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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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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2-5-나(按)
按 君臣‧父子以至朋友之交此五者 天下共由之路 故曰達道 知‧仁‧勇三者 人所同得也 故曰達德이라
原注
道雖人之所共由足以及之則君之當仁 臣之當敬 子之當孝 父之當慈 未必不昧其所以然이요
知雖及之而仁不能守하며 仁雖能守而勇不能斷則於當行之理 或奪於私欲하며 或蔽於利害하여
以至蔑天常而敗人紀者 多矣 故曰所以行之이니라
原注
德雖人所同得이나 然或勉强焉하며 或矯飾焉則知出於數術하며 仁流於姑息하며 勇過於彊暴而德非其德矣
故行之必本於誠이니 一者 誠也 三者 皆眞實而無妄 是之謂誠이니
德至於誠則以之爲君 必盡君道하며 以之爲臣 必盡臣道하며 處夫婦‧昆弟‧朋友之間 無不盡其道者
하니 以私欲 蔽其知也 하니 以讒賊 害其仁也
然則人君之於三德 其可使有一之闕哉 其可有一之不出於誠哉잇가
以上皆言誠이라


原注
12-5-나(按)
[臣按] 군신‧부자부터 붕우의 사귐에 이르기까지 이 다섯 가지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가는 길이기 때문에 ‘공통된 도[達道]’라고 한 것이며, 지혜‧어짊‧용기 이 세 가지는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통된 덕[達德]’이라고 한 것입니다.
原注
‘道’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그 지혜가 이에 못 미치면, 임금은 어질어야 한다는 것과 신하는 공경해야 한다는 것과 자식은 효도해야 한다는 것과 부모는 사랑해야 한다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둡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혜가 비록 이에 미친다 할지라도 어짊으로 이를 지키지 못하고, 어짊이 비록 이를 지킨다 할지라도 용기로 끊지 못한다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이치에 대해 사욕에 빼앗기기도 하고 이해에 가려지기도 해서
天理를 없애고 人倫을 무너뜨리는 일이 많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행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所以行之者三]’라고 말한 것입니다.
原注
덕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억지로 노력하기도 하고 거짓으로 꾸며서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가 術數에서 발현되기도 하고, 어짊이 원칙 없는 관용으로 흐르기도 하며, 용기가 지나치게 强暴하게 되기도 하여 덕이 본래의 덕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성실함에 뿌리를 두어야 하니, ‘하나[一]’라는 것은 ‘성실함[誠]’을 말합니다. 세 가지가 모두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을 일러 ‘성실함’이라고 합니다.
덕이 성실함에 이르면 이것을 가지고 임금의 직분을 행할 때 반드시 임금의 도리를 다하게 되고, 이것을 가지고 신하의 직분을 행할 때 반드시 신하의 도리를 다하게 되며, 부부‧형제‧붕우 사이에 처했을 때 그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漢 高祖가 嬖妾에 빠져 人彘의 禍를 일으키는 빌미를 주었으니, 사욕이 그 지혜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晉 武帝가 어버이의 명을 어기고 아우에 대한 사랑을 손상시켰으니, 참소가 그 어짊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唐 太宗이 태자 李承乾을 폐하고 李治를 태자로 세울 때 하마터면 결단을 내리지 못할 뻔하였으니, 사랑이 그 용기를 잡아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이 이 세 가지 덕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라도 성실함에서 나오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상(12-1~12-5)은 모두 성실함에 대해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2 其知不 : 대전본에는 ‘其知’로, 사고본에는 ‘非知’로 되어 있다.
역주3 : 대전본‧사고본에는 없다.
역주4 : 사고본에는 이 뒤에 ‘一’이 있다.
역주5 漢高……之禍 : 漢 高祖가 戚夫人을 총애하여 태자 劉盈을 폐하고 척부인이 낳은 趙王 劉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가 呂后와 張良의 계책으로 태자를 바꾸지 못하였는데, 뒤에 고조가 죽고 惠帝 유영이 즉위하자, 呂后가 유여의는 수도로 불러들여 독살하고 척부인은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약을 써서 귀머거리에 벙어리를 만들고서 변소에 넣은 뒤 ‘인간 돼지[人彘]’라고 부른 일을 이른다. 《史記 卷9 呂后本紀》
역주6 晉武……之恩 : 晉 武帝 司馬炎(236~290)은 司馬懿의 손자이자 司馬昭(211~265)의 적장자로, 사마소가 죽은 뒤 작위를 이어받아 晉王이 되었고, 몇 달 후 魏 元帝를 압박하여 양위를 받아 晉나라를 개국하였다. 사마소는 원래 온순하고 총명한 차자 司馬攸(248~283)를 후사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사마소는 병으로 드러눕게 되자 사마염에게 漢나라 淮南王과 魏나라 陳思王의 고사를 얘기하며 울었고, 임종을 앞두고서는 사마유의 손을 잡아 사마염에게 주며 부탁하기도 하였다. 사마소 사후 사마염이 진나라를 세우자 사마유는 齊王에 봉함을 받았는데, 사마염 말년에 이르러 사마유는 비록 洛陽에 계속 머물며 侍中‧太子太傅 벼슬을 하였으나 封國의 정사를 잘 처리하여 매우 민심을 얻었으며 조정의 여론도 사마유가 후계자가 될 것을 원하였다. 그러자 사마염의 총신 荀勖과 冯紞(담) 등은 자신들을 미워하는 사마유가 후계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사마염에게 태자의 지위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마유를 참소하여 封國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사마유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울분으로 병이 나 피를 토하고 36세의 나이로 죽었다. 漢나라 淮南王의 고사는 8-9-가 참조. 魏나라 陳思王은 曹操의 셋째 아들 曹植(192~232)을 가리킨다. 형인 魏 文帝 曹丕와 조비의 아들 魏 明帝 曹叡가 황제로 있었던 12년 동안 심한 견제를 받아 여러 차례 封地가 옮겨졌다. 조비가 조식을 죽이고자 7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고 명을 내린 〈七步詩〉에 관한 일화는 유명하다. 《晉书 卷38 文六王列傳 齊獻王攸》
역주7 唐太……能決 : 唐 太宗은 貞觀 16년(642) 2월에 넷째아들 魏王 李泰가 主編한 《括地志》가 완성되자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秘閣에 보관하도록 명하고 큰 상을 내림과 동시에 태자를 넘어설 정도로 매달 많은 재물을 하사하며 총애하였다. 태자 李承乾(619~645)은 그때 마침 足疾에 걸린 데다 자신처럼 총애를 받는 이태가 자신의 지위를 넘본다는 것을 알고 폐위될 것을 두려워하여 貞觀 17년(643)에 漢王 李元昌 등과 자구책을 모의하였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廢庶人되었다. 태종은 이태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皇位를 아우인 晉王 李治(628~683)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하자 이태를 태자로 세우겠다고 허락하였으나, 褚遂良의 간언을 듣고 자신이 사랑하는 세 아들을 모두 살리기 위하여 성격이 온유한 이치를 태자로 삼고 이승건을 黔州에 유배하였다. 《新唐書 卷2 太宗本紀》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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