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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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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7-2-나(按)
按 左氏傳 載晏子 對景公하니 略曰 하여 之數 其取之公也하고 其施民也 어늘
17-2-나(按)
[臣按] 《춘추좌씨전》에 晏子가 景公에게 대답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陳氏가 비록 큰 덕은 없으나 백성들에게 베푸는 것이 있어서注+田氏는 본래 陳에서 나왔기 때문에 陳氏라고도 한다. 豆‧區‧釜‧鍾과 같은 몇 가지 量器를 가지고 公稅를 징수할 때에는 적게 받고 백성들에게 베풀 때에는 후하게 주는데,
厚斂焉하고 陳氏 厚施焉하니 民歸之矣 後世若少惰 陳氏而不亡則其國也리이다
임금께서는 많이 걷으시고 진씨는 후하게 베푸니 백성들이 진씨에게 귀의하였습니다. 임금의 후대가 만약 조금 태만해지고 진씨가 망하지 않으면 나라는 진씨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公曰 善哉 是可若何 對曰 唯禮 可以已之니이다 在禮 하며 라하니이다
경공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오로지 禮만이 그러한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예에 따르면, 대부 집안에서 베푸는 것이 國人에까지 미쳐서는 안 되며 대부가 公家에 돌아갈 이익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公曰 善哉 我不能矣라하니 史記所謂 此也
경공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나는 못하겠지만.” 이라고 하였으니, 《사기》에서 안자가 간하였으나 경공이 듣지 않았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原注
方田氏之初 不過以小惠於國人而已 使景公用晏子之言하여 修明君臣上下之禮하여 使惠施 出於上而下不得私하며
田氏의 초기에는 작은 은혜를 國人에게 베풀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경공이 안자의 말에 따라 군신 상하의 예를 闡明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이 위에서 나오게 하고 아래에서 사사롭게 나올 수 없게 하며,
利權 歸於上而下不得擅則大分 明而人心이라 雖百田氏 其能竊國乎
작록과 권세가 위로 돌아가게 하고 아래에서 제멋대로 할 수 없게 했더라면, 分義가 분명해지고 민심은 한 곳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니, 100개의 田氏라 하더라도 어찌 나라를 훔칠 수 있었겠습니까.
景公 乃善之而不能用하여 在公則厚斂焉하고 田氏則厚施焉하니 驅其人而歸之也
景公이 마침내 그 말을 훌륭하게 여겼으나 쓰지 못하여 조정에서는 많이 거두어들이고 전씨는 후하게 베풀었으니, 이는 자신의 백성들을 몰아 전씨에게 귀의하게 한 것입니다.
景公 旣沒이어늘 於是 田乞 因主少國疑之際하여 得以擅廢立之權而國之大柄 在其掌握矣
경공이 죽고 나자 이에 전기는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어수선한 때를 이용하여 임금을 폐위하고 세우는 권한을 제멋대로 할 수 있게 되어 나라의 대권이 그의 수중에 있게 되었습니다.
及田乞 死而 代立하여 旣專惠施以作福하고 又專刑罰以作威하니
田乞가 죽고 전항이 그 지위를 이어받게 되자 施惠를 專斷하여 상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또 형벌을 전단하여 벌을 내렸습니다.
