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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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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8-14-나(按)
[臣按] 賈誼는 “황제가 태학에 들어가 스승을 받들어 治國의 道를 물으면 덕과 지혜가 자라나 治國의 도를 알게 된다.”라고 하였고,
董仲舒 역시 “학문에 힘쓰면 견문이 넓어져서 지혜가 더욱 밝아진다.”라고 하였습니다.
夫使人主 德日長而智日明 天下國家之福而臣子之大願也
군주로 하여금 덕이 날로 자라나고 지혜가 날로 밝아지도록 하는 것은 바로 천하와 국가의 복이며 신하의 큰 바람입니다.
故忠臣之心 惟欲其君之務學하나니 是也 姦臣之心 惟恐其君之好學하나니 張布之沮吳主 是也
그러므로 충신의 마음은 오직 자신의 임금이 학문에 힘쓰기를 바라는 법이니 傅說이 高宗에게 학문을 권한 것이 바로 이것이며, 간신의 마음은 오직 자신의 임금이 학문을 좋아할까 두려워하는 법이니 張布가 吳主 孫休의 강론을 저지한 것이 이것입니다.
原注
或見 敎其徒하여 毋使人主 親近儒生하고 則以爲此術 自士良始注+.而不知三國之世 已有如張布者矣
어떤 사람은 仇士良이 자신의 무리에게 군주로 하여금 유생을 친근히 하지 못하도록 가르친 것을 보고 이러한 술책이 구사량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注+仇士良의 일은 뒤에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이미 장포와 같은 자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으니,
憸邪用心不謀而合 大抵 後之姦臣 又有反其機而用之者하여
그 간악하게 마음을 쓴 것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합치한 것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간신들 중에는 또 그 기회를 반대로 이용하는 자도 생겨나서,
雖設而所引 多巧佞之徒 儒臣 雖接而所陳 多蔽蒙之說이라 與布異術而心則同하니 人主 皆不可以不察也니이다
경연을 비록 열었더라도 여기에 부른 사람은 대부분 교묘한 말재주로 아첨하는 무리였고, 儒臣을 비록 접견하였더라도 이들이 진달한 것은 대부분 군주의 이목을 가리는 말들이었습니다. 장포와 방법은 달랐으나 마음 씀씀이는 같았으니, 군주가 모두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주
역주1 賈誼……道得 : 賈誼(기원전 200~기원전 168)는 漢代의 저명한 政論家이자 문학가이다. 漢 文帝 때 博士, 太中大夫가 되었는데, 대신 周勃과 灌嬰의 배척을 받아 長沙王 太傅로 좌천되었다. 이 때문에 賈長沙 또는 賈太傅라고도 칭한다. 3년 뒤에 長安으로 돌아와 梁懷王의 太傅가 되었으나 양회왕이 낙마하여 죽자 이를 몹시 자책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過秦論〉‧〈吊屈原賦〉‧〈鵩鳥賦〉 등이 있다. 본문의 내용은 가의가 문제에게 정사를 논하고 새로운 제도를 건립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에 보이는 것으로, 앞뒤 글은 다음과 같다. “《學禮》에 이르기를 ‘황제가 東學에 들어가 親者를 높이고 仁을 귀히 여기면 親疏에 차례가 있게 되어 은혜가 고루 펴지게 되며, 황제가 南學에 들어가 연장자를 높이고 信을 귀히 여기면 長幼에 차별이 있게 되어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게 되며, 황제가 西學에 들어가 賢者를 높이고 덕을 귀히 여기면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지위에 있게 되어 공을 세운 자들이 누락되지 않게 되며, 황제가 北學에 들어가 지위가 높은 이들을 높이고 작위를 존중하면 貴賤에 차등이 있게 되어 아랫사람들이 분수를 넘지 않게 되며, 황제가 太學에 들어가 스승을 받들어 治國의 道를 묻고 물러가 익힌 뒤 太傅에게 시험을 보아 태부가 법도에 맞지 않는 것에 벌을 내리고 그 미치지 못한 부분을 바로잡아주면 덕과 지혜가 자라고 치국의 도도 알게 됩니다. 이 다섯 가지 학문이 위에서 이루어지고 나면 백관과 백성들이 아래에서 감화되어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學禮曰 帝入東學 上親而貴仁 則親疏有序而恩相及矣 帝入南學 上齒而貴信 則長幼有差而民不誣矣 帝入西學 上賢而貴德 則聖智在位而功不遺矣 帝入北學 上貴而尊爵 則貴賤有等而下不隃矣 帝入太學 承師問道 退習而考於太傅 太傅罰其不則而匡其不及 則德智長而治道得矣 此五學者旣成於上 則百姓黎民化輯於下矣]” 《漢書 卷48 賈誼傳》
