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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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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23-3-나(按)
按 賈謐之譖太子於后也 信之호대 以其未有可廢之罪 故爲不臣之語하여 强使醉而書之
23-3-나(按)
[臣按] 賈謐이 황후에게 태자를 참소했을 때 황후가 이를 믿었으나 아직 폐위할 만한 죄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지어서 태자를 억지로 취하게 한 뒤 이를 베껴 쓰게 하였습니다.
然其迹甚明하고 其情易察이라 孰有臣子 將爲逆於君親而敢露其手書乎리오
그러나 그 자취는 매우 분명하고 그 실정은 살피기가 쉬웠습니다. 신하이자 자식으로 그 누가 군주이자 어버이에게 앞으로 逆亂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감히 직접 쓰는 글에 그 뜻을 드러내겠습니까.
藉使誠有此書 不知何所從得 太子 自發之邪人發之也
설령 참으로 이러한 글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알지 못하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태자가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내놓은 것입니까?
惠帝 昏庸하여 旣莫之辨하고 大臣惟裴頠所請 粗得其要호대 而亦未能深辨其妄也하여
惠帝는 어리석어서 이미 그것을 제대로 분변할 수 없었고, 오직 대신 裴頠가 청한 것만이 그런대로 요점을 얻었으나 또한 그 거짓을 깊이 분변하지 못함으로써
遂使儲君被誣하여 莫能自白하여 하니 豈不哀哉리오
마침내 儲君(태자)으로 하여금 무고를 당하고서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못하여 끝내 원통하게 죽게 만들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夫事之可驗 莫如手書로되 而亦有不可盡據者하니 此類 是也
무릇 일은 징험할 수 있는 것이 직접 쓴 글만 한 것이 없으나, 또한 모두 다 근거로 삼을 수는 없는 경우도 있으니 바로 이와 같은 유입니다.
原注
作聖德詩하여而譏夏竦한대
우리 송나라 慶曆(1041~1048) 연간에 石介가 〈聖德詩〉를 지어서 富弼을 찬양하고 夏竦을 기롱하자 하송이 이를 뼛속 깊이 원망하였습니다.
則使婢習爲介書하여 旣成則僞作介與富弼書하여 勸其廢立하여 播之朝野하니 二臣者 非遇仁祖之聖이면 其得免乎
그리하여 시녀로 하여금 석개의 글씨를 익히게 하여 시녀가 모두 익히자 석개가 부필에게 보내는 편지를 거짓으로 쓰게 하여 황제의 폐립을 권하게 하고서 이를 朝野에 퍼뜨렸으니, 두 신하가 성명한 仁宗을 만나지 못했다면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英宗 踐位 有惡而譖之者어시늘 라한대
英宗이 즉위하자 三司使 蔡襄을 미워하여 참소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인종께서 폐하를 皇嗣로 선택하셨는데 채양이 일찍이 이를 저지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頗怒襄이어시늘 大臣歐陽脩 爲言 陛下 嘗見襄書邪잇가 抑傳聞之也잇가
영종이 채양에게 매우 노하자, 대신 歐陽脩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채양의 글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전해 들으신 것입니까?
臣在先朝 有僞爲臣疏請沙汰宦官者하여 欲以激怒左右하니 잇가
신이 선대의 조정에 있을 때 어떤 자가 신이 벼슬하는 자들을 가려서 쓰라고 청하는 내용의 疏를 거짓으로 지어서 좌우의 신하들을 격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과연 채양의 글을 보았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眞僞 여부를 분변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전해 들은 것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英宗 於是釋然하시고 其後하니 世降俗末 情僞日滋하니 何所不有리오
영종이 이에 노여움을 풀었습니다. 그 뒤에 元符(1098~1100) 연간의 소인 역시 거짓으로 간하는 글을 지어 鄒浩를 모함하였습니다. 世道가 떨어지고 풍속이 나빠져서 거짓이 날로 더해만 가니 속임수가 어느 곳인들 없겠습니까.
公私貿易 所憑者 契券이로되 而巧詐者 能爲之하니 況讒人之工於讒者乎 故因愍懷之事하여 倂著之하여
公私의 거래에 근거로 삼는 것은 계약 문건이지만 교묘하게 속이는 자가 능히 이를 만드니, 더구나 참소하는 자가 참소에 뛰어난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愍懷太子의 일을 계기로 함께 수록함으로써,
以見臣子 遇讒 雖有可驗如手書者라도 猶難遽信이라 要必審而覈之 不然이면 將有不獲自明 如愍懷者니이다
蔡襄蔡襄
신하가 참소를 당했을 때 비록 직접 쓴 글과 같이 징험할 만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대번에 믿기는 어려우니 요컨대 반드시 자세히 살펴서 조사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도 민회태자처럼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임을 보입니다.
역주
역주1 : 사고본에는 ‘他’로 되어 있다.