於是 弑君而人莫敢討하고 世臣公族 以次滅而人莫敢問하니 越再世卒有齊國 亦云晩矣
이에 임금을 시해하였음에도 감히 성토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世臣과 公族들을 차례로 멸하였는데도 감히 따지는 사람이 없었으니 두 세대를 지나 마침내 제나라를 차지한 것도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原注
《주역》에 이르기를,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시해하는 것은 갑자기 발생하는 변고가 아니라 그 연유한 것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분변하기를 일찌감치 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田氏之禍 在景公世하얀 猶可爲也어니와 及其旣久則不可爲矣 蓋其漸之不圖而早之不辨하여 至於簒勢之已成 孰得而遏之哉리오
전씨의 화란이 景公 때에는 그래도 손쓸 수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는 손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때 도모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분변하지 못하여 찬탈의 형세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라하니 蓋言顓國之久則其權 不可收 其勢 不可制하여 必至於危也
漢나라 때 사람이 말하기를, “권신이 대가 바뀌도록 이어지면 위태롭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국정을 전단한 지 오래되면 그 권력을 거두어들일 수 없으며 그 세력을 제압할 수 없어서 반드시 위태로움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故田乞之後 有田 遂以代齊하고 季宿之後 有意如 亦以擅魯注+季武子, 名宿. 其子季平子, 名意如, 하며
그러므로 전기 이후에 전항이 마침내 기존의 齊나라를 대신하여 차지하고 季宿 이후에 季意如가 또한 魯나라의 국정을 전단하였으며,注+季武子는 이름이 宿이다. 그 아들 季平子는 이름이 意如로 魯 昭公을 축출하였다.
至於之於漢注+ 至從子莽簒位. 曹操專政, 至子丕簒位, 是爲魏文帝. 之於魏注+司馬懿始專政, 其子師繼之, 師弟昭遂封晉王, 昭子炎簒位, 是爲武帝. 皆以其漸取之하니
王鳳‧王莽‧曹操‧曹丕가 漢나라에 대해서와注+王鳳이 국정을 전단하고 나서 다섯 侯를 거쳐 조카 王莽에 이르러 제위를 찬탈하였다. 曹操가 국정을 전단하고 나서 아들 曹丕에 이르러 제위를 찬탈하니, 이 사람이 魏 文帝이다. 司馬懿‧司馬師‧司馬昭‧司馬炎이 魏나라에 대해서注+司馬懿가 처음 국정을 전단하였고 그의 아들 司馬師가 사마의를 계승하였다. 사마사의 동생 司馬昭가 마침내 晉王에 봉해지고 사마소의 아들 司馬炎이 제위를 찬탈하니, 바로 晉 武帝이다. 모두 점진적으로 나라를 빼앗은 것이니,
推原本末컨대 由其不早辨故爾 然則人主 其可一日失其操柄也哉잇가
본말을 궁구해보면 일찌감치 분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이 어찌 하루라도 그 권력을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역주
역주1 陳氏雖無……能矣 : 《춘추좌씨전》 昭公 26년(기원전 516) 12월 기사에 보인다. 당시 제나라에 혜성이 나타나자 제 경공은 혜성이 사라지기를 기원하는 禳祭를 지내게 하였는데 晏子가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본문에 보이는 경공과 안자의 대화는 경공이 양제를 그만둔 이후에 두 사람이 서로 路寢(正寢)에 앉아 주고받은 말이다. 경공이 안자와 함께 노침에 앉으면서 “아름답구나, 방이여! 그 누가 이 방을 차지하게 될까?”라고 하자 안자는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물었다. 이에 경공이 “나는 이 방을 차지하는 것이 德에 달렸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안자는 “임금께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이 방을 차지하는 것은 陳氏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본문과 같이 말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 26年》
역주2 田氏……陳氏 : 제나라 田氏는 陳나라 陳完(기원전 750~?)의 후손인데 진완은 陳 厲公 陳他의 아들이다. 여공은 陳 桓公 鮑의 동생으로 환공에게는 免과 林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공이 병석에 누웠을 때 여공의 외가인 蔡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환공과 태자 免을 살해하고 여공을 즉위시켰다. 이에 앙심을 품은 林이 채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여공을 유인하여 죽이게 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바로 陳 莊公이다. 장공이 죽자 동생 杵臼가 즉위하니 바로 陳 宣公이다. 선공 11년(기원전 682)에 선공이 태자 禦寇를 죽이자 평소 어구와 친했던 진완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이때 氏를 陳에서 田으로 바꾸었으며 그가 죽자 敬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일설에는 敬仲이 字라고도 한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역주3 豆區釜鍾之數 : 淸나라 때 洪亮吉은 《春秋左傳詁》에서 “4되가 1豆, 4두가 1區, 4구가 1鬴(부), 10부가 1鍾이다.[四升爲豆 四豆曰區 四區曰鬴 鬴十曰鍾]”라는 鄭玄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鬴와 釜는 음이 유사하고 뜻이 같다고 하였다. 《春秋左傳詁 卷15》
역주4 : 대전본에는 ‘鐘’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춘추좌씨전》에는 ‘鍾’으로 되어 있다.
