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爲
尉(태위)
하시니 時
에 乳母王聖
이 緣恩放恣
하고
聖女伯榮
이 出入宮掖
하여 傳通姦賂
하고 中常侍
等
이 分威共權
하여 屬託州郡
하며 傾動大臣
하고
又詐作詔書하여 調發司農錢穀하여 各起園宅廬觀하니 役費無數어늘
震이 數上疏切諫한대 帝가 不平之而豐等이 皆側目憤怨이러니 尋有河間男子趙騰이 詣闕上書하여 指陳得失이어늘
帝
가 怒
하여 收考
이어늘 震
이楊震 復上
救之
한대 帝
가 不省
하시고 竟誅騰
하시다
豐等
이 遂共譖震云 自趙騰死後
로 深
怨懟
라하여늘 帝
가 遣使者
하여 收震印綬
러시니
豐等이 復譖之어늘 詔遣還本郡이러니 震이 行至城西하여 乃慷慨謂其諸子門人曰
吾
가 蒙恩居
하여 疾姦臣狡猾而不能誅
하고 惡嬖女傾亂而不能禁
하니 何面目復見日月
이리오 因飮酖卒
하다
22-14-가
한 안제漢 安帝가 양진楊震을 책립冊立하여 태위太尉로 임명하였다. 이 당시에 안제의 유모 왕성王聖이 안제를 양육한 은혜로 인하여 방자하게 굴었으며,
왕성의 딸 백영伯榮이 황궁을 드나들면서 간사한 자들의 뇌물을 전달하고 중상시 번풍中常侍 樊豐 등이 위세를 나누어 갖고 권력을 공유하여 주군州郡에 청탁을 넣고 대신大臣을 좌지우지하였다.
또 번풍 등이 조서詔書를 거짓으로 만들어서 사농司農의 돈과 곡식을 조발調發하여 저마다 동산이 딸린 저택과 누대樓臺를 지으니 공역의 비용을 헤아릴 수 없었다.
양진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극간極諫을 하자, 안제가 이를 언짢아하였으며 번풍 등이 모두 흘겨보며 분노하고 원망하였는데, 얼마 뒤에 하간河間의 남자 조등趙騰이 대궐로 와서 글을 올려 잘잘못을 지적하여 서술하였다.
그러자 안제가 노하여 조등을 조옥詔獄으로 잡아들여 조사하였다. 양진이 다시 상소上疏하여 조등을 두둔하자 안제가 이를 살펴주지 않고 마침내 조등을 주살하였다.
번풍 등이 마침내 함께 다음과 같이 양진을 참소하였다. “조등이 죽은 뒤로 깊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안제가 사자를 보내어 양진의 인수印綬를 회수하였다.
번풍 등이 다시 양진을 참소하자 안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양진에게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양진이 길을 떠나 낙양성洛陽城 서쪽에 도착하여 마침내 울분을 터뜨리면서 자식들과 문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성은을 입어 상사上司의 자리에 있으면서 간신의 교활함은 미워하면서도 간신을 주살하지 못하고 총희寵姬가 환란을 일으키는 것을 미워하면서도 막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해와 달을 보겠는가.” 양진이 그대로 독을 마시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