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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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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帝時 上書曰 臣 聞秦有十失 其一 尙存하니 治獄之吏 是也
25-8-가
漢 宣帝 때에 路溫舒가 다음과 같이 上書하였다. “신이 들으니 秦나라에 열 가지 잘못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가지 잘못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니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가 이것입니다.
秦之時 羞文學하고 好武勇하며 賤仁義之士하고 貴治獄之吏하며 正言者 謂之誹謗이라하고 遏過者 謂之妖言이라하니
진나라 때에 文學을 부끄럽게 여기고, 武勇을 좋아하였으며, 仁義를 따르는 士를 천시하고,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를 존중하며, 바른말 하는 것을 비방죄라고 하고, 잘못을 막는 간언을 妖言罪라고 하였습니다.
故盛服先生 不用於世하며 忠良切言 皆鬱於胸하고 譽諛之聲 日滿於耳하여
이 때문에 品德이 고상한 儒者는 세상에 쓰이지 않았으며, 충직하고 선량한 사람의 절실한 말은 모두 가슴속에 답답하게 쌓였고 칭찬하고 아첨하는 소리는 날마다 귀에 가득 차게 하여서,
虛美하여 實禍 蔽塞하니 此乃秦之所以亡天下也
허황된 찬미가 군주의 마음을 어지럽히게 함으로써 실제적인 禍가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秦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입니다.
方今天下 賴陛下恩厚하여 亡金革之危‧飢寒之患하나 然太平未洽者 亂之也
바야흐로 천하가 폐하의 두터운 은덕에 힘입어 병란의 위기와 기근이나 한파의 우환은 없지만 완전한 태평성세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獄事가 이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夫獄者 天下之大命也 死者 不可復生이요 斷者 不可復屬이니
옥사는 천하의 중대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고 신체가 절단된 사람은 다시 붙일 수 없습니다.
이라하니 治獄吏則不然하여 上下 相敺하여 以刻爲하니
《서경》에 이르기를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정해진 법대로 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라.’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상하가 서로 몰아붙여 각박하게 처리하는 것을 명철하다고 여기니
深者 獲公名하고 平者 多後患이라 故治獄之吏 皆欲人死하나니 非憎人也 自安之道 在人之死
법조문을 가혹하게 적용하는 자는 공무를 잘 수행한다는 명성을 얻고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는 자는 후환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가 모두 사람이 죽기를 바라니 사람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편안히 하는 방도가 사람이 죽는 데 있어서입니다.
是以 死人之血 流離於市하고 被刑之徒 比肩而立하여 大辟之計 歲以萬數하니 太平之未洽 凡以此也니이다
이 때문에 죽은 사람의 피가 저자에 흥건하고 肉刑을 받은 죄수가 즐비하게 있어, 사형을 당한 사람의 수가 한 해에 만으로 헤아리니 태평성세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이러한 문제 때문입니다.
夫人情 安則樂生하고 痛則思死하나니 捶楚之下 何求而不得이리오
무릇 사람의 常情이 편안하면 삶을 즐거워하고 고통스러우면 죽음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곤장을 치면 무엇을 요구한들 얻지 못하겠습니까.
故囚人 不勝痛則飾辭以視之하며 吏治者 利其然則指道以明之하며 上奏畏卻則鍛鍊而周內之하나니
그러므로 옥에 갇힌 사람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진술을 꾸며 죄를 인정하며, 관리로서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이 그러한 점을 이롭게 여기면 지시하고 인도하여 죄상을 밝히며, 上奏가 각하될까 두려우면 주밀하게 죄안을 다듬어서 죄에 빠뜨립니다.
蓋奏當之成 雖咎繇 聽之라도 猶以爲死有餘辜리니 何則하고 文致之罪 明也
보고할 죄가 확정되었을 때에는 비록 咎繇(皐陶)가 이를 다스리더라도 오히려 죽음으로도 다 씻지 못할 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무엇 때문입니까? 죄를 주밀하게 만들어 확정시킨 죄명은 많았고, 극도로 그럴듯하게 꾸민 죄는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故俗語 畫地爲獄이라도 議不入이요 刻木爲吏라도 期不對라하니 此皆疾悲痛之辭也
그러므로 시속의 말에 이르기를 ‘땅에 금을 그어놓고 감옥이라 하더라도 온갖 궁리를 하여 들어가지 않고, 나무를 깎아 獄吏라고 하더라도 기필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옥리를 미워하고 비통해하는 말입니다.
故天下之患 莫深於獄이요 敗法亂正하며 離親塞道 莫甚乎治獄之吏하니 所謂一 尙存者也니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우환이 옥사보다 심각한 것이 없고, 법을 망치고 正道를 어지럽히며 친족을 이간하고 도를 막는 것이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아직도 남아 있다는 그중에 ‘한 가지 잘못’입니다.”
深愍焉하사 迺下詔曰 間者 用法巧하고하니 是朕之不德也
未央宮과 宣室未央宮과 宣室
宣帝가 이를 매우 근심하여 이에 조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근간에 관리들이 법을 적용하는 것이 교묘해지고 법조문이 점점 가혹해지니 이는 짐이 부덕하기 때문이다.
夫決獄不當하여 使有罪興邪하며 不辜하여 父子 悲恨하니 朕甚傷之하노라
옥사에 대한 처결이 부당하여 죄가 있는 사람이 간사한 짓을 일으키게 하고 죄 없는 사람이 誅戮을 당하여 부모와 자식이 비통해하고 한스럽게 여기니 짐이 이를 매우 애통하게 여긴다.
