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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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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 卷19
格物致知之要(二)
辨人材
憸邪罔上之情[姦臣]
하여 謂之이라하더니
受禪定樂하여 非正聲者 悉放遣之하시다
將來朝注+啓民可汗, 之君也. 欲以富樂으로 誇之어늘
太常少卿 希指하여 奏括天下周‧齊‧梁‧陳樂家子弟하여 皆爲樂戶하고 六品以下至庶人 有善樂者 皆直太常하니
於是 四方散樂 大集東京이어늘 閱之於러니
其後 悉配太常하고 置博士弟子하여 以相傳授하니 樂工 至三萬餘人이러라
西域諸胡 多至어늘 使吏部侍郞 掌之하니 知帝好遠略하여
至者 誘訪諸國山川風俗 王及庶人儀形服飾하여 撰西域圖記三卷하여 入朝奏之하고
且言諸國 竝因商人하여 密送誠疑하여 願爲臣妾하나니 若服而撫之 渾‧厥 可滅注+‧突厥二大國也.이며 戎‧夏 可壹이라한대
大悅하여 日引矩至御坐하여 親問西域事어늘 盛言胡中 多諸珍寶하고 吐谷渾 易可이라한대
於是 慨然慕秦皇‧漢武之功하여 甘心將通西域하여 四夷經略 咸以委之하고
以矩하여 復使至張掖하여 引致諸胡하여 之以利하여 勸令入朝하니
自是 郡縣 疲於送迎하여 費以萬萬計
卒令中國으로 疲弊하여 以至於亡하니 皆矩之導也러라


대학연의 권大學衍義 卷19
사물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성知性의 힘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방법들(2)
인재人材를 구별하는 방법들
간사奸邪한 자들이 임금을 속인 정상[간신]
19-1-가1
당초 북제 말엽에 어룡희魚龍戱산차희山車戱 등의 잡희雜戱가 있어 산악散樂이라고 하였다.
수 고조隋 高祖가 선양을 받아 즉위하자 우홍牛弘에게 명하여 아악雅樂의 음률을 정비하여 정성正聲이 아닌 산악散樂의 종사자를 모두 풀어주어 내보내게 하였다.
양제煬帝계민가한啓民可汗이 와서 조현하려고 하였기에注+계민가한啓民可汗돌궐突厥의 군주이다. 풍부한 음악을 그에게 과시하고자 하자,
태상소경 배온裴蘊이 양제의 뜻에 영합하여 북주北周북제北齊 출신으로 천하의 전문적으로 가무에 종사하는 집안 자제들을 모아서 모두 악호樂戶로 삼고 6품 이하의 관원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음악에 재주 있는 자를 모두 태상시太常寺에 직숙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의 산악散樂이 모두 동경東京에 크게 모이자, 양제가 방화원 적취지芳華苑 積翠池에서 이를 관람하였다.
그 후에 모두 태상시에 배속하고 박사제자를 설치하여 산악을 전수하니 악공樂工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서역西域 각국의 호인胡人들이 장액張掖에 많이 와서 교역하였는데, 양제煬帝이부 시랑 배구吏部 侍郞 裴矩에게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배구는 양제가 원방遠方을 경략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배구가 서역에서 온 상인들을 꾀어 오게 하여 여러 나라의 산천과 풍속, 왕에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의 생김새와 복식을 탐문하여 《서역도기西域圖記》 3권을 찬술하고서 입조하여 이를 아뢰었다.
아울러 서역의 여러 나라가 모두 상인을 통해서 은밀히 정성을 보내와 복속하기를 원하니 만일 이들을 신복시켜 위무한다면 토욕혼吐谷渾돌궐突厥을 멸망시키고注+토욕혼吐谷渾돌궐突厥대국大國을 이른다. 서융西戎하화夏華를 통일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날마다 배구를 불러 어좌御坐 가까이 다가오게 하여 친히 서역의 사정을 묻자, 배구가 서역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많이 있고 토욕혼을 쉽게 병탄할 수 있다고 극구 말하였다.
