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23-3-나(안按)
[신안臣按] 가밀賈謐이 황후에게 태자를 참소했을 때 황후가 이를 믿었으나 아직 폐위할 만한 죄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지어서 태자를 억지로 취하게 한 뒤 이를 베껴 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취는 매우 분명하고 그 실정은 살피기가 쉬웠습니다. 신하이자 자식으로 그 누가 군주이자 어버이에게 앞으로 역란逆亂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감히 직접 쓰는 글에 그 뜻을 드러내겠습니까.
설령 참으로 이러한 글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알지 못하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태자가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내놓은 것입니까?
혜제惠帝는 어리석어서 이미 그것을 제대로 분변할 수 없었고, 오직 대신 배위裴頠가 청한 것만이 그런대로 요점을 얻었으나 또한 그 거짓을 깊이 분변하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저군儲君(태자)으로 하여금 무고를 당하고서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못하여 끝내 원통하게 죽게 만들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일은 징험할 수 있는 것이 직접 쓴 글만 한 것이 없으나, 또한 모두 다 근거로 삼을 수는 없는 경우도 있으니 바로 이와 같은 유입니다.
原注
우리 송나라 경력慶曆(1041~1048) 연간에 석개石介가 〈성덕시聖德詩〉를 지어서 부필富弼을 찬양하고 하송夏竦을 기롱하자 하송이 이를 뼛속 깊이 원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녀로 하여금 석개의 글씨를 익히게 하여 시녀가 모두 익히자 석개가 부필에게 보내는 편지를 거짓으로 쓰게 하여 황제의 폐립을 권하게 하고서 이를 조야朝野에 퍼뜨렸으니, 두 신하가 성명한 인종仁宗을 만나지 못했다면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삼사사 채양三司使 蔡襄을 미워하여 참소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인종께서 폐하를 황사皇嗣로 선택하셨는데 채양이 일찍이 이를 저지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종이 채양에게 매우 노하자, 대신 구양수歐陽脩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채양의 글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전해 들으신 것입니까?
신이 선대의 조정에 있을 때 어떤 자가 신이 벼슬하는 자들을 가려서 쓰라고 청하는 내용의 소疏를 거짓으로 지어서 좌우의 신하들을 격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과연 채양의 글을 보았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진위眞僞 여부를 분변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전해 들은 것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영종이 이에 노여움을 풀었습니다. 그 뒤에 원부元符(1098~1100) 연간의 소인 역시 거짓으로 간하는 글을 지어 추호鄒浩를 모함하였습니다. 세도世道가 떨어지고 풍속이 나빠져서 거짓이 날로 더해만 가니 속임수가 어느 곳인들 없겠습니까.
공사公私의 거래에 근거로 삼는 것은 계약 문건이지만 교묘하게 속이는 자가 능히 이를 만드니, 더구나 참소하는 자가 참소에 뛰어난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민회태자愍懷太子의 일을 계기로 함께 수록함으로써,
신하가 참소를 당했을 때 비록 직접 쓴 글과 같이 징험할 만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대번에 믿기는 어려우니 요컨대 반드시 자세히 살펴서 조사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도 민회태자처럼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임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