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魏
이 與
有隙
注+澄, 高歡之子, 世專魏政.하여 內不自安
하여 하고 어늘 上
이 召群臣廷議
하니 皆謂非宜
러라
是歲正月乙卯
에 上
이 夢中原
가 皆以地來降
하고 에 見朱异告之
한대 异
가 曰 此
가 宇內混一之兆也
라하더니
及景使가 至하여 稱景定計가 以正月乙卯라한대 上이 愈神之하나 然意猶未決하여
嘗獨言我國家
가 하니 今忽受景地
가 詎是事宜
며 脫致紛紜
이면 悔之何及
이리오
朱异가 揣知上意하고 對曰 聖明이 御極에 南北이 歸仰호대 正以事無機會라 難達其心이러니
今侯景이 分魏土之半以來하니 自非天誘其衷‧人贊其謀면 何以至此리오
若拒而不納이면 恐絶後來之望일까하노이다 上이 乃定議納景하다
還
注+淵明, 宗室子, 以戰敗陷魏.이러니 淵明
이 亦遣人奉啓
어늘 上
이 得啓流涕
하고 與朝官議之
한대
朱异
가 又言 靜寇息民
이 和實爲便
이니이다 가 曰 高澄
이 何事須和
리오 必是設間
이라
故命正陽遣使하여 欲令侯景自疑니 景意不安이면 必圖禍亂하리니 若許通好인댄 正墮其計中이니이다
异가 固執宜和라하고 上이 亦厭用兵하여 乃從异言하다
异等이 皆以姦佞으로 蔽主弄權하여 爲時人所疾이라 故景이 託以興兵하다
及景
이 濟江圍臺城
에 注+時, 太淸三年正月也. 三月城陷. 五月武帝殂, 簡文立, 爲景所簒.하다
18-19-가
동위東魏의
후경侯景이
고징高澄과 사이가 벌어져
注+‘고징高澄’은 고환高歡의 아들이다. 고환의 대를 이어 동위東魏의 국정國政을 전횡하였다.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하남河南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13개
주州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양梁나라에
귀부歸附할 것을 청하였다.
양 무제梁 武帝가 신하들을 불러 조정에서 의론하였는데 모두들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해 정월 을묘일(17일)에 무제武帝가 중원의 주목州牧과 군수郡守가 모두 땅을 들고 와서 항복하는 꿈을 꾸고서 아침에 주이朱异를 소견하고 꿈 얘기를 하자 주이가 말하였다. “이것은 사해 안이 통일될 징조입니다.”
후경의 사자使者가 이르러 후경이 계획에 정한 날짜가 정월 을묘일이라고 말하자, 무제가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한번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금구金甌와도 같아서 조금도 손상되거나 흠결된 부분이 없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후경의 땅을 받는다면 어찌 이 일이 마땅하겠는가. 만일 혼란을 불러오기라도 한다면 그때 가서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주이가 무제의 의중을 미루어 짐작하고 대답하였다. “황상께서 즉위하시자 남북이 귀부하고자 우러러보지만 바로 그런 기회를 가질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을 표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후경이 동위東魏 국토의 반이나 되는 땅을 가지고 오겠다 하니, 이것은 본래 하늘이 그 마음을 인도하고 사람들이 그 계모計謀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후에 귀부하러 올 자들의 희망을 끊을까 두렵습니다.” 무제가 마침내 후경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논의를 정하였다.
동위東魏의
고징高澄이 자주 편지를 보내 다시 통교하여 우호관계를 맺자고 청하고
정양후 소연명正陽侯 蕭淵明의 귀국을 허락하였는데
注+‘소연명蕭淵明’은 양梁나라 종실의 자손이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동위東魏에 억류되었었다. 소연명 역시 사람을 보내 상주문을 올리자,
양 무제梁 武帝가 상주문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관원들과 논의하였다.
주이朱异가 또 말하였다. “도적을 잠잠하게 하고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은 화친이 실로 유리합니다.” 사농경 불기司農卿 傅岐가 말하였다. “고징이 무슨 일로 화친이 필요하겠습니까. 필시 이간책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양후에게 사자使者를 보내도록 명하여 후경侯景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심이 들게 하고자 한 것이니, 후경이 불안해한다면 후경은 반드시 화란을 도모할 것입니다. 만일 저들과 왕래하며 우호관계 맺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바로 그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주이가 한사코 화친을 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무제 역시 전쟁 일으키는 것을 싫어해서 무제는 마침내 주이의 말을 따랐다.
후경侯景이 금 3백 냥을 주이朱异에게 보냈는데 주이가 금만 받고 후경의 계문啓文은 양 무제梁 武帝에게 전하지 않았다. 후경이 이에 비로소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파양왕 소범鄱陽王 蕭範이 은밀히 후경의 모반에 대해 계문을 올렸는데, 무제가 변경의 문제를 전적으로 주이에게 맡겨서 동정動靜을 모두 주이의 손을 거치게 하니, 주이는 후경이 필시 모반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소범의 계문을 더 이상 무제에게 전하지 않았다.
후경侯景이 수양壽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이朱异와 소불경 서린少府卿 徐驎, 태자우위수 육험太子右衛率 陸驗, 제국감 주석진制局監 周石珍을 주벌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다.
주이 등이 모두 간사함과 아첨으로 군주의 이목을 가려서 권력을 쥐고 흔들어 당시 사람들에게 질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후경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후경이
장강長江을 건너
대성臺城을 포위하자
조야朝野가 모두 주이를 탓하였다. 주이가 부끄러움과 분노로 병이 나서 죽자,
무제武帝가 매우 애석해하여 특별히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추증하였다.
注+때는 양 무제 태청梁 武帝 太淸 3년(549) 정월이다. 3월에 궁성이 함락되었다. 5월에 무제가 붕어하고 간문제簡文帝가 즉위하였는데, 얼마 뒤 황위皇位를 후경侯景에게 찬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