역주5 : 대전본에는 이 뒤에 ‘於’가 있다. 통행본 《춘추좌씨전》에는 없다.
역주6 : 대전본에는 ‘輕’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춘추좌씨전》에는 ‘厚’로 되어 있다.
역주7 : 사고본에는 이 앞에 ‘在’가 있다. 통행본 《춘추좌씨전》에는 없다.
역주8 : 사고본에는 이 뒤에 ‘非’가 있다. 통행본 《춘추좌씨전》에는 없다.
역주9 家施不及國 : 공영달은 “대부는 家라고 하니 대부 집안에서 베푸는 것이 國人에게까지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 국인은 임금의 소유이니 대부가 함부로 베풀어 자신의 사사로운 은혜를 심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했다. 陳氏가 국인에게까지 베풀었으니 이는 禮를 어긴 것이다.[大夫稱家 家之所施 不得施及國人 言國人是國君之所有 大夫不得妄施遺之以樹己私惠 陳氏施及國人 是違禮也]”라고 설명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 昭公 26年 孔穎達疏》
역주10 大夫不收公利 : 不收公利를 두예는 “상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不作福]”라고 풀이하였다. 공영달은 “이는 대부가 公家에 돌아갈 이익을 거두어 상으로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진씨가 상을 내려 國人들의 마음을 끌어모으고 백성들에게 베풀어 상을 내리니 이것이 공가에 돌아갈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是言大夫不得聚收公利自作福也 陳氏作福以招國人之心 施民作福 是收公利也]”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 昭公 26年 杜預注‧孔穎達疏》
역주11 晏子諫而公不聽 :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에 따르면, 田氏들이 제나라의 민심을 얻어 종족들이 강성해지고 백성들이 전씨를 생각하자 “晏子가 자주 경공에게 간했으나 경공이 듣지 않았다.[晏子數諫景公 景公弗聽]”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2 : 대전본에는 ‘布’로, 사고본에는 ‘市’로 되어 있다.
역주13 :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대전본의 경우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14 : 사고본에는 ‘翦’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臣弑……辨也 : 《주역》 〈坤卦 文言傳〉에 보인다.
역주16 漢人……則危 : 漢人은 梅福을 가리킨다. 權臣易世則危는 《前漢書》 卷67 〈梅福傳〉에 보이는데, 王鳳을 비롯한 왕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매복이 漢 成帝에게 上書한 글에서 한 말이다.
역주17 :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역주18 逐昭公 : 魯 昭公 25년(기원전 517)에 季平子와 臧氏 집안 사이에 싸움이 생기자 소공이 季氏를 공격하였다. 계평자는 소공에게 자신이 타국으로 망명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소공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계씨가 없어지면 불리할 것을 우려한 孟孫氏와 叔孫氏가 계씨와 연합하여 소공을 공격하자 소공이 齊나라로 망명하였다. 《史記 卷33 魯周公世家》
역주19 : 17-4-가의 ‘鳳’ 주석 참조.
역주20 : 17-4-가의 ‘王莽’ 주석 참조.
