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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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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魏有隙注+澄, 高歡之子, 世專魏政.하여 內不自安하여 하고 어늘 召群臣廷議하니 皆謂非宜러라
18-19-가
東魏의 侯景이 高澄과 사이가 벌어져注+‘高澄’은 高歡의 아들이다. 고환의 대를 이어 東魏의 國政을 전횡하였다.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河南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13개 州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梁나라에 歸附할 것을 청하였다. 梁 武帝가 신하들을 불러 조정에서 의론하였는데 모두들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다.
是歲正月乙卯 夢中原 皆以地來降하고 見朱异告之한대 曰 此 宇內混一之兆也라하더니
이해 정월 을묘일(17일)에 武帝가 중원의 州牧과 郡守가 모두 땅을 들고 와서 항복하는 꿈을 꾸고서 아침에 朱异를 소견하고 꿈 얘기를 하자 주이가 말하였다. “이것은 사해 안이 통일될 징조입니다.”
及景使하여 稱景定計 以正月乙卯라한대 愈神之하나 然意猶未決하여
후경의 使者가 이르러 후경이 계획에 정한 날짜가 정월 을묘일이라고 말하자, 무제가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嘗獨言我國家 하니 今忽受景地 詎是事宜 脫致紛紜이면 悔之何及이리오
한번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金甌와도 같아서 조금도 손상되거나 흠결된 부분이 없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후경의 땅을 받는다면 어찌 이 일이 마땅하겠는가. 만일 혼란을 불러오기라도 한다면 그때 가서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朱异 揣知上意하고 對曰 聖明 御極 南北 歸仰호대 正以事無機會 難達其心이러니
주이가 무제의 의중을 미루어 짐작하고 대답하였다. “황상께서 즉위하시자 남북이 귀부하고자 우러러보지만 바로 그런 기회를 가질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을 표달하기 어려웠습니다.
今侯景 分魏土之半以來하니 自非天誘其衷‧人贊其謀 何以至此리오
그런데 이제 후경이 東魏 국토의 반이나 되는 땅을 가지고 오겠다 하니, 이것은 본래 하늘이 그 마음을 인도하고 사람들이 그 計謀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若拒而不納이면 恐絶後來之望일까하노이다 乃定議納景하다
만약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후에 귀부하러 올 자들의 희망을 끊을까 두렵습니다.” 무제가 마침내 후경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논의를 정하였다.
注+淵明, 宗室子, 以戰敗陷魏.이러니 淵明 亦遣人奉啓어늘 得啓流涕하고 與朝官議之한대
東魏의 高澄이 자주 편지를 보내 다시 통교하여 우호관계를 맺자고 청하고 正陽侯 蕭淵明의 귀국을 허락하였는데注+‘蕭淵明’은 梁나라 종실의 자손이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東魏에 억류되었었다. 소연명 역시 사람을 보내 상주문을 올리자, 梁 武帝가 상주문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관원들과 논의하였다.
朱异 又言 靜寇息民 和實爲便이니이다 曰 高澄 何事須和리오 必是設間이라
朱异가 또 말하였다. “도적을 잠잠하게 하고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은 화친이 실로 유리합니다.” 司農卿 傅岐가 말하였다. “고징이 무슨 일로 화친이 필요하겠습니까. 필시 이간책을 쓰는 것입니다.
故命正陽遣使하여 欲令侯景自疑 景意不安이면 必圖禍亂하리니 若許通好인댄 正墮其計中이니이다
그러므로 정양후에게 使者를 보내도록 명하여 侯景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심이 들게 하고자 한 것이니, 후경이 불안해한다면 후경은 반드시 화란을 도모할 것입니다. 만일 저들과 왕래하며 우호관계 맺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바로 그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固執宜和라하고 亦厭用兵하여 乃從异言하다
주이가 한사코 화친을 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무제 역시 전쟁 일으키는 것을 싫어해서 무제는 마침내 주이의 말을 따랐다.
