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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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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8-16-나(按)
按 小人之害君子 其情狀 非一이라 當庸闇之主則顯擠之하나니 是也
18-16-나(按)
[臣按] 소인이 군자를 해치는 것은 그 情狀이 똑같지 않습니다. 용렬하고 우매한 군주를 만나면 드러내놓고 밀어내니 弘恭과 石顯이 蕭望之를 밀어낸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이고,
當材明之主則陰排之하나니 賈充之於任愷 是也 晉武 雖未得爲賢君이나 然非庸闇者比 又愷亦爲帝寵任而充 欲傾之則亦難矣
유능하고 명철한 군주를 만나면 암암리에 배척하니 賈充이 任愷를 배척한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晉 武帝는 비록 賢君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용렬하고 우매한 군주에 비견될 사람은 아니었으며 또 임개 역시 무제에게 총애를 받아 중용되고 있었으니, 가충이 임개를 넘어뜨리고자 한다면 또한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라하니 是欲奪其侍中之職하여 使不得在左右也
이 때문에 전에는 임개가 충성스럽고 곧으니 동궁을 보필하기에 적합하다고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임개의 侍中 직책을 빼앗아서 무제 가까이에 있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計旣不行이어늘 又薦之爲吏部尙書하니 之任 重矣하니 非若侍中之近密也
계책이 실패하자 또 임개를 추천하여 吏部 尙書가 되게 하였습니다. 天官의 직임이 중하기는 하나 직책이 銓衡에 있으니 시중과 같이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직책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其計 旣行 遂以事擠之而斥廢焉하니 其亦可謂巧也已로소이다
그 계책이 성공하자 마침내 일을 가지고 임개를 밀어내어 폐출시켰으니, 또한 참으로 교묘하다고 하겠습니다.
原注
옛날에 趙堯는 周昌의 御史大夫 지위를 빼앗고자 漢 高帝에게 趙王 劉如意를 위해 신분이 높고 성정이 강한 相을 택하도록 권하고 이어서 주창을 추천하였으며,
嫉董仲舒하여 欲黜之于外則言於武帝하여 使爲膠西相하니
公孫弘은 董仲舒를 질투하여 지방으로 쫓아내고자 漢 武帝에게 아뢰어 동중서를 膠西王의 相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蓋高帝‧孝武 皆明君也而周昌‧仲舒之賢 亦見知於二帝하니 使二人誣之以罪而顯擠之 未必見從이라
高帝와 武帝는 모두 현명한 군주였으며 주창과 동중서의 현명함 또한 두 황제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만일 두 사람을 죄로 무고하여 드러내놓고 밀어낸다면 황제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리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惟其陽借薦譽之名而陰施排擯之術이라 故雖二帝之明이라도 有弗察焉하니 賈充之計 所以得行於晉武也니이다
이에 겉으로는 이들을 추천하고 칭송한다는 이름을 빌리고 속으로는 이들을 배척하고 밀어내는 수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두 황제의 현명함으로도 이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충의 계책이 晉 武帝에게 통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역주
역주1 恭‧顯之於蕭望之 : 18-10-가 참조.
역주2 前稱……東宮 : 18-15-가 참조.
역주3 天官 : 吏部의 장관인 吏部 尙書를 이른다.
역주4 職在銓衡 : 吏部 尙書가 관리의 선발을 관장한 것을 이른다.
역주5 趙堯……薦昌 : 趙堯(?~?)는 前漢의 관리로, 젊어서 御史大夫 周昌(?~기원전 192)의 下屬인 符璽御史였다. 漢 高帝 12년(기원전 195)에 고제가 戚姬의 아들 劉如意(?~기원전 194)를 趙王에 봉하고서 자신이 죽은 뒤 10살밖에 안 된 유여의가 온전히 생명을 부지할까 걱정하는 것을 보고, 呂后와 태자와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공경하고 어려워하는 주창을 趙王의 相으로 삼도록 권하였다. 고제는 이 의견을 따라 주창을 조왕의 相으로 삼은 뒤 조요를 어사대부에 임명하였다. ‘相’은 官名으로, 漢나라 때 諸侯王이 관할하는 郡國의 실제 執政者이다. 그 지위는 郡 太守에 비견된다. 《史記 卷96 張丞相列傳 周昌》 《漢書 卷42 周昌傳》
역주6 : 대전본‧사고본에는 ‘彊’으로 되어 있다.
역주7 公孫……西相 : 公孫弘(기원전 200~기원전 121)은 漢 武帝(기원전 156~기원전 87, 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때 御史大夫, 丞相을 역임한 大臣이다. 자신과 틈이 벌어진 사람에게 겉으로는 관대하게 대하고 친하게 지냈으나 나중에는 그들의 약점을 잡아서 반드시 보복하였다. 董仲舒(기원전 179~기원전 104)가 공손홍을 아첨한다고 여기자 공손홍은 동중서를 미워하였는데, 膠西王 劉端(기원전 165~기원전 107)이 교만한 데다 자주 법을 범하며 相이나 二千石 정도의 고위 관리들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을 알고 무제 元朔 5년(기원전 124)에 동중서를 교서왕의 相으로 추천하였다. 동중서는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董仲舒’는 18-14-나 ‘董仲……益明’ 주 참조. 《資治通鑑 卷19 漢紀11 武帝 元朔 5年》
역주8 : 대전본‧사고본에는 ‘洪’으로 되어 있으나, 北宋 太祖의 아버지 趙弘殷과 淸 高宗 弘曆의 피휘이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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