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元八年
에 으로 判度支
러니 明年
에 奏撿責諸州欠負錢八百餘萬緡
과 呈樣物三十餘萬緡
하여
請別置庫以掌之하니 欠負가 皆貧人이라 無可償이요 呈樣‧染練이 皆左藏正物이어늘
延齡이 徙置別庫하고 虛張名數하여 以惑上하니 上이 信之하여 以爲能富國而寵之하시니 於實無所增이요 虛費吏人簿書而已러라
又明年
에 奏 左藏庫物
이 多有失落
이러니 近因
閱使置簿書
하니 乃於糞土之中
에 得銀十三萬兩
하고 其
雜貨百萬有餘
니
此가 皆已棄之物이라 卽是羨餘니 悉應移入雜庫하여 以供別敕支用이니이다
韋少華
가 不伏
하여 抗奏稱 此
가 皆每月申奏見在之物
이니 請加推驗
하소서 上
이 不許
하시다
延齡이 每奏對에 恣爲詭譎하니 皆衆所不敢言이요 亦未嘗聞者로되 延齡이 處之不疑하더니
上
이 亦頗知其誕妄
하사대 徒以其好詆毁人
으로 冀聞外事
라 故親厚之
하시니 가 上書
하여 極陳其姦詐
하니
其略曰 延齡
이 以聚斂爲長策
하고 以詭妄爲嘉謀
하고 以掊克斂怨爲匪躬
하고 以
譖服讒爲盡節
하니
迹其姦
컨대 日長月滋
어늘 陛下
가 姑欲保持
하사 曾無
問
하시니 延齡
이 謂能蔽惑
이라하여 不復懼思
하여
移東就西하여 便爲課績하고 取此適彼하여 遂號羨餘하여 愚弄朝廷을 有同兒戱라하고
又曰 昔
에 하니 臣
은 謂鹿之與馬
는 物類猶同
이라 豈若延齡
의 掩有爲無
하며 指無爲有
리잇고
書奏
에 上
이 不悅
하여 待延齡
을 益厚
러시니 贄相
하고 又
하다
其後에 延齡이 卒하니 中外가 相賀호대 上이 獨悼惜之하더시다
24-9-가
당 덕종 정원唐 德宗 貞元 8년(792)에 사농소경 배연령司農少卿 裴延齡을 판탁지判度支로 임명하였는데, 이듬해에 배연령이 여러 주州에서 미납된 돈 8백여 만 민緡과 30여 만 민緡 어치의 진상품을 조사하여 받아내었다고 아뢰고서,
별도로 창고를 두어 이 물자를 관장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미납한 사람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상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진상품과 염색한 직물들은 모두 좌장고左藏庫에 규정상 있어야 할 재물이었다.
그런데 배연령이 이 물자를 별도의 창고로 옮기고 품목과 수량을 허위로 부풀려 덕종을 현혹시키니, 덕종이 이를 믿어 배연령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인재라고 여겨 그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증가한 것이 없었고 부질없이 관리와 장부를 허비한 것뿐이었다.
또 이듬해(794)에 배연령이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좌장고左藏庫의 재물이 장부帳簿상에 누락된 것이 많이 있었는데 근자에 조사를 통하여 장부에 등록시키게 하니, 이에 분토糞土 속에서 은 13만 냥을 찾아내었고 비단과 잡화가 백만 남짓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미 버려진 물건이니 곧 남아도는 것입니다. 모두 잡고雜庫로 옮겨 들여 별도의 칙서를 통해 집행하는 지출에 써야 할 것입니다.”
태불소경 위소화太府少卿 韋少華가 불복하여 이에 맞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달마다 폐하께 보고되어 현재 있어야 할 것들이니 더 조사하여 살펴보십시오.” 덕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배연령이 덕종을 면대하여 물음에 대답할 때마다 멋대로 허탄한 말을 하니, 그의 말은 모두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었고 또 들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으나 배연령은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덕종 또한 그의 말이 허탄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단지 배연령이 남을 헐뜯고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점을 가지고 바깥일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하고 후대하였다. 재신 육지宰臣 陸贄가 상서上書하여 그의 간사함을 극력 진달하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배연령은 가렴주구를 상책으로 여기고 허탄한 것을 묘책으로 여기며, 가렴주구로 원망을 불러 모으는 짓을 가지고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충성으로 여기고, 참언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참소를 행하는 짓을 가지고 절의節義를 다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간사함의 해악을 따져보면 날마다 자라나고 달마다 불어나는데도, 폐하께서는 우선 내버려두고자 하여 힐문한 적이 없으시니, 배연령이 폐하를 속이고 미혹시킬 수 있겠다고 여겨 더 이상 두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동쪽에 있는 것을 서쪽에 옮기고서 이내 성과로 삼고, 여기에 있는 것을 가져다 저기로 가져가서 마침내 남아도는 것이라고 하면서 조정을 우롱하기를 마치 어린애 장난처럼 하고 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옛날에 조고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사슴과 말은 사물의 종류가 그래도 같은 것이니, 어찌 있는 것을 덮어 없다고 하며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한 배연령의 소행만 하겠습니까.”
글이 상주되자 덕종이 불쾌해하면서 배연령을 대우하기를 더 후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육지를 재상에서 파면시키고 또 충주별가忠州別駕로 좌천시켰다.
그 후에 배연령이 죽자 온 나라가 서로 축하를 했는데 덕종만 유독 배연령을 애석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