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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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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21-7-나(按)
按 驪姬之讒申生也 其機變 亦甚巧矣 夫父子之情 日相親近이라 則間言 不得而入이니
21-7-나(按)
[臣按] 驪姬가 申生을 참소한 것이 그 권모술수가 또한 매우 뛰어납니다. 무릇 부자간의 정은 매일같이 가까이 지내는 사이이기 때문에 이간하는 말이 먹혀들어가지 못하니
惟以術離之然後 譖愬 可施焉이라 故驪姬 首賂二五하여 使說獻公하여 出三子于外하니 離之之術也
오직 방법을 써서 그들을 떼어놓은 뒤에야 참소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희가 맨 먼저 梁五와 東關嬖五에게 뇌물을 주어 獻公을 설득하여 세 공자를 지방으로 내보내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부자를 떼어놓는 방법입니다.
獻公者 喜功貪得之人이라 闢地啓土 正其所欲이라 故二五 因以啗之하고
헌공이란 사람은 공적을 세우기 좋아하고 얻는 것을 탐하는 사람이라서 영토를 확대하는 것이 바로 그가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오와 동관폐오가 이런 점을 이용하여 헌공을 꾀어내었고
且爲之辭하여 發諸歌하여盪其心志하니 公安得不悅而從之리오
또 이를 위한 가사를 지어 노래에 드러내어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니 헌공이 어떻게 기뻐하며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原注
三子 旣出則圖之 易矣 旣又與優施 謀作難之先後한대 優施 知申生之可陷也하고 則請先之하여
申生, 重耳, 夷吾 세 공자가 지방으로 나가고 나니 그들을 도모하기가 쉬웠습니다. 얼마 뒤에 또 優施와 난을 일으킬 계획의 순서를 모의하였는데 우시가 신생을 함정에 빠뜨릴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먼저 모함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其言 曰 精潔易辱이라하며 又曰 甚精必愚라하니 蓋精潔之人 惜名顧行하여 惟恐點汙 故曰 易辱이라하고
그의 말에 “정결한 사람은 쉽게 모욕을 느낀다.”라고 하고, 또 “지나치게 정결한 사람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짓을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결한 사람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행동을 돌아보아 오직 더럽힐까만을 염려하기 때문에 “쉽게 모욕을 느낀다.”라고 하였고,
以節自하여 不以智自全이라 故曰 必愚라하니 申生 惟其精潔也 故一辱以弑君之名則必以死自明而後已하니
절제로써 스스로 면려하여 지혜로써 스스로 온전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리석은 짓을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申生이 오직 정결할 뿐이기 때문에 임금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죄명으로 모욕을 당하자마자 반드시 죽음으로써 스스로 결백을 밝힌 뒤에 그쳤으니,
蕭望之 其情 亦然이라 夫必頑鈍無恥沉有謀之人則雖辱之而不動하나니
신이 앞에서 논한 石顯이 蕭望之를 무함했던 것이 그 정상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반드시 완고하고 둔하여 부끄러움을 모르고 침착하고 굳세어 지모가 있는 사람은 비록 모욕을 주어도 동요하지 않는 법입니다.
淮陰少年 嘗辱韓信矣로되 寧甘俛出跨下之恥언정 不死也하고
淮陰의 소년이 일찍이 韓信을 욕보였지만 한신은 차라리 기꺼이 몸을 굽혀 가랑이 아래를 기어 나오는 치욕을 받을지언정 죽지 않았고,
諸葛亮 嘗辱司馬懿矣로되 寧得畏蜀如虎之誚언정 不戰也하니
諸葛亮은 일찍이 司馬懿를 욕보였지만 사마의는 차라리 蜀나라를 범과 같이 두려워한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싸우지 않았습니다.