역주2 卒寃以死 : 愍懷太子가 賈皇后의 모함으로 폐위되기 전에 당시 불렸던 洛陽의 동요 중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남풍이 불어와서 백사를 날리도다. 멀리 노국을 바라보니 높은 산 근심스러워라. 천 년의 해골에 치아가 생기도다.[南風起兮吹白沙 遙望魯國鬱嵯峨 千歲髑髏生齒牙]” ‘南風’은 가황후의 이름이며, ‘白沙’는 민회태자를 비유하는데 민회태자의 어렸을 적 字가 ‘沙門’이다. 《晉書 卷53 愍懷太子列傳》
역주3 本朝……夏竦 : ‘聖德詩’는 宋 仁宗 慶曆 3년(1043)에 國子監直講 石介가 지은 〈慶曆聖德頌〉을 이른다. 〈慶曆聖德詩〉라고도 한다. 모두 960자이다. 석개의 문집인 《徂徠集》에는 실려 있지 않고 《宋文鑑》 권74, 《古今事文類聚別集》 권8 〈文章部 頌 慶曆聖德頌〉 등에 수록되어 있다. 경력 3년에 晏殊를 同平章事 兼 樞密使에, 韓琦와 富弼을 樞密副使에, 杜衍을 樞密使에, 范仲淹을 參知政事에 임명하고, 夏竦을 동년 3월에 樞密使에 임명하였다가 하송이 동년 4월에 경사에 왔을 때 諫官 歐陽脩의 간언을 받아들여 하송을 파직하고 本鎭으로 돌려보내자, 석개가 이 시를 지어 신하들을 노래한 것이다. 그 가운데 “오직 범중엄과 부필이 기이며 설이라오.[維仲淹弼 一夔一契]”, “뭇 현자들 등용함은 띠풀처럼 한꺼번에 발탁한 것이요, 큰 奸人을 제거함은 며느리발톱을 뽑아버린 듯 가차 없도다.[衆賢之進 如茅斯拔 大奸之去 如距斯脫]”라는 구절이 있는데, 석개가 범중엄과 부필 등은 賢臣으로 찬미하고 하송은 姦臣으로 기롱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하송은 석개에 대해 원한을 갖게 되었다. 夔(기)는 舜임금 때의 樂官이며 契(설)은 堯임금 때의 司徒로, 여기에서는 모두 賢臣을 비유한다. 夏竦(985~1051)은 송나라 江州 德安 사람이다. 眞宗 景德 4년(1007)에 賢良方正科로 발탁되었으며, 이후 知制誥, 樞密副使, 參知政事, 樞密使 등을 역임하였다. 재능이 있었으나 권모술수에 능하고 탐욕스러웠다. 저서에 《文莊集》, 《古文四聲韻》이 있다. 시호는 文莊이다.
역주4 石介 : 1005~1045. 북송 초기의 사상가이자 理學의 선구자이다. 자는 守道이며 兗州 奉符 사람이다. 일찍이 泰山書院과 徂徠書院을 설립하고 《易》과 《春秋》를 가르쳐서 徂徠先生으로 불린다. 泰山學派의 창시자이며 정자와 주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宋 仁宗 慶曆 연간에 太子中允으로 발탁되었다. 宋 仁宗 경력 5년(1045)에 붕당을 지었다는 무고를 받아 濮州通判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病死하였다. 道統과 文統의 합일설을 주장하고 老佛과 騈文을 반대하였다. 《徂徠集》이 있다.
역주5 富弼 : 1004~1083. 북송의 명재상이다. 자는 彦國이며 洛陽 사람이다. 경력 3년(1043)에 樞密使가 되어 范仲淹 등과 함께 慶曆新政을 시행하였다. 인종 至和 2년(1055)에는 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神宗 때 王安石의 變法에 반대하다 判亳州로 쫓겨났으나 靑苗法을 시행하지 않아 탄핵당하였다. 洛陽에 물러나 살면서도 계속해서 新法 폐지를 청하였다. 《富鄭公詩集》이 있다. 시호는 文忠이다.