양제가 이에 꿈에 부풀어 진 시황秦 始皇한 무제漢 武帝의 공적을 동경하여 장차 서역과 개통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사이四夷의 경략을 모두 배구에게 맡겼다.
그리고 배구를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임명하여 다시 장액張掖에 가서 서역 각국의 호인胡人들을 꾀어 이익으로 그들을 설득하여 입조하도록 권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서역 각국의 호인胡人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니, 연로沿路의 군현들이 영접하고 전송하는 일로 피폐해져 소모한 비용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국이 피폐해져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으니, 이 모두는 배구가 창도한 것이다.


역주
역주1 19-1-가1 : 《資治通鑑》 卷180 〈隋紀4 煬帝 上之上〉 大業 2년(606) 12월 조에 보인다.
역주2 高齊之末 : ‘高齊’는 北齊를 이른다. 《資治通鑑》에는 ‘齊溫公之世’로 되어 있는데, 溫公은 북제의 제5대 왕인 高緯(재위 565∼577)이다.
역주3 魚龍山車等戱 : 魚龍은 百戱 雜耍(사) 중에 물고기나 용으로 변화하는 舍利獸를 이르는데, 어룡희는 사리수 모형을 이용하여 사리수가 물고기, 거북, 고래 등의 형태를 거쳐 黃龍이 되는 과정을 표현하는 百戱의 일종이다. 《漢書》 〈西域傳〉의 贊에 “주지육림을 가설하여 四夷의 賓客에게 연향을 베풀면서 巴兪都盧‧海中碭極‧漫衍魚龍‧角抵 등의 백희를 공연하여 관람한다.”라고 하였으므로 漢代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듯하다. 山車는 수레 위에 棚閣을 설치하고 채색 비단, 假作物 등을 장식하여 山林의 형상을 만든 일종의 假飾舞臺로, 그 안에 사람을 태우거나 악기를 진열하여 공연을 하기도 한 듯하다.
역주4 散樂 : 周代의 民間 樂舞로부터 발전하여 성립한 雜技‧武術‧幻術‧滑稽表演‧歌舞戱‧參軍戱 등의 曲藝‧雜耍와 음악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樂舞 雜技 演戱의 총칭이다. 漢代에는 서역의 幻術 등의 요소가 도입되었고, 南北朝 이후에는 百戱와 동의어가 되었다. 隋代의 산악은 규모가 매우 크고 형식이 다양하고 기예가 우수하여 공전의 수준에 도달했다. 唐代에는 唐樂과 함께 일본 등에 전래되기도 하였다.
역주5 隋高……遣之 : 隋나라 鄭譯은 중국 고유의 7聲 12律 84調와 蘇只婆 7調를 결합하여 음률을 정비하여, 이를 바탕으로 雅樂을 정리하였다. 正聲은 이를 말한다. 牛弘은 정성에 의거하여 開皇 6년(586)에 雅樂의 음률을 확정하였다. 隋 文帝 開皇 9년(589)에 陳을 평정하고 國伎‧淸商伎‧高麗伎‧天竺伎‧安國伎‧龜玆伎‧文康伎 등 七部樂을 두었고, 우홍의 건의로 鞞‧鐸‧巾‧拂 등 四舞를 보존하였는데, 우홍은 아악을 정리하면서 宋‧齊의 舊樂인 淸商과 七部, 四舞의 樂家를 제외하고는 모두 放遣하였다. 裴蘊은 대업 초에 태상소경이 되었는데, 煬帝에게 건의하여 淸樂‧西涼‧龜玆‧天竺‧康國‧疎勒‧安國‧高麗‧禮畢 등 九部를 두고 천하의 散樂을 모아 太常寺에 소속시켰다. 《隋書 卷15 音樂志下》
역주6 隋高祖 : 541~604(재위 581~604). 隋나라 개국 황제인 文帝 楊堅이다. 弘農 華陰 사람이다. 東漢의 太尉 楊震의 후손이다. 부친은 西魏의 大司空‧柱國‧隨國公 楊忠이며, 딸은 北周 宣帝 宇文贇(559~580, 재위 578~579)의 황후 楊麗華이다. 北周 大成 1년(579)에 靜帝 宇文闡(573~581, 재위 579~581) 때 相國에 올랐고 581년에 정제의 선양을 받아 隋를 건국하였다. 이후 後梁과 南朝 陳을 정벌하여 개황 9년(589)에 천하를 통일하였다. 재위 중에 義倉 설립, 均田制 실시, 五省六部制 정비, 開皇律 제정, 府兵制 개혁, 科擧制 실시, 州縣制 정비 등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평소 의심이 많아 참언이 잘 통하였고 말년에는 법을 가혹하게 적용하였는데 급기야 개황 20년(600)에 무함을 듣고 태자 楊勇을 폐립하고 차남 楊廣을 태자로 삼았다가 仁壽 4년(604)에 병이 위중해지자 양광에게 살해되었다.
