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禹가 이미 ‘삼가라’라는 한 마디 말로 舜임금을 경계하고서도 오히려 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하였다고 여겨서 또 세 마디 말을 하여 부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安汝止’란 그 마음이 그쳐야 할 바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 것이니, 사람의 한 마음은 고요해진 뒤에 동할 수 있고 안정된 뒤에 응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시끄럽고 어지럽다면 장차 외물에 부림을 당하기에 급급하게 될 것이니, 또 어떻게 만물을 주재하겠습니까.
先儒가 말하기를 “마음은 사람에게 있어 북극성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북극성이 오직 제자리에 있기 때문에 二十八宿의 벼리가 될 수 있고, 마음이 오직 그쳐야 할 바에 편안하기 때문에 모든 일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原注
그러나 마음이 항상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幾’는 생각이 싹트는 시초이고, ‘康’은 편안하여 안일에 젖어 있는 때입니다.
기미를 살피지 않으면 喜怒哀樂이 때에 따라 절제를 잃기도 하고 편안함을 경계하지 않으면 耽樂과 나태가 때에 따라 부려지기도 하니, 이렇게 하면서 마음이 그쳐야 할 바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바란다면 가능하겠습니까.
‘마음이 그쳐야 할 바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安止]’과 ‘기미를 살피고 편안한 때를 살피는 것[幾康]’은 성인이 마음을 기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마음이 그 기름을 얻게 되면 帝位에 계심을 삼갈 수 있게 되고, 또 반드시 보필하는 신하 가운데 정직하지 않은 이가 없다면 안과 밖에서 서로 길러주어 언제나 편안하지 않은 때가 없을 것이니, 사람만 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응하게 될 것입니다.
순임금이 정밀히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서 중도를 잡는 것으로 禹에게 일러주었는데, 우가 다시 마음이 그쳐야 할 바를 편안히 여겨서 기미를 생각하고 편안한 때를 살피는 것으로 순임금에게 아뢰었으니 힘쓰는 길이 다른 듯하지만 귀결점은 실로 같습니다.
순임금과 우임금의 학문을 알고자 하는 자는 두 분의 말을 합하여 玩索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