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여조겸이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상은商殷(상商나라)은 그래도 다른 세대이지만, 문왕文王은 성왕成王의 친할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문왕의 안일하지 않음을 다시 거론하여 성왕에게 고했으니, 말이 더욱 가깝고 뜻이 더욱 절실하다.
「그 또한[厥亦]」이라고 운운한 것은 문왕의 안일하지 않음을 논하고자 먼저 연원淵源의 유래를 말한 것이다. 무릇 혈기血氣를 가지고 있으면 늘 윗사람을 능멸할까 근심하게 된다.
학문하는 방도는 다른 것이 없다. 겸양謙讓하는 것뿐이니, 덜어내고 억누르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겸양하는 방법이다.
原注
태왕大王(고공단보古公亶父)과 왕계王季가 능히 스스로를 억누르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안일하지 않음에 힘썼던 것이 깊어서였다. 이것이 바로 문왕이 안일하지 않았던 연원이다. 그리고 문왕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스스로를 억누르고 두려워했던 것으로 말미암아 성인聖人이 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문왕이 변변치 않은 의복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업과 농사일에 뛰어들었다.’라는 것은, 스스로를 봉양하는 것을 검박하게 하고서 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부양하는 데 전념했음을 말한 것이다. 변변치 않은 의복은 아마도 한 가지를 든 것이니, 궁실과 음식 등 스스로를 봉양하는 것은 검박하게 했음을 모두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물은 양쪽 모두가 커질 수 없는 것이니, 자기를 봉양하는 데 후하면 반드시 백성들을 돌보는 데 박한 법이다. 문왕이 의복 등 스스로를 봉양하는 것과 같은 데에 본성이 있지 않아 전혀 뜻을 둔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힘을 과연 어디에 썼겠는가?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업에 뛰어들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농사일에 뛰어들어 백성들을 부양했을 뿐이다. 자신을 봉양하는 데 힘이 분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력이 백성들을 돌보는 데 온전히 들어간 것이다.
原注
「아름답게 유연한 것[휘유徽柔]」은 유연함이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답게 공손한 것[의공懿恭]」은 공손함이 깊고도 아름다운 것이다. 무릇 사람이 유연하고 손순하며 삼가고 점잖은 것을 「유연하고 공손한 것」이라고 하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아름답게 유연하고 아름답게 공손한 것」의 의미가 빛나는 것과 비교하면 크게 다르다.
백성에게 「힘없는[소小]」이라고 말한 것은, 대체로 일반 백성들이 아직 그 은택을 입지 못하면 품어서 보호하는 것이 여전히 두루 미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아비와 과부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어 살게 하였다.[혜선惠鮮]’라고 말한 것은, 홀아비와 과부 등 곤궁한 백성들이 의기소침하여 풀이 죽자 문왕文王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어루만지니, 활기차게 생기를 띠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주왕紂王이 위에서 군림하고 있어서 천하를 도탄에 빠뜨리자, 문왕은 방백方伯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 백성들을 모두 화합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격에 맞지 않게 한 잔 물로 불을 끄는 듯한 어려움이 있으면서 도를 바라보고도 아직 보지 못한 듯이 여기는 마음을 확충해나갔으니, 근면하면서도 수고로움이 저절로 응당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또한 문서의 양을 재거나 식사를 날라 오게 하여 유사有司의 소임을 대신했던 후세 사람과 어찌 같았겠는가.
原注
《서경書經》 〈입정立政〉에서 ‘문왕文王은 여러 가지 명령, 여러 가지 옥송獄訟, 여러 가지 금법禁法을 겸하는 일이 없었다.’라고 말하였다면, 이른바 ‘먹을 겨를도 없이 분주하였다.[不遑暇食]’라는 것은 그 근면함과 수고로움이 반드시 있었다는 것이다. 〈무일無逸〉을 읽으면 문왕의 노고를 알 수 있고 〈입정〉을 읽으면 문왕의 안일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겠는가. 지극한 노고 속에 지극한 안일이 있고, 지극한 안일 속에 지극한 노고가 있는 것이다.
유락遊樂과 사냥은 나라에 일정한 제도가 있으니, 유락과 사냥을 즐기는 것에 이른다면 이것들을 향락에 빠질 거리로 삼는 것이다. 이는 본래 문왕이 하지 않았던 일인데, ‘하지 않았다.[불위不爲]’라고 말하지 않고 ‘감히 하지 않았다.[불감不敢]’라고 말한 것은 삼가는 조심함 때문이다.
유락과 사냥의 간소함으로 보았을 때 그 비용이 절약됨을 알 수 있으니, 이미 낭비하는 것이 없으면 저절로 지나치게 징수하는 일이 없게 된다. 여러 제후국이 문왕에게 공상貢上하는 것에서 정식으로 규정된 수량 이외에는 한 터럭만큼도 더하는 게 없었던 까닭이다.
原注
문왕文王이 서백西伯으로 있었으니 거느리고 있던 여러 나라들이 일정하게 공상供上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이 패주霸主에게 공상貢上했던 경우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 장章에서는 문왕의 가법家法을 논했기 때문에 「안일하지 않음」의 조목으로서, 예컨대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 농사를 중히 여기는 것, 곤궁한 이를 돌보는 것, 정사에 근면한 것, 방탕하게 노는 일을 경계하는 것, 과도한 징수를 줄이는 것이 대략 모두 갖추어져 있다.
문왕이 장수했다고 한 것은 바로 앞 장章의 뜻이다. 이것을 가지고 백성을 단속했음에도 후세에 오히려 문왕이 우려하고 근면하여 수명이 줄어들었다는 말을 함부로 지어내 임금이 안일함을 좋아하도록 터준 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