역주7 牛弘 : 546~610. 자는 里仁이다. 安定 鶉觚 사람이다. 본성은 裛(읍)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검박했으며 문학에 뛰어나고 율령과 예제에 정통하여 ‘大雅君子’로 일컬어졌다. 隋 文帝 開皇 1년(581)에 散騎常侍 秘書監에 제수되어 〈請開獻書之路表〉를 올려 도서의 ‘五厄論’을 제시하고 산일된 문헌 전적의 수집, 보관, 정리에 크게 공헌하였다. 개황 3년(583)에 예부 상서에 제수되었고 개황 6년(586)에 太常卿이 되어 雅樂의 改定과 明堂의 修建을 주도하였다. 이후 吏部 尙書‧大將軍 등을 역임하였고 《大業律》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시호는 憲이다.
역주8 煬帝 : 569~618(재위 604~618). 隋나라 제2대 황제인 煬帝 楊廣이다. 일명 英이고, 小字는 阿摐이다. 시호의 경우 唐나라는 煬帝, 夏王 竇建德은 閔帝로 정하였다. 大興 사람이다. 隋 文帝의 차남이다. 開皇 원년(581)에 晉王에 봉해졌고 개황 8년(588)에 南朝 陳을 평정하고 揚州 總管이 되어 강남을 진무하였다. 聲色을 멀리하고 賢士를 예우하였으며 겸양하고 근신하여 文帝의 환심을 샀고 개황 20년(600)에 태자 楊勇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태자가 되었다. 仁壽 4년(604)에 문제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시해하고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 東都 洛陽 천도, 대운하 개착, 大業禮‧大業律令 제정 등 치적이 많았으며, 대외적으로는 突厥‧吐谷渾‧琉求 공략 등 세력 확장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대규모 토목공사를 빈번히 일으키고 잦은 巡幸과 사치향락, 대고구려 전쟁 실패 등으로 많은 民力을 소모하여 각지의 반란을 야기하였다. 大業 14년(618)에 江都에 巡幸했다가 驍果軍 宇文化及이 兵變을 일으켜 시해되었다.
역주9 啓民可汗 : ?~609?(재위 ?~609?). 東突厥의 可汗이다. 본래 突利可汗이라고 하였다. 성은 阿史那이고 이름은 染干이다. 부친은 沙鉢略可汗이다. 일설에는 莫何可汗 處羅侯의 아들이라고 한다. 隋 文帝 開皇 19년(599)에 都藍大可汗과 서돌궐의 達頭可汗의 연합 세력에 패배하여 隋에 歸降하였다. 이후 도람대가한이 부하에게 살해되고 달두가 자립하여 步迦可汗이 되어 隋의 북방을 침입하자, 隋軍과 함께 이를 패퇴시켰고 仁壽 원년(601)에 隋의 지원을 받아 북정을 추진하여 漠北을 제압하고 동돌궐 대가한이 되었다. 大業 3년(607)에 楡林으로 남하하여 隋 煬帝를 朝見하였고 대업 5년(609)에는 東都 洛陽으로 가서 煬帝를 조현하였다. 같은 해 죽었다. 일설에는 대업 10년(614)에 죽었다고 한다.