侯景이 금 3백 냥을 朱异에게 보냈는데 주이가 금만 받고 후경의 啓文은 梁 武帝에게 전하지 않았다. 후경이 이에 비로소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鄱陽王 蕭範이 은밀히 후경의 모반에 대해 계문을 올렸는데, 무제가 변경의 문제를 전적으로 주이에게 맡겨서 動靜을 모두 주이의 손을 거치게 하니, 주이는 후경이 필시 모반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소범의 계문을 더 이상 무제에게 전하지 않았다.
侯景이 壽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朱异와 少府卿 徐驎, 太子右衛率 陸驗, 制局監 周石珍을 주벌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다.
异等 皆以姦佞으로 蔽主弄權하여 爲時人所疾이라 故景 託以興兵하다
주이 등이 모두 간사함과 아첨으로 군주의 이목을 가려서 권력을 쥐고 흔들어 당시 사람들에게 질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후경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及景 濟江圍臺城 注+時, 太淸三年正月也. 三月城陷. 五月武帝殂, 簡文立, 爲景所簒.하다
후경이 長江을 건너 臺城을 포위하자 朝野가 모두 주이를 탓하였다. 주이가 부끄러움과 분노로 병이 나서 죽자, 武帝가 매우 애석해하여 특별히 尙書右僕射를 추증하였다.注+때는 梁 武帝 太淸 3년(549) 정월이다. 3월에 궁성이 함락되었다. 5월에 무제가 붕어하고 簡文帝가 즉위하였는데, 얼마 뒤 皇位를 侯景에게 찬탈당하였다.
역주
역주1 18-19-가 : 《資治通鑑》 卷160 〈梁紀16 武帝16〉 太淸 원년(547) 1월‧3월 조, 卷161 〈梁紀17 武帝17〉 太淸 2년(548) 2월‧8월 조, 卷162 〈梁紀18 武帝18〉 太淸 3년(549) 1월 조에 보인다.
역주2 侯景 : 503~552. 자는 萬景이며 지금의 내몽고 固陽縣 남쪽에 있던 北魏(386~534) 懷朔鎭 사람이다. 羯族이다.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에 뛰어났다. 북위 말기 權臣 爾朱榮(493~530)을 섬겨 軍功으로 定州 刺史가 되었다. 북위의 高歡(496~547)이 학정을 일삼던 爾朱氏를 몰살하고 節閔帝를 폐한 뒤 孝武帝를 옹립하였다가 효무제가 고환을 토벌하려다 실패하고 서쪽 長安으로 달아나자 534년에 다시 孝靜帝(524~552, 재위 534~550)를 옹립하고 東魏(534~550) 시대를 열었는데, 후경은 이러한 고환에게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고환이 죽은 뒤 고환의 장자인 高澄과 불화하여 다시 梁 武帝(464~549, 재위 502~549)에게 투항하여 河南王에 봉해졌다. 무제 太淸 2년(548)에 반란을 일으켜 수도 建業을 포위하고 臺城을 함락시켰다. 무제를 餓死시키고 簡文帝(503~551, 재위 549~551)를 옹립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하고 다시 豫章王 蕭棟(?~552)을 옹립하였다. 간문제 大寶 2년(551)에 간문제를 죽이고 소동을 폐한 뒤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漢이라 하고 연호를 太始로 고쳤다. 王僧辯(?~555) 등에게 토벌당하여 달아났다가 피살되었다.
역주3 高澄 : 521~549. 자는 子惠이며 高歡의 장자로 북위의 懷朔鎭에서 태어났다. 547년에 고환이 죽자, 고환을 대신하여 大丞相‧都督中外諸軍‧錄尙書事‧大行臺‧渤海王이 되었다. 東魏의 孝靜帝가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것을 알고 효정제를 유폐시킨 뒤 동위의 舊臣들을 죽이고 선위를 받으려고 모의했다가 선위 전날 膳奴에게 피살되었다. 아우 高洋(529~559)이 北齊(550~577)를 건립하고 文襄帝로 追諡하였다.
역주4 據河南叛 : 梁 武帝 太淸 원년(547) 1월 13일 신해일의 일이다.
