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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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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中山王注+中山, 國名. 箕子, 王名.注+妖病也.이어늘 祖母注+馮太后, 母. 漢制, 諸侯王母‧祖母, 亦稱太后. 自養視하고 數爲禱祠解注+解, 猶人言賽謝也.러니
22-13-가1
漢 哀帝 때 中山王 劉箕子가注+‘中山’은 國 이름이다. ‘箕子’는 中山王의 이름이다. 眚病이 들자注+‘眚病’은 알 수 없는 병이다. 조모인 馮太后가注+‘馮太后’는 中山王(劉興)의 모친이다. 漢나라 제도에 따르면, 諸侯王의 모친과 祖母 또한 太后라고 칭하였다. 직접 간호를 하고 여러 차례 기도를 올려 병이 낫기를 빌었다.注+‘解’는 사람들이 ‘賽謝(제사를 올리고 감사를 표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여 將醫治之注+謁者, 官名.하신대 素有狂易病注+所謂.이라 病發怒去하여 西歸長安이어늘
애제가 謁者 張由를 보내 의원을 대동하고 중산왕을 치료하게 하였다.注+‘謁者’는 벼슬 이름이다. 그런데 장유가 평소 狂易病을注+‘狂易病’은 이른바 ‘풍을 앓아 실성했다.’라는 것이다. 앓고 있었다. 그 병이 발작하여 화를 내면서 사신 행렬을 이탈하여 서쪽으로 가서 長安으로 돌아왔다.
尙書 簿責由 擅去狀注+尙書, 官名. 責其故擅去, 令其書於簿也.한대하여 因誣言 中山太后 祝詛上及라한대
그러자 尙書는 장유가 멋대로 이탈한 정황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文簿에 쓰게 하자注+‘尙書’는 벼슬 이름이다. ‘簿責由擅去狀’은 張由가 무엇 때문에 제멋대로 이탈했는지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文簿에 쓰게 했다는 뜻이다. 장유가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장유가 무고하여 말하였다. “중산왕의 태후가 폐하와 傅太后를 저주하였습니다.”
傅太后 與馮太后 竝事元帝 追怨之하더니 因是遣御史하여 案驗數十日無所得하여 更使治之하니
부태후가 풍태후와 함께 元帝를 섬겼기에 원제가 붕어한 뒤에 풍태후에게 원한을 품었다. 이를 계기로 御史를 파견하여 수십 일 동안 조사하였으나 소득이 없어, 다시 中謁者를 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受傅太后指하여 誣奏云 祝詛謀殺上하고 立中山王이라하여늘 하니 等死者注+參, 馮太后弟, 中山王舅.이러라 張由 以先告封侯하다
중알자가 부태후의 지시를 받고서 다음과 같이 무고하였다. “귀신에게 빌어 폐하를 시해하고 중산왕의 옹립을 획책하였습니다.” 중산왕(중산태후의 오류)이 이에 약을 마시고 자살하니 宜鄕侯 馮參 등 죽은 이가 17명이었다.注+‘參’은 馮太后의 아우이자 中山王의 외삼촌이다. 장유는 먼저 고발했다는 이유로 侯에 봉해졌다.
역주
역주1 22-13-가1 : 《前漢書》 卷97下 〈外戚傳下 孝元馮昭儀傳〉, 《資治通鑑》 卷33 〈漢紀25 哀帝 上〉 建平 1년(기원전 6) 기사에 보인다.
역주2 漢哀帝 : 기원전 25~기원전 1(재위 기원전 7~기원전 1). 前漢의 황제 劉欣(유흔)으로, 漢 元帝의 손자이며 定陶王 劉康의 아들이다. 아들이 없던 成帝에 의해 綏和 元年(기원전 8)에 태자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성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董賢에 대한 총애가 지나쳐 국정을 그르쳤다.
역주3 箕子 : 기원전 9~5(재위 기원전 1~5). 漢 平帝 劉衎(유간)으로, 箕子는 초명이다. 元帝의 손자이며 中山王 劉興의 아들이다. 元壽 2년(기원전 1)에 哀帝가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元始 2년(2)에 衎으로 개명하였으며 元始 5년(5)에 병사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王莽이 권력을 휘둘렀기에, 일설에는 왕망에 의해 독살당했다고도 한다.