역주2 董仲……益明 : 董仲舒(기원전 179~기원전 104)는 漢代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젊어서 《춘추》를 공부하였으며 漢 景帝 때 박사가 되었다. 武帝 建元 원년(기원전 140)에 江都易王 劉非(기원전 168~기원전 128)의 國相에 임명되었으며 元朔 5년(기원전 124)에 膠西王 劉端(기원전 165~기원전 107)의 國相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가 저서에 몰두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본문의 내용은 漢 武帝가 즉위한 뒤 賢良으로 천거된 동중서가 무제의 策問에 대답한 글 중에 보이는 것으로, 앞뒤의 글은 다음과 같다. “학문에 힘쓰면 견문이 넓어져서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힘써 도를 행하면 덕이 날로 높아져서 크게 공을 이루게 되니, 이것은 모두 즉시 이르게 할 수 있으며 곧바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彊勉學問 則聞見博而知益明 彊勉行道 則德日起而大有功 此皆可使還至而立有效者也]” 《漢書 卷56 董仲舒傳》
역주3 傅說之告高宗 : 傅說(?~?)은 商나라 때의 저명한 賢臣이다. 지금의 산서성 平陸의 虞나라 사람으로, 傅巖이라는 들에서 성을 쌓는 일을 했는데, 商 高宗이 꿈에서 그를 보고 그림을 그려 찾아서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傅說之告高宗’은 부열이 고종에게 학문을 논한 《서경》 〈說命 下〉의 “왕이시여! 사람을 견문이 많은 자를 구하는 것은 이 일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옛 가르침을 배워야 얻음이 있을 것이니, 일을 옛것을 본받지 않고서 능히 장구하게 하는 것은 제가 들은 바가 아닙니다.[王 人求多聞 時惟建事 學于古訓 乃有獲 事不師古 以克永世 匪說攸聞]” 이하의 내용을 가리킨다.
역주4 仇士良 : 781~843. 唐나라 때의 환관이다. 順宗 때 환관으로 훗날의 憲宗인 태자를 섬겼다. 헌종이 즉위(805)한 뒤 內給事가 되었으며 이후 조정의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文宗 大和 9년(835)에 甘露之變을 일으켜 李訓‧王涯‧賈餗‧舒元輿 등 네 재상을 죽였는데, 이 변란은 문종이 환관들에게 빼앗긴 황권을 되찾고자 환관의 우두머리인 구사량을 左金吾廳 후원의 석류나무에 甘露의 길조가 있는지 확인하라는 핑계로 이곳에 불러서 죽이려다가 장막이 바람에 날리는 바람에 매복 군사가 발각되어 도리어 환관들에 의해 조정의 중신들과 1천여 명이 연루되어 죽은 사건이다. 구사량은 이를 계기로 더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楚國公에 봉해졌다. 840년에 문종이 죽자 武宗을 옹립하면서 태자였던 陳王 李成美와 문종의 아우였던 安王 李溶, 문종의 후궁인 楊賢妃를 죽였다. 병으로 사직한 뒤 얼마 안 되어 죽었으며 사후에 楊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
역주5 士良事見後 : 자세한 내용이 20-15-가에 보인다.
역주6 : 사고본에는 ‘如’로 되어 있다.
역주7 : 사고본에는 ‘若’으로 되어 있다.
역주8 : 사고본에는 ‘幃’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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