若申生則輕死重名하여 不能如信‧懿之忍하여 可以術激之而使死 故優施 欲先陷焉하고
그런데 신생으로 말하면 죽음을 가벼이 여기고 명예를 중히 여겨서 한신이나 사마의처럼 참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계책을 써서 그를 격동시켜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시가 신생을 먼저 무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原注
然恐獻公 未忍果於殺也하여 則又夜半而泣하여 以危言動之하여 謂申生 有將爲逆之意라하여 自請先死하고
그러나 驪姬는 獻公이 죽이는 것을 차마 결행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또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로 헌공을 동요시켜 “申生이 장차 반역하려는 뜻을 품었다.”라고 하고서 스스로 먼저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懼而謀之則又勸授之政而避禍焉하니 夫獻公 猛人也 能滅霍‧魏‧虢‧虞諸國하여其封하고
헌공이 두려워하여 상의를 하면 또 그에게 정권을 주어 화를 피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저 헌공은 굳세고 용맹한 사람이라서 霍나라, 魏나라, 虢나라, 虞나라 등 여러 나라를 멸망시켜 자신의 영토를 확대시킬 수 있었고,
久主夏盟이나 未嘗一爲之屈하니 而肯爲其子屈乎 懷怒必殺之心 自此啓矣
비록 齊 桓公이 오랫동안 華夏의 회맹을 주관하였지만 헌공이 한 번도 그에게 굴복한 적이 없었으니 그 자식에게 굽히려고 했겠습니까. 노기를 품고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然猶患無隙以加之罪也하여 則使將兵而伐翟焉하여 勝則加以得衆之名하고 敗則繩以覆師之罪하니 申生 至是 無逃死之路矣
그러나 오히려 죄명을 덮어씌울 틈이 없을까 근심하여 신생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서 翟을 정벌하도록 해서 승리하면 민심을 얻었다는 죄명을 더하고 패배하면 군대를 궤멸되게 만들었다는 죄목을 엮으려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신생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然又慮大臣 或守正力爭則公之意 未必不回也하여 則又使優施 往飮里克而諷其附麗之計하니 鳥烏之歌 亦猶二五晉都之歌也
그러나 혹여 대신이 正道를 지켜 힘써 간쟁한다면 헌공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優施를 시켜 가서 里克에게 술을 대접하고 그에게 의탁하는 방법을 귀띔하였으니 까마귀의 노래는 또한 梁五와 東關嬖五의 晉都의 노래와 같습니다.
詩歌 於人 最爲易動하니 故三姦之言 無不售焉이라 里克 大臣也어늘 許以中立하니 則殺嫡立庶之謀 成矣
詩歌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마음을 흔들기가 쉬운 것이니 그러므로 우시, 양오, 동관폐오 세 간신의 말이 먹혀들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里克은 대신이었는데도 중립을 지키는 데 동의하였으니 그렇다면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옹립하려는 계책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獻公 旣惑驪姬之讒이라 故歸胙之詐 最爲易辨而不復辨하고 申生之仁 恐傷君意하여 又不忍自辨하니 惟有一死而已
헌공이 이미 여희의 참소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 보내온 술과 음식의 속임수는 가장 분별하기 쉬운 것이지만 더 이상 분별하지 않았고, 인자한 申生은 헌공의 뜻이 상할까 걱정하여 또 차마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으니 신생에게는 오직 죽는 길 하나밖에는 없었습니다.
原注
申生 死而하여 無不如優施之所料者하여 卒之하고
申生이 죽자 두 공자가 달아나 優施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헌공이 죽고 奚齊(惠公)가 즉위하자 里克이 그를 시해하였고, 卓子가 즉위하자 또 이극이 그를 시해하였고,
하여 迨重耳 立而後定하여 하니 由驪姬之讒而三姦 助之也
夷吾가 즉위하였으나 잘 마치지 못해서 重耳(文公)가 즉위한 뒤에야 안정되어 晉나라의 혼란이 20년간 지속되었으니, 여희가 참소하고 세 간신이 그녀를 도운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든 況驪姬 有三姦之助乎 故女子‧小人 表裏交締者 危國亡家之本也니이다
褒姒가 虢 石父 한 사람만으로도 함께 모의하여 태자인 宜臼를 축출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여희는 도와주는 세 사람의 간신이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자와 소인이 안팎에서 서로 결탁하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집안을 망하게 하는 근본입니다.
