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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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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屬侍中 太子太傅 少傅 皆受宣帝遺詔하여 輔政이러니
18-8-가
당시 외척이었던 侍中 史高와 太子太傅 蕭望之와 太子少傅 周堪이 모두 宣帝의 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였는데,
望之‧堪 以師傅舊恩으로 數宴見하여 言治亂‧陳王事하더니
소망지와 주감이 사부라는 옛 은혜로 元帝가 한가히 거처할 때면 자주 알현하여 국가의 治亂과 王者의 일에 대해 진언하곤 하였다.
望之 宗室明經有行‧諫大夫하여 爲給事中注+漢制, . 朝臣此, 則入朝內朝, 故曰給事中, .하여 與侍中金敞으로 竝拾遺左右注+.하여
소망지가 건의하여 종실로서 경학에 정통하고 훌륭한 행실이 있는 散騎‧諫大夫인 劉更生을 給事中에 임명하여注+‘給事中’은 漢나라 제도에 加官이었다. 朝臣이 이 관직에 임명되면 內朝에 들어가 조현하기 때문에 ‘급사중’이라고 한 것이며 지금의 두 省官에 비견되는 것은 아니다. 侍中 金敞과 더불어 임금의 좌우에서 그 언행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이를 수습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注+‘拾遺’는 임금이 언행에 혹여 놓치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이를 수습하여 바로잡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후세에는 이를 간관의 명칭으로 삼았다.
四人同心謀議하여 勸導上以古誼하여匡正하니 甚鄕納之하시니
소망지‧주감‧유갱생‧김창 네 사람이 한마음으로 모의하여 원제에게 古誼를 들어 권하고 인도하여 바로잡고자 하는 바가 많았는데, 원제가 매우 믿고 이 의견들을 가납하였다.
史高 充位而已注+言但備位, 無所建明. 由此 與望之有隙하더니 石顯 與高相表裏하여 常獨持故事하고 不從望之等하더라
史高는 자리만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注+단지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 의견을 낸 바가 없는 것을 말한다. 이로 이해 소망지와 틈이 생겼는데, 石顯이 또 사고와 표리가 되어 늘 혼자서만 前例에 따를 것을 주장하고 소망지 등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역주
역주1 18-8-가 : 《資治通鑑》 卷28 〈漢紀20 元帝 上〉 初元 2년(기원전 47) 1월 조에 보인다.
역주2 史高 : ?~기원전 42. 漢 宣帝(기원전 91~기원전 49, 재위 기원전 74~기원전 49)의 조모 史良娣의 형제인 史恭(?~기원전 117)의 장자이다. 선제 때 樂陵侯에 봉해졌다. 선제의 임종 때 蕭望之‧周堪과 함께 顧命을 받았으며 大司馬‧車騎將軍으로 尙書의 일을 관장하였다. 기원전 43년에 致仕하고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安이다.
역주3 蕭望之 : ?~기원전 47. 漢나라의 건국 공신인 蕭何의 6세손이다. 漢 元帝(기원전 74~기원전 33, 재위 기원전 49~기원전 33)가 태자였을 때 太子太傅가 되어 유가의 경전을 가르쳤다. 宣帝 甘露 3년(기원전 51)에 長安 未央宮 북쪽에 있는 황실 도서관인 石渠閣에서 선제의 조령에 따라 여러 儒者들과 함께 五經의 同異를 논하였는데, 이때의 논의가 《石渠議奏》이다. 左馮翊, 大鴻臚, 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기원전 49년 12월에 元帝가 즉위한 뒤 매우 중시받았으나, 뒤에 환관인 弘恭과 石顯 등의 무고를 받고 하옥되자 자살하였다.