역주10 突厥 : 튀르크(Türk)의 음차어로, 匈奴의 일파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대로 金山에 살면서 철을 다루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 군장의 씨족은 阿史那氏이다. 6세기 무렵 柔然에 복속하다가 552년에 阿史那土門이 可汗을 칭하고 이어서 유연과 鐵勒 등을 격파하고 독립하였다. 土門의 사후에는 점차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할되었는데, 동돌궐은 大興安嶺에서부터 阿姆河까지, 서돌궐은 阿姆河에서부터 아랄해와 페르시아까지 강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隋‧唐 시기 분열정책으로 점차 동돌궐과 서돌궐의 분열과 경쟁이 심화되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동돌궐은 唐 太宗 貞觀 4년(630)에 당에 복속되었고 唐 高宗 顯慶 4년(658)에는 서돌궐이 멸망하였다.
역주11 裴蘊 : ?~618. 隋朝의 大臣이다. 河東 聞喜 사람이다. 성품이 明辯하고 爲政의 재간이 있었다. 陳나라에서 直閣將軍‧興寧令 등을 지냈다. 부친이 隋에 있었기에 은밀히 내응할 것을 隋 文帝 楊堅에게 청하였고 陳이 멸망한 뒤에 발탁되어 開府儀同三司로 加官되었다. 隋 煬帝가 즉위한 뒤에 太常少卿으로 徵召되었다. 대업 5년에 민부 시랑을 거쳐 어사대부에 제수되고 裴矩‧虞世基 등과 朝政에 참여하였다. 양제의 뜻에 따라 법리를 왜곡해서 가감하여 형법을 적용하였고, 楊玄感의 당여를 치죄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어사를 백여 명으로 증원하고 이목을 군현에까지 넓혔다. 大業 14년(618) 江都의 兵變 때 右屯衛將軍 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
역주12 芳華苑積翠池 : 芳華苑은 곧 西苑으로, 대업 원년(605) 5월에 東都 洛陽의 궁성 서쪽에 지었다. 둘레가 200리에 달했다. ‘一池三山’의 배치를 취하여 내부에 둘레가 십여 리나 되는 바다를 만들고 바다 안에는 높이가 백여 자에 이르는 方丈山, 蓬萊山, 瀛洲山 등 假山을 조성하였다. 북쪽으로 龍鱗渠를 연결하여 물을 대었다. 용린거를 따라 16院을 만들고 화려한 殿堂과 樓觀을 짓고 각 院마다 4품 夫人을 두어 주관하게 하였다.
역주13 張掖 : 한 무제가 武威郡을 나누어 설치한 군명으로 ‘張國臂掖(나라의 팔과 겨드랑이를 펼친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치소는 현재의 감숙성 장액시 서북에 있는 觻得縣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감숙성 高臺縣 이동, 弱水 상류, 내몽고 에치나(額濟納) 旗 지역이었다. 일설에는 酒泉에서 분리되어 나왔으며 무위군의 관할구역까지 포괄하고 있었다고 한다.
역주14 交市 : 漢‧魏 이래로 변경의 군국에는 互市를 두어 이민족과 교역을 하였는데, 隋에 이르러 서북 변경에 交市監을 설치하고 호시의 사무를 관장시켰다. 장관인 교시감은 종8품이었다.
