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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1)

대학연의(1)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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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魏陳隋唐數君之學
漢 元帝 학문
多材藝하사하며 鼓琴瑟하며 吹洞簫하고 自度曲하여 被歌聲호대 節度 窮極幼眇하며
少而好儒하더시니 及卽位 徴用儒生하여 委之以政하니 迭爲宰相而上
牽制文義하여 優游不斷하니 孝宣之業 衰焉하니라


나라 여러 군주의 학문
원제元帝의 학문
4-9-가
원제元帝재예才藝가 많아 대전大篆을 잘 썼고 을 탔으며, 퉁소를 불고 직접 작곡하여 노래를 입히되 구절을 나누어 구획(악보)을 만드는 것을 지극히 정미精微하게 하였다.
젊어서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는데, 즉위하자 유생儒生을 불러 등용하여 그들에게 정사를 맡기니 공우貢禹설광덕薛廣德위현성韋玄成광형匡衡이 번갈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원제는 문사文辭에 이끌려 우유부단하였기에 선제宣帝공업功業이 쇠퇴하게 되었다.


역주
역주1 4-9-가 : 《漢書》 卷9 〈元帝紀〉의 贊에 보인다.
역주2 漢元帝 : 기원전 76~기원전 33(재위 기원전 49~기원전 33). 前漢의 10대 황제 劉奭으로, 宣帝의 장남이다. 성격이 유순하고 儒學을 좋아하였다. 즉위한 뒤에 蕭望之 등과 같은 유생을 승상으로 기용하기도 하였으나, 외척과 환관들을 중용하는 바람에 그들이 국정을 전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치세 기간에는 백성들의 조세 부담이 가중되었으며 변방이 불안하였다.
역주3 史書 : 周 宣王 때의 太史였던 史籀가 만든 大篆을 말한다. 《漢書 卷9 元帝紀 顔師古注》
역주4 分刌節度 : ‘刌’은 ‘자르다’라는 뜻으로 ‘구절을 나누어 구획을 만드는 것[分切句絶 爲之節制]’을 말한다. 《漢書 卷9 元帝紀 顔師古注》
역주5 : 사고본에는 이 뒤에 小字로 ‘音忖’이라고 讀音을 표시하였다.
역주6 : 貢禹(기원전 124~기원전 44)를 가리킨다. 자는 少翁으로, 琅邪 사람이다. 董仲舒의 제자인 嬴公에게 《春秋公羊傳》을 배웠다. 宣帝 때 博士가 되었으며, 元帝 때 御史大夫가 되었다. 궁중의 사치와 요역의 경감에 대하여 여러 차례 상주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고 상업보다 농업을 중시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역주7 : 薛廣德(?~?)을 가리킨다. 자는 長卿으로, 沛郡 相縣 사람이다. 戴勝‧戴舍 등에게 《魯詩》를 전수하였으며, 宣帝 때 經學博士가 되고 石渠閣 회의에 참석하였다. 諫議大夫‧御史大夫 등을 역임하고 三公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황제에게 직언을 아뢰었다. 뒤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역주8 : 韋玄成(?~기원전 36)을 가리킨다. 자는 少翁으로, 魯國 鄒縣 사람이다. 宣帝 때의 승상이자 유학자인 韋賢의 아들로,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고 경학에 능통했다. 元帝 때 太子太傅‧御史大夫를 지내고, 기원전 42년(永光2)에 승상이 되었다. 父子가 재상을 지냈다 하여 “자식에게 황금을 한 바구니 주느니 經 하나를 가르쳐주는 것이 낫다.[遺黃金滿籝 不如敎子一經]”라는 말이 생겨났다.
역주9 : 匡衡을 가리킨다. 대전본에는 ‘匡’이 없고, 사고본에는 ‘康’으로 되어 있다. 4-2-나(按) 주석 ‘匡衡’ 참조.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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