今遣하여 與郡鞫獄 任輕祿薄이라 其爲秩六百石員四人하여 其務平之하여 以稱朕意하라하시고
지금 廷尉史를 파견하여 郡守와 함께 옥사를 신문하게 하는 것이 책임이 가볍고 봉록이 박하기 때문에, 廷尉平을 두되 秩은 六百石으로 하고 인원은 4인으로 하라. 그리하여 공평하게 처결하는 데 힘써서 짐의 뜻에 걸맞게 하라.”
於是爲廷尉하시고 求明察寬恕等爲廷平하사
그리고 이에 于定國을 뽑아 廷尉로 삼고, 밝게 살피고 관대한 黃霸와 같은 자를 찾아 정위평으로 삼았다.
季秋後請讞時 常幸宣室하사 居而決事하시니注+, 殿名. 在前殿之側, 則居之. 獄刑 號爲平矣러라
그리하여 늦가을이 된 뒤에 옥사에 대한 처결을 청할 때 선제가 항상 宣室에 거둥하여 재계하고 있으면서 옥사를 처결하니,注+‘宣室’은 殿 이름이다. 未央宮의 前殿 옆에 있고, 재계하면 여기에 거처하였다. 형벌이 공평하다고 불렸다.
역주
역주1 25-8-가 : 《前漢書》 권51 〈路溫舒傳〉, 《前漢書》 권23 〈刑法志〉, 《資治通鑑》 권25 〈漢紀17 宣帝 上之下〉 地節 3년(기원전 67)에 보인다.
역주2 路溫舒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西漢의 관료, 법관이다. 자는 長君이다. 鋸鹿 東里 사람이다. 일찍이 율령을 익혀 縣獄吏, 郡決曹史 등이 되었다. 이후 孝廉으로 천거되어 山邑縣丞이 되었다. 漢 昭帝 元鳳 연간(기원전 80~기원전 74)에 奏曹掾, 廷尉史 등을 역임하였다. 宣帝 때 〈尙德緩刑書〉를 올려 덕을 숭상하고 형벌을 완화할 것을 주장하여 선제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거듭 승진하여 右扶風丞이 되었다. 후에 臨淮太守가 되어 훌륭한 치적을 쌓았으나 재임 중에 죽었다. 《前漢書 卷51 路溫舒傳》
역주3 : 사고본에는 ‘薰’으로 되어 있다.
역주4 與其……不經 : 《서경》 〈虞書 大禹謨〉에 보인다. 皐陶가 舜임금의 법 집행에 대해 찬미한 말이다. 25-3-가 참조.
역주5 : 대전본에는 ‘名’으로 되어 있다.
역주6 : 대전본에는 ‘練’으로 되어 있다.
역주7 : 사고본에는 ‘曰’로 되어 있다.
역주8 : 사고본에는 이 뒤에 ‘之風’ 2자가 더 있다.
역주9 : 대전본에는 ‘䆮’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 대전본에는 ‘興’으로 되어 있다.
역주11 廷史 : 漢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廷尉史라고도 하였다. 刑獄의 사무를 관장하는 廷尉의 속관이다. 지방에 파견되어 옥사의 심문을 감독하였다.
역주12 : 대전본에는 ‘致’로 되어 있다.
역주13 廷平 : 漢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廷尉平 또는 廷評이라고도 하였다. 漢 宣帝 地節 3年(기원전 67)에 처음 설치되었다. 詔獄을 平決하는 일을 맡았다.
역주14 于定國 : ?~기원전 41. 漢 宣帝 때의 관료이다. 자는 曼倩이다. 東海 郯縣(담현) 사람이다. 처음에 獄史와 郡決曹를 거쳐 御史中丞이 되었다. 선제가 즉위한 뒤에 光祿大夫‧平尙書事가 되었다. 선제 本始 3년(기원전 71)에 水衡都尉가 되었다. 宣帝 地節 원년(기원전 69)에 廷尉가 되었다. 위인이 겸손하였다. 부친인 于公은 옥사를 공평히 다스린 것으로 이름이 났는데 우정국 역시 송사를 신중하게 잘 처리하여 억울해하거나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선제 甘露 2년(기원전 52)에 어사대부가 되었고 감로 3년에 승상이 되었고 西平侯에 봉해졌다. 元帝 초에 關東에 연이어 재해가 발생하여 대규모 유민이 발생하자 사직하였다. 시호는 安이다.
역주15 黃霸 : 漢 武帝 때에는 河南太守의 丞으로, 宣帝 때에는 潁川太守로 있으면서 獄事를 관대하게 처리하고 백성을 잘 보살폈으므로, 漢代에 목민관을 말할 때는 반드시 황패를 먼저 꼽았다. 《漢書》에 열전이 보인다.
역주16 : 대전본‧사고본에는 ‘齋’로 되어 있다.
역주17 宣室 : 漢代 未央宮 前殿의 正室이다. 《淮南子》에 “周 武王이 宣室에서 殷 紂王을 죽였다.[武王殺紂于宣室]”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史記》 〈賈生列傳〉의 司馬貞의 索隱에는 《三輔故事》를 인용하여 “未央殿의 북쪽에 있었다.[在未央殿北]”라고 하였고, 如淳은 “정령과 교화를 펴는 방이다.[布政敎之室也]”라고 하였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司馬貞索隱》 《前漢書 卷3 刑法志》 《淮南子 本經訓》
역주18 : 사고본에는 ‘齊’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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