역주4 周堪 : ?~기원전 40. 夏侯勝에게 《今文尙書》를 전수받았다. 漢 宣帝 때 石渠閣 회의에 참석하고 太子少傅를 역임하였다. 宣帝의 임종 때 顧命을 받고 元帝가 즉위한 뒤 논의를 관장하는 光祿大夫가 되었다. 일찍이 會稽郡의 鄭朋과 大司農史 李宮이 金馬門에서 待詔하였는데, 鄭朋의 행실이 바르지 않다 하여 이궁만을 黃門郞으로 추천한 일로 인해 정붕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정붕은 환관인 홍공‧석현과 결탁하고 元帝에게 글을 올려 주감이 劉更生‧蕭望之 등과 붕당을 짓고 권력을 전횡한다고 무고하여 廢庶人이 되었으나, 기원전 47년에 소망지가 홍공 등의 무고를 받고 자살하자 원제에 의해 다시 光祿勳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된 홍공 등의 참소를 받고 河東 太守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논의를 관장하는 光祿大夫에 임명되었다. 말을 못하는 병을 앓는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다. 《資治通鑑 卷29 漢紀21 元帝 下 永光 4年》
역주5 建白 : 대전본에는 ‘選白’, 사고본에는 ‘白選’으로 되어 있다.
역주6 散騎 : 加官名이다. 황제의 거마를 隨從하였다. ‘加官’은 아래 ‘給事中爲加官’ 주 참조.
역주7 劉更生 : ?~기원전 6. 뒤에 劉向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子政이다. 漢나라의 종실로서 漢 高帝 劉邦의 異母弟인 劉交의 후손이다. 經學家, 目錄學家, 文學家로 유명하다. 漢 宣帝 때 諫大夫가 되었으며 元帝 때에는 宗正을 역임하였다. 환관인 홍공과 석현을 반대하여 감옥에 갇히고 庶人이 되기도 하였다. 뒤에 成帝가 즉위한 뒤 다시 임용되어 光祿大夫가 되었고 이때 유향으로 개명하였다. 일찍이 성제의 명을 받고 궁중 도서관의 도서들을 교감하여 중국 최초의 도서 목록인 《別錄》을 지었다. 저서로 《新序》‧《說苑》‧《列女傳》‧《戰國策》 등이 전한다.
역주8 給事中爲加官 : ‘給事中’은 秦代에 처음 설치한 加官이다. 漢나라에서 이를 계승하여 大夫‧博士‧議郞 등의 관직에 加官으로 사용하였다. 급사중의 가관을 가진 관원은 正職의 고하에 상관없이 모두 황제의 고문 역할을 하여 매일 조회에 참여하였다. ‘加官’은 본래의 관직 외에 더하는 겸직으로, 일종의 虛銜이다. 《漢書》 卷19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侍中, 左曹, 右曹, 諸吏, 散騎, 中常侍 등이 모두 가관이다.
역주9 : 대전본‧사고본에는 ‘如’로 되어 있다.
역주10 非今兩省官比也 : ‘今’은 宋나라를 가리킨다. ‘兩省’은 中書省과 門下省을 가리킨다. 송나라는 당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給事中의 관직을 두어 문하성에 소속시켰는데, 이때 급사중은 실직이 아닌 官階名으로서 寄祿官이었다. 당나라의 급사중은 크게 세 가지의 권한이 있었다. 첫째는 황제의 詔勅에 반박하고 돌려보낼 수 있는 封駁權, 둘째는 부분적인 사법권, 셋째는 인사 임명에 대한 심리권이다. 송나라 때에는 神宗 元豐(1078~1085) 연간에 문하성에 급사중 4명을 두어 六房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정사의 잘못이나 인사 임명에 대해 상주하고 바로잡는 일을 담당하였다.
역주11 拾遺……之名 : ‘拾遺’는 唐 武則天 垂拱 원년(685)에 관직으로 설치하여, 좌습유는 門下省에, 우습유는 中書省에 소속시켜 간언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大事는 조정에서 의론하고 小事는 封事를 올렸다.
역주12 所欲 : 대전본에는 ‘欲所’로 되어 있다.
역주13 : 사고본에는 ‘又’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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