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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5)

대학연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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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29-23-나3(按)
按 養心 謂涵育其心也 謂不失其本心也 多欲則戕伐其心矣 烏乎養이며 以欲戕伐則喪失其心矣 烏乎存이리오
漢武帝 謂群臣曰吾欲云云하노라 리잇고하니
夫堯舜 無欲者也 武帝 好聲色․好征伐․好刑名․好財利․好神仙하니 多欲者也
多欲則邪念 紛紜하여 本心 流蕩而欲效堯舜而施仁義 得乎잇가
原注
曰 聖可學乎 曰 可 有要乎 曰 一爲要 一者 無欲也
인저하니 然則有志於學聖人者 必由寡欲充之하여 以至於無欲而後
若夫多欲而不知所以克之 方將與漢武 同科而欲遠輩堯․舜 非臣之所敢知也 惟聖主 致思焉하소서
以上 論操存省察之功하니라


原注
29-23-나3()
[신안臣按] ‘양심養心’은 그 마음을 함양하는 것을 이릅니다. ‘’은 그 본심本心을 잃지 않는 것을 이른다. 욕심이 많으면 그 마음을 해치니 어떻게 함양하겠으며, 욕심으로써 해치면 그 마음을 상실하게 되니 어떻게 보존하겠습니까.
옛날에 무제武帝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리이리 하고자 하노라.”라고 하자, 급암汲黯이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푸시니, 어떻게 요순堯舜의 정치를 본받고자 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과 임금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고, 무제는 아름다운 소리와 여색女色, 정벌征伐, 형명刑名, 재화와 이익, 신선을 좋아하였으니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욕심이 많으면 부정한 생각이 어지럽게 일어나 본심이 흔들리게 되는데 요임금과 순임금을 본받아서 인의를 베풀고자 하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原注
주돈이周敦頤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을 배워서 될 수 있는가? 배워서 될 수 있다. 핵심적인 방법이 있는가? 순일純一함이 핵심적인 방법이 되니, 순일함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할 때에는 마음이 비고 동할 때에는 정직하다. 고요할 때 마음이 비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달하며, 동할 때에 정직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어진다. 밝고 통달하고 공정하고 넓으면 거의 성인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인을 배우는 데 뜻을 둔 자는 반드시 욕심을 적게 하는 데로부터 이를 확충하여 욕심이 없는 데 이른 뒤에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욕심이 많은데도 이를 극복할 방법을 모른다면, 이제 곧 무제武帝와 같은 부류인데, 멀리 임금과 임금과 동렬이 되고자 하는 것은 신이 감히 아는 바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 점을 지극히 생각하소서.
이상은 마음을 간직하고 보존하며 반성하고 살폈을 때의 공효功效를 논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汲黯 : 기원전 ?~기원전 112?. 西漢의 諫臣이다. 자는 長孺이다. 西漢 濮陽 사람이다. 景帝 연간에 蔭補로 太子洗馬가 되었다. 武帝 때 謁者, 東海太守, 主爵都尉 등을 역임하였다. 直諫을 좋아하고 주저 없이 犯顔을 하여 무제에게 ‘社稷之臣’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匈奴와의 화친을 주장하고 전쟁은 반대했다. 승상 張湯과 御史大夫 公孫弘 등을 법에 의존하고 천자에게 아첨하는 무리라고 비난하였다. 또 黃老之道와 無爲之治를 주장하며 武帝에게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가 다시 淮陽太守에 제수되어 재직하던 중에 죽었다.
역주2 昔漢……治乎 : 《史記》 권120 〈汲鄭列傳 汲黯〉과 《漢書》 권50 〈張馮汲鄭傳 汲黯〉, 《資治通鑑》 권17 〈漢紀9 武帝上之上〉 建元 6년(기원전 135)에 보인다. 漢 武帝가 文學하는 儒者들을 초빙한 자리에서 무제가 한 말에 대해 급암이 직간한 것이다. 무제가 말한 ‘云云’의 내용에 대해 裴駰의 《史記集解》에는 張晏의 설을 인용하여 인의를 베풀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고만 하였는데, 荀悅의 《漢記》 권10 〈孝武1〉 건원 6년에는 무제가 “내 정치를 흥기시켜 요임금과 순임금을 본받고자 하니 어떠한가?[吾欲興政治法堯舜 何如]”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역주3 : 대전본에는 ‘端’으로 되어 있으나, 南宋 光宗 趙惇의 피휘이다.
역주4 周敦頤 : 1017~1073. 북송 때 관료, 철학가, 사상가. 程顥․程頤․邵雍․張載와 함께 ‘北宋五子’로 일컬어진다. 본명은 敦實인데 宋 英宗 趙宗實을 피휘하여 개명하였다. 자는 茂叔이고, 호는 濂溪이다. 道州 營道 사람이다. 관직은 大理寺丞, 太子中舍, 國子博士, 建州通判, 廣東轉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周易》에 정통하고 도가와 불가의 주요 인식과 개념을 수용하여 우주의 원리와 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성리학 이론을 개척하여 北宋 理學의 개창자로 일컬어진다. 濂學의 창시자로, 程顥․程頤의 이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술로는 《太極圖說》․《通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周元公集》이 있다. 시호는 元이다.
역주5 聖可……矣乎 : 周敦頤의 《通書》 〈聖學〉에 보인다.

대학연의(5)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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