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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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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注+東都, 洛陽也.러니 李密 帥衆逼東都注+李密, 叛臣也.어늘 隋兵 拒之라가 敗走하니
19-1-가6
煬帝가 江都로 행차해서 아들인 越王 楊侗을 東都 留守로 삼았다.注+‘東都’는 洛陽이다. 李密이 무리를 거느리고 東都를 핍박하자注+李密은 叛臣이다. 수나라 군대가 이를 막다가 패주하였다.
移檄하여 數帝十罪어늘 越王侗 遣太常丞하여 間行賊中詣江都하여
이밀이 격문을 돌려 양제의 열 가지 죄를 일일이 들었다. 이에 월왕 양동이 太常丞 元善達을 파견하여 사잇길로 도적 가운데를 지나 강도에 이르러
奏稱李密 有衆百萬하여 圍逼東都하니 若陛下 速還이면 烏合 必散이요 不然이면 東都 決沒하리이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밀이 무리 백만을 거느리고서 동도를 포위하여 압박하니 만약 폐하께서 속히 돌아오신다면 이밀의 오합지졸은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동도가 반드시 함락될 것입니다.”
因歔欷嗚咽한대 帝爲之改容이러니 虞世基 進曰 越王 年少 此輩誑之 若如所言인대 善達 何緣來至리잇고
이어서 흐느껴 울자 양제가 이 때문에 태도를 바꾸었다. 虞世基가 나아가 말하였다. “월왕이 어려서 이러한 무리가 속인 것입니다. 말한 대로라면 원선달이 어디를 통하여 왔겠습니까?”
帝乃勃然怒曰 善達 小人으로 敢廷辱我라하고 因使經賊中하여 向東陽催運한대
양제가 이에 발끈 성을 내며 말하였다. “일개 하급관리인 원선달이 감히 조정에서 나를 모욕하였다.” 이로 인하여 적중을 지나 東陽에 가서 양식의 운송을 재촉하도록 하였는데
善達 遂爲群盜 所殺하니 是後 人人 杜口하여 莫敢以賊聞이러라
원선달이 마침내 군도에게 피살되자, 이후로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저마다 입을 다물고 감히 도적의 상황을 보고하지 못하였다.
世基 容貌 沈審하고 言多合意하니 特爲帝所親愛하여 朝臣 無與爲比
虞世基는 몸가짐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말이 양제의 뜻과 부합하는 것이 많자 특별히 양제의 친애를 받아서 朝臣 중에 그와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親黨 憑之하여 鬻官賣獄하고 賄賂公行하여 其門如市하니 由是 朝野 共疾怨之하더라
그의 私黨이 그를 믿고서 돈을 받고 관직을 팔거나 판결을 멋대로 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져 그의 집 문 앞은 저자처럼 붐볐다. 이로 말미암아 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였다.
託附世基하여 密爲指畫하여 宣行詔命 諂順帝意하고 群臣表奏忤旨者 皆屏而不奏하고
內史舍人 封德彝가 우세기에게 붙어서 은밀히 조종하여 詔命을 선포하고 행할 때 양제의 뜻에 아첨하여 맞추고 신하들의 表文과 章奏 중에서 양제의 뜻에 거스르는 것은 모두 막아놓고 아뢰지 않았다.
獄用法 多峻文深詆 論功行賞則抑削就薄이라 故世基之寵 日隆而隋政 日壞하니 皆德彛所爲也注+等反弑煬帝, 虞世基‧裴亦被殺.러라
그리고 옥사를 심리하여 조문을 가혹하게 적용하고 날조하고 훼방하는 것이 많았고 논공행상은 억누르고 깎아내려 야박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우세기에 대한 총애가 날로 높아졌고 수나라의 정사가 날로 무너졌으니, 이는 모두가 봉덕이가 한 짓이었다.注+뒤에 宇文化及 등이 반란을 일으켜 煬帝를 시해하였고, 虞世基와 裴蘊도 그에게 살해당했다.
