 등이 연계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고자 涇原에서 군사를 징발했는데 建中 4년(783)에 경원에서 兵變이 일어나 長安으로 쳐들어오자 奉天으로 달아났다. 興元 원년(785)에 李晟이 병사를 이끌고 장안을 수복하자 되돌아왔다. 이후로는 賦稅를 늘려 聚斂에 골몰하였으며 陸贄‧陽城‧韓愈 등을 폄척하고 裴延齡‧竇參 등을 가까이하여 정치를 부패하게 만들었다. 또한 환관들에게 禁軍의 병권을 맡겨 그 세력이 더 강해졌다. 貞元 21년(805)에 병사하였다.
역주3 觀察使 : 唐 肅宗 乾元 원년(758)에 采訪處置使를 觀察處置使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것의 약칭이 관찰사이다. 節度使를 설치하지 않은 곳에는 관찰사가 한 道의 행정 장관이 되어 州縣에 소속된 관리들의 치적을 살피고 백성들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였다. 당나라 중엽 이후로는 대부분 절도사가 관찰사를 겸임하였으며 그 아래에 副使‧判官‧掌書記‧推官‧巡官‧衙推 등의 관리를 두었다. 《兩唐書辭典 觀察使》
역주4 杜兼 : 750~809. 자는 處弘으로 京兆 사람이다. 太宗‧高宗 때의 재상인 杜正倫의 5세손이다. 德宗 建中 원년(780)에 진사가 된 후 濠州 刺史‧蘇州 刺史‧河南尹 등을 역임하였다. 부임하는 곳마다 살육과 가렴주구를 일삼아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역주5 李藩 : 754~811. 자는 叔翰으로 趙郡 사람이다. 일찍 부친을 잃어 집안 형편이 어려운 탓에 40세가 넘어서 출사하였다. 처음에는 秘書郞이 되었다가 憲宗 元和 연간(806~820) 초에 吏部 郎中‧國子監 司業‧給事中을 역임했다. 재상 裴垍(기)의 추천으로 憲宗 元和 4년(809)에는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책을 신중히 수행하였으며 과감하게 직언을 하였다. 후에 李吉甫의 배척을 받아 詹事로 좌천되었다. 元和 6년(811)에는 華州 刺史 兼 御史大夫가 되었는데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죽은 뒤 戶部 尙書에 추증되었다.
역주6 秘書郞 : 東漢 때 창설된 관직으로 秘書監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서적의 교감을 담당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秘書省의 소속으로 비서랑 4員을 두었는데, 각기 經‧史‧子‧集 4部 典籍의 교감과 書寫를 담당하였다. 《中國官制大辭典 秘書郞》
역주7 : 사고본에는 ‘祕’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