역주4 眚病 : 《前漢書》에 주석을 단 학자 가운데 蘇林에 따르면 肝厥이라고도 하는데, 이 병에 걸리면 입술과 손발톱까지 모두 푸른빛이 돈다. 《前漢書 卷97下 外戚傳下 孝元馮昭儀傳 李賢注》
역주5 馮太后 : ?~기원전 6. 漢 元帝의 후궁이자 平帝의 조모로, 이름은 媛(원)이다. 光祿勳 馮奉世의 딸이며, 원제의 아들 劉興을 낳자 倢伃(첩여)가 되었다. 우리를 빠져나온 곰이 원제를 덮쳤을 때 곰을 맨몸으로 막아선 적이 있어 원제에게 중시를 받았다. 원제 建昭 2년(기원전 37)에 유흥이 信都王이 되었을 때 昭儀가 되었으며, 竟寧 원년(기원전 33)에 원제가 죽자 信都太后가 되었다. 훗날 유흥이 中山王으로 改封되면서 中山太后가 되었다. 哀帝가 즉위한 후 애제의 조모 傅太后 측의 압박에 못 이겨 음독자살하였다. 《前漢書 卷97下 外戚傳下 孝元馮昭儀傳》
역주6 中山王 : 여기에서는 馮太后의 아들이자 劉箕子의 부친인 劉興(?~기원전 8)을 가리킨다. 시호인 孝를 붙여 ‘中山孝王’이라고도 한다.
역주7 : 509본‧512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8 謁者 : 아래의 ‘中謁者’ 주석 참조.
역주9 張由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哀帝 때 馮太后를 고발한 공으로 關內侯가 되었다가 애제가 죽은 뒤 풍태후의 억울함이 밝혀지면서 庶人이 되었다.
역주10 病風喪心 : 蘇洵의 〈諫論〉에 “사람의 감정은 풍을 앓아 실성하지 않는 이상, 상을 피하고 형벌을 선택하는 경우는 없다.[人之情非病風喪心 未有避賞而就刑者]”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1 : 사고본에는 ‘也’로 되어 있다.
역주12 : 대전본에는 ‘同’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13 傅太后 : ?~기원전 2. 漢 元帝의 후궁이자 哀帝의 조모로, 河內 溫縣 사람이다. 원제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定陶王 劉康을 낳았다. 원제의 후궁 馮倢伃(풍첩여)가 中山王 劉興을 낳자, 원제가 살아 있어 太后로 불릴 수 없었기에 풍첩여와 함께 昭儀가 되었다. 원제가 죽자 定陶太后로 칭해졌으며, 유강이 죽고 그의 아들 劉欣이 哀帝로 즉위하자 恭皇太后로 높여졌다. 병사한 후에는 孝元傅皇后라고 칭해졌다. 《前漢書 卷97下 外戚傳下 孝元傅昭儀傳》
역주14 中謁者 : 궁중에 둔 謁者라는 뜻으로, 알자는 典禮를 거행할 때 의식을 안내하거나 황제의 명을 출납하고 신하가 올리는 글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관원이다. 湯其領에 따르면, 중알자는 전적으로 황태후를 위해 알자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中謁者府에 소속되었다. 李正周와 殷昭魯에 따르면, 呂太后 이후에 중알자는 환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권력이 컸다. 《前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上》 《湯其領, 西漢中謁者制探論, 史學月刊 2008年 第11期, 125쪽.》 《李正周‧殷昭魯, 西漢“中謁者”考, 唐都學刊 2014年 7月 第30卷 第4期, 39~40쪽.》
역주15 王乃飮藥自殺 : 《전한서》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자살한 사람은 劉箕子가 아니라 그의 조모인 馮太后이다. 진덕수가 史書의 내용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훗날 유기자는 元壽 2년(기원전 1)에 후사가 없던 애제의 뒤를 이어 漢 平帝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번역문에서는 이때 실제로 자살한 중산태후를 괄호 안에 첨가하였다. 《前漢書 卷97下 外戚傳下 孝元馮昭儀傳》 《資治通鑑 卷33 漢紀25 哀帝 上 建平 元年》
역주16 宜鄕侯參 : ?~기원전 6. 馮參을 가리킨다. 자가 叔平으로, 上黨 潞縣(노현) 사람이다. 光祿勳 馮奉世의 아들이자 漢 元帝의 후궁 馮媛의 동생으로, 어려서 《상서》에 정통했으며 인품이 근엄하였다. 諫大夫를 지냈으며 成帝 말엽에 定陶王 劉欣이 태자가 되었을 때 宜鄕侯로 봉해졌다. 哀帝의 조모 傅太后가 누이를 대역죄로 얽었을 때 이에 연루되어 廷尉에게 회부되자 자결하였다.
역주17 : 대전본에는 ‘八’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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