역주21 : 155~220. 曹操를 가리킨다. 자는 孟德으로 沛國 譙縣 사람이다. 曹參의 후예이자 曹嵩의 아들이다. 20세에 孝廉으로 천거되어 頓丘令‧議郞 등을 지냈으며, 黃巾賊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濟南相이 되었다. 獻帝 建安 원년(196)에 鎭東將軍이 되고 費亭侯에 봉해졌다. 이해에 洛陽에서 헌제를 맞이한 뒤 許昌으로 천도하고 나서 大將軍이 되고 武平侯에 봉해졌다. 이후로는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여 북으로는 烏丸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關隴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건안 5년(200)의 官渡大戰 이후로는 점차 중국의 북방을 장악해나갔다. 건안 13년(208)에 스스로 丞相이 되었으며 赤壁大戰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이후 屯田과 水利 사업을 일으키고 호족들을 억제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건안 21년(216)에 魏王으로 진봉되었다. 아들 曹丕가 魏나라를 건국한 뒤에 太祖武皇帝로 추존되었다.
역주22 : 187~226. 재위 220~226. 삼국시대 魏나라의 초대 황제 曹丕를 가리킨다. 시호는 文帝, 묘호는 世祖이다. 자는 子桓으로 沛國 譙縣 사람이다. 曹操의 아들이다. 獻帝 建安 22년(217)에 世子가 되었다. 延康 원년(220)에 조조가 죽자 그 작위를 이어받아 魏王과 丞相이 되었다. 얼마 후에 獻帝에게 양위를 받아 魏나라를 건국하였다.
역주23 王鳳專政歷五侯 : 17-4-가의 주석 鳳, 商, 音, 根 참조.
역주24 : 179~251. 司馬懿를 가리킨다. 자는 仲達로 河內 溫縣 사람이다. 曹操가 집권했을 때 主簿‧軍司馬 등을 지냈으며, 魏나라가 건국되자 曹丕에 의해 중용되어 侍中‧尙書右僕射‧給事中‧錄尙書事 등을 지냈다. 明帝 太和 4년(230)에 大將軍으로 승진하고 靑龍 3년(235)에 太尉가 되었다. 240년에 齊王 曹芳이 즉위하자 顧命大臣으로 보좌하였다. 曹爽에 의해 太傅가 되어 병권을 잃었다가 嘉平 원년(249)에 군사를 일으켜 조상 등을 주살하고 丞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손자 司馬炎이 晉나라를 건국한 후에 宣帝로 추존되었다.
역주25 : 208~255. 司馬師를 가리킨다. 자는 子元으로 河內 溫縣 사람이다. 司馬懿의 맏아들이다. 嘉平 원년(249)에 아버지를 도와 曹爽 등을 주살하는 데 공을 세운 후에 錄尙書事가 되었다. 가평 4년(252)에 大將軍‧侍中이 되어 국정을 전단하였다. 가평 6년(254)에 曹芳을 폐위하고 曹髦를 옹립하였다. 이후 正元 2년(255)에 揚州 刺史 文欽‧鎭東將軍 毌(관)丘儉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후에 許昌에서 사망하였다. 조카 司馬炎이 晉나라를 건국한 뒤에 景帝로 추존되었다.
역주26 : 211~265. 司馬昭를 가리킨다. 자는 子上으로 河內 溫縣 사람이다. 司馬懿의 둘째 아들이다. 嘉平 원년(249)에 아버지를 도와 曹爽 등을 주살하는 데 공을 세웠다. 正元 2년(255)에 형 司馬師가 죽자 大將軍‧錄尙書事로 승진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甘露 5년(260)에 曹髦를 시해하게 한 뒤에 元帝 曹奐을 옹립하였다. 景元 4년(263)에 相國이 되고 晉公에 봉해졌으며 蜀나라를 멸한 뒤에 晉王으로 진봉되었다. 晉나라가 건국된 뒤에 文帝로 추존되었다.
역주27 : 236~290. 재위 265~290. 晉나라의 초대 황제 司馬炎을 가리키며 묘호는 世祖이다. 자는 安世로, 河內 溫縣 사람이다. 司馬昭의 맏아들이다. 魏 元帝 咸熙 2년(265)에 사마소의 뒤를 이어 相國과 晉王이 되었다. 얼마 후에 元帝 曹奐에게 선양을 받아 晉나라를 건국하였다. 咸寧 6년(280)에 吳나라를 멸함으로써 60년간 분열되어 있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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