역주5 請擧十三州內附 : 양 무제 태청 원년(547) 2월 13일 경진일의 일이다. 《자치통감》에는 3월 경진일로 되어 있으나, 3월에는 경진일이 없을 뿐 아니라 《梁書》 권3 〈武帝本紀 下〉에 “2월……경진일에 東魏의 司徒 후경이 豫章‧廣‧潁‧洛‧陽‧西揚‧東荊‧北荊‧襄‧東豫‧南兗‧西兗‧齊 등 13개 주를 가지고 내부할 것을 청하였다.[二月……庚辰 魏司徒侯景求以豫章廣潁洛陽西揚東荊北荊襄東豫南兗西兗齊等十三州內屬]”라는 구절에 근거하면 2월 경진일로 보아야 한다. 다만 13개 주의 명칭이 《자치통감》에는 豫‧廣‧郢‧荊‧襄‧兗‧南兗‧濟‧東豫‧洛‧陽‧北荊‧北揚으로 되어 있고, 《梁書》 권56 〈侯景列傳〉에는 후경이 行臺郞中 丁和를 무제에게 보내 항복을 청하면서 河南의 牧伯이자 大州의 수장인 豫州刺史 高成, 廣州刺史 暴顯, 潁州刺史 司馬世雲, 荊州刺史 郞椿, 襄州刺史 李密, 兗州刺史 邢子才, 南兗州刺史 石長宣, 濟州刺史 許季良, 東豫州刺史 丘元征, 洛州刺史 可朱渾願, 揚州刺史 樂恂, 北荊州刺史 梅季昌, 北揚州刺史 元神和 등과 남몰래 결탁하여 기회를 보아 東魏에 반란을 일으키자고 모의하였다고 말하고 있어, 구체적인 명칭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6 牧守 : 州郡의 장관을 이른다. 州의 장관은 ‘牧’, 郡의 장관은 ‘守’라고 한다.
역주7 : 저본‧512본에는 ‘朝’로 되어 있으나, 조선 태조 李旦의 피휘이므로 바로잡았다.
역주8 如金甌無一傷缺 : 흠이 없는 무쇠 주발처럼 완전하고 결점이 없다는 뜻으로, 국력이 강하여 외침을 받은 적이 없음을 비유한다. ‘金甌無缺’이라는 성어가 있다.
역주9 東魏……异言 : 梁 武帝 太淸 2년(548) 2월 조에 보인다.
역주10 正陽侯淵明 : 梁 武帝 蕭衍의 조카 蕭淵明(?~556)을 이른다. 자는 靖通이며, 무제의 長兄인 長沙王 蕭懿의 아들로 貞陽侯에 봉해졌다. 무제 太淸 원년(547) 11월에 都督이 되어 군대를 끌고 북벌을 나갔다가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北齊(550~577)가 강성해지면서 555년에 소연명을 梁나라 황제로 세워 남쪽으로 돌려보내자 양나라 장수 王僧辯(?~555)이 맞이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얼마 후에 陳霸先(503~559)이 왕승변을 죽이고 소연명을 내쫓아 太傅‧建安王으로 삼았다. 이듬해에 北齊에서 소연명을 불렀으나 등창이 나서 죽었다. 북제에서 사후에 閔皇帝로 追諡하였다.
역주11 司農卿 : 관직명이다. 양 무제 天監 7년(508)에 大司農을 사농경으로 바꾸고 太常卿‧宗正卿과 함께 春卿이라 칭하였다. 농사와 곡물 저장을 관장하였다.
역주12 傅岐 : ?~549. 남조 梁나라의 관리로 지금의 寧夏自治區 靈武인 北地郡 靈州 사람이다. 자는 景平이다. 양 무제 태청 원년(547)에 太僕, 司農卿을 역임하였다. 侯景의 난 때 후경에 의해 南豐侯에 봉해졌으나 거절하고 병든 몸으로 宮城의 포위를 뚫고 나가 자택에서 죽었다.
역주13 景以……反計 : 양 무제 太淸 2년(548) 2월 조에 보인다. 양 무제가 朱异의 말을 따라 蕭淵明에게 東魏와 화친하겠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동위에서 보낸 사신 夏侯僧辯에게 주었는데, 하후승변이 돌아가는 길에 壽陽을 들렀다가 侯景에게 억류되어 모두 자복하였다. 후경은 이에 스스로 소연명에게 답장을 써서 보내고 무제에게는 화친을 반대하는 내용의 계문을 올렸다. 또한 별도로 주이에게는 금 3백 냥과 함께 편지를 보냈는데, 주이는 이 금만 받고 무제에게 올리는 계문은 전하지 않았다.
