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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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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宗元和中 平蔡하고 還知政事러니 以言財利幸하여
16-9-가
唐 憲宗 元和 연간(806~820)에 裴度가 蔡州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와 정사를 맡았는데 程异와 皇甫鎛이 재물과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 총애를 받아 갑자기 재상 자리를 얻었다.
三上書極論不可한대 不納하시니 纖人 始得乘罅하다
배도가 세 번 上書하여 그 불가함을 극론하였는데, 헌종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소인배가 비로소 그 틈을 탈 수 있게 되었다.
嘗論 臣事君 當勵善底公이니 惡夫植黨者하노라
헌종이 한번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선을 권면하여 공평함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은 저 붕당 짓는 자들을 미워한다.”
曰 君子‧小人 以類而聚 未有無徒者하니 君子之徒 同德이요 小人之徒 同惡이라 中實遠하니 在陛下 觀所行則辨이니이다
배도가 말하였다. “군자와 소인은 끼리끼리 모이므로 무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군자의 무리는 덕을 함께하고 소인의 무리는 악을 함께하므로 겉은 매우 유사하지만 속은 실로 현격합니다. 폐하께서 그들의 행동을 보면 분변하게 되실 것입니다.”
帝曰 言者 大抵若是하니 豈易辨之리오 退喜曰 上 以爲難辨則易 以爲易辨則難이니 君子‧小人 行判矣라하더니
헌종이 말하였다. “말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렇게 말하니 짐이 어찌 쉽게 분변하겠는가.” 배도가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하였다. “상께서 분변하기 어렵다고 여기시면 쉬울 것이며 상께서 분변하기 쉽다고 여기시면 어려울 것이니, 군자와 소인은 행동이 판이하다.”
已而 卒爲异‧鎛所構하여 出爲河中節度使하다
이윽고 배도가 마침내 정이와 황보박에게 무함을 당하여 河中 節度使로 나가게 되었다.
역주
역주1 16-9-가 : 《新唐書》 卷173 〈裴度傳〉에 보인다. 元和 13년(818) 봄에 裴度는 吳元濟가 일으킨 蔡州(淮西)의 난을 평정하였다. 헌종은 난이 평정되자 점점 교만하고 사치하여 戶部 侍郞 判度支 皇甫鎛과 鹽鐵轉運使 程异가 황제의 비위를 맞추어 그 비용을 댔으므로 덕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에 두 사람이 예전처럼 판탁지와 염철전운사를 맡으면서 同平章事가 되었다. 배도는 세 번이나 上書하여 그 불가함을 극론하고 자신의 인장을 바치기까지 하였으나 덕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배도는 정이와 황보박의 모함을 받아 檢校尙書右僕射 兼 門下侍郞平章事의 직함을 가진 채 河東 節度使가 되었다.
역주2 唐憲宗 : 778~820. 재위 805~820. 당나라의 황제 李純이다. 초명은 淳이며 시호는 聖神章武孝皇帝이다. 順宗의 아들로 貞元 21년(805)에 태자가 되어 그해 8월에 즉위하였다. 杜黃裳‧李吉甫 등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律令을 개혁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削藩策으로 국가 재정의 증대를 꾀하였다. 元和 10년(815)에 재상 武元衡이 암살되자 裴度를 재상으로 李愬 등을 장수로 기용하여 신속하게 淮西의 吳元濟를 討平하였다. 이로써 成德‧橫海‧幽州 등의 藩鎭들이 잇달아 귀부하였다. 元和 14년(819)에는 淄靑 12州를 수복하여 元和中興을 이룩하였다. 만년에는 불로장생을 추구하여 方士를 맹신하고 金丹을 복용하여 조급증에 빠져 죄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환관 陳弘志 등에게 謀殺당하였다.
역주3 : 대전본‧사고본에는 없다.
역주4 裴度 : 765~839. 자는 中立으로 河東 聞喜 사람이다. 德宗 貞元 5년(789)에 진사가 되어 監察御史‧起居舍人 등을 지냈으며, 憲宗이 즉위한 뒤에는 中書舍人‧御史中丞 등을 거쳐 元和 10년(815)에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후 蔡州를 공격하여, 반란을 일으킨 吳元濟를 사로잡는 공을 세워 金紫光祿大夫‧弘文館大學士가 더해졌으며 上柱國에 오르고 晉國公에 봉해졌다. 穆宗 때에는 李逢吉의 배척을 받아 山南西道 節度使로 쫓겨났다가 敬宗 寶曆 2년(826)에 경종을 시해한 환관 劉克明을 주멸하고 文宗을 옹립하는 데 협력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뒤에 牛僧孺 등의 시기를 받아 山南東道 節度觀察使‧臨漢監牧使 등으로 나갔다가 開成 4년(839)에 中書令이 되었다. 재상으로 있을 때에는 藩鎭 철폐를 주장했으며, 벼슬에서 물러나 洛陽에 있을 때에는 綠野堂을 짓고 白樂天‧劉禹錫 등과 함께 詩文을 수창하였다. 시호는 文忠이다.
역주5 程异 : ?~819. 자는 師擧로 京兆 長安 사람이다. 德宗 때 鹽鐵轉運使를 지냈으며 王叔文과 함께 개혁에 참여했다가 개혁이 실패하면서 郴(침)州 司馬로 폄적되었다. 憲宗이 즉위한 후 鹽鐵使 李巽의 추천으로 淮南等五道兩稅使가 되었으며 후에 鹽鐵轉運副使를 겸하였다. 당시 李希烈의 반란을 평정하느라 나라의 재정이 바닥나자, 南方 각지에 남아도는 재정을 조정으로 바치게 하여 국고가 풍족해졌다. 元和 13년(818)에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는데, 錢穀을 담당하는 관리 출신이라 재상에 걸맞지 않다는 비판을 듣자 재상직을 수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북 변경의 軍政이 문란하자 巡邊使를 두자는 건의를 하면서 재상에서 물러나 외직으로 보임되기를 자청하였는데 詔令이 내려지기 전에 사망하였다. 성품이 청렴하여 죽을 때 집에 가산이 없어 남들의 칭찬을 받았다. 시호는 恭이다.
역주6 皇甫鎛 : ?~?. 涇州 臨涇 사람으로 일설에는 安定 朝那 사람이라고도 한다. 德宗 때 進士가 되어 監察御史‧吏部 員外郞‧司農卿‧戶部 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憲宗이 蔡州를 토벌하려고 할 때 財用이 급히 필요해지자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관원들의 녹봉을 삭감하여 군비를 댄 공으로 御史大夫가 되었다. 元和 13년(818)에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으면서도 度支를 담당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장사치를 재상으로 앉혔다며 비판하였다. 정치적으로는 李逢吉‧令狐楚와 함께 裴度를 배척하였으며, 인심을 잃는 대신 황제의 환심을 얻고자 方士와 승려를 추천하고 長生藥을 수소문하였다. 憲宗이 피살된 뒤 穆宗이 즉위하자 崖州로 폄적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역주7 俄得……乘罅帝 : 대전본‧사고본에는 없다.
역주8 甚類 : 대전본‧사고본에는 ‘似’ 1자로 되어 있다. 통행본 《신당서》에는 ‘甚類’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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