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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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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7-5-나(按)
按 此 莽得權用事之始也 故其情狀 浸與昔異하니
17-5-나(按)
[臣按] 이는 왕망이 권세를 얻어 권력을 휘두른 시초입니다. 그러므로 그 정상이 차츰 예전과 달라진 것입니다.
其推尊孔光 以其有重名而易制也 名重則可以欺天下 易制則不妨己之權而可以行己之志
왕망이 孔光을 추켜세운 것은 그가 큰 명망이 있으면서도 제어하기 쉬웠기 때문이니, 명망이 크면 천하를 속일 수 있고 제어하기 쉬우면 자신의 권력에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前則 後則
之於 其術 略同하니이다
왕망 이전에는 霍光과 蔡義의 경우가, 왕망 이후에는 王伾‧王叔文과 杜佑의 경우가 그 방법이 대략 같았습니다.
自色厲言方以下 史氏 所以狀莽之情態也 라하시니
“낯빛이 엄숙하고 말이 方正하였다.”라는 대목 이하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왕망의 마음과 태도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공자가, 낯빛은 엄숙하여도 내심이 유약한 것을 두고 좀도둑이라고 하였습니다.
蓋外爲剛勁之色而中實陰柔하니 所以欺世盜名也 莽之竊國 蓋用此術이라
이는 외면은 굳센 기색을 하고 있어도 마음속은 실로 陰柔한 것이니 欺世盜名하는 방법입니다. 왕망이 나라를 훔칠 때에는 이러한 술책을 사용하였습니다.
欲有所爲 微示風指하고 及其得請則涕泣固辭하니 姦僞至此 雖明君이라도 未能遽察이어든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의도를 은밀하게 내비치고 요청이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리며 固辭하였으니, 간사함과 거짓이 이 정도라면 비록 명철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대번에 살펴 알 수 없는 것인데,
況易欺之母后 與易惑之衆庶乎 其潛移漢鼎 宜矣로소이다
하물며 속기 쉬운 태황태후와 미혹되기 쉬운 뭇사람들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왕망이 漢나라의 정권을 남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훔친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역주
역주1 霍光之於蔡義 : 漢 宣帝가 즉위하고 나서 蔡義가 楊敞의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다. 胡寅의 《讀史管見》에서는 이를 霍光이 한 일로 보았는데, 昭帝 때 승상 田千秋가 죽자 2년이 지나서야 곽광이 양창을 승상으로 삼게 한 것은 소제를 깔본 것이라 하였고, 선제 때 양창이 죽자 겨우 10일 만에 채의를 승상으로 삼은 것은 선제를 감히 깔보지 못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이때 채의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으며 조정의 대권은 곽광이 쥐고 있었다. 《致堂讀史管見 卷2》 《漢書 卷66 蔡義傳》
역주2 蔡義 : ?~기원전 71. 蔡誼라고도 한다. 河內 溫 사람이다. 경서에 밝아 大將軍 霍光의 휘하에서 일했으며, 昭帝가 《韓詩》에 통달한 사람을 찾을 때 불려가 풀이함으로써 光祿大夫‧給事中으로 발탁되어 소제에게 《시경》을 전수하였다. 이어서 少府‧御史大夫로 승진하였다. 元平 원년(기원전 74)에 승상이 되고 陽平侯에 봉해졌다. 승상이 된 지 4년 만에 졸하였으며, 시호는 節侯이다.
역주3 伾文之於杜佑 : 唐 順宗은 즉위하고 나서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때 王叔文은 王伾의 도움으로 起居郞‧翰林學士가 되어 그에게 의지하였는데, 왕비가 聖旨의 전달과 상주문의 접수를 관장하고 왕숙문은 이를 재가하여 中書省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왕숙문은 늘 말하기를 “錢穀은 나라의 큰 근본으로, 이에 대한 권력을 장악하면 선비들을 포섭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杜佑에게 度支鹽鐵使를 겸임하도록 건의하고 자신은 副使가 되어 실질적으로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新唐書 卷168 王叔文傳》
역주4 : ?~?. 王伾를 가리킨다. 杭州 사람이다. 唐 德宗 때 翰林侍書待詔‧正議大夫‧殿中丞‧太子侍書 등을 지냈으며, 王叔文과 동궁에서 時政을 논하여 태자의 신임을 얻었다. 貞元 21년(805)에 順宗이 즉위하고 나서 左散騎常侍가 되었다. 왕숙문이 조정을 개혁할 때 순종이 風疾을 앓고 있어 왕비가 궁중을 출입하며 환관 李忠言 등과 소식을 주고받았다. 오래지 않아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開州 司馬로 폄적되어 개주에서 죽었다.
역주5 : 758~806. 王叔文을 가리킨다. 越州 山陰 사람으로, 唐 德宗 때 王伾와 함께 東宮侍讀을 지냈을 때 태자(順宗)의 신임을 받았다. 貞元 21년(805)에 順宗이 즉위한 후 翰林學士가 되고 얼마 후에 戶部 侍郞이 되었다. 韋執誼를 추천하여 재상이 되게 하고 柳宗元‧劉禹錫 등을 기용하여 弊政을 개혁하는 데 힘썼으나, 순종이 환관 俱文珍에 의해 퇴위당하고 憲宗이 즉위하자 渝州 司戶로 좌천되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피살되었다.
역주6 杜佑 : 735~812. 자는 君卿으로 京兆 萬年 사람이다. 門蔭으로 濟南 參軍이 된 이후 御史大夫‧刑部 尙書 등을 거쳐 德宗 貞元 19년(803)에 檢校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順宗이 즉위한 후에 檢校司徒에 오르고 度支鹽鐵使가 되어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이때 王叔文이 度支鹽鐵副使가 되었다. 憲宗 元和 원년(806)에 司徒가 되고 岐國公에 봉해졌다. 저서에 《通典》이 있다. 시호는 安簡이다.
역주7 孔子……之盜 : 《논어》 〈陽貨〉 제12장에, “낯빛은 엄숙하면서도 내심이 유약한 것을 소인에 비유하자면 좀도둑과 같을 것이다.[色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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