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成湯의 이 말씀은 君師의 소임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사람에게 지극히 선한 性을 줄 수는 있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을 온전하게 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은 君師의 소임입니다.
漢代의 儒者들은 ‘衷’을 ‘善’이라는 뜻으로 보았으니, 신은 ‘衷’이 바로 ‘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누구에게나 각각 仁‧義‧禮‧智의 덕을 부여하여 안에서 혼연히 한 덩어리가 되어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없는 이것이 이른바 ‘衷’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입장에서 말하면 ‘衷’이라 하고, 사람이 받은 입장에서 말하면 ‘性’이라 하니, 두 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준 것은 애초에 지혜롭고 어리석은 차이가 없었지만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은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잡박한 것이 타고난 것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반드시 君師가 나와서 사람들이 지닌 떳떳한 본성을 따라서 계도해줌에 힘입어야 합니다.
舜임금이 五典을 아름답게 한 것과 周나라에서 六德‧六行을 가르친 것이 모두 그 일입니다.
原注
본성은 본래 지극히 선하므로 이로 인하여 가르치는 것이니, 이것을 ‘順’이라 이릅니다.
만약 본성이 본래 악하여 선을 억지로 가르친다면 이는 거스르는 것[逆]이지 따르는 것[順]이 아닙니다.
‘若’이라는 글자를 보면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猷’는 ‘道’이니 ‘道’는 바로 ‘性’입니다.
體로 말하면 性이라 하고 用으로 말하면 道라 하니, 실은 하나입니다.
그 본성을 따라서 그 道를 편안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은 임금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편안하게 여기도록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어버이는 慈愛를 편안하게 여기며 자식은 孝를 편안하게 여겨서, 자애와 효가 자연스러워 바꿀 수 없다는 것과 당연하여 그만두면 안 된다는 것을 안 뒤에야 편안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成湯이 천하를 소유한 초기에 곧바로 이것을 가지고 자임하였으니, 신이 이 때문에 “君師의 소임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후에 ‘秉彛’‧‘受中’이라는 말이 뒤이어 잇달아 나와서 孔子와 孟子에 이르러서는 性善의 이치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萬世 性學의 근원을 연 것은 성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아, 聖人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