역주14 鄱陽……爲通 : 양 무제 태청 2년(548) 8월 조에 보인다. 蕭範(498~549)은 양 무제 蕭衍의 異母弟 蕭恢의 아들로, 자는 世儀이며 지금의 산동성 臨沂市 蘭陵縣인 蘭陵 사람이다. 아버지 소회가 죽은 뒤 작위를 이어받아 鄱陽王에 봉해졌다. 太子洗馬로 벼슬을 시작하여 秘書郞, 黃門郞, 衛尉卿, 益州刺史, 安北將軍, 南豫州刺史 등을 역임하였다. 侯景의 난 때 臺城이 함락되자 나가서 東關을 지키며 北魏에 원군을 요청하고 두 아들을 인질로 보냈으나 북위에서는 끝내 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에 군대를 끌고 湓城으로 갔는데, 尋陽王 蕭大心이 소범을 미워하여 곡물을 구매하지 못하도록 막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고 소범 역시 등창이 나서 죽었다.
역주15 景反……興兵 : 梁 武帝 太淸 2년(548) 8월 10일의 일이다.
역주16 少府卿 : ‘卿’은 대전본‧사고본에는 없다. ‘少府卿’은 관직명이다. 양 무제 天監 7년(508)에 少府를 고친 것으로, 太府卿‧太僕卿과 함께 夏三卿으로 칭한다. 관부의 수공업을 관장하였다.
역주17 徐驎 : ?~548. 남조 梁나라 吳郡 吳縣 사람이다. 朱异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라 陸驗과 함께 번갈아가며 少府丞‧太市令을 역임하였다. 虐政으로 상인들에게 원망을 받았으며 주이‧陸驗과 함께 三蠹로 불렸다. 평소 邵陵王 蕭綸(?~551)의 미움을 받았는데,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소륜에게 피살되었다. 《南史 卷77 陸驗列傳 徐驎》
역주18 : 저본‧대전본‧509본‧512본‧사고본에는 모두 ‘朱’로 되어 있으나, 인명의 오류이므로 《梁書》 卷56 〈侯景列傳〉과 《자치통감》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19 太子右衛率 : 관직명이다. 동궁의 屬官으로, 崇榮‧永吉‧崇和‧細射 등 4營의 衛士를 통솔하여 동궁을 守衛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역주20 陸驗 : ?~?. 남조 梁나라 吳郡 吳縣 사람이다. 젊어서 가난하여 장사로 부를 이루고 이 부를 이용해 권신들을 섬겼다. 주이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라 少府丞‧太市令을 역임하였다. 양 무제를 위해 재물을 다루면서 가혹하게 하여 모든 상인들이 두려워하였다. 《南史 卷77 陸驗列傳》
역주21 制局監 : 관직명이다. 尙書省 소속의 하급 관리로 주로 寒門 출신이 담당하였다. 병기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역주22 周石珍 : ?~552. 建康城 노복 충신으로 대대로 비단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開陽令‧直閣將軍을 역임하였으며 南豐縣侯에 봉해졌다. 후에 侯景에게 항복하여 후경을 위해 제도와 儀仗을 모두 제정하였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 江陵으로 압송되어 腰斬당하였다. 《南史 卷77 周石珍列傳》
역주23 朝野……僕射 : 양 무제 태청 3년(549) 1월의 일이다. 대신이 죽은 뒤 추증하는 것은 後漢 초기에 시작되어 六朝 때 매우 성행하였는데, 다만 尙書官만은 종래 추증하지 않았으나 이때 특례로 상서관을 추증한 것이다. 상서복야는 육조시대 상서령의 副職이기는 하였으나 令이 없는 경우 令과 지위의 고하 차이가 없었으며 복야의 벼슬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집정자였다. 令과 복야를 병칭하여 ‘朝端’ 또는 ‘端右’라고 불렀다. 우복야는 禮制를 관장하였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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