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대답하였다. “‘中’이 이름은 하나이면서 뜻은 둘이니, 程子가 본래 이에 대해 언급했었다. 이제 程子의 설에 따라 추론해보면, ‘不偏不倚’라고 한 것은 程子가 이른바 ‘중앙에 있다.[在中]’는 뜻이다.
아직 발현하기 전에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없는 것을 이름한 것이고, ‘無過不及’은 程子가 이른바 ‘中의 道[中之道]’이니 行事에 드러났을 때 각각 그 中을 얻은 것을 이름한 것이다.
‘不偏不倚’는 서 있는데 네 모퉁이에 가깝지 않은 것과 같으니 마음의 본체이며 장소의 중앙이다. ‘無過不及’은 길을 가는데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 이치의 당연함이며 일의 中道이다.
그러므로 아직 발현하기 전의 큰 근본에 있어서는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은 것[不偏不倚]’의 명칭을 취하기는 하였지만 지나치거나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의 본체가 본래 여기에 있다.
그것이 발현하였을 때 중도를 얻게 되어서는 비록 그 주장하는 바가 한 가지 일에 편벽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바로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없는 것이 한 바여서 한 가지 일에서도 편벽되거나 치우친 적이 없다.
때문에 程子가 또 말하기를 ‘和를 말하면 中은 그 안에 있고, 中을 말하면 희노애락은 그 안에 있다.[言和則中在其中 言中則含喜怒哀樂在其中]’라고 하였고,
呂大臨도 말하기를 ‘그것이 아직 발현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 마음이 지극히 虛靈하여 편벽되거나 치우친 것이 없다. 그러므로 「中」이라고 이르니, 이 마음을 가지고 만물의 변화에 응한다면 어디를 간들 中이 아님이 없다.[當其未發 此心至虛 無所偏倚 故謂之中 以此心而應萬物之變 無往而非中矣]’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두 가지 뜻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體와 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서명을 ‘中庸’이라고 한 의미에 대해 한 가지 뜻만 취하고 다른 뜻을 버려둘 수 없었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