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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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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太子 善書하고 俱出入東宮하여 娛侍太子러니
20-4-가
順宗이 태자였을 때 翰林待詔 王伾는 글씨를 잘 쓰고 王叔文은 바둑을 잘 두어서 모두 동궁에 드나들며 태자를 모시고 즐겁게 하였다.
叔文 譎詭多計하여 自言讀書知治道라하니 遂大愛幸하여 與王伾 相依附러라
왕숙문이 속임수에 능하고 꾀가 많아 스스로 말하기를 책을 읽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안다고 하자, 순종은 마침내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그리하여 왕숙문은 왕비와 서로 의지하였다.
하사 常深居施簾帷하시고 獨宦官李忠言‧昭容牛氏 侍左右하여 百官奏事 自帷中러니
順宗은 즉위한 뒤에 병이 있어 늘 궁궐 깊숙이 거처하며 발이나 휘장을 드리우고 오직 환관 李忠言과 昭容 牛氏만이 좌우에서 시봉하여 백관이 上奏한 일을 휘장 안에서 그 상주를 재가하였다.
하니 大抵計事 叔文 依伾하고 依李忠言하고 忠言 依牛昭容하여 轉相交結이라
순종이 王丕를 左散騎常侍에 임명하고 王叔文을 起居舍人에 임명하니, 대체로 일을 계획할 때 왕숙문은 왕비를 따르고 왕비는 이충언을 따랐으며 이충언은 우소용을 따라서 돌아가며 서로 결탁하였다.
每事 先下翰林하여 使叔文可否然後 宣於中書어든 承而行之注+執誼以黨伾等得宰相.하고
順宗이 매사를 먼저 翰林院에 내려 王叔文으로 하여금 可否를 결정하게 한 후에 中書省에 선포하면 韋執誼가 이를 받들어 행하였다.注+韋執誼는 王丕 등과 붕당을 지음으로써 재상이 되었다.
外黨則韓泰‧柳宗元‧劉禹錫等 主采聽外事하여 謀議唱和하여 日夜 汲汲如狂하여
그리고 外廷의 黨與로는 韓泰‧柳宗元‧劉禹錫 등이 주도적으로 조정의 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함께 모의하고 맞장구치며 밤낮으로 미친 사람처럼 다급히 서둘렀다.
互相推獎하여 曰伊‧曰周‧曰管‧曰葛이라하고 僴然自得하여 謂天下無人이라하여
서로 추켜세우고 칭찬하여 ‘伊尹이네’, ‘周公이네’, ‘管仲이네’, ‘諸葛亮이네’라고 칭하여 뻐기고 의기양양해하며 천하에 인재가 없다고 말하였다.
榮辱進退 生於造次하여 惟其所欲이요 不拘程式하니 士大夫 畏之하고 道路 以目하더라
그리하여 褒貶과 黜陟이 순간의 결정에서 나와 오직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규정에 구애받지 않으니, 사대부들이 두려워하고 길 가는 사람들은 눈짓만 할 뿐 〈말을 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20-4-가 : 《資治通鑑》 권236 〈唐紀52 德宗11〉 貞元 19년(803) 6월, 〈唐紀52 順宗〉 永貞 원년(805) 1월‧2월 조에 보인다.
역주2 順宗 : 761~806. 재위 805.1~805.8. 당나라 武則天을 포함하면 제11대 임금이다. 휘는 誦이며 시호는 至德大聖大安孝皇帝이다. 제10대 임금 德宗 李适(742~805, 재위 779~805)의 장자로, 779년에 태자에 책립되어 805년에 덕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태자로 있었다. 즉위한 지 8개월 만인 805년 8월에 태자 李純(778~820)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역주3 翰林待詔 : 唐 玄宗(685~762, 재위 712~756) 초기에 설치한 관직명으로, 表文이나 상소에 대한 비답과 文詞의 일을 관장하였다. ‘翰林’은 翰林院이라는 관서의 이름으로, 文翰의 숲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開元(713~741) 초에 內廷에 처음 설치하여 각종 예능과 기술을 내정에 供奉하는 곳으로 삼았으며, 이런 직책을 맡은 사람을 ‘待詔’라고 불렀다.
역주4 王伾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당나라 德宗‧順宗 때의 관리로, 지금의 절강성 杭州 사람이다. 덕종 말년에 翰林待詔로 동궁에 출입하여 태자, 즉 훗날의 順宗의 신임을 얻었다. 순종이 즉위한 뒤 左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王叔文의 개혁 정치를 지지하고 궁궐에 출입하면서 환관 李忠言과 교유하였다. 憲宗(778~820, 재위 805~820)이 즉위한 뒤 왕숙문의 개혁 실패와 함께 지금의 사천성 開縣인 開州의 司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病死하였다. 《舊唐書》 권135와 《新唐書》 권168에 列傳이 있다.
역주5 王叔文 : 753~806. 당나라의 정치가로 지금의 절강성 紹興인 越州 山陰縣 사람이다. 바둑을 잘 두었으며, 唐 德宗 때 태자, 즉 훗날의 順宗의 侍讀이 되어 늘 백성들의 疾苦를 말하여 총애를 받았다. 태자, 즉 順宗이 즉위한 뒤 翰林待詔 兼度支使鹽鐵轉運使에 임명되어 王伾‧劉禹錫‧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황제를 위하여 사냥용 매와 개를 기르던 五坊과 환관이 장악한 宮市를 혁파하여 ‘시장에서 환호하고[市裏歡呼]’ ‘민심이 크게 기뻐하였다[人情大悅]’고 한다. 이를 ‘永貞革新’이라고 한다. 805년 憲宗이 즉위한 뒤 渝州司戶參軍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賜死되었다. 개혁을 함께 추진했던 王伾 역시 開州司馬로 좌천되어 얼마 뒤 病死하고 韓泰‧陳諫‧柳宗元‧劉禹錫‧韓曄‧淩准‧程異‧韋執誼 등 8명도 변방의 州司馬로 좌천되어 史書에서는 이들을 ‘二王八司馬’로 칭한다.
역주6 : 대전본‧사고본에는 ‘棊’로 되어 있다.
역주7 帝卽……其奏 : 《자치통감》에는 順宗 永貞 원년(805) 1월 조에 보인다.
역주8 有疾 :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順宗은 병으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역주9 可其 : 대전본에는 2자가 雙行小字로 되어 있다.
역주10 以伾……舍人 : 順宗 永貞 원년 2월 22일 壬戌日의 일이다.
역주11 韋執誼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당나라의 재상으로, 지금의 陝西省 西安인 京兆 사람이다. 초창기에 右拾遺, 翰林學士, 南宮郞, 吏部郞中 등을 역임하였다. 順宗 때 王叔文과 교분을 맺어 왕숙문의 추천으로 재상이 되어 尙書右丞‧同平章事, 中書侍郞‧同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왕숙문을 도와 永貞革新을 추진하였으나 憲宗이 즉위한 뒤 왕숙문이 실각하면서 위집의 역시 崖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영정혁신’은 위 ‘王叔文’ 주석 참조.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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