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하늘이 物을 냄에 각각 하나의 性을 부여하였다.
단지 나에게 있는 渾然한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性의 體가 되는 것은 또한 오직 仁‧義‧禮‧智‧信 다섯 가지일 뿐이니, 천하의 이치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다섯 가지 중에 이른바 ‘信’이라는 것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이치이다.
仁‧義‧禮‧智가 모두 진실되고 거짓이 없기 때문에 ‘信’은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이다.
仁‧義‧禮‧智의 네 가지가 中에 있어서 각기 분별이 있기 때문에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
仁은 온화하고 사랑하는 이치이고, 義는 판정하여 알맞게 처리하는 이치이고, 禮는 공경하고 절제하는 이치이고, 智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이치이다.
原注
무릇 이 네 가지는 人心에 구비되어 있으니 바로 性의 本體이다.
이것이 아직 발현되기 전에는 漠然히 볼 수 있는 형상이 없다가, 발현하여 用이 되면 仁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되고 義는 不善을 부끄럽게 여기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되고 禮는 공경하는 마음[恭敬之心]이 되고 智는 옳음과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이 되니, 이른바 ‘情’이라는 것이다.
‘端’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어떤 물건이 안에 있어서 볼 수 없다가 반드시 그 단서로 인하여 밖에 발현된 뒤에야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性의 이치는 비록 형태는 없으나 단서의 발현은 징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에 仁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不善을 부끄럽게 여기고 미워하는 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에 義가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공경하는 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에 禮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옳음과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여기에 智가 있음을 알게 된다.
만일 본래 안에 이러한 이치가 없었다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난 이러한 단서가 있겠는가.
밖으로 드러난 이러한 단서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原注
仁‧義‧禮‧智에 대해 이미 경계를 분명히 안 뒤에는 또 이 네 가지 중에 仁과 義가 마주선 門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仁은 仁이고 禮는 仁이 드러난 것이며, 義는 義이고 智는 義가 감추어진 것이다.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이 비록 사계절이 되기는 하지만, 그 실상은 한 번 陰이 되고 한 번 陽이 되는 데 불과한 것과 같다.
봄과 여름은 모두 陽에 속한 것이고 가을과 겨울은 모두 陰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도를 세운 것을 陰과 陽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운 것을 柔와 剛이라고 하고 사람의 도를 세운 것을 仁과 義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原注
仁과 義가 비록 마주 서서 둘이 되지만, 仁은 낳고 낳는 뜻이 실로 네 가지 안에 두루 관통하여 유행한다.
그러므로 仁은 仁의 本體이고 禮는 仁의 節文이며, 義는 仁의 판단이고 智는 仁의 분별이다.
바로 봄의 생기가 사계절에 관통하는 것과 같으니 봄은 봄의 태어남이고 여름은 봄의 자라남이고 가을은 봄의 거두어들임이고 겨울은 봄의 저장됨이다.
그러므로 程子가 ‘四德의 元은 五常의 仁과 같으니, 치우쳐서 말하면 한 가지 일이고 오로지하여 말하면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다.
넷에서 둘이 되며 둘에서 하나가 되면 통솔함에는 종주가 있게 되고 모임에는 으뜸이 있게 되니, 천지의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