역주6 竦怨……免乎 : 宋 仁宗 慶曆 4년(1044)의 일이다. 石介는 이전에 富弼에게 ‘伊尹과 周公의 일을 행하라[行伊周之事]’는 내용의 글을 보낸 적이 있는데, 夏竦이 이를 위조하여 ‘伊周’를 ‘伊霍’으로 고쳐 ‘伊尹과 霍光의 일을 행하라.’는 내용으로 만들고, 또 석개가 부필을 위하여 황제의 폐립을 논하는 초안을 위조하여 范仲淹을 위시한 개혁파가 仁宗을 폐하고 새로운 군주를 세우자고 논의하는 것과 같이 만들었다. 仁宗은 이를 믿지는 않았으나, 범중엄과 부필은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두려워하여 자발적으로 외직을 청하여 나가 범중엄은 동년 6월에 陝西‧河東宣撫使로, 부필은 동년 8월에 河北宣撫使로 나갔다. 범중엄과 부필이 모두 외직으로 나가자 석개 역시 濮州通判으로 나갔으나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이듬해 3월에는 韓琦가 상소하여 부필을 변호하다가 揚州로 폄적되었다. 그리하여 주요 개혁파 인사들이 모두 외직으로 나가면서 慶曆新政 역시 중지되었다. 伊尹은 商나라 湯王을 보필했던 대신으로, 탕왕 사후에 太甲이 즉위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자 桐으로 放逐하였다가 3년 만에 태갑이 뉘우치자 다시 태갑을 맞이하여 복위시켰다. 霍光(?~기원전 68)은 漢 武帝 때 국정을 담당하였던 대신으로, 昭帝 사후에 昌邑王 劉賀를 옹립했으나 유하가 국정을 황폐하게 하자 곧바로 폐위시키고 宣帝(기원전 91~기원전 49)를 옹립하였다. 《續資治通鑑長編 卷150 仁宗 慶曆 4年》
역주7 三司使 : 관직명이다. 唐代의 判戶部, 判度支, 鹽鐵使를 三司로 삼은 것을 五代 이후 後唐 明宗 때 하나의 관직으로 통합되어 ‘삼사사’라고 칭하였다. 송나라에서는 이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국가 최고의 재정 담당관으로 삼았다. 中書門下, 樞密院과 함께 각각 재정, 정사, 군사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執政에 다음가는 지위를 가져서 計相이라고 불렀다.
역주8 蔡襄 : 1012~1067. 북송의 저명한 서법가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君謨이며 興化軍 仙遊 사람이다. 宋 仁宗 天聖 8년(1030)에 進士가 되고, 館閣校勘, 知諫院, 直史館, 知制誥, 龍圖閣直學士, 樞密院直學士, 翰林學士, 三司使, 端明殿學士, 福建路轉運使, 知泉州, 知福州 등을 역임하였다. 泉州知府로 있을 때 泉州灣을 가로지르는 萬安橋를 건설하였다. 이 다리는 泉州洛陽橋라고도 부르는데,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해양 다리이다. 서법에도 뛰어나 宋四家 중 한 사람이다. 저술에 《茶錄》‧《荔枝譜》‧《蔡忠惠集》이 있다. 시호는 忠惠이다.
역주9 仁宗選上爲皇嗣 : 宋나라 제5대 임금 英宗(1032~1067, 재위 1063~1067)은 제2대 임금 太宗의 증손자이자 濮王 趙允讓의 13번째 아들이다. 제4대 임금 仁宗이 후사가 없어 4세인 趙曙(영종)를 양자로 들여서 嘉祐 7년(1062)에 황태자에 책립하고 이듬해에 죽자,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역주10 襄嘗沮之也 : 蔡襄의 本傳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英宗이 병이 나서 황태후가 聽政한 적이 있었다. 이때 채양이 보좌하는 신하들에게 “선황제께서 이미 황자를 정하여 세우셨는데, 환관들이 다시 선황제를 현혹시키고 이름 있는 근신들 역시 이와 같아서 대사가 거의 어그러질 뻔하였다. 최근에 그들의 상주문을 벌써 불태웠다.[先帝旣立皇子 宦妾更加熒惑 而近臣知名者亦然 幾敗大事 近已焚其章矣]”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양이 영종의 승계에 대해 의론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자 영종이 전해 듣고 채양을 의심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를 가리켜 말한 듯하다. 《宋史 卷320 蔡襄列傳》
역주11 陛下嘗見……聞乎 : 구양수의 〈辯蔡襄異議〉에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12 元符……鄒浩 : ‘元符’는 宋 哲宗 때 사용한 세 번째 연호로, 1098~1100년이다. ‘元符小人’은 북송 때의 간신인 蔡京(1047~1126)을 이른다. 鄒浩(1060~1111)는 북송 때의 관리이다. 자는 志完, 호는 道鄕居士이며, 常州 晉陵 사람이다. 宋 神宗 元豐 5년(1082)에 進士가 되었고, 呂公著‧范純仁이 군수로 있을 때 모두 예우하였다. 哲宗 때 右正言이 되어 賢妃 劉氏를 황후로 책립하는 것을 간하였다가 削官되어 新州에 구금되었다. 1100년에 徽宗이 즉위하자 復官되어 다시 우정언이 되고, 이어 左司諫, 起居舍人, 中書舍人, 兵部侍郞, 吏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劉皇后를 책립했던 일에 연루되어 永州 등지로 폄적되었으며, 휘종 崇寧 5년(1106)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술에 《論語解義》, 《孟子解義》, 《道鄕集》 40권이 있다. 시호는 忠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건은, 휘종 때 평소 추호를 미워했던 채경이 자신의 당여를 시켜 유황후가 卓氏를 죽이고 그 아들을 빼앗았다는 내용의 거짓 상소를 지어서 추호의 상소로 만든 것을 이른다. 이 일로 추호는 衡州別駕로 폄적되고 다시 昭州로 유배되었다가 5년 뒤에나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다. 《宋史 卷345 鄒浩列傳》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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