역주15 裴矩 : 547~627. 隋唐 시기의 정치가, 외교가, 지리학자이다. 본명은 世矩, 자는 弘大이다. 河東 聞喜 사람이다. 일찍이 北齊, 北周, 隋에서 벼슬하였다. 南朝 陳 정벌에 참가하여 嶺南을 평정하였다. 특히 大業 연간에는 隋 煬帝의 중용을 받아 對西域政策의 입안자이자 집행자 역할을 하며 土谷(욕)渾을 타격하고 突厥을 분열시키는 등 서역 경영에서 활약하였다. 民部侍郞, 內史侍郞, 尙書左丞, 吏部侍郞, 黃門侍郞 등을 역임하고 聞喜縣公에 봉해졌다. 蘇威‧宇文述‧裴蘊‧虞世基 등과 朝政을 장악하여 江都의 兵變 이후 宇文化及, 竇建德 등에 협력하여 존중을 받았다. 武德 4년(621) 唐에 항복하여 高祖, 太宗 연간에 殿中侍御史, 太子左庶子, 太子詹事, 檢校侍中, 民部尙書를 역임하고 安邑縣公에 봉해졌다. 絳州 刺史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敬이다.
역주16 商胡 : ‘胡’는 흉노 이전에는 북방 이민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범용되다가 흉노제국 등장 이후에는 흉노를 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隋‧唐 시기에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 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商胡’는 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을 의미하였다. 소그드는 중앙아시아의 제라프샨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소그디아나 지방으로 사마르칸드(Samarkand)‧부하라(Bukhara)를 중심으로 한다. 그 원주민인 소그드인은 국제적 상업무역에 종사하면서 河西回廊 연변의 돈황‧무위‧고창 등은 물론이고, 長安에도 거류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강성한 돌궐에 복속하여 돌궐 가한의 경제적 기반 축적에 협조하여 지위와 영향력을 강화해갔다. 수당 시기에는 돌궐과 소그드 간의 분열을 꾀하기 위해 소그드 인의 중국 내지 집단 거주를 허용하고 서역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 및 외교에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방법이 사용되었기도 하였다.
역주17 吐谷渾 : 吐谷渾은 ‘Tuyuhun’의 음차어로, 중국 고대에 遼東 일대에 거주하던 鮮卑族 慕容部의 일파를 말한다. 西晉 말엽에 慕容部의 單于 慕容涉歸의 庶長子인 吐谷渾이 部民을 거느리고 靑海‧甘肅 일대로 이동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동서교역의 요지인 靑海道를 장악하고 세력을 키웠다. 6세기에는 동으로 청해, 서로 且末, 북으로 祁連山, 남으로 雲山까지 강역을 확장하였다. 隋初에는 선우 夸呂가 可汗을 칭하고 伏俟城을 수도로 삼아 동서교역의 요충인 河西 지역 진출을 도모한 수‧당‧토번 등과의 경쟁하였다. 그러나 大業 5년(609)에는 隋에 패배하여 黨項部로 달아났고 舊地에는 西海‧河源 2군이 설치되었다. 隋末에 점차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唐 高宗 龍朔 3년(663)에 吐蕃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일부는 당에 귀속되었다.
역주18 幷呑 : 대전본에는 雙行小字로 되어 있다.
역주19 黃門侍郞 : 黃門은 秦‧漢 시기에 宮門을 黃色으로 油漆하였기 때문에 일컬은 것으로, 황문시랑은 士人으로 충임하는 外廷의 직임이지만 宮內에서 供職하였기 때문에 명칭을 삼았다. 黃門郞‧夕郞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隋‧唐 시기 門下省의 副官으로, 품계는 正4品上이었다. 侍中과 함께 문하성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며, 의례의 진행을 돕고 奏文을 검열하여 과실을 바로잡고 상벌 여탈의 논의에 참여하였다. 東臺侍郎‧鸞臺侍郎‧황문시랑 등으로 개칭을 거듭하다가 唐 玄宗 天寶 元年(742)에 門下侍郎으로 개칭되었다.
역주20 : 사고본에는 ‘啗’으로 되어 있다.
역주21 西域……導也 : 《資治通鑑》 卷180 〈隋紀4 煬皇帝 上之上〉 大業 3年(607) 10월 조에 보인다.
역주22 : 사고본에는 ‘過’로 되어 있다.
역주23 : 대전본에는 ‘縻’로 되어 있다.
역주24 : 사고본에는 ‘倡’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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