以上 論憸邪罔上之情二하니라[臣]
이상은 간사한 자들이 임금을 속인 정상을 논한 두 번째이다. [참소하는 신하들]
역주
역주1 : 대전본에는 ‘咏’으로 되어 있다.
역주2 : 대전본에는 ‘盟’으로 되어 있다.
역주3 : 대전본에는 ‘礪’로 되어 있다.
역주4 臣前……望之 : 18-10-가 참조.
역주5 : 대전본에는 ‘傾’으로 되어 있다.
역주6 : 대전본에는 ‘贄’로 되어 있다.
역주7 : 대전본에는 ‘甘’으로 되어 있다.
역주8 : 사고본에는 ‘一’로 되어 있다.
역주9 雖齊……之屈 : 齊 桓公(재위 기원전 685~기원전 643)은 재위 43년간 盟主로서 제후를 규합하여 ‘九合之會’로 대표되는 회맹을 여러 차례 주도하였으나, 晉 獻公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특히 진 헌공 26년(기원전 655)에 제 환공이 주도한 ‘葵丘之盟’의 경우에는, 진 헌공이 참석을 위해 가던 도중에 周 王室의 宰孔을 만나 “회합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 환공은 덕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원정에만 힘쓴다. 그러므로 북쪽으로 山戎을 치고 남쪽으로 楚나라를 치고 서쪽으로 이 회합을 열었다. 동쪽으로 공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서쪽으로 가서 晉나라를 공략하지는 않을 것이다.[可無會也 齊侯不務德而勤遠略 故北伐山戎 南伐楚 西爲此會也 東略之不知 西則否矣]”라는 권유를 듣고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9年》
역주10 : 대전본에는 ‘威’로 되어 있으나, 宋 欽宗 趙桓의 피휘이다.
역주11 : 대전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
역주12 獻公……弑之 : 《사기》 〈晉世家〉에 따르면, 晉 獻公 26년(기원전 651) 여름에 헌공은 병이 들자 대부 荀息에게 後嗣인 奚齊의 보좌를 부탁하고 그를 相으로 삼았다. 9월에 헌공이 죽자, 里克이 중이를 맞이하여 옹립하고자 하였다. 결국 10월에 이극이 喪次에서 奚齊를 죽였다. 순식은 이에 해제의 이복동생인 卓子를 옹립하고 헌공의 장례를 마쳤다. 그러나 11월에 다시 이극이 조정에서 탁자를 죽였다.
역주13 夷吾立不終 : 夷吾가 君位의 기강을 확립하지 못하여 훌륭한 정치를 행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僖公 11년(기원전 649) 조에 따르면, 周 襄王이 召武公과 內史 過를 보내 晉 惠公 夷吾에게 爵名을 내렸는데, 혜공이 瑞를 받을 때 태만히 하였다. 내사 과가 돌아와서 양왕에게 “晉侯는 아마도 후손이 없을 것입니다.[晉侯其無侯乎]”라고 하였다. 그리고 혜공이 먼저 스스로 체통을 버렸으므로 후사가 없을 것이고 예는 나라의 근간인데 예가 행해지지 않아 상하가 혼란하므로 오랜 세대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에 대한 杜預의 注에 “혜공이 잘 마치지 못한 장본이다.[爲惠公不終張本]”라고 하였다.
역주14 晉國……十年 : 驪姬의 難으로 태자 申生이 자결하고 重耳와 夷吾가 망명한 것은 晉 獻公 21년(기원전 656)이고, 晉 文公이 秦 穆公의 지원을 받아 귀국하여 즉위한 것은 晉 懷公 1년(기원전 636)이므로 20년이 된다.
역주15 褒姒……宜臼 : 21-1-가~21-2-나 참조.
역주16 : 대전본에는 ‘咎’로 되어 있다.
역주17 : 대전본에는 ‘奸’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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