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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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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 太后커늘 諸呂 欲爲亂이러니 當是時하여 趙王‧梁王 將兵하여하니 太尉勃 不得入主兵이라
16-4-가
高后 8년(기원전 180)에 태후가 붕어하자 여씨들이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 당시에 趙王 呂祿과 梁王 呂産이 군권을 맡아 南軍과 北軍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태위 周勃은 軍中으로 들어가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다.
與呂祿善이러니 絳侯 乃與丞相平으로하여 使人劫酈商하여 令其子寄 歸將印하여 以兵屬太尉하니
酈商의 아들 酈寄가 여록과 사이가 좋았는데, 絳侯(주발)가 이에 승상 陳平과 모의하여 사람을 시켜서 역상을 겁박하여 그의 아들 역기로 하여금 거짓말로 여록을 설득해 장군의 印綬를 반납하여 군대를 태위에게 배속하도록 하였다.
太尉 遂將北軍하나 然尙有南軍이러니 丞相平 乃召朱虛侯佐太尉하여 遂誅諸呂하고 立文帝하다
태위가 마침내 북군을 통솔하였으나 아직도 남군이 남아 있었다. 승상 진평이 이에 朱虛侯 劉章을 불러 태위를 돕게 하여 마침내 여씨들을 주살하고 文帝를 옹립하였다.
역주
역주1 16-4-가 : 관련 내용이 《史記》 卷9 〈呂太后本紀〉, 《資治通鑑》 卷13 〈漢紀5 高皇后〉 8년(기원전 180) 기사 등에 보인다. 高后 8년 7월에 여태후가 죽고 나서 呂祿‧呂産 등이 난을 일으키려고 하자 陳平‧周勃 등이 서로 손을 잡고 9월에 여씨들을 주멸하였다. 그 다음 달인 윤9월에 고조의 아들인 代王 劉恒을 옹립하니 바로 文帝이다.
역주2 呂祿 : ?~기원전 180. 單父 사람이다. 呂釋之의 아들로 呂后의 조카이다. 高后 원년(기원전 187)에 漢陽侯로 봉해지고 北軍을 장악하고 궁궐을 호위하였으며 고후 7년(기원전 181)에는 趙王으로 봉해졌다. 여후의 병이 위중해지자 上將軍이 되었다. 여후가 죽은 뒤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周勃‧陳平 등에게 주살당했다.
역주3 呂産 : ?~기원전 180. 單父 사람이다. 呂澤의 둘째 아들로 呂后의 조카이다. 惠帝 원년(기원전 194)에 汶侯로 봉해졌으며 高后 원년(기원전 187)에는 南軍을 장악했다. 고후 6년(기원전 182)에 呂王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에 梁王으로 轉封되었다. 여후의 병이 위중해지자 相國이 되었으며 여후가 죽은 뒤에 반역을 획책하다가 朱虛侯 劉章에게 주살당했다.
역주4 南北軍 : 南軍과 北軍을 말한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황제와 중앙 정권에 소속된 이들의 안전을 보위하는 것으로 中央軍에 속했다. 남군은 황궁을 수비하는 禁衛軍으로 西漢 前期에는 대략 2만 명이 넘었으며 長安城 남쪽 황궁 안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북군은 도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상주했던 군대로 未央宮과 長樂宮 북쪽에 군영이 있었다. 병력‧무기‧장비 면에서 남군을 능가하였는데, 평소에는 남군과 함께 번갈아 장안 일대의 경비를 담당하였다가 戰時에는 대다수가 將軍을 따라 출정하였다. 《劉向東, 中國古代軍事典章制度, 沈陽:白山出版社, 2012, 39~40쪽》 《漢書辭典 北軍》
역주5 軍中 : 사고본에는 ‘中軍’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사기》에는 ‘軍中’으로 되어 있다.
역주6 酈商 : ?~기원전 180. 高陽 사람이다. 秦나라 말 陳勝이 봉기할 때 무리를 이끌고 귀부했다가 劉邦이 陳留를 공격하자 군대를 이끌고 유방에게 귀부하였다. 이후 宛‧長社‧漢中 등을 공략하는 데 공을 세워 信成君에 봉해지고, 유방이 漢王이 되자 장군이 되어 臧荼를 격파하였다. 유방이 帝位에 오르자 右丞相이 되었으며, 陳豨‧黥布 등을 평정한 뒤 曲周侯로 進封되었다. 유방이 죽자 惠帝와 呂后를 보좌하였으며 高后 8년(기원전 180)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景이다.
역주7 : ?~?. 酈寄를 말한다. 자는 況 또는 兄으로 陳留 高陽 사람이다. 酈商의 아들로 본래 呂祿과 친하였다. 呂后가 죽자 역상이 周勃의 겁박을 받아 여록이 거느리던 북군의 군권을 내놓게 하였다. 文帝 원년(기원전 179)에 역상의 뒤를 이어 曲周侯가 되었다 吳‧楚 7國이 난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이끌고 趙를 공격했다가 10달이 되도록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欒布의 원병과 합세하고 나서야 평정할 수 있었다. 景帝 中元年(기원전 148)에 경제의 王皇后의 언니 臧兒를 부인으로 삼으려다 경제의 노여움을 사 제후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역주8 紿說呂祿 : 酈寄가 呂祿에게, 지금 태후가 죽었는데도 封國으로 가 藩屛을 지키지 않고 계속 병권을 가지고 있으면 대신과 제후들의 의심을 살 것이므로 인수를 내놓고 병권을 태위에게 소속시키라고 제의하였다. 또한 梁王 呂産으로 하여금 相國의 인수를 내놓게 하여 대신들과 맹약하고 함께 封國으로 돌아가면 대신들이 편안할 수 있어 여록에게 이로움이 된다고 설득하였다. 여록이 이 말을 믿고 병권을 내놓고자 사람을 시켜 여산 및 여씨 가문의 노인들에게 이를 통보하였으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얼마 후에 태위 周勃이 북군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했는데, 황제의 符節을 관장한 襄平侯 紀通이 부절을 가지고 어명을 사칭하여 결국 주발이 들어가게 해주었다. 주발이 다시 역기와 典客 劉揭로 하여금 먼저 여록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자, 이들이 여록에게 장군의 인수를 반납하고 봉국으로 가지 않으면 화가 닥칠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록은 역기가 자신을 속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인수를 유게에게 주어 마침내 병권을 주발에게 넘겼다. 《史記 卷9 呂太后本紀》
역주9 : ?~기원전 177. 劉章을 말한다. 齊悼惠王 劉肥의 아들로 漢 高帝 劉邦의 손자이다. 高后 원년(기원전 187)에 朱虛侯로 봉해졌다. 한번은 呂后와 呂氏들이 있는 술자리에서 軍法에 따라 술을 돌리겠다고 청했는데, 그 뒤 여씨 일족 가운데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달아나자 그를 검으로 베었다. 이후 여씨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여후가 죽은 뒤 陳平‧周勃 등이 呂氏 일족을 주살할 때 呂産을 未央宮에서 주살하였다. 그 공으로 文帝 2년(기원전 178)에 城陽王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景이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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