역주
역주1 19-1-가6 : 《資治通鑑》 卷183 〈隋紀7 煬帝 下〉 大業 12년(616) 7월 壬戌 조와 《資治通鑑》 卷183 〈隋紀7 恭帝〉 義寧 원년(617) 4월 丁未 조에 나온다.
역주2 煬帝旣幸江都 : 《資治通鑑》 卷183 〈隋紀7 煬帝 下〉 大業 12년(616) 7월 壬戌(8일) 조 기사에 보인다. 당시에 江都(江蘇 楊州)에서 새로 龍舟를 만들어 東都(洛陽)로 보내자, 우문술의 건의로 甲子日(10일)에 행차하였다.
역주3 以其……留守 : 大業 12년(616)에 隋 煬帝가 江都로 행차하면서 越王 楊侗에게 명하여 東都를 留守하되, 光祿大夫 段達‧太府卿 元文都‧檢校民部尙書 韋津‧右武威將軍 皇甫無逸‧右司郞 盧楚 등과 留臺의 뒷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역주4 元善達 : 隋 煬帝 때의 太常丞이다. 越王 楊侗의 命을 받아 포위를 뜷고 江都에 가서 구원을 청하였다. 煬帝가 권고를 듣지 않자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東陽郡으로 파견되어 糧草의 운송을 재촉하도록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群盜에게 피살되었다.
역주5 內史舍人 : 隋初에 내사사인 8인을 두어 詔誥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품계는 정6품상이었는데, 개황 3년(583)에 종5품상으로 올렸다. 양제 대업 3년(607)에는 정원을 4인으로 줄였다. 이후 省名의 변천에 따라 내서사인‧내사사인‧중서사인 등으로 개칭되었다. 주로 禁中에서 수직하고 奏文을 올리고 表章의 내용을 상의하여 가부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尙書 6司의 表章을 분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詔勅과 制書 등의 초안을 작성하고 재가를 받아 절차대로 시행되도록 하였다. 이때 제칙의 초안을 작성하여 재가를 받는 일을 전담하는 1인을 知制誥라고 하였고 他官이 겸직하면 兼知制誥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원통한 일이나 지체되는 일은 문하성의 급사중‧어사대의 시어사과 함께 사안을 심리하여 판결하였고, 관원의 考課에도 참여하였다.
역주6 封德彝 : 568~627. 隋末唐初의 관료이다. 이름은 倫이고, 자는 德彝이다. 觀州 蓨縣 사람이다. 일찍이 楊素의 막료가 되었다. 大業 연간에 內史舍人에 올랐다. 행정에 뛰어나고 법률에 정통하여 內史侍郎 虞世基의 총애를 받았다. 대업 14년(618)에 江都의 兵變이 일어나자 宇文化及에 협력하여 內史令에 제수되었다. 뒤에 唐에 투항하였다. 太宗이 즉위하자 尙書右僕射가 되었고, 刑法에 따른 治國을 주장하였다. 생전에 太宗의 知遇를 입었으나 암암리에 太子 李建成을 보호하였던 사실이 밝혀져 貞觀 17년(643)에 관작을 추탈당하고, 시호가 明에서 繆로 고쳐졌다.
역주7 : 대전본‧사고본에는 ‘鞠’으로 되어 있다.
역주8 宇文化及 : ?~619. 隋末唐初의 대신이다. 代郡 武川 사람이다. 부친은 左翊衛大將軍 宇文述이다. 성격이 간교하고 부친의 권세를 믿고 법도를 따르지 않고 非違를 저질렀다. 양제가 즉위한 뒤 右屯衛將軍에 올랐다. 大業 14년(618) 황제가 江都에 갔을 때 武賁郎將 司馬德勘 등이 그를 수령으로 추대하자, 驍果軍을 거느리고 兵變을 일으켜 양제를 시해하였다. 이후 秦王 楊浩를 옹립하고 大丞相이 되어 섭정하였다. 洛陽으로 출정하여 李密과 싸웠으나 童山에서 李密‧徐世勣 등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양호를 독살하고 칭제건원하여 연호를 天壽, 국호를 許라고 하였다. 619년 竇建德에게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역주9 : 사고본에는 ‘縕’으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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